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일홀도-354화 (354/600)

#354화. 第七十一章 만회(滿懷) (4)

슷!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았다.

허공에서 공기를 가르는 듯한 느낌이 약간 일어났을 뿐, 무엇이 움직인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새 한 사람이 나타나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부복했다.

츠읏!

서리형개는 눈을 떴다.

꾸벅!

부복한 자는 고개를 깊이 숙여서 서리형개에게 예를 표시했다. 지극히 공경하는 모습으로. 그리고 품에서 서신과 지도를 꺼내 두 손으로 받쳐 올렸다.

서리형개는 담담한 표정으로 그가 건넨 서신을 읽었다.

“흠! 야천이라.”

서리형개의 얼굴에서 잔인한 미소가 배어 나왔다.

“이런 곳에서 또 뭘 주워 드시려고. 어떻게 먹는 거라면 더러운 거, 깨끗한 거 가리지 않고 덤벼드시나. 그런데 이런 곳에도 먹을 게 있나? 그놈의 욕심하고는…….”

서리형개의 눈가에서 살광이 피어올랐다.

“수고했다.”

서리형개가 나타난 자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러자 부복한 자는 고개를 푹 숙여 인사를 한 후, 스읏! 소리 없이 사라졌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갈 때도 일절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서리형개는 그가 사라진 후, 서신을 다시 읽었다.

“야천. 숨겨둔 힘을 꺼내서 고작 사용한다는 곳이 야천…… 도대체 야천에 뭐가 있지?”

서리형개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허도기는 모든 관직을 다 내려놓고 낙향했다.

다른 사람에게는 낙향이 은거 생활로 이어지지만, 허도기에게는 무림 지존으로 귀환하는 길이다.

성검문이 허도기의 고향이다.

그런데 그가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성검문은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후였다.

손보는 사람이 없어서 전에 살던 집이 폐허로 변해 버렸다고 할까? 소축십검 중 살아남은 사람은 몇 명 되지 않고, 성검문 위신도 옛날처럼 강하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이제 허도기가 돌아왔으니 성검문이 당장 일어설 줄 알았다.

무림에서 일어나는 분란을 당장 잠재우고, 소축십검도 옛날처럼 위세를 떨치고…… 무림이 평온해진다. 그동안 분탕질을 치던 아걸, 취화원 등 몇몇은 말끔히 정리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허도기는 손을 늦췄다.

소축십검은 여전히 망가져 갔다. 폐관 수련이라는 명목으로 아예 자취를 감춰 버렸다.

허도기가 군에서 데려온 자들도 자취를 감췄다.

일부가 무림에 모습을 보인 적은 있지만, 궤멸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완전히 사라졌다.

그래도 무림은 여전히 성검문을 주시했다.

성검문은 허도기가 전부다. 허도기라는 사람 자체가 성검문이다. 하인이 몇 명이고, 하녀가 몇이고…… 성검문 문도가 몇 명이냐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허도기가 있으면 성검문이 존재하는 것이고, 그가 없으면 사라진다.

무림은 두 가지를 궁금해한다.

하나는 왜 허도기가 왜 손 쓸 시간을 늦추고 있느냐는 점이다.

취화원이나 적랑대 같은 무리는 마음만 먹으면 지금도 당장 무너트릴 수 있다. 그들이 쥐새끼처럼 음지에서 음지로 피해 다니고 있지만, 그 정도도 잡아내지 못할 성검문이 아니다.

성검문을 그들을 잡지 않고 있다.

또 하나는 허도기가 정말 아걸을 잡을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무림에 알려진 공식적인 싸움은 이전이승이다. 여기에 비공식 싸움, 한 번이 더해진다.

허도기는 아걸과 싸워서 두 번을 이겼다. 죽이지는 못하고 심한 상처만 입혔다. 비공식 싸움 한 번은 무승부다. 동굴이 무너지는 바람에 아무도 승기를 잡지 못했다.

허도기가 직접 나섰는데도 이렇다.

상황이 이렇게 흐르니 허도기에게 아걸을 잡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 하는 의문까지 든다.

물론 아직도 허도기가 정말로 검을 뽑으면 아걸 따위는 단번에 날려 버릴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태반이다. 하지만 예전에는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전부였다.

전부에서 태반으로 바뀌었다.

일부가 의심하기 시작했다.

무림 상황이 이런 판에 허도기는 낯선 자, 진짜 강자들을 끌어들였다. 숨겨진 힘 중 하나를 드러냈다. 그런데 그 힘을 움직인 곳이 고작 야천이다.

도대체 야천 같은 곳에 무엇이 있을까?

야천은 많은 사업에 발을 담그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주축은 아니다. 야천 대방만 해도 그렇다. 동정호에서 제법 짭짤한 수입을 취하고 있지만, 정말로 동정호를 관리하는 곳은 무림이다.

