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일홀도-365화 (365/600)

#365화. 第七十三章 방해자(妨害者) (5)

아걸은 큰 방갓을 썼다.

야천 무인들에게 큰 방갓은 죽음의 상징이다. 방갓 쓴 사람이 다가오면 살인이 벌어진다.

제팔방을 공격할 때 특별히 눈에 띄는 방갓을 썼다.

일종의 상징적인 의미도 있다. 어설픈 무공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칼이니 알아서 물러서라. 큰 방갓을 쓴 사내가 어떤 일을 벌였는지 알고 있지 않나.

방갓 하나를 씀으로써 애꿎은 희생을 피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써야겠지.

허리에는 대도 대신에 반철도를 찼다.

복색은 옛날과 같지만, 칼은 다르다. 위로 향한 칼과 밑으로 향하는 칼의 의미를 벗어났다. 일홀도 역시 여느 병기와 마찬가지로 칼에 불과하다. 의미를 둘 필요가 없다.

저벅! 저벅!

아걸이 내딛는 발걸음 소리가 무겁게 울렸다.

“흠!”

아걸은 팔방 정문을 보면서 눈을 가늘게 좁혔다.

수문 무인이 없다. 최소한 두세 명 정도는 정문을 지키고 있어야 하는데, 완전히 텅 비었다. 매복인가? 아니다. 아침만 해도 지키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에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버렸다.

큰 방갓만 보면 다가오는 사람이 누군지 안다. 특히, 야구가 스며들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 명부판관이 복면인들을, 마유 마인들을 척살했다.

- 명부판관이 마유 마인들을 죽이기 위해서 이곳으로 오고 있다. 아! 명부판관은 혈도비자이기도 하다. 아는 사람이 많겠지만,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봐.

이 말은 대단한 파괴력을 지녔다.

제팔방을 피로 물들인 사람이 명부판관이라는 사실을 아는 순간, 야천 무인들은 저항할 생각도 의지도 모두 잃었다.

명부판관이 누구인가? 성검문에 정정당당히 도전해서 혈무대 역사상 처음으로 승리를 쟁취한 인물이다. 소축십검을 물리쳤을 뿐만이 아니라 두 번째 비무에서도 이겼다.

그런 무인을 무슨 수로 감당하나. 한낱 수문 무인이.

또 사실 저항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능력 자체가 닿지 않지만, 닿는다고 해도 몸을 빼냈을 것이다. 명부판관과는 싸울 이유가 전혀 없으니까.

제오방 무인들은 야천 무인이다. 마유 마인이 아니다.

그들은 마유 마인들을 위해서 희생양이 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복면인들이 마유 마인이라는 사실을 안 순간, 그들을 지키고자 하는 이유가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오히려 명부판관이 마유 마인들을 척살하면 야천이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올 수도 있는, 희망적인 사단이었다.

구룡은 죽었다. 구룡을 받치고 있던 일선 무인들도 이미 사라지고 없다. 하지만 누군가는 다시 나타날 것이다. 야천이 이대로 무너질 리 있나.

저벅! 저벅!

아걸은 정문을 지나쳤다.

그를 가로막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수문 무인은 없지만, 장원 안에는 많은 사람이 있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사전에 약조라도 한 듯이 아걸이 모습을 보이자마자 슬그머니 담벼락 쪽으로 붙어서 몸을 피했다.

싸울 의사가 없다는 뜻을 확실히 보여 주었다.

“어디 있나?”

지나가는 무인에게 물었다.

“중문만 들어서시면 연무장이 나옵니다. 거기 있습니다. 오시는 걸 알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담에 찰싹 달라붙어서 움직이던 무인이 즉시 답했다.

초면에 서로가 두서없는 말이지만, 목적을 알고 있으니 이런 대화가 가능한 것이다.

아걸은 야천 무인이 말한 중문을 열었다.

삐걱!

문이 열리자 넓은 연무장이 나타났다. 그리고 연무장 한쪽에 앉아 있는 복면인들이 보였다.

‘일곱?’

이상하다. 숫자가 다르다.

아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곱 명은 짝이 맞지 않는다. 저들은 두 명이 한 조를 이뤄서 움직인다. 직하검 두 명, 상충검 두 명…… 네 명이 기본이다.

지금까지 항상 그래왔다.

여기에 인원을 더 보탠다면 두 명이나 네 명이 보태져야 한다. 항상 짝수로 움직인다. 세 명이 붙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네 명 중 한 명이 죽었나? 그럴 수도 있고……

‘공격 방식이 달라졌을 수도 있지.’

네 명 중 한 명이 죽어서 세 명이 붙었다기보다는 공격 방식이 달라졌을 가능성이 더 크다.

네 명이 한 조가 되어서 공격하는 방식은 이미 깨졌다.

아걸이 깼다. 서리가헌이 깼고, 서리형개가 깼다. 중원 무림에서 몇몇 무인에게는 이 방식이 통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중 한 명이 온다는 전갈을 받았다. 어떻게 할 것인가? 공격 방식을 다르게 가져가야 하지 않겠나.

저벅! 저벅!

아걸은 그들에게 걸어갔다.

