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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홀도-360화 (360/600)

#360화. 第七十二章 타초(打草) (5)

서리가헌은 매우 빠르게 움직였다.

서리가헌 정도 되는 고수라면 천천히 걸어도 될 법한데 그는 뛰었다. 냅다 내달렸다. 달리면서 칼을 쓴다.

쒯! 쒜에엑!

“크으윽!”

허공에서 칼 빛이 번뜩 터지면 어김없이 비명이 쏟아진다. 한 사람이 목숨을 잃는다.

쒯! 쒜에엑!

칼이 정확하게 사혈을 벤다.

피를 많이 쏟는 자도 있고 그렇지 않은 자도 있다. 하지만 땅에 쓰러지기 전에 이미 숨이 끊어진다는 점은 똑같다. 일도일사(一刀一死), 즉사(卽死)다.

서리가헌은 단숨에 외장을 뚫었다.

대체로 기루를 지키는 무인은 기루에서 자체적으로 양성 혹은 채용한 무인들이다. 무공이나 충성심이 높지 않다. 약자에게는 강하고, 강자에게는 약하다. 그러니 절대 고수가 나타나면 당장 검을 꺾고 도주한다.

그런데 농성제일루 외장 무인들은 죽기 살기로 달려들었다.

달려들면 죽을 것이 뻔한데도 거침없이 달려들면서 병기를 쳐 냈다. 그리고 예상대로 죽었다.

이들은 기루에서 채용한 용병이 아니다.

아마도 흑의 복면인과 같은 무리가 아닐까 추측해 본다.

쒯! 쒜에엑!

단검을 거침없이 휘둘렀다. 바싹 다가붙고, 사혈을 내리찍고, 옆으로 이동했다.

그는 순식간에 외장을 거치고 내원을 넘어섰다.

내원이 뚫릴 때까지도 흑의 복면인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여전히 침묵을 지킨다.

‘잘못 찾아온 것이 아닐까?’ 하는 의혹까지 치밀었다.

서리형개가 파악하고 있는 지도는 야천 간자가 전해 준 것이다. 그러니 잘못 파악했을 수도 있다.

아니다. 외장, 그리고 내원 무인들이 달려드는 모양새를 보면 분명히 이곳에 흑의 복면인이 있다. 이곳 무인들은 흔히 볼 수 있는 야천 무인들이 아니다. 그들보다는 훨씬 정교하다.

서리가헌은 가장 안쪽, 후원을 향해 걸어갔다.

스스스! 스스스!

내원을 넘어서 후원으로 들어서려고 할 때, 담장 위로 십여 명이 내려섰다.

“음!”

서리가헌은 고개를 들어서 담장 위를 쳐다봤다.

담을 밟고 서 있는 자들, 그들은 모두 검을 지녔다. 풍기는 기도는 매우 날카롭다. 살기가 뚝뚝 흐른다.

전문 살수다.

“이제야 좀 칼을 쓸만한 놈들이 나왔군. 진작 나왔어야지.”

서리가헌이 히죽 웃으면서 그들을 쳐다봤다.

“쳐!”

누군가 일갈을 터트렸다.

순간, 십여 명이 한 몸처럼 동시에 번쩍 날아올랐다. 검광도 일제히 터졌다.

쒯! 쒜에엑! 쒜에엑!

저들 열 명은 한 몸이다. 허공에 솟구치는 모습, 검을 쳐 내는 동작, 한쪽 무릎을 굽힌 모습까지 판에 박은 듯이 똑같다. 검을 쏟아 내는 호흡까지 일치한다.

‘십검분개(十劍分開)!’

서리가헌은 저들의 검진(劍陣)을 알아봤다.

나무 위, 절벽, 바위 위, 담장, 지붕 위…… 이런 높은 위치에서 아래로 뛰어내리면서 내리긋는 검진, 합격술(合擊術)이다. 위에서 밑으로 떨어지는 힘에 내리치는 힘을 더하고 거기에 전신 진기를 합일시킨다.

열 명이 일제히 내리치는 검이 한 곳에 집중된다.

