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6화. 第七十二章 타초(打草) (1)
부스스!
아주 미세한 소리가 신경을 자극했다.
‘음!’
아걸은 걸음을 멈추고 나무에 등을 기댔다.
대체로 이격술은 사람 뒤에 사람이 있고, 또 그 사람 뒤에 다른 사람이 있다. 사람이 줄지어 늘어선 형태다.
앞사람이 당하면 바로 뒷사람이 잇는다.
목표를 감시하고, 목표와 접촉한 사람을 죽이는 것이기 때문에 무공이 강할 필요는 없다. 대신 추격과 은신에는 능숙해야 한다. 도주는 필수다.
하지만 흑의인 같은 경우에는 사정이 조금 다르다. 이들은 야천 제일인자 흑수혈검마저 노릴 정도로 강자다. 야천 방주들을 일순간에 잠재웠다.
이들 정도의 무공이면 꼬리를 두지 않는다.
혼자 쫓아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걸을 노리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단지 주위에 달라붙은 곁가지만 쳐 내는 것이라면 혼자서도 충분하다.
도주? 잡힐 염려는 없다. 거리를 충분히 벌려 놨다.
아걸은 이들에게 그만한 자부심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뒤에 꼬리가 붙었다. 이들은 자신을 믿지 않는다. 철저하게 안전 위주로 진행한다.
‘그렇군.’
아걸은 이들의 특성을 알았다.
아마도 뒤에 붙어 있는 자는 앞선 자가 죽는 모습을 봤을 것이다. 그러면 당연히 밀마를 남긴다. 자신이 당할 것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하늘에 전서구가 날지 않았다.
사람이 오가지도 않았다.
죽은 자와 뒤에 있는 자 외에 이들이 습격당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직 없다.
뒤에 있는 자가 남긴 밀마는 아직 전달되지 않았다.
밀마를 찾아서 없애 버리면? 어림도 없는 생각이다.
타 문파의 밀마는 지극히 은밀해서 찾기가 힘들다. 아는 사람이 아니면 아무리 찾아도 눈에 띄지 않는다. 특히, 산이나 들에 남기는 밀마라면 더욱 은밀하다.
이런 곳에 남겨진 밀마를 찾겠다고 나섰다가는 공연히 시간만 낭비한다.
스읏!
아걸은 선 채로 감각을 죽였다.
감각을 죽이면 묘한 느낌이 일어난다. 육신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육신이 보인다. 밖에서 몸을 보는 것이 아니라 몸 안에서 몸을 본다. 근육이 어떻게 생겼고, 얼굴이 어떻게 생겼고…… 이런 외면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내 몸이라고 여겨지는 몸 안쪽이 보인다.
이 상태에서 진기를 눈에 집중시키면 몰안이 된다. 눈이 아니라 감각에 집중하면 오체진감이 된다. 감각을 곤두세우거나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감각이 깨어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다.
스슷! 스으읏!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움직임이 감지된다. 하지만 방금 흙 부스러기가 떨어졌던 곳에서는 아무런 움직임도 일어나지 않았다. 지극히 조용했다.
상대가 움직이지 않는다.
흑의인이 죽었다는 것은 많은 것을 말해 준다.
아걸은 흑의인을 죽일 수 있다. 그것도 매우 빠르게. 아무리 깊게 숨어도 쉽게 찾아낸다. 그러니 아걸이 움직이지 않는 한 절대로 움직이면 안 된다.
이 모든 말을 한꺼번에 말한다.
무공으로 아걸을 누를 수 있는 자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절대 침묵해야 한다.
절대 침묵과 오체진감의 대결이다.
숨는 자는 모든 것을 감춰야 하고, 아걸은 숨겨진 감각을 찾아내야 한다.
어느 쪽이든 쉽지 않다.
시간이 말없이 흘러갔다.
부스스!
아주 미미한 소리가 들렸다. 흙이 무너지는 소리다.
흑의인은 잘못된 땅에 숨어 있다. 흙이 단단한 곳에 엎드려 있어야 하는데, 무른 흙에 닿아있다.
흑의인이 흘린 소리는 바로 옆에서 귀를 기울여도 듣지 못할 정도로 미약하다. 하지만 아걸은 분명히 들었다.
‘찾았어.’
저벅! 저벅!
아걸은 나무에서 등을 뗀 후, 거침없이 걸었다.
상대도 아걸이 움직이는 모습을 봤다. 이 순간, 상대는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아직 자신이 발각되었는지 모르니까 조금 더 숨어 있을까? 아니면 발각된 것이 확실하니까 지금이라도 일어나서 도주해야 하나?
흑의인이 아걸을 주시하고 있다.
저벅! 저벅!
아걸은 흑의인을 향해 똑바로 걸어갔다.
