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2화. 第七十一章 만회(滿懷) (2)
털썩!
아걸은 지나가는 우마차에 올라탔다. 주인 허락도 받지 않고 엉덩이부터 걸쳤다.
“가는 데까지 타고 가죠.”
우마차를 몰던 사람은 뒤를 흘끔 쳐다봤을 뿐 거절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빈 우마차다. 짐을 실었어도 빈 곳만 있다면 무방하다. 지나가는 길손들이 다리품을 덜어 보겠다고 마차에 궁둥이를 붙이는 일은 아주 흔하다.
아걸은 우마차에 벌렁 드러누웠다.
하늘을 쳐다봤다. 날이 참 좋다.
따각! 따각! 따각!
우마차가 느리게 나아갔다.
할배랑 중원을 돌아다니면서 이런 우마차를 만나면 어김없이 올라탔다.
우마차는 느리지만 대신 끊임없이 움직인다. 먼 길을 갈 때는 잠시 쉬면서도 계속 움직이니 아주 좋다.
“무인이슈?”
우마차를 모는 촌부가 말을 걸어왔다.
“떠돌이입니다.”
“쯧! 우리 자식 놈도 무인이 된다고 집 나간 지가 벌써 일 년인데.”
“그래요?”
“어디서 뭐 하나 살짝 알아봤는데, 오도문(五刀門)에 들어가 있습디다. 엊그제 들어간 것 같은데 벌써 일 년 차요.”
알고 보니 촌부가 아들 자랑을 하고 싶은가 보다.
“오도문이 유명한가요?”
“오도문을 모르슈?”
“제가 견문이 짧아서.”
“쯧! 그래서 어디 무림을 다녀? 오순도법(五瞬刀法)의 창시자께서 만드신 문파가 오도문 아니우. 오도문주께서 초도성에 가면 성검문주도 버선발로 뛰어나온다고 합디다.”
“아, 네. 그렇군요.”
“거 젊은이도 그렇게 돌아다니지 말고 어디 문파 한 군데 골라서 들어가.”
“그럴까요?”
“괜히 칼 들고 또 돌아다녀 봤자 모진 일밖에 더 당하나. 요즘 세상에 칼을 들어야 출세할 수 있다지만, 목숨도 걸린 문제니까. 보호해 주는 사람들이 있으면 좋지.”
“네.”
“찐빵 하나 드릴까?”
“아, 있습니까? 그러잖아도 점심을 먹지 않아서.”
아걸은 일어나 앉았다.
마차를 몰던 촌부가 옆에 있는 광주리를 뒤져서 차게 식은 찐빵을 건네주었다.
아걸은 찐빵을 받아서 뭉텅 베어 물었다.
밀가루에 소금만 뿌려서 쪄낸 찐빵이라서 별로 맛은 없다. 속에 팥이라도 넣으면 좋으련만 시골 살림에 그런 호사까지 부릴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찐빵도 따뜻할 때는 상당히 맛있다.
아걸은 찐빵 하나를 게 눈 감추듯이 먹어 치웠다.
“어쩌나. 찐빵 남은 게 그거 하난데.”
“됐습니다. 이걸로 한 끼 때웠네요.”
“젊은 사람이 그거 갖고 양이 되나. 떠돌아다니더라도 굶지는 마슈. 자! 난 이쪽으로 가는데.”
촌부가 옆으로 빠지는 길을 가리켰다.
“그럼 저는 여기서 그만. 찐빵 잘 먹었습니다.”
아걸이 촌부를 향해 활기차게 말했다.
아걸은 관도를 따라서 걸었다.
그것도 쉰 것이라고, 잠시 마차를 탔더니 다리 피로가 쫙 풀렸다. 거기에다가 찐빵까지 얻어먹었다.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무작정 베푼 선의다.
아걸은 이런 게 좋았다.
