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3화. 第七十五章 암중사(暗中事) (3)
오음산 입구에는 대불사(大佛寺)라는 큰 절이 있다.
승려가 백여 명에 이르는 대사찰이라서 일 년 내내 향화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오음산 입구부터 사 리 정도는 마차도 다닐 수 있을 정도로 길이 잘 닦여 있다. 길가에는 가로수도 잘 정비되어 있고, 불교용품을 파는 잡상인도 꽤 많다.
아걸은 길을 따라서 걸었다.
그에게 말을 거는 상인은 없었다. 보통 산과일 즙액이나 야채, 감자 등을 강매하다시피 팔곤 하는데, 아걸에게는 말도 붙이지 않았다. 아니, 아걸이 가까이 다가서려는 시늉만 해도 멀찌감치 물러서서 대화를 피했다.
모두가 아걸이 누군지 안다.
“물 좀…….”
물 한 잔을 얻어 마시려고 했다. 하지만 상인은 어느새 뒤로 물러서서 대화를 피했다.
‘누가 두려운지 모르겠네. 내가 두려운 건지, 오음산 마인이 두려운 것인지.’
아걸은 일부러 바가지로 물을 퍼서 마셨다.
상인은 십여 걸음 떨어진 곳에서 멀뚱멀뚱 아걸을 지켜보기만 했다. 아걸이 물이 아니라 산과일 즙액을 마셔도 달려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걸은 바가지를 놓고 길을 걸었다.
“휴우!”
등 뒤에서 가는 한숨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아걸이 손댔던 바가지나 물통을 치우지는 않았다.
오음산 마인은 아무 상관이 없다. 아걸을 도와주었다는 후환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그런 마음이 일 푼이라도 있었다면 아걸이 손댄 모든 물건을 당장 치웠을 것이다. 그래야 나중에라도 변명할 수 있으니까.
저들은 단지 아걸이 두려운 것이다.
아걸이 두렵다기보다는 싸움을 하는 무인이 두려운 게다.
괜찮다. 자신은 얼마든지 두려워해도 무방하다. 오음산 마인들이 민초를 괴롭히는 것 같지는 않으니까, 그럼 됐다고 생각한다. 이 싸움이 저들에게 풍파가 튈까 봐 걱정했는데.
대불사를 향해서 걷다 보면 일주문(一柱門) 옆으로 작은 소로가 보인다.
오음산 산정으로 향하는 등산로다.
이곳에서부터는 길이 매우 좁아진다. 두어 명 정도가 나란히 걸을 수 있는 폭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오간 길이라서 산길치고는 잘 닦여 있다.
길을 잃는다거나 수림을 헤치고 나갈 필요는 없다.
‘이 정도면 됐지 뭘 바라.’
아걸은 산길을 따라서 오음산 정상을 향해 걸어갔다.
아걸은 널찍한 바위까지 단숨에 올라갔다.
인근 마을 사람들은 너럭바위라고 부르는 곳인데, 사오십 명 정도는 편히 앉아서 쉴 수 있을 만큼 평평하고 넓은 바위가 속 시원하게 드러났다.
너럭바위에서 보니 주위가 한눈에 들어온다.
물론 대불사를 비롯해서 산 앞쪽만 보인다. 그가 가고자 하는 계곡 쪽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실질적으로 오음산 산행은 너럭바위부터 시작한다.
오른쪽 길은 산 정상으로 가는 길이다. 왼쪽에 있는 작은 길은 깊은 계곡으로 간다.
‘음!’
아걸은 신음을 흘리면서 반철도를 꽉 잡았다.
너럭바위에 올라서니 어디로 가야 할지 단번에 느껴졌다.
물론 산등성이 길은 아니다. 원래부터 그쪽으로는 갈 생각도 없었다. 계곡으로 갈 생각이었는데…… 망설일 필요가 전혀 없다. 왼쪽 길로 가야 한다.
아랫길로 가면 구절 산중으로 접어든다. 구불구불 이어진 깊은 계곡이 기다린다.
이 길이 맞나? 맞다.
왼쪽 산길 쪽에서 음산한 살기가 무럭무럭 피어나고 있다. 아걸 같은 사람은 절대 놓치지 않는 뜨거운 살기가 일어난다. 마치 수증기처럼 아른거린다.
많은 무인이 매복해 있다.
아마도 흑화방을 몰살시켰다는 바로 그 마유 마인들이 아닐까 싶다. 아니, 틀림없이 그들이다.
산등성이 쪽은 어떤 살기도 엿보이지 않는다.
저들도 아걸이 산등성이로 올라설 것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은 듯하다.
그러면 저들의 예상을 벗어나서 산등성이로 올라가 볼까?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이야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테니까. 일단 매복은 피하고 보는 것이 상책인데.
아걸은 고개를 내둘렀다.