야천 대방은 겨우 동체에서 떨어지는 콩고물을 주워 먹고 있다.

성검문이 원하기만 하면 야천 대방의 관할 뿐만이 아니라 동정호 상권 전부를 차지할 수도 있다.

허도기가 도대체 왜 야천을 장악한 것일까? 그것도 한 번도 드러난 적이 없는 미지의 힘까지 동원해서.

허도기가 아걸을 손대지 않고 있는 이유는 서리형개도 궁금하다.

아걸을 잡아 죽였어도 벌써 잡아 죽여야 했는데 너무 시간을 끈다. 아니, 야천도 문제다. 야천도 완전히 장악한 게 아니다. 아직 야천 대방과 팔방에 잔존 세력이 남아있다. 짓밟았어도 벌써 짓밟아야 했는데 너무 시간을 들인다.

“후후후!”

서리형개는 웃었다.

아걸이 오음산으로 향하고 있다.

벌써 허도기와 네 번째 싸움이다. 상대도 되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도전하고 있다. 일홀도 중에서도 가장 처절하다는 일홀사도의 길을 걷고 있다.

서리형개는 아걸에게서 일홀도의 맛을 봤다.

‘이렇게 되면……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서리형개는 맑은 하늘을 쳐다봤다.

그는 풍도곡에서 이룬 모든 걸 다 잃었다. 정동 무인도 잃었다. 한순간에 세상을 뒤집을 수 있을 것 같던 막강한 세력을 하루아침에 다 잃었다.

그리고 목숨까지 위협받아가면서 쫓겨 왔다.

엄청나게 많이 잃은 것 같았다. 이제는 망했다는 생각만 들었다. 하지만 옛 고향…… 삼호산(三護山)으로 돌아온 후에야 깨달았다. 사실은 잃은 게 하나도 없었다.

옛날 그 자리로 돌아와 보니 자신에게서 떨어져 나간 게 아무것도 없었다. 사지 육신 멀쩡하고, 칼도 여전히 날카롭다. 변한 것이 전혀 없다.

실패가 약간 있었지만, 이미 주워 담을 수 없는 과거다.

서리형개는 칼을 잡았다.

무림을 장악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나는 허도기처럼 성검문 같은 거대한 집단을 통해서 장악하는 것이다. 그렇게 장악하면 왕 못지않게 호사를 누릴 수가 있다.

다른 하나는 사부처럼 절대 칼을 가지는 것이다.

일홀도를 얻는다.

일홀도를 얻으면 무림을 얻는 것이나 다름없다. 모든 문파, 모든 무인이 일홀도 앞에 머리를 숙인다.

굳이 피를 흘리지 않고도 온 천하가 내 것이 된다.

허도기는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길을 택했고, 사부는 지배하지 않으나 군림하는 쪽을 택했다.

서리형개가 깨달은 것은 그것이다.

사형 서리가헌은 이런 사실을 진작 깨달은 것 같다. 다만 절대자로 군림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칼을 뽑지 않았다. 한마디로 허도기를 이길 자신이 없었다.

“후후! 막내놈이 팔팔 날뛰고 있는데 가만히 있을 순 없지. 그만 가 볼까.”

서리형개가 일어섰다.

서리형개는 사부가 기거하던 초옥으로 왔다.

초옥은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가는 중이었다. 사실, 거의 다 부서져서 폐허나 다름없었다.

자신과 사형이 사부에게 삼인독을 투여하던 곳.

흙벽은 부서져 떨어졌고, 큰 구멍이 뚫려서 싱싱 바람이 들락거린다. 마당에는 잡초가 키만큼 높이 자랐다. 물맛 좋던 우물도 매몰되어 버렸다.

서리형개는 피식 웃었다.

‘여길 왜 왔지?’

지금은 죽고 없는 사부에게 하산 인사라도 하러 왔나?

삼호산으로 돌아온 후에도 자신이 머물던 옛 장소로 바로 갔다. 이곳은 방문하지 않았다. 한 번도 들리지 않았다. 배반의 장소가 좋을 리 없다.

그런데 문득 들러 보고 싶었다.

‘여기서 뭘 보겠다고…….’

서리형개가 몸을 돌렸다.

그때, 등 뒤에서 차가운 음성이 들렸다.

“산에서 내려갈 생각이니?”

‘사형!’

서리형개는 서리가헌의 음성에 눈살부터 찌푸렸다.

사형의 충고를 쫓아서 산으로 돌아왔다. 자신을 추슬렀고, 칼을 정비했다.

하지만 사형의 칼은 일홀도다.

자신도 일홀도다.

두 칼은 공존하지 못한다. 일홀도는 칼 위에 칼이 있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니 언젠가는 부딪쳐야 할 칼이다. 사형이 먼저 칼을 뽑지 않아도 변한 건 없다. 자신의 칼이 사형의 칼을 꺾어야 한다고 말한다.