저들은 처음에는 쌀가마니를 쪼갰을 것이다. 열 명이 동시에 열 토막으로 갈라내야 한다. 쌀가마니를 쪼개면 물 양동이, 그다음은 호박, 그리고 사과를 가를 때까지 수련한다.

허공에서 열 명이 일제히 검을 쳐 내는데, 사과가 과도로 잘라 낸 것처럼 정확히 열 조각으로 쪼개진다.

여기까지가 일차 수련이다.

이차 수련은 움직이는 물체가 대상이 된다.

목인(木人)을 밧줄에 묶어서 잡아끈다. 어디로 잡아당길지 모르기 때문에 허공에서 방향 전환을 해야 한다. 열 명이 일제히 호흡을 맞춰서 타격 위치를 잡는다.

목인에 능숙해지면 살아 있는 짐승으로 수련한다. 고양이나 쥐, 닭, 비둘기가 대상이 된다.

십검분개는 천하 오대 검진 중 하나다.

‘좋군.’

서리가헌은 만족했다.

이들의 움직임을 살펴보니 충분히 훈련되어 있다.

‘일홀도를 써도 되겠어.’

스릉!

서리가헌은 단검을 집어넣고 허리에 찬 칼을 풀어냈다. 그리고 좁은 공간을 재빨리 뛰었다.

앞으로 치달린 것이 아니다. 저들처럼, 저들이 구성한 검진 안에서 움직였다. 검진 밖으로 벗어나려는 것이 일반적인 움직임일 테지만, 서리가헌은 안에서 빙글빙글 맴돌았다.

쒯! 쒯! 쒜에엑!

손에 든 칼이 위로 번쩍 쳐들렸다.

쫘쫘쫘쫙!

일탄십검, 밝은 광채 한 줄기가 갑자기 열 개로 쭉 불어났다. 거대한 칼이 하늘로 솟구친다. 칼 열 자루가 검사 열 명을 향해서 쏘아져 간다.

내리꽂히던 자들이 깜짝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바바바바박!

일탄십검은 검수 네 명을 피투성이로 만들었다. 다리가 베이고, 옆구리가 베이고, 머리가 베었다.

스스스스슷!

서리가헌은 몇 명을 베어 낸 후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 맴돌았다. 매우 빠르게 휘돌았다.

보통이라면 서리가헌처럼 치달으면 상당히 지친다. 빗살처럼 움직이면서 칼을 쳐 내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서리가헌은 이 모든 것을 매우 자연스럽게 해낸다.

서리가헌은 지치지 않았다. 계속해서 달리고 또 달렸다.

쒯! 쒜에엑! 쒜엑!

일탄십검이 연속해서 세 번이나 허공을 후려쳤다.

칼날 서른 자루가 검수들을 향해 뻗쳐 나갔다.

“악!”

“크윽!”

비명이 거칠게 터졌다.

천하 오대 검진 중 하나인 십검분개가 순식간에 무너졌다.

십검분개가 펼쳐진 후, 단 사 합!

검진을 형성한 열 명이 전개한 검은 단 일 초!

서리가헌은 저들에게 두 번째 검초를 전개할 여유조차 주지 않았다. 저들이 일 초를 펼치는 동안에 그는 일탄십검을 네 번이나 쏟아 냈다.

열 명 중 땅에 내려서기 전에 절명한 자가 여섯 명이다. 땅을 밟기는 했지만, 꿋꿋이 서지 못하고 내던져진 개구리처럼 무너진 자가 네 명이다.

휘릭! 파라락!

서리가헌은 칼을 휘둘러서 칼에 묻은 피를 털어 냈다.

복면을 쓰고 칠흑같이 검은 흑의를 입은 자들, 그들은 서리가헌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차분하게 기다렸다.

도주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서리가헌이 사납지만, 자신들에게는 상대가 안 된다는 자신을 가지고 있었다.

스읏! 슷! 슷!

서리가헌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흑의인 앞으로 미끄러지듯 흘러갔다.

“네놈들이 누군지 더럽게 궁금한데, 묻는다고 가르쳐 줄 거 같지도 않고. 그래도 물어볼까? 네놈들 누구야?”

흑의인들은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스슷! 슷!

