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일홀도-375화 (375/600)

#375화. 第七十五章 암중사(暗中事) (5)

아걸은 계곡 깊이 들어갔다.

걸음을 떼어 놓을 때마다 피를 봤다. 조금 잊힐 만하면 어김없이 사람이 나타나서 공격해 왔다.

그런데 그 공격이 이상하다.

처음 계곡을 들었었을 때는 진짜 강한 검이었다. ‘이놈들, 마유 마인이다!’라는 생각이 확실히 들었다. 하지만 계곡 안으로 들어설수록 검이 약해진다.

지금은 정말 이 자들이 검이나 수련했나 싶을 정도로 형편없다.

은신해 있는 모습도 한눈에 읽힌다. 숨어 있기는 한데, 호흡이며 냄새며 옷자락 부스럭거리는 소리까지 모두 들린다. 지금까지 본 매복자 중에서 최악이다.

하지만 공격을 할 때는 한 점의 망설임도 없다. 정말로 죽을힘을 다해서 달려들고, 칼에 썰려서 쓰러진다.

‘이 사람들, 무인이 아니다.’

아걸은 눈살을 찌푸렸다.

반철도에 맞아 죽는 자들은 확실히 무인이 아니다. 이들은 검초도 모르고 신법도 모른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죽음도 무시한 채 달려들기만 한다.

아걸은 이런 싸움을 해 본 경험이 있다.

혈도비자라는 무명을 얻게 된 싸움에서 무공과는 거리가 먼 민간인들이 화약 더미를 안고 달려들었다.

협박에 못 이겨서 목숨을 던진 사람들.

불현듯 그 싸움이 확 떠올랐다.

이 사람들은…… 끝도 없이 베어야 한다.

인정사정없이 베어도 이들은 절대 겁먹지 않는다. 계속 달려든다. 마지막 한 명이 쓰러질 때까지 결코 공격을 멈추지 않는다. 이들은 상대방이 지치기를 기대한다.

아무리 무공이 강한 자라도 며칠이고 잠도 안 자면서 싸우면 지칠 수밖에 없다. 반면에 공격하는 자들은 생생한 모습으로 사력을 다할 수 있다.

무리 지어서 공격한다는 게 이런 면에서 좋다. 결국은 숫자 많은 쪽이 이긴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어서 결코 공격을 멈추지 않는다.

이건 도박이다.

이번 판에는 딸 수 있어. 맞아. 지금까지 재수 없었으니까 딱 한 판만 더 하면 딸 수 있어. 이번 판에도 틀렸나? 다음 판에는 딸 거야. 패가 뒤지게도 안 들어오네. 이 정도 운이 나빴으면 다음 판에는 좋은 게 들어올 거야. 꼭 딸 수 있어.

다음, 다음, 다음…….

이들의 공격도 마찬가지다.

앞서서 아걸에게 죽은 자들은 아걸의 진기가 왕성했을 때 덤벼들었기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아걸은 지쳤다.

자신의 칼에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 아니 이번 기회를 놓치면 아걸을 죽이는 공로는 다른 사람에게 넘어갈 것이다. 운 좋게 내 차례까지 왔으니 즉시 공격해야 한다.

다수가 한 사람을 공격하는 심리다.

이런 심리가 있는 이상 이들은 절대 멈추지 않는다.

쒜에엑! 퍼억!

공격이 이어지고, 너무도 쉽게 무너졌다.

무인의 공방이 아니다. 싸움이 아니라 도살이다.

‘너무 약해.’

아걸은 언제부터 이런 자들이 공격해 왔는지 생각해 봤다.

그러니까…… 네 명이 후첨사상진을 펼쳐서 공격해 왔을 때…… 그때가 아마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그 이후부터는 전부 민간인으로 추측되는 자들이 달려든다.

쒯! 퍼억!

생각을 이어가는 중에도 공격이 지속된다.

아걸은 반사적으로 반철도를 쳐 냈다. 그 정도 공방만으로도 민간인은 나가떨어졌다.

이들은 결코 반철도를 이기지 못한다.

단번에 검을 놓쳐 버렸을 뿐만 아니라 이어진 발길질에 명치를 얻어맞고는 털썩 주저앉았다.

‘이걸로 한 사람의 목숨은 살린 것인가.’

공격하는 자들이 민간인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니 굳이 죽일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혼절시켜서 두 번 다시 달려들지 못하게 만들면 족하다는 생각이다. 한데,

쒯! 퍽!

어디선가 독침이 날아와 사내의 목덜미에 꽂혔다.

사내의 얼굴은 금방 흑색으로 변했다.

털썩!

사내가 쓰러졌다. 목숨을 잃었다.

요행은 없다. 아걸에게 달렸던 이상 모두 죽는다. 아걸이 사정을 봐줘도 죽는다.

공격자 측에서 공격자들에게 경고한다.

아걸은 멀리 이십 장 밖을 쳐다봤다.

그곳에 긴 대롱을 입에 문 자들이 있다. 독침을 쏘고는 재빨리 도주하고 있다.

아걸은 화가 치밀어서 그들을 쫓아갈까 생각했다.