할배와 같이 중원을 이렇게 돌아다니는 것도 상당히 재밌겠다고 생각한 적이 많다. 사실은 정말로 칼바람 부는 무림판에 발을 들여놓기가 싫었다. 그때다.
“아아악!”
등 뒤에서 커다란 비명이 울렸다.
아걸은 불길한 예감이 울컥 치밀어 고개를 돌려서 뒤를 쳐다봤다. 미간은 저절로 찡그려졌다.
멀리…… 우마차가 빠진 샛길 쪽에서 사달이 났다.
우마차가 멈춰 섰다. 마차를 몰던 촌부가 마차에서 굴러떨어지는 중이었다.
마차 위에는 검 든 흑의인이 서 있었다.
그가 방금 촌부를 베어서 핏물이 잔뜩 묻은 검을 들어서 아걸을 가리켰다.
아걸은 흑의인을 뚫어지게 주시했다.
두 사람 사이는 거리가 멀다. 거의 백여 장은 떨어져 있다. 서로 무슨 말인가를 나누려면 소리를 빽빽 질러야 한다. 평소처럼 말해서는 들리지도 않는다.
흑의인은 아걸과 거리를 충분히 벌린 후에야 검을 썼다.
휘리릭! 휙!
흑의인이 허공에 검을 휘둘러서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냈다. 그리고도 못마땅한지 검을 죽은 촌부의 옷에 쓱쓱 문질러서 다시 닦았다. 그리고 서서히 검집에 꽂아 넣었다.
아걸은 눈살을 가늘게 좁힌 채 흑의인을 쏘아봤다.
촌부는 마부는 자신에게 찐빵 하나를 건넨 덕분에 죽었다. 아니, 말을 나눈 탓에 죽었다.
접촉하는 모든 사람을 죽인다.
목표를 고립시키는 매우 고전적인 수법이다.
정도인 혹은 마음속에 정의심이라는 것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통하는 이격술(離隔術)이다.
목표를 세상으로부터 분리한다.
오다가다 말은 나눈 모든 사람을 죽인다. 밥을 준 사람, 물을 준 사람도 죽인다. 티끌만 한 도움이라도 주었다면 가차 없이 죽인다. 어떤 식으로든 목표와 접촉한 사람은 모두 죽인다.
그러면 목표는 자기 스스로 알아서 사람 다니지 않는 길을 선택하게 되어 있다.
세상 사람들과 완전히 떨어진다.
그렇다고 급습을 가하는 건 아니다. 그런 후에도 멀리 떨어져서 지켜보기만 한다. 그러다가 또 누군가와 접촉하면 즉시 죽인다. 평생 혼자 살아야 한다는 마음이 들게 만든다.
이런 이격술은 피를 말린다.
하지만 살행이 상상 이상으로 많고, 상시 감시를 해야 하니 동원되는 인력도 많아야 하며, 접촉자를 뒤탈 없이 죽여야 하니 일정 수준 이상의 고수가 동원되어야 한다.
매우 비효율적인 격리 방법이다.
흑의인이 이런 방법을 택했다는 것은 비효율적일망정 아걸의 피를 말리겠다는 심산이다.
‘이건 너희가 걸어온 싸움이야.’
아걸은 아직도 입안에 감도는 찐빵의 향기를 음미했다.
이 향기는 촌로의 피 맛이다. 찐빵 하나가 촌로의 목숨이다. 촌부가 웃으면서 말한 자식 자랑이 그의 비명을 만들어 냈다. 전혀 죽지 말아야 할 사람이 죽었다.
‘너희를 무시하려고 했는데, 너희가 먼저 싸움을 걸어 왔으니…… 각오해!’
아걸은 어금니를 으득 갈았다.
이격술을 유지하려면 낮이고 밤이고 접촉하는 자를 모두 살필 만한 눈이 필요하다.
항시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다는 뜻이다.
이격술 대상자로 점찍힌 자가 그들이 원하는 대로 산이나 섬으로 들어가더라도 지켜보는 자는 따라서 가야 한다. 어디를 가든 계속 지켜봐야 한다.