“도움은 고마웠지만, 내 행동에 간여하는 것은 껄끄럽군.”

“네 목숨, 내가 살려 준 것이나 마찬가지잖니. 그 정도면 상관할 수 있지 않겠니?”

“사형, 함부로 나서면 죽어.”

“그러니? 그럼 어디 칼 한 번 볼까?”

사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벅! 저벅! 저벅!

사형이 걸어온다.

‘더 강해졌다!’

서리형개는 사형의 모습을 보자마자 담박 알았다. 자신만 강해진 것이 아니다. 사형도 강해졌다. 이미 도천(刀天)을 이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해졌다.

사형은 칼이다.

지금 사람이 걸어오고 있는 게 아니다. 칼이 걸어온다. 아주 거대한 칼이 자신을 향해서 똑바로 걸어온다. 사람은 보이지 않고 오직 칼만 보인다.

“음!”

서리형개는 침음했다.

사형이 말로 표현하지 못할 만큼 강해졌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이 잔잔하다. 편안하다.

자신 역시 강해졌다.

일홀도가 한층 강해졌다고 자부한다.

사부가 살아계셨다면 이쯤에서 사형제 간에 결전시켰을 것이다.

동박은 살아 있어도 예외다. 동박은 서리 성을 얻지 못했다. 사부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니 그가 이 싸움에 끼어든다면 단박에 베일 것이다.

아걸은 서리 성을 얻었다. 그렇다면 싸워야 한다.

사실 아걸과 서리가헌의 싸움은 상당히 불공평하다. 서리가헌은 아걸보다도 십여 년이나 더 수련했다. 내공이나 칼에 대한 이해가 한층 더 깊을 것은 뻔하다.

나이 차이로만 보면 서리가헌이 사부가 된다고 해도 하등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두 사람은 같은 일홀도, 싸워야 한다.

이런 불공평한 시합을 일홀문은 시킨다. 그것도 목숨 걸고 진검으로 싸워야 한다. 두 명이 죽고 한 명만 살아남는 날, 사부는 문주 직을 넘겨준다.

세 명 중 승자가 일홀문주를 이어받는다.

세 명이 싸우다 세 명 전부 동사(同死)하면, 사부는 제자를 헛키운 셈이다. 그때는 다시 일홀문도를 찾아서 세상을 돌아다녀야 한다. 제자를 다시 키워야 한다.

상당히 비효율적이다. 상당히 모순되고 조잡하다. 절대 칼만 고집하는 아주 비효율적인 문파다.

스릉!

서리형개가 칼을 뽑았다.

서리형개의 칼이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 빛났다.

“후후! 내게 칼을 뽑아? 이제는 나와 싸울 수 있다 이건가? 내 칼을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서리가헌이 웃었다.

“우리는 참 재미있는 관계야. 사형인데 죽여야 할 운명. 우리 서로 이렇게 될 거, 알고 있었잖아.”

“그러니? 후후! 됐다.”

서리가헌이 돌아섰다.

“뭐 하자는 건가?”

“그래도 명색이 사형인데, 말 좀 올려야 되지 않니? 혓바닥이 반 토막도 아니고, 왜 말꼬리를 끊어 먹니?”

“사형!”

“예전에 너는 내게 칼을 뽑지 못했잖니. 이제 칼을 뽑았다는 건 그만큼 많이 컸다는 얘기 아니겠니. 방금 내 칼을 보여줬는데도 뽑았잖니. 그럼 됐다는 거지.”

“후후! 아직도 사형 행세를 한다는 건가?”

“행세?”

“우리 사이에는 칼이 하는 말부터 들어야 한다는 거지.”

“너 마음이 비비 꼬였구나?”

“칼 뽑지?”

“너 방금 뭐라고 그랬니?”

“내게 칼을 보여 주었다고 하는데, 나는 사형의 칼을 제대로 보지 못했거든. 그러니 이제 봐야겠어.”

“내 칼을 보지 못했니?”

사형은 도기(刀氣)로 칼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도기는 진짜 칼이 아니다. 진짜 칼을 쇠붙이다. 기세나 기도가 아니다.

“잘난 척 그만하고 칼 좀 뽑아 봐.”

“후회하지 않겠니?”

스읏! 팟!

서리형개가 진기를 일으켰다.

순간, 서리형개는 한 자루 칼이 되었다. 아주 고요하고 평온한 칼이다. 하지만 날이 예리하게 갈려 있어서 매우 위험해 보인다. 언제든 피를 뿜어낼 수 있다.

“후후!”

서리가헌은 서리형개의 도기를 보고도 태연히 웃었다.

서리가헌은 서리형개가 검을 뽑을 때부터 이런 기세를 읽었다. 서리형개의 칼을 봤다. 새삼스럽게 도기를 드러내서 일부러 보여 주지 않아도 안다.

스릉!

서리가헌이 칼을 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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