소설리스트

일홀도-349화 (349/600)

#349화. 349. 第七十章 백척간두(百尺竿頭)(4)

흑의인들의 시신은 두 종류다.

나병에 걸린 환자가 있다. 매우 심한 중증 나환자다. 아마 전염성도 강할 것으로 생각된다.

또 한 부류는 병명을 알 수 없지만, 전신이 수포로 가득했다. 피부에만 수포가 있는 것이 아니라 눈, 혀, 식도에도 크고 작은 물집이 수북했다.

“이러고도 살 수 있나?”

나병도 두렵지만, 수포도 두렵다.

아마도 이 두 가지 병은 모두 치료가 불가능한 불치병일 것 같다.

그것 외에 달리 알아낸 것은 없다.

사실, 흑의인들의 시신을 살펴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할배가 정서를 보내와서 흑의인이 나병 환자이니 혹여 만나게 되면 십분 조심하라는 말을 듣고서야 살펴본 것이다.

죽은 네 명 중 두 명이 나병 환자다. 다른 두 명은 수포가 뒤덮인 환자다.

그러고 보니 이 두 부류가 쓰는 검이 달랐다.

나병 환자들은 직하검, 상충검을 썼다. 수포 환자들은 연자비를 사용했다.

흑수혈검과 싸운 흑의인도 찌르는 검, 자검법을 주로 사용했다. 초식 자체가 찌르는 검법 위주다. 반면에 문둥병 나병 환자들은 휘두르는 검이다.

이들은 병에 따라서 검을 달리한다.

‘두 부류!’

이들이 어느 문파인지 모르겠지만, 두 갈래로 갈라져 있다.

그렇다면 나병 환자를 지휘하는 검수가 있을 것이고 수포 환자를 지휘하는 검수가 있을 것이다.

그때 봤던 자, 대방 방주를 죽인 자는 어느 쪽인가? 양쪽 두 검수를 전부 아우르는 총대장?

그가 문파의 우두머리라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자보다 강한 고수가 없다는 말이 되니까. 만약 그자가 어느 한쪽만 지휘하는 검수라면 그가 모시는 또 한 명의 고수가 존재할 것이다. 아니면 여러 명이 존재하던가.

끔찍한 생각이다.

그렇다면 흑의인들이 존재하는 문파는 어쩌면 지상 최강 문파일 것이다.

아걸은 비밀의 방에 들어섰다.

대방 방주의 집무실 밑에 지하 공간이 있다.

절명한 대방 방주 외에는 아는 사람이 전혀 없는 오직 그만의 공간이다.

대방 방주에게 자신만의 공간이 있다는 사실은 흑수혈검도 알지 못했다. 임시로 대방 방주 직을 역임하면서 방주의 집무실을 사용하다가 우연히 찾게 되었다.

비밀의 방으로 통하는 입구는 책상 밑에 있다.

책상을 옆으로 밀어도 안 되고, 위로 밀어도 안 된다. 오직 사선으로 밀어야만 문이 열린다.

비밀의 방은 지하 깊은 곳에 마련되어 있다. 계단을 무려 쉰 개는 밟고 내려가야 바닥에 닿는다.

계단을 밟아 내려가는 동안 벽에 작은 쇠사슬이 돌출된 것을 봤다. 줄을 잡아당기면 위쪽에 설치된 함정이 작동한다. 일종의 기관 장치다.

비밀의 방은 유사시 탈출 용도로 사용할 생각인 듯했다.

비밀의 방은 지하 깊은 곳에 있는데도 선선한 바람이 들어왔다. 안쪽에 나무로 만든 문이 있는데, 그곳을 통해서 바깥으로 나갈 수 있게 만들어 놨다.

확실히 비상 탈출구다.

이곳은 평상시에는 비밀을 소유하는 방으로 쓰인 듯했다.

밀실 사방으로 선반이 만들어져 있고, 선반에는 크고 작은 옥함들이 빼곡하게 놓여 있었다.