이십 장쯤은 단숨에 달려갈 수 있다. 저들을 쫓아가기만 하면 도륙하는 것은 일도 아니다. 하지만 그러자면 무려 이십여 명에 이르는 애꿎은 자들을 또 죽여야 한다.

자신과 저들 사이에 매복자가 이십여 명은 있다.

은신술이 형편없는 것을 보면 역시 민간인들이다. 아걸이 쫓아올 것에 대비해서 길을 막을 사람들까지 준비시켜 놓은 것이다.

아걸은 미간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이놈들!’

상대는 마유 마인이라고 생각되는데, 도대체 왜 애꿎은 사람을 싸움판에 집어넣은 것일까? 그만 물러서라는 건가? 물러서지 않을 것을 알면서?

이러면 계곡 안쪽에 무엇이 있는지 더욱 궁금해진다.

저벅! 저벅!

아걸은 앞으로 걸어갔다.

조금 널찍한 공지가 나왔다.

아걸은 찌푸려진 미간을 풀지 않은 채 공지로 걸어갔다.

이미 알고 있는 매복자, 어쩔 수 없이 죽음 속으로 달려드는 장정들이 사방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이들은 무인이 아니다.

“휴우!”

아걸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어떤 협박을 당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죽으라는 명령을 기꺼이 수행할 정도로 지독한 협박을 당하고 있다. 아마도 가족이 인질로 잡혀 있을 것이다.

아걸은 이렇게 사람을 이용하는 자들을 상당히 싫어한다.

마유 마인들을 반드시 뿌리 뽑고 말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빙빙 맴돈다.

하지만 우선 당장 이들과 싸워야 한다. 자신이 죽이든 죽이지 않던 이들은 죽게 되어 있다. 그럴 바에는 빨리 죽이는 게 차라리 도움을 주는 게 아닐까?

휘리리링!

반철도를 크게 휘둘렀다.

아걸은 회선도를 떠올렸다. 일시에, 지극히 짧은 시간에 십여 명을 죽일 생각이다.

가장 빠르게, 가장 고통 없이 죽음을 선물한다.

그때, 그를 둘러싼 장정 십여 명이 이상한 행동을 했다. 일제히 노란 거름종이를 꺼내 들더니, 안에 든 단환을 꺼내서 입에 넣고 꿀꺽 삼켰다.

“뭐야?”

아걸이 중얼거렸다.

간혹 무인 중에는 독단을 복용하고 싸우는 자들이 있다.

일종의 각성 성분이 들어 있는 단환으로 몸에 해롭기는 하지만 당장 죽지는 않는다.

단환을 복용하면 근육이나 신경의 긴장도를 극성으로 끌어 올릴 수 있다. 본래 지닌 힘보다 두 배, 세 배 더 강하고 빠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물론 그 대가는 아주 혹독하다.

신경에 이상이 생길 수 있다. 혈맥에 응고가 생겨서 심장마비가 뇌졸중을 일으킬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단환을 복용하지 않고는 싸울 수 없는 몸이 된다. 마약처럼 각성 성분이 들어 있는 단환에 중독되는 것이다.

그래도 상대를 이길 수 있다면 복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무인이 많다.

이들도 그런 독단을 복용한 것인가? 하지만 그런 독단을 복용해서 공력을 증진하는 데도 분명히 한계가 있다. 이들처럼 무공을 전혀 모르는 자들이 복용하면 그저 힘이 조금 세지는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

괜히 애꿎은 독단만 버리는 격이다.

도대체 이들에게 이런 독단까지 복용시키면서 뭘 하자는 것일까?

아걸은 주위에 늘어선 장정들을 쓸어 봤다.

이들이 복용한 것은 독단이 맞다. 얼굴색이 순식간에 검붉은색으로 변했다.

얼굴은 시커먼데 눈동자만 새하얗게 반짝거린다. 아니다. 이미 흰자위에서 실핏줄이 터지기 시작했다. 눈가에 붉은 혈광이 감돌기 시작했다.

“하악! 학!”

독단을 복용한 자들은 속에서 열이 나는지 거친 숨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호, 혹시 인독화(人毒花)!’

아걸은 인상을 악귀처럼 찡그렸다.

세상에 독의 종류는 상당히 많다. 얼굴색이 검게 변했다는 것만으로 인독화를 떠올리기는 어렵다. 상대가 마유 마인이 아니라면 절대로 생각해 내지 못했을 것이다.

마유가 배출한 마인 중에서 가장 강한 자들이 열 명 있다.

일홀도의 삼십육 문주처럼 마유에서도 천신으로 떠받들어지는 마인들이 있다.

그들을 마유십신(魔乳十神)이라고 한다.

마유십신 중 한 명이 인독멸절화마(人毒滅絶花魔)다.

사람에게 독일 복용시켜서 몸에 깃든 열화진기를 끌어낸다. 아니, 열화진기로 전신을 태워서 죽게 만든다. 그러면 불에 타 죽은 시신처럼 새까맣게 타 죽는다.