이제는 상대방도 발각되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러면 또 결심해야 한다. 싸울까, 도주할까?
스읏!
흑의인이 일어섰다.
아걸은 흑의인이 일어서는 모습만 보고도 상대방의 어떤 생각을 굳혔는지 눈치챘다.
도주!
쒯! 쒜에엑!
흑의인은 매우 쾌속하게 신형을 날렸다.
이상하다. 정말 이상하다. 어떻게 상대방의 행동이 이렇게 환히 예측될까?
흑의인이 미처 신형을 쏘아 내기도 전, 아걸은 대도를 회륜(回輪)처럼 사용해서 힘껏 내던졌다. 그러니 상대가 신형을 쏘아 낼 즈음에는 이미 대도가 상대방에게 닿고 있었다.
쒜에에에엑!
흑의인인 득달같이 날아온 칼날에 깜짝 놀라서 급히 후향선전(後向旋轉) 수법을 전개했다.
휘릭! 휘리릭!
손으로 땅을 짚고 뒤로 맴돌았다. 후향선전을 두 번이나 전개해서 멀찌감치 물러섰다.
휘리리릭!
아걸은 흑의인을 가격하고 다시 돌아온 대도를 받아들었다.
아걸이 수련한 도법 중에 칼을 비표(飛鏢)나 건곤권(乾坤圈)처럼 날렸다가 다시 받는 도법은 없다.
방금 아걸이 펼친 도법은 임기응변이다.
몸을 회전시키면서 도법을 전개하는 삼십대 문주의 회선도(回旋刀)와 칼날만 빙그르르 돌리는 삼십오대 문주의 회륜도를 섞어서 주인에게 다시 돌아오는 도법을 찾아냈다.
“무인이면 싸워야지. 도주가 웬 말?”
아걸이 날아든 대도를 가볍게 받아들면서 말했다.
스릉!
흑의인은 검을 뽑았다.
도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싸워도 이기지 못한다. 그렇다면 목숨을 던진다. 그리고 최대한 깊은 상처를 입힌다. 사지 중에 하나라도 잘라 낸다면 만족한다.
아걸은 말 없는 흑의인에게서 많은 말을 들었다.
스릉!
아걸은 대도를 다시 집어넣었다.
흑의인이 검을 뽑았지만…… 흑의인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굳이 대도를 쓰지 않고도 제압할 수 있겠다. 이미 상대방의 초식이 보이고, 공격할 수법도 떠올랐다.
아걸이 칼을 집어넣자 흑의인의 눈빛에 번쩍 살광이 비쳤다. 아마도 이길 수 있다고 자신하는 듯하다.
아걸은 두 손도 축 늘어트렸다.
상대방을 읽었으니 거기에 맞춰서 허점을 드러내 준다. 공격할 곳을 만들어 준다.
아! 허도기와 싸울 때,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다.
허도기의 전신이 허점투성이였다. 어디든 칠 수 있었다. 허도기가 검을 뽑는 것보다 더 빠르게 달려들었다가 빠져나올 수 있을 것 같았다.
고수가 드러낸 허점은 정말 심각하게 고려해 봐야 한다. 매우 신중하게 공격해야 한다.
쒯! 쒜에엑!
흑의인이 대뜸 검을 쏘아 왔다.
정말 빠르다. 왼쪽 눈을 찌르는 척하면서 심장을 베고, 왼쪽 옆구리로 흘러나갈 심산이다.
슷!
아걸은 이미 흑의인과 바짝 붙었다.
흑의인이 쳐 낸 검은 심장으로 흘러내리지 못했다. 왼쪽 귀를 스치면서 지나갔다.
아걸의 움직임은 흑의인이 생각했던 것보다 두 배 이상 빨랐다. 흑의인의 판단에는 이제 막 검으로 몸을 찌르려고 한다. 그럴 시간이다. 하지만 아걸은 어느새 코앞에 바싹 붙어 있다. 검의 거리를 뚫고 들어와서 몸에 달라붙었다.
툭!
아걸은 왼쪽 어깨로 상대방의 오른손 팔꿈치를 쳐올렸다.
견갑타주(肩胛打肘)!
어깨로 팔꿈치를 치는…… 실전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수법이 튀어나왔다.
우둑!
흑의인의 팔꿈치에서 뼈 부러지는 소리가 울렸다.
흑의인은 검을 들고 있을 수 없었다. 팔꿈치 뼈가 으스러지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검을 놓고 물러섰다.
하지만 이것은 아주 큰 실수다.
어떤 일이 있어도 검만은 놓지 말아야 한다. 검을 놓는 순간 그는 죽은 것이다.
슷! 착!