흑의인들이 먼저 검을 들어 올렸다.

“묘해. 이거 아주 묘해.”

서리가헌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웃었다.

“똑같은 옷을 입고 같은 검을 들고…… 너희 그 검, 한 사람이 만들었나? 무게, 길이, 검신의 넓이가 모두 같지? 같은 검이야. 서로 바꿔서 들어도 아무 지장이 없을 거야. 그런데…… 묘한 게 있어. 너희 안쪽에 있는 두 놈, 그리고 바깥쪽에 있는 두 놈. 안쪽과 바깥쪽이 검이 달라. 왜 이럴까?”

서리가헌이 눈살을 좁혔다.

검이 다르다는 말은 검기가 다르다는 말이다. 두 명씩 두 개조로 구성되었다는 말이다. 또 이들이 사용하는 검의 성질이 완전히 다르다는 뜻도 된다.

마도 검공을 수련한 사람과 도문 검공을 수련한 사람을 세워 놓았을 때처럼 검법이 현격히 차이가 난다.

이런 경우, 검이 다르다고 말한다.

“너희, 벙어리지? 이것도 말하지는 않을 것이고…… 나도 뭐 굳이 깊게 알 것까지는 없어. 베어 버리면 그만이니까. 어이, 벙어리들! 시작해 볼까?”

스읏!

서리가헌이 칼을 들어 올렸다.

네 명이 좌우로 쫙 넓게 분산했다. 부챗살처럼 활짝 펼쳐졌다.

‘정통!’

서리가헌은 네 명의 움직임에서 정통 검수의 검초를 읽었다.

이들은 사술이나 환술을 쓰지 않는다. 정통 검법, 그중에서도 빠른 검법을 구사한다. 여타의 변초를 일체 배제하고, 오직 빠름으로만 승부한다.

아걸이 이들을 잡은 것은 매우 당연하다.

빠름으로는 아걸을 상대할 수 없다. 아걸의 일홀도는 모든 공격을 반 치 차이로 흘려버린다. 소축십검이 전개한 잠기일력타까지도 반 치 차이로 흘려보냈다.

아마도 지상에서 가장 빠른 반응일 것이다.

순간적인 반응에 이어서 곧바로 터진 일격은 여지없이 심장을 부순다. 상대가 검을 휘두르는 동시에 동귀어진 수법으로 쳐 낸 칼이기에 피하기가 어렵다.

빠름으로 아걸을 잡을 수 있는 사람은 허도기뿐이다.

이들 무공은 아걸의 일홀도와 궤를 같이한다. 그러니 강한 것이 위에 선다. 아걸의 일홀도가 이들에게는 천적이다.

그러면 자신의 일탄십검은 어떨까?

‘해 보면 알겠지.’

타악! 탁! 탁! 탁탁! 탁탁탁! 타타타탁!

서리가헌은 앞에 선 두 명을 향해 달려들었다.

순간 좌우에 있던 두 명이 빗살처럼 달려들었다. 한 명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고, 한 명은 아래에서 위로 쳐올린다.

‘백인검(百忍劍)! 그럴 줄 알았어!’

서리가헌은 놀라지 않았다. 이미 이런 검법일 줄 예측하고 있었다.

백인검은 특정 검법을 일컫는 말이 아니다. 검법을 수련하는 방법을 말한다.

백번 참는다. 천 번 참는다. 만 번 참는다. 백인검의 백(百)은 숫자 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무한대를 뜻한다. 죽을힘을 다해서 참으라는 말이다.

내리치는 검? 이 자는 오직 내리치는 검초만 수련했다.

똑같은 동작을 수십 번, 수백 번, 수천 번 거듭했다. 내리치는 검식에 대해서만은 따라올 사람이 없을 정도로 깊게 수련했다. 그러다 보면 다른 움직임에도 능통해진다.

아이가 걸음마를 배울 때, 처음에는 일어서서 앞으로 걷는 법만 배운다. 옆으로 걷거나 뒤로 물러서는 법은 배우지 않는다. 오직 똑바로 일어서서 앞만 보고 걷는다. 그런데도 앞으로 걷는 것에 익숙해지면 다른 움직임은 저절로 일어난다.

