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3화. 第七十一章 만회(滿懷) (3)
아걸이 반철도 대신 대도를 쓰는 데는 이유가 있다.
반철도는 위로 향한 칼이다. 도전하는 칼이다.
죽음이 확실한 경우, 내 육신을 만들다가 말은 볼품없는 쇳덩이처럼 여겨야 할 때, 그 의미를 되새기고자 반철도를 잡는다. 분명히 반철도는 미완성 칼이다.
대도는 완성된 칼이다.
대도는 아래를 향할 때 사용한다.
승리가 확실해서 전력을 다한다는 측면보다는 손속에 사정을 남겨야 할 때 사용한다. 칼을 쓸 때, 상대방을 꼭 죽일 필요가 있는지 두 번, 세 번 점검해 본다.
이자를 죽이고자 한다. 내가 너무 과하게 손을 쓰는 건 아닐까? 그냥 이기는 것만으로 끝낼 수는 없나? 경고는 어떨까? 근맥을 자르는 선에서 칼을 멈출 수도 있는데.
대도를 잡는 데는 그런 의미가 있다.
하지만 오늘 잡은 대도에는 그런 의미를 빼 버렸다.
아래를 향한 칼이기에 완성된 칼을 들었지만, 하수에 대한 배려는 삭제했다.
무인을 상대하기 위해서 죄 없는 촌부를 죽인 자다.
자식이 무림 문파에 들었다고 남몰래 찾아가서 살펴보고는 기뻐하는 아비였다.
흑의인은 촌부만 죽인 것이 아니다. 오도문이라는 문파에 들어가서 칼을 닦고 있는 자식의 인생까지 망쳐 버렸다.
앞으로 그 아들은 정순하게 칼을 닦을 수 있을까? 아비가 누군가에게 피살당했는데, 그 칼이 자신이 상대할 수도 없는 아주 지고한 칼이라면? 이를 악물고 무공을 수련할까? 포기할까?
당장은 이를 악물고 무공을 수련한다. 그러다가 한계를 맞이한다. 그러면 타락한다. 세상을 원망하면서 주변 사람들을 공격한다. 괴롭힌다.
아들의 운명은 십중팔구 이런 수순으로 흐른다.
아걸은 흑의인의 행태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래서 대도를 잡았다. 오음산에 도착할 때까지는 칼을 쓸 생각이 없었는데, 이까지 악물며 칼을 잡는다.
그리고 말한다. 너희가 먼저 공격했으니 후회하지 말라고.
아걸은 뱀이 풀숲을 기어가듯 소리 없이 나아갔다.
풀을 밟아도 소리가 나지 않는다. 나뭇잎이 많이 쌓인 곳을 걸어가도 소리가 울리지 않는다.
아걸의 몸은 깃털처럼 가볍다.
모든 신경은 칼날같이 곤두서서 마른 나뭇가지나 마른 잎 등 소리가 날 만한 물체를 철저히 피한다.
스윽!
발길이 마른 나뭇잎을 헤치고 밀치고 젖은 나뭇잎을 밟았다.
소리는 울리지 않았다. 눈으로 보고 행한 것이 아니다. 두 발이 감각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아걸의 움직임 속에는 도신일체의 정순함이 베여 있다.
이런 움직임은 아름답다. 모든 움직임이 아름답다.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사람의 움직임은 모두가 다 아름답다. 손을 들어 올리는 단순한 동작까지 아름답다.
이런 집중은 초긴장 상태에서 우러나오는 집중이 아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완전방송(完全放鬆),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다 풀어진 이완 상태에서 나오는 집중이다.
아걸은 천천히 숲을 나아갔다.
툭!
아걸은 경계선을 넘었다.
상대방이 알아차릴 수 있는 영역 안으로 들어섰다.
상대방도 상당히 뛰어난 무인이다. 최대한 소리 내지 않고 접근했지만, 그래도 아걸에게는 강력한 도기(刀氣)가 스며 있다. 은연중에 도기가 발산된다. 일반인은 눈치채지 못할 도기이지만 흑의인 같은 고수는 당장 알아챈다.
