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2화. 第七十三章 방해자(妨害者) (2)
서리형개는 길성(吉城)에 발을 디뎠다.
사형은 이미 농성에서 일을 벌였을 것이다. 걸음을 재촉했다면 허도까지 피바람이 몰아쳤을 수 있다.
흑의 복면인은 무공이 상당히 높다. 야천 제일 검사라는 흑수혈검을 죽음 직전까지 몰아넣은 검의 달인들이다. 하지만 사형이 작심하고 칼을 쓰면 살아남지 못한다.
그것은 이쪽도 마찬가지다.
일홀도 칼을 든 놈들이 진심으로 칼을 들면 상대가 누구이든 모조리 쓸려 나간다.
스슷!
서리형개는 매우 조심해서 장원으로 스며들었다.
용마표국(龍馬鏢局)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표두는 물론이고 표사까지 무공이 뛰어나다.
물론 서리형개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처음에는 정문부터 치고 들어가서 가로막는 놈들은 모조리 베어 버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생각을 바꿨다. 애꿎은 자들까지 죽일 필요가 없다.
무엇보다도 십육파혈산에 중독된 것이 치명타다.
잠력을 끌어내기는 했지만, 독성이 의외로 강했다. 움직이는 데는 지장이 없어도 진기가 거의 절반이나 막혔다. 그러다 보니 초식을 구사해도 형편없이 끊긴다.
사형은 그런 몸이니 싸우지 말라고 한다.
그럴 수가 없다. 자존심 상하지 않나.
누구 맘대로 행동을 조정하려고 들어. 사형이면 사형이지 왜 앞을 가로막아. 건방지게.
스스스슷!
서리형개는 매우 은밀하게 표국 안으로 스며들어 갔다.
흑의 복면인은 표국 안쪽에 있다.
세상은 복면인들이 사람이 번잡하게 들락거리는 표국에 몸을 숨기고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이곳에 흑의 복면인들이 있다.
야천 간자들이 이곳에 있을 것이라고 적어 왔기 때문에 틀림없이 있다고 확신한다.
이들은 아걸이 자신들을 치고 있어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럴 수밖에. 아걸은 오음산으로 향하면서 칼을 쓴다. 길성 용마표국은 오음산 방향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지역적으로 뚝 떨어져 있어서 안심해도 된다.
아걸이 자신들을 치기 위해서 올 리는 절대 없다.
이 말을 달리 들으면 이들이 꽤 방심하고 있다는 말로도 바꿔서 말할 수 있다.
‘너희는 오늘 죽어.’
스스스스슷!
서리형개는 서둘지 않고 천천히, 천천히 안으로 파고들었다.
척척! 척! 척!
눈앞에 복면을 쓴 흑의인들이 나타났다.
사실, 서리형개는 이들에게 발각되지 않고 더 안으로 스며들 수 있었다. 그러면 복면인들의 뒤통수를 칠 수 있게 된다. 시도했다면…… 암살도 가능했다.
아니다. 암살은 일홀도 살법이 아니다.
표국 무인들이 끼어들 수 없는 곳이라면 굳이 숨어서 움직일 필요가 없다.
그렇다. 서리형개는 표국 심처(深處)에 도달한 후, 스스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뿐만이 아니라 저들이 당장 자각하게끔 강한 살기를 쏘아 냈다.
복면인이 나타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후후! 네놈들이군. 야천을 쑥밭으로 만든 놈들.”
스릉!
서리형개가 칼을 뽑았다.
순간 복면인들은 서로를 쳐다봤다.
야심한 밤에 불쑥 나타난 자, 무엇보다도 표국 안쪽으로 자신들을 찾아온 자……. 자신들이 누구인지 알면서도 일부러 찾아오기에 대단한 고수인 줄 알았더니, 이건 한 손으로 싸워도 이길 수 있는 자이지 않나.
무슨 놈의 칼이 이렇게 느리고 힘이 없어.
복면인들은 상수와 하수를 구분할 줄 안다. 긴장할 상대와 당장 꺾어 버릴 상대도 구분한다. 그런 그들의 안목으로 봤을 때, 방문객은 우습게 보인다.
서리형개는 복면인들과는 다른 의미로 인상을 찡그렸다.
진기를 절반쯤 일으키지 못해도 이들 정도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부딪쳐 보니 아니다. 잘못 판단했다. 이들은 경시하지 못할 고수다.
‘세상에 쉬운 일이 없다니까.’
서리형개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막아놓았던 십육 혈을 풀었다.
툭! 툭! 툭! 툭……!
십육파혈산에 무너졌던 혈에서 생생한 진기가 감돌았다. 경혈 주변에 흩어져 있던 힘들을 모두 모아서 제대로 된 혈로 재건되었다. 서리형개만의 잠기일력타다.
이렇게 생성된 경혈은 단 한 번만 사용된다.
화염도를 쏟아 내고 나면 경혈이 무너질 것이고, 곧 극심한 복통이 일어날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십육파혈산이 제대로 작용해서 진기를 절반쯤 거둬간다.
방금까지는 그가 자진해서 진기를 숨겼지만, 화염도를 터트린 후에는 싫든 좋든 미약한 진기로 싸워야 한다.