돌아가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어느 쪽으로 움직이든 자신은 이 살기와 부딪혀야 한다. 자신이 움직이는 쪽으로 이 살기도 움직일 터이다. 한시도 눈길을 떼지 않고 지켜볼 것이다.
‘기왕이면 나도 편한 길로.’
아걸은 왼쪽 숲길로 접어들었다.
쒯! 쒜에엑!
나무에서 벼락같이 검이 떨어졌다.
아걸은 허리를 숙여 검을 피해 냈다. 단지 허리만 숙인 건 아니다. 다른 사람 눈에는 허리만 숙인 것처럼 보였겠지만 그는 이미 반철도를 휘둘렀다.
팟! 퍼억!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나무 위에서 떨어져 내린 자는 피를 한 사발이나 뿜어내며 나가떨어졌다.
저벅! 저벅!
아걸은 쓰러진 자를 쳐다보지도 않고 걸어갔다.
칼이 몸에 닿는 순간 상대가 절명할 것을 알았다.
손에 사정을 담지 않고 칼을 쳐 내기도 했지만, 반철도가 살을 가르는 순간에 어느 부위를, 어느 정도 깊이로 파고들었는지 정확히 감지해 냈다.
살지 못한다!
치는 순간에 상대의 상태를 헤아렸다.
쒜에엑! 쒜에엑!
바위 사이에서 느닷없이 장창이 튀어나왔다.
아걸은 일도의 장창을 잘라 내고, 이 도에 상대방의 머리를 쳤다.
‘미숙해.’
아걸의 눈에는 온통 미숙한 자들의 몸부림만 보였다.
이들이 사용하는 무공은 하나같이 뛰어나다. 일체의 군더더기가 섞여 있지 않다. 직하검이나 상충검을 사용했던 마유 마인들처럼 이들도 지금 같은 일격을 실현하기 위해 수천 번, 수만 번 고련을 거듭했을 것이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도 아걸 눈에는 굉장히 미숙해 보였다.
가서 젖 좀 더 먹고 와라!
너무 형편없어 보이는 자들에게는 이런 식의 말을 던지면서 사정을 봐줄 수가 있다.
어차피 살려줘 봤자 다시 덤빌 텐데, 뭐하러 살려 주나. 기왕 뿌리 뽑을 것이면 죽이는 것이 낫지 않나. 원한 가진 사람은 살려 주는 게 아니다.
무림은 무척 잔인하다. 후환이 될 자는 살려 주지 않는다.
그런 점을 알면서도 실제로는 종종 적을 놓아준다. 비웃음, 비아냥도 내뱉는다. 조롱도 한다. 원수 맺은 자를 더욱 약 올려서 억하심정을 품게 만든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앞으로 십 년이든, 이십 년이든 몇백 년 동안 수련을 하더라도 내 상대가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런 미숙함이 이들의 무공에서 엿보인다.
너희는 내 상대가 안 돼!
단순한 느낌일 뿐이다. 그런 마음이 들어도 일홀도는 언제나 최선을 다한다.
허도기는 이런 느낌을 매우 자주 가질 것이다.
싸우는 상대마다 얕잡아 보일 것이니, 싸우는 맛도 재미도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 사람 중에는 자신도 포함되어 있다.
자신은 절정에 이른 일홀도라면서 자신 있게 떨쳐 냈지만…… 허도기 눈에는 어린애 장난질로 보였을 것이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넌 안 돼!
그런 느낌이 든다면 얼마든지 아량을 베풀 수 있다. 상대방을 무시하고 조롱할 수가 있으며,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보라고 목숨을 살려 줄 수도 있다.
상대방은 이를 악물고 덤비겠지만 그게 오히려 재밌는 거다.
그런데 그런 짓에도 한계가 있다. 같은 자가 두 번, 세 번 계속 달려들면 슬슬 지겨워진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는 ‘에휴! 인제 그만 정리해야겠다’ 하는 생각이 든다.
가지고 노는 장난감에 싫증 난 거다.
지금 허도기는 일홀도라는 장난감에 싫증을 내고 있다. 사실, 일홀도에 싫증 난 지는 꽤 오래되었다. 사부가 쓰러지면서 더는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그의 눈은 황궁을 보고 있다.
황궁을 보는 한 일홀도는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일홀도는 이미 무공이 아니다. 무공이라고 생각할 만한 가치가 없다. 적어도 허도기에게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하찮은 무공일 뿐이다.
‘사부님이 살아계실 때는 그래도 긴장했는데…… 어쩌면 독살한 걸 후회할지도 모르겠군.’
사부 이후, 제대로 된 일홀도가 나오지 않았다.
일홀도를 능가한 무공도 나타나지 않았다. 한마디로 더는 꺾을 자가 없다.
허도기가 무림을 떠나서 전장을 떠돈 게 이해된다.