이렇게만 보면 자연발화와 비슷하다. 불도 없는데, 인체의 열기만으로 타 죽는 것이다.

다만 인독멸절화마가 죽인 시신은 독으로 변한다는 것만 다르다. 독인이 죽은 자리는 독지(毒地)가 된다. 독지의 반경도 넓어서 무려 삼십 장에 이른다.

사방 삼십 장이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죽음의 땅으로 변한다.

그 땅을 디딘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죽음을 면치 못했다. 어떤 독에 중독되었는지도 모른 채 절명한다.

인독멸절화마는 무림을 종횡할 때, 늘 하인을 서너 명씩 데리고 다녔다. 유사시에는 그들에게 독단을 복용시키고 주위를 죽음의 독지로 만들어 버린다.

한데 그 독지라는 것이 표식이 나는 게 아니다. 겉보기에는 아무 표식도 없다.

물론 독단을 먹고 죽은 사람의 주위는 새까맣게 타들어 간다. 풀도 타고 꽃잎도 타고 나무도 타 죽는다. 하지만 조금 멀리 떨어지면 전혀 알 수가 없다.

아무 이상이 없는 땅을 무심히 밟았다가 죽는 것이다.

아걸 주위에 그런 자가 무려 십여 명이나 있다.

이들을 지금 당장 죽여야 한다. 그리고 몸을 빼내야 한다. 독단이 효력을 발휘하면 이미 늦었다.

쒜에엑!

아걸은 반철도를 휘둘렀다.

삼십대 문주의 회선도가 펼쳐지면서 장정들을 베기 시작했다.

하지만 장정들의 반응도 빨랐다. 장정들은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는지 즉시 손에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재빨리 거리를 좁혔다. 자신들은 칼에 맞아 죽더라도 아걸만은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실제로 그들의 팔과 팔에는 철갑이 채워져 있다.

철컥! 철컥!

철갑이 서로 엮였다.

그렇다고 빠져나가지 못할 바는 아니다. 팔을 잘라내고 그 사이로 뛰쳐나가면 된다.

다만 이미 늦었을 뿐이다.

사내들이 푹푹 쓰러지기 시작했다.

순간, 아걸은 극심한 현기증을 느꼈다. 머리가 어질어질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정신이 뚝 떨어졌다.

곧바로 다시 정신을 수습하기는 했다. 하지만 아주 짧은 시간 동안에 깊은 잠을 잔듯한 느낌이 들었다. 자신이 깜빡 졸았다는 느낌이 확연히 일어났다.

쒜에엑!

아걸은 전력을 다해서 신형을 쏘아 냈다.

장정들을 죽이는 것은 급하지 않다. 먼저 몸을 빼내야 한다. 이곳에서 정신을 잃으면 죽는다.

인독멸절화마, 그 독이 남아 있을 줄이야.

독에 중독된 것은 분명히 아걸의 실수다. 어떤 경우를 당하든, 어떤 함정을 만나든 변명의 여지가 없다. 당한 사람이 바보다. 죽은 다음에 하소연해 봤자 누가 들어줄 것인가.

쒜에엑! 쒯! 쒜에엑!

아걸은 순식간에 회선도를 십여 초나 쳐 냈다.

회선도를 펼쳐서 주위에 도벽을 쌓았다. 칼 그림자로 성벽을 쌓아서 침입자를 방비한다. 어떠한 공격도 용납하지 않는다. 모두 베어낸다.

탁! 촤라라라락! 촤라락!

공격해 오는 자가 있다면 당장 회선도를 맞고 썰려 나갈 것이다. 상대가 누군지 보지도 않고 무조건 베어 낸다. 그리고 앞으로 치달려 간다.

* * *

“놓쳤습니다.”

“알았다.”

사령이 묵직하게 말했다.

아걸은 인독화에 중독되었다. 그렇다면 이 보고는 ‘죽였습니다’로 바뀌어야 한다.

인독화에 중독되고도 살아난 사람은 없다.

인독화가 나타난 지 백오십 년, 그동안 해약조차 발견되지 않았다.

인독화는 무적의 독이다. 그런 독에 중독된 만큼 아걸이 살아나기는 힘들다.

그러니 ‘놓쳤습니다’라는 보고 대신에 ‘죽였습니다’하고 보고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마유 마인들에게 죽음이라는 말은 시신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 절명 사실을 확인한 후에야 내뱉을 수 있는 용어다. 시신을 확인하지 못했다면 죽였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아걸이 도강(刀罡)을 일으켰다고?”

“갑옷을 입은 것처럼 몸 주위에 칼로 방벽을 쌓았습니다. 칼이 너무 빨리 움직여서…….”

“무공이 점점 발전하는군.”

“인독화에 중독되었으니.”

보고하던 자가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다시 입을 다물어 버렸다.

역시 죽었다는 말을 하기에는 이르다. 아걸의 시신을 보지 않았으니까.

“시신을 찾을 때까지 계속 뒤져라. 오음산을 벗어나지 못했을 거야.”

“알겠습니다.”

사령도 아걸의 죽음을 믿지 않았다. 죽음은 시신을 확인한 후에 말해도 늦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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