그 거리, 상대방이 감지할 수 있는 무형의 영역.
그 안으로 들어서면 아무리 은밀히 이동해도 상대방에게 발각된다. 상관없다.
아걸을 노려보면서 촌부를 죽일 때처럼 거리가 멀리 벌어져 있지 않다.
상대방이 펼쳐 놓은 무형의 금역은 거리가 매우 좁다. 기껏해야 오 장 또는 십 장…… 이 정도의 거리는 도주하지 못한다. 어떤 식으로 도주해도 바로 잡힌다.
아걸의 눈에 잡힌다. 감각에 잡힌다.
아걸은 오체진감을 펼치면서 흑의인을 찾아왔다. 귀로 들을 수 없는 소리를 전신 감각으로 들었다. 땅의 울림, 공기의 파장을 느끼면서 찾아왔다.
흑의인은 소리를 내지 않았다. 어떤 기척도 흘리지 않았다. 하지만 혼자 있다 보면 아무래도 몸을 움직인다. 그때의 움직임을 오체진감으로 잡아냈다.
세상까지 속였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아걸은 잡아챘다.
아걸은 오체진감을 지금도 펼쳐지고 있다. 상대방이 도주하면 즉시 쫓아간다. 상대방이 어떤 신법을 가졌는지 모르지만, 아걸도 빠른 신법에는 자신 있다.
흑의인이 그를 단숨에 오십여 장 이상 떼어 놓을 수 있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도주하지 못한다.
스읏!
흑의인이 도주를 포기하고 일어섰다.
탁!
아걸이 들고 있던 대도로 옆에 있는 나무를 쳤다. 너를 베러 왔다는 표시다.
“훗!”
흑의인은 말하는 대신 실소를 흘렸다. 뒤를 내준 것이 아무래도 어이없는 듯하다.
아걸은 칼을 들어 올렸다.
흑의인들은 말을 하지 않는다. 혀가 잘린 것은 아니다.
옛날, 서리형개는 귀적칠흔을 양성했다. 그들은 사기침류공을 수련해서 말하는 기능을 잃었다.
이들도 그와 같은 공부를 연성한 것일까? 이들은 도대체 어떤 수련을 거친 것인가.
스으읏!
흑의인도 아걸과 맞춰서 검을 들어 올렸다. 순간,
“아!”
아걸은 순간적으로 자신이 잘못 찾아왔다는 걸 느꼈다.
상대방이 너무 하수다. 웬만큼 상대될 줄 알았는데, 이건 순 맹탕이다.
상대도 같은 느낌일까? 아닐 것이다. 상대방은 자신이 하수라는 사실을 전혀 모를 것이다. 단순히 아주 강한 상대를 만났으니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수는 자신이 하수인 줄 모른다. 오직 상수만 하수를 알아본다.
어쩌면 서로 칼을 들어 올린 순간, 흑의인도 상대를 잘못 선택했다는 것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아걸은 흑의인에게서 수많은 허점을 봤다.
정말로 이자는 상대가 못 된다. 흑의인을 찾아올 때는 허점이 이렇게 많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흑의인과 칼을 섞어 보기도 했지만 이렇게 허술하지는 않았다.
이자가 특히 약한 건가?
‘이랬었나?’
아걸은 피식 웃었다.
흑의인이 칼을 들어 올리자마자 바로 알았다. 아주 간단한 기수식을 취하는 동작 속에서 아걸은 적어도 십여 곳 이상 칼로 칠 곳을 찾아냈다.
흑의인은 머리가 비었다. 이문주의 목도일참을 사용하면 갈라낼 수 있다. 가슴도 비었다. 사문주의 일초무적도, 탄궁도가 적격이다. 옆구리도 비었다. 구문주의 십이살환도를 펼치면 제대로 움직여 보지도 못하고 나가떨어진다.
이거야 원……
흑의인이 정말 이토록 맹탕인가? 아니다. 흑의인은 전신을 다 방어하고 있다. 검을 잡은 자세는 정밀하다. 실오라기 한 올 들어갈 수 없는 방어막을 형성해 놨다.