복면인들도 일어섰다. 당황하지는 않는다. 태연히 일어나서 검을 뽑았다.

네 명은 예전과 같다.

안쪽에 있는 두 명은 상충검을 쓸 것이고 바깥쪽에 있는 두 명은 직하검을 쓸 것이다.

두 명은 나병 환자고 두 명은 수포 환자다. 다른 세 명은 어떤 질병을 안고 있나?

세 명이 재빨리 움직여서 아걸의 퇴로를 막았다. 아니 퇴로를 막았다기보다는 배후를 막아섰다.

전면은 네 명, 뒤에 세 명이다.

‘그런가.’

아걸을 피식 웃었다.

이들 일곱 명과 마주 선 순간, 아걸은 아주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예전에도 겪었던 현상인데, 신기하게도 이들의 움직임이 장난처럼 환히 보인다.

이들이 굼벵이처럼 느리게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정반대로 매우 빠르다. 하지만 이들이 움직이기 전에 어디로 움직일지, 언제 움직일지…… 모든 행동이 읽힌다.

아걸은 이들 개개인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도 짐작한다.

이들은 모두 마유 마인이고, 같은 수련을 거쳤다. 하지만 이들 사이에도 분명히 고하가 있다. 가장 강한 자와 가장 약한 자의 차이는 종이 한 장, 그런데 그 차이가 읽힌다.

복면인들은 검을 들고 걸어오기만 했다. 걸어오는 동안에는 어떤 초식도 펼치지 않았다. 당연하다. 서로 간의 거리가 가까워서 굳이 신법을 펼칠 이유도 없었다.

아걸은 단순히 걷는 간단한 움직임만으로 복면인들의 무공 수위를 읽은 것이다.

그럼 이제 이들을 어떻게 공격할까?

어떤 초식을 구사해서 어떤 식으로 상대할까 하는 고민이 아니다. 이들을 죽여야 할지 아니면 제 분수를 알게 해 주고 손을 뗄지 선택할 수가 있다.

일격에 즉사시킬지 아니면 희롱하다 죽일지 결정할 수 있다.

자신은 상위에 있는 포식자다. 이들은 하위에 있는 초식 동물이다. 본인들은 하위인 줄 모르겠지만. 양 일곱 마리가 호랑이를 에워싸고 달려드는 것과 같다.

상대와 마주 서자마자 이런 느낌이 확 일어난다는 것은 매우 기이한 경험이었다.

‘일격에 죽이자!’

아걸은 가장 강력한 살법을 떠올렸다.

이들을 죽이는 데는 굳이 신경 쓸 필요도 없지만, 지금은 가장 강력하게 타격을 가해야 한다. 네 명이 아니라 일곱 명이 늘어서 있는 것도 어쩌면 다행인지 모른다. 자신의 잔인함 아니면 강함……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도 좋은데 모든 시선이 이 싸움에 집중되도록 타격해야 한다.

꾸욱!

아걸은 반철도를 잡았다. 그리고 눈을 살며시 감았다.

그러자 바깥쪽에 있던 두 명이 좌우로 쫙 흩어지면서 냅다 검초를 터트렸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위에서 아래로 터지는 직하검이다.

의미는 없지만…… 왼쪽에서 공격하는 자가 오른쪽 마인보다 반 초 정도 강하다.

안쪽에 있는 두 명도 쾌속하게 달려들었다.

쒯! 쒜에엑!

네 명이 쏟아내는 검풍이 회오리바람을 일으켰다. 파공음이 천지를 찢었다.

스스슷!

아걸은 파공음 속에서 아주 기묘한 소리를 들었다.

뱀이 기어 오는 듯 매우 은밀하고 답답한 소리, 좋았던 기분도 확 나빠지는 소리다.

뒤쪽을 막은 세 명, 그들이 동시에 공격했다.

귀에 선 자들은 일절 소리를 흘리지 않는다. 암검(暗劍)!

살수들이 쓰는 어둠의 검이다. 아니 이들이 전개하는 검은 어둠의 검을 넘어선다.

조용히 다가와서 팍! 치고 사라진다. 그런 검이다.

아걸은 암검이 터질 줄은 몰랐다. 상대방이 펼치는 초식까지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일곱 명이 동시에 공격하리라는 것은 알았다.

진기를 일으켜서 살핀다거나, 몰안으로 집중해서 본다거나, 오감으로 감지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알았다.

본인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데, 상대방의 움직임이 저절로 읽혔다.

쒜에엑!

반철도를 쳐 냈다. 삼십대 문주의 회선도가 장난처럼 펼쳐졌다.

몸이 빙글 휘돌았다. 동시에 직하검과 상충검을 갈라냈다. 다시 빙글 돌았다. 이번에는 십팔대 문주의 사도진파! 반철도가 파라락! 떨렸다.

암검 두 개가 쩍 갈라졌다.

아걸은 손을 놓았다가 다시 잡았다. 십구대 문주의 역수참도로 반철도를 쥔 후, 등 뒤에서 다가오는 직하검과 상충검을 무 베듯 간단히 갈라냈다.