아걸의 경우, 지켜보는 자는 흑의인이다.
흑의인이 직접 아걸에게 따라붙었다. 수하를 시키지 않았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따라온다. 아걸이 되돌아서 쫓아올 것까지 염두에 두고 미행한다.
그러면 이대로 당해야 하나?
이격술은 살수문파에서 처음 사용했다. 하지만 효과에 견줘서 소모되는 지원이 너무 많아서 폐기된 지 오랜데…… 그래서 이격술에 대한 대응책도 많이 나왔다.
저들이 접촉하는 모든 사람을 죽인다고 해도 사람들과 연락할 방법은 존재한다.
물론 그 연락 방법은 매우 신중해야 한다.
일단, 저들이 온 세상을 지켜본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그만한 자신감이 있을 때만 이격술을 사용하는 것이다.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살짝살짝 사람에게 접근할 수 있다면 그게 무슨 이격술인가. 숨소리 하나까지 모두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은 물론이고 전서구, 문서까지 모두 살펴야 한다.
아걸은 일절 연락을 취하지 않았다.
흑의인을 잡겠다고 함정을 설치하지도 않았다. 숨었다가 뒤쫓아가는 일도 벌이지 않았다.
이런 모든 것이 이격술에 대한 대비책으로 나온 것인데, 어느 것 하나 사용하지 않았다.
아걸은 흑의인이 이끄는 대로 고스란히 당해 주었다.
스읏! 스읏!
아걸은 숯으로 담장에 그림을 그렸다.
어린아이가 낙서하듯이 엉망진창인 그림, 사람이 말을 타고 사냥을 하는 그림인데 조잡하기 이를 데 없다.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을 그림이다.
“흠!”
아걸은 그림을 보고 만족한 듯 웃었다.
그림은 매우 평범하다. 어른이 정성을 다해서 그린 그림이니 의미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어느 곳에 남기는 밀마다. 그럼 어디에 보내는 밀마인가? 누구라도 알 수 있다. 이것이 밀마라면 바로 관부에 보내는 것이다.
밀마를 보내는 곳이 관부 어딘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관아 담장에 그린 밀마라면 목적지도 관부다.
아걸과 연관 있는 관부는 전보영밖에 없다.
그림은 전보영에 보내는 밀마였다.
무인도 관아 담장에 그려진 밀마는 건드리지 않는다. 관부와 충돌하는 것이 좋을 리 없다. 특히, 야천은 얼마 전에 대대적으로 소탕당한 경험이 있다.
아걸은 그림을 그린 후, 미련 없이 돌아섰다.
스읏!
흑의인이 나타났다.
그는 나타날 때부터 물에 개인 흙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한 치도 망설이지 않고 아걸이 그린 그림을 지웠다.
그런 모습을 아걸이 봤다.
아걸은 백여 장쯤 걸어가서 뒤돌아섰고, 흑의인은 아걸이 지켜보는 것을 알면서도 그림을 지웠다.
아걸이 포기한 듯 뒤돌아섰다.
전보영 밀마는 관아 담장에 남기지 않는다. 땅에 남긴다.
손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발끝으로 땅에 그림을 그린다. 발로 진흙을 차기도 하고, 풀을 짓밟은 후에 즙액이 묻은 신발로 담을 밟기도 한다.
그림이나 문자로 연락을 취하지 않는다.
특정한 표식을 남겨 놓으면, 표식에 맞춰서 정해 놓은 글귀를 찾는 식이다.
흑의인이 가까운 곳에서 아걸을 지켜봤다면 이런 잔재주도 당장 드러났을 것이다. 하지만 흑의인은 가까이 다가오지 않는다. 아걸과 항상 일정한 거리를 벌리고 있다.
저들도 싸울 생각은 없다. 단지 피 말려서 죽이겠다는 심산이다. 이 정도로 아걸을 죽이기까지는 못하고…… 고통스럽게 괴롭힌다는 측면이 강하다.