“많이도 모았네.”

아걸은 미간을 찌푸렸다.

흑수혈검은 이 비밀의 방을 발견하고 들어와 봤다.

옥함도 열어봤다. 옥함을 보면 척하고 생각나는 것…… 그렇다. 금은보화가 쏟아졌다.

흑수혈검은 전임 방주를 존경했다. 비밀의 방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전임 방주가 모아 놓은 금은보화를 봤을 때의 실망감은 말로 표현하지 못할 것이다.

방주가 한낮 재물에 눈먼 욕심꾸러기라니.

흑수혈검의 존경심이 막연한 것이었다면 그는 당장 실망감을 느끼고 돌아섰을 것이다. 하지만 흑수혈검의 존경심은 매우 깊었다. 그는 전임 방주의 모든 것을 다 믿었다. 일가친척도 없이 평생을 혼자 사신 분이 이만한 재물을 모아 놨을 때는 이유가 있지 않겠나.

그는 계속 옥함을 열었고, 당장 필요한 것을 찾아냈다.

흑수혈검은 그것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았다. 그저 웃는 얼굴로 들어가 보라는 말만 했다.

아걸은 재화에 관심이 없다. 그런 점을 흑수혈검도 알고 있을 텐데, 뭐하러 이런 곳에 들여보냈을까?

그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서가로 가서 손에 닿는 옥함을 열었다.

딸칵!

경쾌한 옥소리와 함께 싯누런 빛이 밀실을 밝혔다.

금이다. 네모반듯하게 정제된 금덩이가 옥함 가득히 담겨 있었다.

딸칵!

금이 담긴 옥함을 닫고, 옆에 있는 옥함을 열어 봤다.

옥함이 열리자 어린아이 주먹만 한 야광주가 빚을 뿜었다. 하얀 야광주에서 대단히 밝은 빛이 흘러나와 밀실 전체를 환하게 밝혔다. 반딧불 수천 마리를 모아놓은 듯 대단히 밝았다.

굉장한 보물이다.

이 야광주 한 알이면 아무리 어두운 길도 대낮처럼 즐기면서 걸을 수 있을 것 같다.

아걸은 옥함을 열어 두었다.

밀실에는 횃불이 밝혀져 있어서 어둡지 않지만, 야광주가 방을 한층 더 밝게 만들어 주었다.

아걸은 금은보화가 나오는 서가를 지나쳐서 다음 서가로 갔다.

딸칵!

옥함을 열어봤다.

“응?”

아걸은 눈을 번쩍 떴다.

옥함에는 온갖 서신이 빼곡하게 담겨 있었다.

종이가 낡은 것도 있고, 근래에 받은 듯 생생한 것도 있었다.

‘음!’

아걸은 옥함의 용도를 알았다. 옥함은 공기를 차단한다. 안에 든 물건들이 삭거나 녹슬지 못하게 한다. 벌써 삭아 버렸을 서신이 아직도 생생하다.

- 이소내내(二少奶奶) 요명(要命). 청위장성자연사망(請僞裝成自然死亡).

선덕(宣德) 이년(二年) 시월[十月] 열이레[十七日]

둘째 며느리를 죽여 달라. 자연사한 것처럼 위장해 달라.

살인을 청부하는 내용이다.

‘선덕 이년?’

선덕 이년이라면 정미년(丁未年)이다. 지금부터 십삼 년 전에 있었던 일이다.

이 서신이 누구에게서 온 것인지는 알지 못한다. 이때 죽었을 둘째 며느리가 누구인지, 왜 시부모로부터 미움을 받았는지 알 수 없고, 관심도 없다.

아걸은 옥함의 용도를 알았다.

이 옥함들엔 대방에 좋지 않은 일을 부탁한 증거가 담겨 있다.

옥함에 있는 내용을 다 읽어보면 심부름을 시킨 사람이 누구인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옥함은 어떤 사람을 파멸시킬 수 있다.