‘이놈들, 절반의 진기로는 싸우지 못할 놈들이야. 그러면 화염도를 쓸 때 최대한 많이 쓰러트려야 해. 풋! 이것 역시 선택의 여지가 없군.’
츠읏! 츠으으읏!
복면인들이 일자로 늘어섰다.
서리형개는 이들의 싸움방식을 전해 들었다. 이인 일조로 합격하며, 백인검 방식의 검초를 사용한다고 한다.
바깥쪽 두 명은 수직검, 안쪽 두 명은 수평검.
이런 검초는 여러 번 무너졌다. 아걸에게 무너졌고, 사형에게도 무너졌을 것이다. 그런데도 또 같은 검초를 구사할까? 그러면 무너진다는 것을 느끼는데?
서리형개는 고요한 신색으로 칼을 들어 올렸다.
복면인들이 또 서로를 쳐다봤다.
‘이놈, 안 좋지?’
‘안 좋아. 정상이 아니야.’
서리형개는 암산 당한 모습을 전혀 흘리지 않았지만, 복면인들은 이미 눈치챘다. 독에 암산 당했다는 사실까지는 몰라도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아냈다.
쒯! 쒜에엑!
바깥쪽에 있던 두 명이 먼저 치달려 왔다.
같은 방식으로 싸운다. 이들은 다른 방식으로 싸우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이것이 백인검의 단점. 안 되면 돌아가야 하는데, 돌아가는 방법을 몰라.’
복면인들은 빨리 끝낼 심산인지 네 명이 일시에 덮쳐들었다. 아니, 네 명이 합공하는 게 기본이다. 성질이 완전히 다른 두 검법이 동시에 덮쳐든다.
서리형개는 칼에 집중했다.
살을 내주는 한이 있더라도 일시에 뼈를 취해야 한다. 평소 같으면 이런 생각도 하지 않으련만……. 그 썩을 놈의 사형이란 놈이 제멋대로 독을 쓰는 바람에.
쒯! 쒜에엑!
수직검이 머리 위로 떨어졌다.
다른 때 같았으면 마주쳐 가도 충분할 거리다. 하지만 한 호흡 더 참는다.
쒜에엑!
수직검 두 자루에 이어서 수평검까지 몸에 틀어박히려고 한다.
서리형개는 그제야 칼을 휘둘렀다.
꿰에에엑!
그가 든 칼에서 돼지 멱 따는 소리가 울리는 듯했다. 실제로 강도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너희 모두 죽인다!’
가슴 밑바닥에서 흘러나온 분노가 강도에 실렸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분노가 거칠게 퍼져 나갔다.
쒜에엑! 퍽퍽! 퍽퍽퍽!
칼이 육신을 격타하는 소리가 장작 패듯이 크게 울렸다.
서리형개가 쓰는 칼은 매우 날카롭다. 그런데도 장작 패는 소리가 난다는 것은 그의 칼이 뼈를 후려치고 있다는 뜻이다. 뼈를 베는 것이 아니라 찍어 낸다.
“크윽!”
서리형개도 신음을 흘렸다.
일도에 세 명을 베어 냈다. 하지만 그래도 검 하나가 남았다. 수평으로 베어 오는 검……. 그 검까지 부러트리지는 못했다. 검이 그러잖아도 통증이 일어나는 아랫배를 긋고 지나갔다.
매우 심각한 중상이다.
스읏! 척! 척!
두 사람은 재빨리 자세를 가다듬었다.
서리형개도 상처를 보살필 틈이 없었다. 붉은 피가 꾸역꾸역 흘러내리는 아랫배를 한 손으로 꽉! 움켜잡고 칼을 들어서 복면인을 가리켰다. 하지만,
“끄윽!”
서리형개는 또다시 비명을 토해 냈다.
이번에는 검에 맞아서 아픈 것이 아니다. 검에 베인 통증 때문에 신음을 흘린 것도 아니다.
십육파혈산에 무너진 경혈이 진기를 걸러낸다. 갑자기 진기가 절반 이하로 뚝 떨어진다. 그러자 화염도에 맺힌 잔기(殘氣)가 역류해 들어왔다.
잔기는 어지간한 무인도 느끼지 못한다. 칼께나 휘둘렀다는 무인도 검에 맺힌 잔기를 감지하지 못한다. 하지만 서리형개 같은 사람은 아주 민감하게 느낀다.
칼과 동화되어서 칼이 자신이고 자신이 칼인 지경, 도신일체(刀身一體)를 이루면 자신이 일으키는 진기보다 잔기가 더 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안다.
지금이 바로 그런 때다.
“크윽!”
서리형개는 잔기에 떠밀려서 휘청휘청 뒤로 물러섰다.
그 순간 복면인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달려들었다.
복면인은 앞선 결전에서 서리형개가 자신보다 훨씬 상위에 있는 고수라는 사실을 알았다.
눈앞에서 칼이 불길로 변했다. 칼에 깃든 화기(火氣)를 느낀 것인데, 실제로 일어난 불길보다도 훨씬 극강했다. 살에 닿기만 해도 화상을 입을 것처럼 보였다.