왼쪽으로 반 바퀴 돌고, 오른쪽으로 다시 반 바퀴 도는 짧은 순간에 이미 여섯 명이 결딴났다.

이 짧은 순간에 삼 도가 터졌고, 각 도에 두 명씩 베어나갔다.

아걸은 다시 돌아섰다.

쒯!

암검이 바짝 다가왔다.

복면인은 말도 못 하게 빠르다. 하지만 그가 일 검을 쳐내는 동안 아걸은 몸을 세 번이나 바꿨다. 탄식이 절로 터질 만큼 빠른 움직임이다.

푹!

십삼대 문주의 단도격타가 터졌다. 짧은 거리에서 정확하게 심장을 쪼갰다.

“훅!”

복면인의 입에서 신음인지 헛바람인지 모를 소리가 새어 나왔다. 본인들에게 비명을 지르지 않겠다는 의지가 있었고, 아걸의 칼이 비명을 허락하지 않은 면도 있다.

쿵!

마유 마인들이 일제히 쓰러졌다.

칼을 맞은 부위와 시간은 각기 다르다. 하지만 쓰러지는 모습을 보면 일시에 맞은 것처럼 보인다.

머리가 갈라진 자, 가슴이 벌어진 자, 심장이 찔린 자…… 상처는 한결같이 참혹하다. 상처만 봐도 ‘즉사’가 당장 생각날 정도로 치명적인 일격이다.

머리를 맞은 자는 힘센 역사가 커다란 도끼로 전력을 다해서 내리친 것 같다. 가슴이 베인 자는 갈라진 뼈가 드러나 보였다. 어린아이 주먹이 들어갈 정도로 살이 넓게 벌어졌다.

사방에서 핏물이 일제히 솟구쳤다.

휘릭!

아걸은 반철도를 휘둘러서 칼에 묻은 피를 털어 냈다.

“시신을 건드리지 마라.”

허공에 한 말이다.

“누군가는 내 칼을 알아볼 것이다. 그때까지 절대로 시신을 거두지 마라.”

아걸의 음성은 나직했다. 하지만 싸움을 지켜본 사람들은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모두 똑똑히 들었다.

아걸의 음성에는 진기가 실려 있다.

음성은 낮지만, 음정이 또박또박 귀에 틀어박힌다.

아무리 낮은 속삭임일지라도 큰 소리로 고함치는 것보다 더 명확히 들려온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절대 건드리지 않겠습니다.”

야천 무인이 즉시 답했다.

흥분에 들뜬 음성이다.

마유 마인들을 이렇게 죽이는 사람도 있구나. 복면인들은 방주도 죽이고, 오방 제일검도 죽였는데……. 그때보다 세 명이나 더 붙었는데, 명부판관에게는 일초지적에 불과하구나.

야천 무인들은 흥분했다.

말로 전해 듣는 것과 자신이 직접 본 것은 차이가 크다.

그들은 명부판관이 야천을 위해서 칼을 들어준 것에 대해 감사했다. 아걸의 뜻이 어디에 있든, 설혹 그것이 야천을 위한 게 아닐지라도 고마웠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야천은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자들이 마유 마인들이라며? 명부판관이 그들 일곱 명을 눈 깜짝할 사이에 싹 죽여 버렸어.”

“칼을 맞대지도 않았다니까. 그냥 덤벼들다가 제풀에 푹푹 쓰러지더라고. 이건 상대가 안 돼. 상대가.”

소문이 날개를 타고 멀리 퍼져 나갔다.

아예 작심하고 소문을 내는 사람들이 있어서, 어떤 소문보다도 강렬하게 퍼져 나갔다.

서리가헌이나 서리형개가 일으킨 살겁은 단박에 묻혀 버렸다.

복면인이 죽은 사건은 될 수 있으면 덮어 버리려고 시신마저 치워 버렸지만, 그럴 필요도 없이 완전히 묻혀 버렸다.

야천 간자들이나 흑화방에 신경 쓸 여력도 없었다.

아걸의 존재감은 단번에 부각되었다.

명부판관, 혈도비자의 명성이 중원을 쩌렁 울렸다. 아걸이 명부판관이라는 것, 또 혈도비자라는 사실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아걸은 가능한 모든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기를 바랐다. 그래야 허도기가 엉뚱한 생각을 하지 않고 오음산으로 온다. 그가 엉뚱한 생각을 하면 많은 사람이 죽는다.

허도기는 생각할 것이다.

아걸! 이놈을 죽이지 않고는 야천을 장악할 수 없겠어.

그런 생각을 했다면 성공한 것이다.

야천을 이용해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한다면 오음산 사건이 끝난 후에, 자신을 죽인 후에 하라.

이것이 허도기에게 보내는 전갈이다.

복면인들의 복수만 염려하는 것이 아니다. 허도기가 야천을 통해서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그것도 염려스러웠다.

전보영이나 대장군에게는 시간이 필요하다.

허도기의 시선이 자신에게 꽂힌다면,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아걸이라는 사람을 주시한다면 서리가헌의 숨은 뜻을 간파할 만한 시간을 벌 수 있다.

아걸은 큰 방갓을 쓰고 대로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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