아걸은 옥함을 닫았다. 그리고 비밀의 방을 둘러봤다.

사면이 옥함으로 꽉 채워져 있다. 이 중에는 금은보화도 있겠지만, 대부분이 누군가의 약점이다.

아걸은 차분히 옥함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아걸은 황옥으로 만든 옥함을 들고 비밀의 방에서 나왔다.

“이건 내가 갖고 가야겠는데.”

“전부 다 가져가셔도 됩니다.”

흑수혈검은 옥함 속에 든 게 무엇이냐는 말도 하지 않았다.

“이 밑에 있는 거, 쓸 건가?”

“써야죠. 좋은 물건들 아닙니까. 쓰는 게 불편하시면 함몰시키겠습니다.”

“어련히 알아서 할까.”

아걸은 피식 웃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봤다.

아걸은 대방을 떠날 것이다. 그러니 어쩌면 이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일 지도 모른다.

흑수혈검은 구룡의 도전을 받아야 한다. 구룡이 흑의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흑수혈검의 목숨은 산목숨이 아니다.

아걸도 썩 좋은 상황은 아니다. 허도기가 노리고 있다면 흑수혈검보다도 못하다. 살 수 있는 여지가 완전히 박탈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무덤 자리나 봐두는 것이 좋다.

“다음에 볼 때는 대방 방주로 대해 주지.”

“아닙니다. 속하는 이게 좋습니다. 대방 방주가 되어도 속하는 주인님의 신하입니다.”

흑수혈검이 당장 정색하며 말했다.

아걸은 누군가에게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 칼을 들고 목숨을 빼앗아야 하는 적에게는 거침없이 하대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늘 존대를 사용했다.

아걸은 흑수혈검도 존중하려고 했다. 하지만 흑수혈검이 워낙 완강하게 수하임을 자처하니 부득불 수하로 대할 수밖에 없었는데…… 아걸 입장에서는 나이가 한참 많은 사람에게 하대하는 게 편안하지는 않았다.

“어디로 가십니까?”

“오음산(吾音山).”

“오음산요?”

아걸은 웃었다. 흑수혈검은 더 묻지 않았다.

흑수혈검은 팔방 방주를 통해서 음산사마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고 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단서는 직접 음산사마와 접촉했던 대방 방주가 가지고 있다.

아걸이 들고 있는 황옥 상자.

옥함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 수 없지만, 허도기의 숨통을 조일 단서인 것만은 틀림없다.

‘아닌데?’

흑수혈검은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도 비밀의 방에 무엇이 있는지 안다. 많은 사람의 약점이 증거로 소장되어 있다. 하지만 허도기 같은 자는 증거를 남기지 않는다. 서신을 전하지도 않는다. 오직 사람을 시켜서 말로 전한다. 그리고 그것조차도 비밀이다.

아걸은 왜 오음산에 가려는 것일까?

“다녀올 때까지 견뎌 봐. 살아서 돌아오면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아걸이 묘한 소리를 했다.

“무슨 말씀을. 꼭 살아오셔서 도와주셔야죠. 가시는 길에 저희 애들이 수발을 들어드릴 겁니다. 이것까지 물리시면 제가 직접 따라갈까 합니다.”

“협박이네.”

“네. 협박입니다.”

“후후! 좋아. 어차피 야천 도움받을 일이 많을 테니까. 도와준다니 적극적으로 이용하지.”

아걸은 쓴웃음을 흘렸다.

* * *

“마반사(馬絆蛇)가 오음산으로 가고 있대.”

“오음산? 거긴 왜?”

“거기 음산사마의 후인이 살고 있대. 그 후인이라는 놈이 사공을 수련한다는데?”

오가는 사람마다 ‘마반사’ 이야기로 시끌벅적했다.

소문의 진위는 따질 필요가 없었다. 야천이 작심하고 소문을 낸 것이라서 매우 빠른 속도로 전해졌다.