이글거리는 불길이 화르르 타올랐다.
그 순간, 두 명이 불벼락을 맞고 나가떨어졌다. 칼에 맞기도 전에 화기에 타 죽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다시 휘둘려진 검에 다른 한 명도 불타버렸다.
그 칼에 힘이 조금만 더 깃들었어도 자신마저 베였을 것이다.
‘화염도!’
중원에 이런 칼을 쓰는 자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풍도곡 칼 귀신 중 한 명이 화염도를 쓴다. 풍도곡에 들어갈 때만 해도 매우 빠른 칼에 불과했다. 연환도(連環刀) 중에서는 압권인 정도?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화기를 머금기 시작했다.
이 자가 화염도를 구사한다는 서리형개인 것 같다.
사실이 그렇다면 상대가 되지 않는다. 일홀도는 천하제일을 바라보는 칼이다. 이 자는 성검문에 허도기가 있어서 풍도곡에 틀어박혔지, 그렇지 않았다면 진작 중원을 떠돌아다니면서 수많은 무인을 죽였을 것이다.
이 자가 정신을 수습하기 전에, 몸을 추스르기 전에 쳐 내야 한다.
쒯!
복면인은 더는 완숙할 수 없는 검초를 쏟아냈다.
수평검을 쓸 때는 한쪽 팔만 사용한다. 다른 팔은 움직이지 않도록 등 뒤에 댄다. 한쪽 팔만 사용해서 원하는 검초를 얻어 낼 때까지 수련한다.
외검에 능숙한 사람이 두 팔을 사용하면 속도는 배가 된다.
검을 든 손은 오른손이지만 왼팔도 옆으로 활짝 벌렸다. 가위 치기를 하듯이 몸 앞에서 왼팔과 오른팔이 교차했다. 오른팔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왼팔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휘둘러졌다.
교차하는 힘이 약간이라도 더 강한 힘을 부여한다.
쒜에엑! 파아악!
‘쳤다!’
복면인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눈앞에서 피가 솟구쳤다. 그 전에 짜릿한 손맛이 울렸다. 검에 육신이 걸렸을 때의 감촉이다. 살이 베어지고 뼈가 갈라지는 감각까지 여실히 느낀다.
파아아앗!
붉은 핏물이 눈앞에서 확 솟구쳤다, 순간,
푸욱!
느닷없이…… 허공에 흩어지는 핏방울 사이를 뚫고 불쑥 칼 한 자루가 들어섰다. 그리고 그 칼날은 어느새 자신의 가슴을 슬며시 뚫고 들어섰다.
“컥!”
복면인은 신음을 흘렸다.
어찌 된 것인가? 방금 살을 베었는데, 뼈까지 갈라 냈는데…… 왜 자신이 당했나?
복면인은 땅에 쓰러진 핏덩어리를 봤다.
자신이 베어낸 살과 뼈……. 흑의에 복면을 쓴 자가 쓰러져 있다. 머리가 갈라진 것은 화염도를 맞았기 때문이고, 복부가 갈라진 것은 수평검에 맞아서다.
서리형개가 동료의 시신을 발로 차올렸다. 순간적으로 동료의 시신과 서리형개가 겹쳐 보였다.
복면인은 서리형개가 발길질하는 것도 보지 못했다. 눈앞에 시신이 나타난 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야말로 한순간의 움직임, 엄청난 반사신경이다.
‘빨라!’
순간, 쓱 칼이 뽑혀 나갔다. 그리고 복면인의 가슴에서도 어김없이 붉은 피가 솟구쳤다.
서리형개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녹선마황을 꺼내서 상처에 붙였다.
그리고 축 늘어졌다.
한동안 움직이지 못할 것 같다.
누군가가 싸움이 일어난 걸 알고 장원 안쪽으로 들어선다면 상당히 피곤해진다. 그나마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싸움이 빨리 끝났다는 것이다.
복면인들은 죽는 순간에도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헛바람 정도는 토해냈지만, 세상이 떠나가라 고함을 토해내지는 않았다. 또 병기가 부딪치지도 않았다.
이들의 백인검은 완벽하다.
‘한심하네. 내가 이런 놈들에게 쩔쩔맬 줄은. 이게 무슨 꼴이야. 배까지 갈라지고.’
서리형개는 눈을 감고 녹선마황이 상처를 갉아 먹도록 기다렸다.
베어진 살이 붙어야 한다. 그리고 그동안 해야 할 일도 있다.
툭! 투툭!
서리형개는 힘없는 손을 들어서 십육 경혈을 점혈해 갔다.
또다시 있을 싸움에 대비해서 경혈을 집어 놓는다.
정말 빌어먹을 사형이다. 왜 괜한 짓을 해 가지고 사람을 이토록 골탕 먹이나. 덕분에 이게…… 너무 아프다. 식은땀이 비 오듯 줄줄 흘러내린다.
검을 맞은 상처보다 창자가 꼬이는 고통이 더 극심하다.
“이 원수는 꼭 갚아 주겠어. 사형. 훗훗!”
서리형개는 신음이 흘러나오려는 것을 웃음으로 대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