저런 기수식은 어떤 공격도 막아 낼 수 있다. 공격보다는 방어에 치중한 기수식이다.
하지만 아걸은 각 부위에 특화된 공격을 찾아냈다.
머리 같은 경우, 다른 칼은 통하지 않는다. 구문주의 십이살환도를 펼치면 막아 낸다. 하지만 목도일참을 펼치면 밑에서 쳐올리는 검을 부수면서 머리를 갈라낼 것이다.
옆구리 같은 경우에는 정반대다. 목도일참을 사용하면 막아 낼 것이다.
옆구리를 치기 위해서는 아걸도 칼을 밑으로 내려야 한다. 칼을 밑으로 내리는 그 짧은 순간에 흑의인은 자세를 정비한다. 모든 힘을 옆구리로 집중시킨다.
그래서 십이살환도의 환도를 쓴다. 상대방이 막지 못하게끔 현란한 도법을 구사한다.
이 모든 것이 아걸의 눈에는 한눈에 쫙 보였다.
이것이 허도기의 발검술이다.
자신이 기수식을 잡을 때 허도기는 이미 자신을 칠 수많은 방법을 찾아냈을 것이다. 자신이 흑의인에게서 열 군데 이상 허점을 찾아낸 것처럼, 허도기는 마주 서자마자 ‘도대체 어디를 공격하지? 공격할 곳이 너무 많잖아?’ 하는 생각을 떠올렸을 것이다.
이러니 자신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 수밖에 없다.
동굴 속에서 허도기가 왜 허초를 그토록 많이 흘렸는지도 이해가 간다.
일견검살(一見劍殺)!
한눈에 공격할 방법을 찾아낸다.
상대를 보지 못하니 일견검살이 무력해졌다. 그러니 약간 화가 났을 것이다. 하지만 아걸이 검초를 흘리는 순간, 일견검살은 다시 살아난다. 즉시 허점을 보게 된다.
아걸은 비로소 허도기의 발검술을 이해했다.
이자가 특별히 약한 것이 아니다. 다른 흑의인들처럼 강하다. 다만, 아걸의 눈이 밝아졌다.
스읏!
아걸을 칼을 거꾸로 잡았다.
칼날을 오른손 팔꿈치 뒤로 빼냈다. 칼끝이 등 뒤로 향했다.
역도(逆刀)!
역도를 잡은 채 왼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상대에게 반 초 이상 빠름을 양보한다.
쒜에엑!
흑의인이 여지없이 공격해 왔다. 아걸이 역도를 잡자 즉시 기회라고 판단했다.
검이 밑에서 위로 흐른다.
아걸은 상대방의 공격 속에서 또 다른 공격을 봤다.
흑의인의 검은 곧 급선회할 것이다. 둥근 원을 그리면서 한 바퀴 휘돌 것이고, 집중 타격점은 옆구리가 될 것이다. 검은 둥근 원을 그리면서 탄력을 얻고, 몸은 검에 진력을 고스란히 실을 수 있게끔 자세를 잡아 준다.
아걸이 상상한 흑의인의 공격은 상식을 벗어난다.
도마 위에 생선을 올려놓고 칼을 내리칠 때, 강한 힘이 일어난다. 수직, 직각으로 떨어지는 칼이 가장 강하다. 옆에서 후려치는 칼은 위에서 떨어지는 칼처럼 강하지 않다.
흑의인은 아걸의 옆구리를 수직, 직각으로 내려치고자 한다.
검은 원을 그리면서 수직 위치로 들어설 수 있다. 하지만 몸은…… 몸도 수직 위치로 자세를 잡아 주어야 한다. 흑의인의 몸이 허공에 떠 있어야 가능하다.
흑의인은 한 발을 들어 올릴 것이다. 오른발로 중심을 잡고, 몸을 직각으로 꺾는 것이다. 아걸과 십자(十字) 형태로 몸을 돌린다. 그런 상태에서 두 손으로 힘껏 내리친다.