아걸은 산에서 산으로 움직였다.
관도를 버리고 산길을 택했지만, 여전히 오음산을 향해서 걷고 있다. 산정에 올라설 때마다 이정표를 살폈다. 오음산으로 향하는 산길도 찾았다.
아걸은 일절 사람과 접촉하지 않았다.
나무꾼이나 사냥꾼이 나타나면 일부러 몸을 숨겼다. 잠깐 어깨를 스치며 지나가는 정도도 허락하지 않았다. 인기척이 들리는 즉시 아예 몸을 빼냈다.
그렇지 않으면 죽는다. 서로 몸이 닿지 않고 스쳐 지나가도 살인 목표가 된다.
자신 때문에 애꿎은 사람이 죽는 것은 원치 않는다.
‘오늘이 여드레째. 소식이 올 때가 됐네.’
아걸은 서둘지 않고 차분히 기다렸다.
밀마는 전보영에 넣었다. 하지만 전보영이 움직이기를 바란 것은 아니다. 단지 중간에 연락만 해 주면 된다. 야천 팔방주가 심어 놓은 간자들에게.
흑의인의 눈을 피해서 야천에 밀마를 남길 방법은 없다. 그래서 전보영으로 우회했다. 전보영이 야천에 밀마를 전했다면…… 지금쯤 회신이 올 때가 됐다.
회신도 야천이 직접 보내 오지 않는다. 전보영을 통해서 온다. 그러니 다른 때보다 배는 시간이 더 걸린다.
직접 밀마를 넣었다면 삼사일이면 회신을 받겠지만, 이레가 지나도록 연락이 없었다.
오늘이 여드레째, 오늘은 소식이 올 것이다.
아걸은 태행산(太行山) 산 중턱에 있는 산신묘를 찾아 들어갔다.
산으로 다니면 쉴 곳이 마땅치 않다. 그래서 산신각이라든가 쉬기 좋은 동굴 같은 곳이 나오면 아직 해가 남아 있어도 걸음을 멈추고 쉰다.
자고로 잠자리가 편해야 실컷 싸울 수 있다.
이것은 할배의 철칙이다.
어디를 가더라도 이슬을 맞고 자는 일은 없어야 한다. 노숙하더라도 밤이슬을 피해 줄 만한 지붕은 있어야 한다.
몸을 최대한 아낄 줄 알아야 한다. 몸을 혹사하는 것은 수련할 때로 족하다. 정작 무림을 활보할 때는 최대한 아끼고 사랑하면서 다녀야 한다.
삐걱!
아걸은 산신각 문을 밀치고 들어갔다.
흑의인은 그를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산신각이 나오면 만사 제쳐 놓고 잠을 청했기 때문에 오늘도 그런 줄 안다.
아걸이 산신각 안으로 들어서자 산신 탱화를 찾았다.
깊은 산속에 있는 산신각인데도 탱화는 여전히 생생했다. 사람 발길이 끊이지 않은 곳이다.
호랑이를 옆에 앉히고 죽장을 들고 있는 산령대신.
아걸은 탱화를 유심히 살폈다. 가장 밑쪽 하단에 깨알만 하게 쓰인 글씨를 읽었다.
‘한성(漢城), 고은(庫恩), 상하(常鰕)……’
모두 지명이다. 또 지명 옆에는 기호도 있다.
야천에 숨어 있는 간자가 전보영을 통해서 전해 온 회신이다.
밤이 깊었다.
스릉!
아걸은 대도를 뽑았다.
‘오늘부터.’
아걸이 보는 앞에서 촌부를 척살한 대가, 지금부터 치른다.
저들이 어떤 의미에서 자신을 건드렸는지 모르지만 아마 뼈저리게 후회하게 될 것이다.
스읏!
진기를 일으켜서 사지 백해로 흘려 보냈다.
전신을 편안하게 하고, 사방에서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사방에서 전해지는 기운을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