사실, 이런 소문은 흘러 다니기가 쉽지 않다.

일단, 세상 사람들은 마반사가 무엇인지 모른다. 중원 사람이 알고 있는 마반사는 요사한 뱀이다. 신화나 전설에 가끔 등장할 뿐, 실존하지도 않는.

마반사는 중원 서남쪽 사천성(四川省)과 운남성(雲南省)에 산다는 교룡이다. 몸통은 뱀 형상이고, 머리는 쥐를 닮았다. 이마 한가운데는 별 형상의 흰 점이 있다.

마반사는 매우 커서 돼지나 사람을 한입에 삼켜 버린다.

하지만 마반사에 잡아먹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마반사의 몸에서 풍기는 매우 역한 비린내는 십 리 밖에서도 맡을 수 있다. 물속에 있으면 물비린내 때문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고, 물 위로 나오면 썩는 비린내가 사방으로 풍긴다.

그것이 마반사다. 그리고 야천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나온 방갓무인의 별호다. 흑수혈검이 그런 별호를 지었을 리는 없고, 아마도 소문을 내던 자가 이야기를 덧붙인다는 것이 마반사까지 옮겨간 듯하다.

소문을 듣는 사람들은 마반사가 뭐 하는 사람인지, 왜 오음산으로 가는지 전혀 모른다.

“마반사가 누구야?”

“그 왜 있잖아. 야천 팔방에 나타나서 야천 무리를 떼거리로 죽인 살인귀.”

“아! 그 사람 별호가 마반사야?”

“그렇다나 봐.”

“거, 별호 한 번…… 이그! 별호만 들어도 소름 끼치네. 그런 별호를 가졌으니 인정사정없이 살인을 저지르지. 그놈한테 죽은 놈이 몇백 될걸?”

“그럼 어때. 다 그놈이 그놈인데. 자기들끼리 지지고 볶고 하는 거지.”

마반사에 대한 소문을 확실하게 고착시키려면 마반사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필요했다.

마반사는 아무 이유 없이 병기를 든 무인이면 무조건 벤다. 베는 이유도 말해 주지 않는다. 다짜고짜 칼을 뽑아서 벤다. 그러니 방갓을 쓴 놈이 앞에 나타나거든 당장 몸부터 피하고 봐라.

마반사는 정도보다는 사도 쪽 인물이다. 그가 사용하는 도법은 매우 사이비하다. 도대체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도법을 구사하는데, 모두 퍽퍽 쓰러진다.

무공 수준은 꽤 높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야천 구룡 방주들도 쩔쩔맸다고 한다.

마반사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그 정도다.

다음은 오음산으로 가는 이유가 필요했다.

음산사마가 후인을 남겼는데, 후인 역시 음산사마가 수련했던 바로 그 사악한 마공을 수련한단다.

음산사마의 후인이 확실히 맞나? 맞다. 인근 무인들이 확인했다. 다만 마공이 너무 높아서 건드리지는 못하고 있다. 추살하려는 무인도 있었지만, 오히려 당했다.

마반사가 그자를 찾아가는 이유? 정의 구현은 말이 안 된다. 마반사는 그런 인간이 아니다. 강한 놈이라니까 무작정 찾아가는 것으로 안다.

소문이 날개를 달고 번져갔다.

‘마반사? 휴우! 어찌 별호가 갈수록……’

혈도비자, 명부판관에 이어서 세 번째 얻은 별호가 마반사다.

듣기에 섬뜩한 혈도비자나 마반사는 모두 무림인이 지어 준 것이다. 좋은 별호는 결코 아니다.

“마반사가 오음산으로 간대.”

“마반사? 마반사가 누군데?”

아걸이 걸어가는 곳마다 소문이 먼저 와서 그를 기다렸다.

‘그냥 오음산으로 간다는 소문만 내달랬지, 누가 마반사라는 별호까지. 휴우! 못산다, 내가.’

아걸은 한숨을 푹푹 쏟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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