한가지 동작만 집중적으로 연성한 끝에 만검(萬劍)으로 통하는 길을 여는 수련법이 백인검이다.

이들이 가장 자신이 있는 초식을 펼쳐 낼 때, 이 검은 무적이 된다.

흑의인이 강했던 것은 이런 이유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백인검이라면 서리가헌도 일가견이 있다.

쒯! 쒜에엑!

서리가헌은 좌우에서 덮치는 두 검을 무시하고 오직 전면만을 노려보면서 일탄십검을 쏘아 냈다.

꽈자자자작!

칼이 열 개로 쫙 불어났다.

그의 십 도는 모두 실초다. 열 군데를 찌르는 칼이 너무 빨라서 잔상이 지어지지 않은 것이다. 얼핏 보면 환상처럼 보이지만, 모두 진짜 칼이다.

앞에 서 있던 두 명도 즉시 마주쳐 왔다.

한 명은 좌에서 우로, 한 명은 우에서 좌로…… 서리가헌을 가르려고 달려든다.

깡! 까앙! 깡!

칼과 검이 부딪혔다.

앞에서 쳐오던 자의 검이 순식간에 종이나 과자처럼 부서져 나갔다. 그리고 칼날이 파고들었다. 그들의 목, 가슴, 등, 옆구리…… 전신을 사정없이 파헤치며 지나갔다.

서리가헌은 달음박질을 멈추고 뒤돌아섰다.

쿵! 쿵!

그제야 두 명이 쓰러졌다.

바깥쪽에서 서리가헌을 덮쳤던 두 명은 미처 신법을 따라잡지 못하고 허초를 흘렸다.

그들은 다소 당혹한 표정으로 서리가헌을 쳐다봤다.

빠름에서 상대가 안 된다. 서리가헌의 움직임은 극강의 빠름이다.

두 명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더니, 즉시 몸을 바싹 붙였다. 두 명이 한 명처럼 찰싹 달라붙었다.

어째서? 이런 모습에서는 공격하기가 더 불편한데?

다다닥! 다다다닥!

서리가헌이 달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느리게, 천천히 달려온다. 하지만 곧 전력을 다해서 달려온다. 이어서 신형이 흐릿할 정도로 빨라진다.

쒝! 파아아앗!

눈앞에서 일탄십검이 피어났다.

흑의 복면인들은 당황하지 않았다. 이미 예측했다는 듯 태연하게 검초를 뻗어 냈다.

그들이 전개하는 검초는 항상 똑같다. 위에서 아래로 내리치는 직하검, 아래에서 위로 쳐올리는 상충검…… 하지만 흑의인도 전력을 모두 쏟아 냈다.

빠악! 빠아아아악!

검이 허공을 긋는데 뼈 부러지는 소리가 울렸다. 흑의인은 분명히 검을 사용하는데, 아주 폭이 넓고 두께가 얇은 도끼가 내리쳐지는 것 같다.

검 흐르는 궤적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그려진다.

일탄십검과 같은 검이다. 너무 빨라서 잔상이 환상처럼 어른거린다.

까앙! 깡깡! 까아아아앙!

이번에도 칼과 검이 거칠게 부딪혔다.

복면인들의 검은 사정 없이 부서져 나갔다. 그리고 그들의 육신은 먼저 쓰러진 자들과 마찬가지로 피투성이가 되었다. 칼 맞은 육신이 발에 챈 돌멩이처럼 거칠게 나뒹굴었다.

“후우!”

서리가헌은 숨을 크게 토해 내며 칼을 거뒀다.

주륵! 주르륵! 주륵!

그제야 그의 몸에서도 피가 솟구쳤다. 가슴, 아랫배, 허벅지!

흑의인의 검이 그의 몸을 세 곳이나 찢어 놓았다.

“이 정도 검이면 상당한 수준인데. 야천 방주들이 맥없이 당했다고 해서 믿지 않았더니, 당할 만했군. 후후!”

서리가헌은 피식 웃었다.

그는 솟구치는 핏물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심한 상처는 아니다.

저벅! 저벅!

그는 흑의인들의 시신은 쳐다보지도 않고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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