공격하는 곳은 옆구리, 하지만 흑의인은 도마 위에 올려진 생선을 내리칠 때처럼 수직으로 내리친다.
아걸은 밑에서 위로 치솟는 검초 속에서 곧 이어질 변초를 읽었다.
대단히 기이한 도법이다. 이런 도법을 펼치기 위해서는 수십, 수백 번에 걸친 고련을 거쳤을 것이다. 대단히 환상적이고 위력적인 검초이지만 실전에서 사용하기는 매우 위험하니까, 더 많은 수련을 쌓았을 것이다.
흑의인은 옆구리를 행해서 전력을 쏟아붓고 있다.
그 힘은 엄청날 테다. 하지만 이 순간 아걸은 흑의인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공격을 펼치고 있었다.
스읏!
아걸은 몸을 반 바퀴 휘돌았다. 동시에 역도가 아래에서 위로 솟구쳤다.
흑의인의 몸이 십자 형태로 눕혀질 때, 역도가 땅에서 하늘로 치솟았다. 흑의인이 원하던 수직 상태를 아걸이 먼저 사용했다. 강력하게 내리칠 필요는 없다. 빠르게 올려치면 된다.
쒜에엑! 퍼억!
둔탁한 격타음이 일어났다.
빠름! 상대방의 도법을 분쇄하는 방법은 빠름이다.
역도를 잡아서 반 초를 양보했지만, 아걸의 빠름은 상대보다 적어도 두 초 이상 앞섰다.
“큭!”
상대방이 짧은 단발마를 내지르며 나가떨어졌다.
흑의인은 복부에 칼을 맞았다. 오른쪽부터 왼쪽까지 한일자로 쭉 갈렸다.
칼을 맞기 직전, 흑의인의 몸은 완전히 직각으로 꺾여 있었다.
검초를 쓰기 위해서 자세를 만드는 데까지 성공했지만, 마지막 마무리를 짓지 못했다.
휘릭!
아걸은 칼을 허공에 휘둘러 대도에 묻은 피를 털어 냈다.
아니,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흑의인은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아야 한다.
아걸은 흑의인에게 다가가서 대도에 묻은 피와 기름기를 흑의인의 옷에 닦았다. 천천히, 느릿느릿…… 흑의인은 아직도 손에 검을 쥐고 있지만, 전혀 개의치 않고 칼을 닦았다.
“이런 일, 너 혼자 독단적으로 저질렀다고 생각하지 않아.”
아걸이 차분하게 말했다.
“너희 같은 부류는 누군가의 명령이 없으면 절대 움직이지 않지. 다시 말해서 네가 쓴 이격술…… 네 뒤에 있는 누군가가 명령을 내렸다는 거야. 그렇지?”
흑의인은 대답이 없었다. 그는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검을 쓰려고 했다.
하지만 검을 쓸 수가 없다. 흑의인은 단순히 복부를 갈린 것이 아니다. 복부를 베이면서 손과 발의 경락까지 일시에 베였다. 오른쪽 반신이 마비된 상태다.
“지금부터 내가 너희를 사냥한다. 너흰 큰 실수 했어. 날 오음산까지 그냥 보냈어야지. 어차피 허도기에게 죽을 게 뻔한데…… 날 왜 건드린 거야?”
스읏! 철컥!
아걸은 대도를 집어넣었다.
흑의인의 숨이 아직 붙어 있다. 하지만 칼을 쓰지 않는다.
“날 건드린 대가는 철저히 받을 거야.”
아걸은 흑의인을 멀거니 쳐다보다가 뒤돌아섰다.
흑의인이 일어서려고, 검을 쳐 내려고 발버둥 쳤다. 검을 잡은 손이 부르르 떨렸다.
하지만 흑의인은 곧 잠잠해졌다.
아걸의 칼은 사맥(死脈)을 쳤다. 곧 일어날 것처럼 생생해 보여도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저벅! 저벅!
숲을 걸어가는 발걸음 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오체진감이 풀린 발걸음에 마른 풀잎이 바스락바스락 부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