아걸은 손을 등 뒤로 뻗쳐서 툭 떨어지는 검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즉시 십구대 문주의 일홀도, 역수참도가 펼쳐졌다. 거꾸로 잡은 검이 허공을 향해 쓱 그어졌다.
“흑!”
흑의인은 짧은 헛바람을 내질렀다.
쭉! 파아앗!
검이 배에서부터 얼굴까지 길게 그어 냈다. 살이 갈라지면서 붉은 피가 확 솟구쳤다.
꼬리에 꼬리를 잘라 냈다. 이 꼬리에 뒤에 또 다른 꼬리가 있을까? 없을 것이다.
흑의인들이 매우 신중하게 움직이지만, 이자들 역시 무인의 자부심이 있다. 꼬리에 꼬리를 붙였을 정도면 충분하다. 더는 뒤를 주시하지 않는다.
사실, 쫓는 자가 아걸이니 두 명이나 따라붙었지, 그렇지 않았다면 한 명도 넘쳤을 것이다.
아걸은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더 이상의 꼬리는 없다고 확신하지만, 그래도 이 꼬리 뒤에 또 다른 꼬리가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사흘 후, 아걸은 한성에 모습을 드러냈다.
산신묘 산신 그림에서 본 장소 중 제일 가까운 곳에 있는 도읍이다.
원래는 족히 닷새는 걸릴 거리다. 그것을 사흘로 단축했다.
더 빨리 달려올 수 있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 이틀 정도만 단축하면 된다.
죽은 흑의인에게서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는 데 하루, 연락이 끊긴 그들은 찾아가는 데 하루, 변고 사실을 알고 가장 빠른 연락망으로 소식을 보내는 데 하루…… 아무리 빨리 잡아도 꼬리가 되잡힌 사실을 아는 데 사흘은 걸린다.
나흘은 조금 늦을 수 있고, 이틀 만에 달려오는 것은 괜한 체력 낭비다.
저벅! 저벅!
아걸은 사람 많은 도읍을 버젓이 걸었다.
한성은 굉장히 번화한 도읍이다. 흑의인이 이격술을 계속 고집한다면 이곳 사람들을 전부 죽여야 한다. 물론 아걸이 한성 땅에 발을 붙인 것도 모르고 있을 터이지만.
흑의인들은 번화한 도읍에 숨지 못한다.
그들은 세상 사람과 어울려 살 수 없는 환자들이다. 문둥병 환자, 그리고 종류를 할 수 없는 수포 환자……. 복면을 벗고 일반인들과 섞일 수 없다.
그들은 일상생활을 하면서도 복면을 쓰고 있어야 한다.
복면을 쓰고 살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곳, 그러면서도 언제든 야천을 공격할 수 있는 곳.
그런 곳이 어딜까?
복면을 쓰고 다니거나 문둥병 환자가 돌아다니면 당장 사람들 눈에 뜨일 텐데.
야천은 도자기 굽는 공방을 주목했다.
대체로 공방은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한적한 곳에 있다.
가마도 있어야 하고, 장작도 많이 쓰이니 터가 넓으면서도 사람 발길은 닿지 않는다.
어떤 공방은 도읍 한복판에 있기도 하다.
그래도 사람 눈길은 가마에 쏠리지 않는다. 사람은 가마에서 구워진 도자기만 쳐다본다. 가마 굽는 사람들이나 공방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쳐다보지 않는다.
복면을 쓰고 있어도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물론 이럴 경우, 공방에서 일하는 사람도 흑의인과 한통속이어야 한다.
그래서 야천은 공방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을 적으로 간주했다.
그렇다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공방이 적일 수는 없다. 그러면 적이 너무 많아진다.
- 이봐, 이봐! 어딜 들어가! 뭘 염탐하려고? 여기는 비밀 구역이야. 아무도 못 들어가.
- 잠깐만 구경합시다.
- 가마에 장작을 어떻게 쌓는지, 불 온도를 어느 정도로 높이는지, 이게 다 비밀이라고. 못 들어가.
- 도기를 굽지 않을 때는 언제요? 그때라도 구경하게.
- 이봐! 가마 생김새, 위치, 높이. 이게 다 비밀이라니까! 못 봐.
이런 것들이 비밀일 수도 있다. 하지만 도기를 굽지 않는 날까지 막무가내로 출입을 막는 것은 너무 과하다. 대부분의 공방이 도기를 굽지 않는 날에는 가마를 보여 준다.
완강하게 출입을 막는 공방!
그런 곳 중의 한 곳이 바로 이곳, 한성에 있다.
그런 공방이라고 해도 반드시 흑의인이 숨어 있다고 단정하지는 못한다. 단지 의심이 간다는 거다. 정말로 도기 굽는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서 출입을 막았을 수도 있다.
어쩌면…… 야천 팔방 간자들이 알려온 정보가 헛된 것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