어쩌면 허도기에게 사부는 평생 넘을 수 없는 적으로 각인되어 있을 수도 있다. 독에 중독된 자를 공격했으니 순수히 무공으로 제압했다고 할 수 없지 않나.
그러니 지금쯤은 사부를 살려 두었다가 겨뤄 보는 건데 하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요즘 들어서 아걸도 그런 마음이 일어난다.
싸우는 상대들이 모두 한 수 아래 하수들이다. 어떤 자도 팽팽한 긴장감을 불러오지 않는다.
허도기와 만나도 이런 마음이 가시지 않는다면…… 이길 수 있다!
‘괜찮아. 난 너희들이 이를 악물고 덤비면 아주 위험할 것이라는 걸 알아. 그래서 사정을 봐줄 수가 없어. 내가 곤란하면 안 되니까 가차 없이 베는 거야.’
쒯! 쒜에엑!
반철도가 허공을 휘저었다.
아걸은 달려드는 병기는 모두 꺾어 버렸다. ‘어쩔 수 없어서 죽인다’라는 말을 되뇌면서 손속에 힘을 실었다. 자꾸 느슨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한쪽은 바위, 한쪽은 벼랑이다.
쒯! 쒜에엑!
양쪽에서 파공음이 들렸다.
절벽 밑에서 검 한 자루가 불쑥 솟구쳤다. 바위 위에서도 검이 밑으로 흘러내렸다.
양쪽에서 직하검이 터졌다.
쒜에에에엑!
아걸은 구대문주의 환도, 십이살환도를 펼쳤다.
순간 절벽에서 솟구치던 검이 다시 아래도 떨어져 나갔다. 미처 아걸에게 닫기도 전에 힘을 잃고 뚝 떨어졌다.
바위에서 흘러내리던 검도 다시 튕겨 올라갔다. 아주 강한 충격을 받고 잠시 멈칫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위로 던져졌다. 누군가가 목덜미를 낚아채서 다시 던진 모양새다.
파아아악!
위로 던져진 자의 몸에서 핏물이 폭우처럼 쏟아졌다.
아걸은 피를 피해서 몸을 움츠리며 빠르게 자리를 피했다.
“이런 싸움은 너희에게 불리해. 길이 좁거든. 숨어 있기도 마땅치 않고, 공격하기도 불편해. 이런 곳에서는 기습을 가하는 게 아니야. 그저 지켜보는 장소이지.”
아걸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솔직히 이들의 공격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적어도 이들을 부리는 자는 지금 이런 상황이 될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계속 공격 명령을 내리는 것은 너무 무책임해 보인다.
수하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지 않나!
공격하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상대방에게 타격을 가하기 위해서인데, 지금 어떤 타격을 받고 있나? 옷깃조차 건드린 자가 없는데 무슨 타격인가.
힘을 빼기 위한 모습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나타나는 자마다 일 초에 도륙하고 있으니 진기 손실 같은 것도 생기지 않는다. 발걸음조차도 늦추지 못하고 있다.
저들은 오히려 계곡 안쪽에 무엇인가 보이지 말아야 할 것이 단단히 있다고 말해 준다.
어서 와라! 어서!
저들이 피를 흘리면 흘릴수록 아걸은 음산사마에 대한 궁금증이 증폭되었다.
도대체 무엇이 있기에 이토록 결사적으로 앞길을 막나.
스읏!
아걸은 조금 멀리 떨어진 곳을 쳐다봤다.
매복해 있는 자들이 꽤 많이 있다. 하지만 거리가 멀어서 습격을 가해 오지 못한다.
아걸은 일부러 쫓아 나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공격해 오는 자는 가차 없이 베었다. 한 사람에게 최대 두 번만 칼을 쓴다. 그 이상은 절대로 칼을 쳐 내지 않는다. 그런 마음으로 칼을 쓰고 있으니 잔인할 수밖에 없다.
저벅! 저벅!
아걸은 계속 계곡 안으로 파고 들어갔다.
너럭바위에서 사오 리 정도를 내려오면 계곡으로 들어가는 길이 다소 넓어진다.
경사도 원만해지고 길도 넓어진다.
협공하기 딱 좋다. 이런 지형에서는 적어도 양의진(兩儀陣)이나 삼재진(三才陣), 사상진(四象陣) 정도까지는 펼칠 수 있다. 오행진(五行陣)이나 육합진(六合陣)을 펼치기에는 다소 협소하다.
딱 사상진까지가 좋다.
“풋!”
아걸은 피식 웃었다.
어쩌면 예상이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것일까? 이곳은 딱 사상진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정말로 네 명이 매복해 있다. 동서남북, 사상 위치다.
이상하다. 그래도 전혀 긴장되지 않는다. 저들이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는데, 머릿속에는 이미 어떤 도법을 펼치는 게 좋을지 예상이 그려진다.
“후후!”
아걸은 웃음을 흘리면서 주위를 쓸어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