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9화. 第七十六章 야심(野心) (4)
쏴아아! 콸콸! 조르르륵!
계곡물이 시원하게 흐른다. 햇볕도 따뜻하게 잘 들고, 바람도 시원하게 통한다.
“오면서 안 좋은 냄새를 맡았는데, 시원하게 씻기는 것 같군요. 늘 좋은 자리를 고르십니다.”
“그런가? 앉아.”
허도기가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그는 고기가 불에 타지 않도록 주의해서 굽고 있었다.
“관심이 없어서 몰랐는데, 발이 넓으시더군요?”
“내 발이 좀 넓어. 신발 만드는 데 가죽이 많이 들어가. 가만, 자네 발도 만만치 않은데?”
허도기가 화제를 돌렸다. 마유 마인들에 대해서는 말을 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서리가헌이 맞은 편에 앉았다.
“꼭 누군가 올 것 같더란 말이지. 그래서 두 마리를 잡았는데, 자네가 온 거야. 자 한 마리 먹지. 반 시진 넘게 구워서 속까지 잘 익었을 거야.”
허도기가 꿩고기를 내밀었다.
서리가헌은 묵묵히 받아서 고기를 뜯어 먹었다.
“우리 이렇게 앉아서 먹는 것이 몇 년 만이지?”
서리가헌은 피식 웃었다.
그는 허도기에게 패한 적이 있다. 일탄십검을 사용했는데 패하고 말았다.
그날, 지금처럼 들판에 앉아서 꿩을 잡아 구워 먹었다. 성검문에서 대활극이 일어날 것을 알게 된 날이고, 사부의 암산 계획을 세운 날이다.
그때…… 허도기와 함께 꿩을 먹지 않았다면 사부는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그때가…… 꽤 오래됐네. 한 이십 년 넘었지?”
“그렇군요.”
“그때는 모두 다 젊었는데. 내 나이가 벌써 환갑이야. 그동안 그냥 속절없이 나이만 먹었어.”
허도기가 꿩을 뜯어먹으면서 말했다.
“후후! 저만큼 속절없지는 않으실 겁니까. 저도 이미 마흔이 넘었습니다. 그동안 일홀도를 챙긴다고 챙겼는데, 생각해 보니 이십 년이란 세월만 훌쩍 보냈더군요.”
“일홀도가 꽤 좋아지지 않았나?”
“이십 년 동안 제가 갈고닦은 것이라는 게…… 후후! 사부님과 함께 한 달을 보낸 것보다도 못한 하찮은 거였죠. 이십 년 동안 칼만 녹슬었습니다.”
찰칵!
서리가헌이 칼을 만졌다.
“아무리 칼이 녹슬었다고 해도 그렇지, 새파란 애송이한테 팔이나 베이고.”
“그러게요. 하하하하!”
“하하하하!”
두 사람은 크게 웃었다.
기분 나쁠 수도 있는 말인데, 두 사람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 정도 농담으로 기분 나쁠 것 같으면 이십 년 세월 동안 견뎌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서리가헌은 허도기의 압박에서, 허도기는 욕망의 굴레에서.
“여기 온 거는…… 왜? 나하고 부딪혀 보려고?”
“그럴 생각입니다.”
“이제는 일홀도에 자신이 붙었나?”
“자신감이 실력에서 나온다면, 자신감을 키우고 검을 들게 하는 것이 조명천검. 일홀도는 그런 게 아니더군요. 자신감이 없어도 칼을 들게 하는 것. 그러니 죽는 사람이 많겠지만. 일홀도를 가졌으면서 조명천검을 쫓았더니 이 모양 아닙니까.”
“아냐, 아냐. 무모한 건 좋지 않아.”
“하하하! 그 좋지 않은 게 일홀도 아닙니까. 사부님이 기껏 무모함을 키워 주셨는데, 이 미련한 놈은 지난 이십 년 동안 무모함을 무디게 만들었어요. 차라리 이십 년을 술이나 마시며 허송세월로 보냈다면 좋았을 것을…… 칼을 손에서 놓지 않았으면서 끝내 싸우지 못했다는 게 더 아픕니다.”
“그렇군.”
두 사람은 천천히 얘기하면서 고기를 뜯어 먹었다.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허도기가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걸을 왜 살려 주신 겁니까?”
허도기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아걸을 살려 줬다? 그 말은 내 검에 대한 모욕인데?”
서리가헌은 허도기를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아걸과 부딪혔을 때는 봐주지 않았을 겁니다. 아걸이 입은 상처는 정말 죽이려고 뻗어낸 검이었으니까. 그것을 묻는 게 아닙니다. 싸움과 싸움 사이의 틈을 묻는 겁니다.”
“틈이라.”
“아걸은 동굴 싸움에서 용케 목숨은 부지했는데, 그때 진심으로 죽이려고 하셨죠? 후후! 아마 아걸도 이 산 어딘가에는 있을 겁니다. 그럼 문주님과 싸울 것이고. 동굴 싸움에서부터 오음산 싸움까지의 틈. 그동안 아걸이 상당히 신경에 거슬렸을 텐데.”
“하하하! 하하하하!”
허도기가 크게 웃었다.
“다른 놈들은 전부 공부라고 아부를 떠는데 문주라. 그 말도 오랜만에 들어보는군.”
“후후!”
서리가헌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에게 허도기는 영원히 문주일 뿐이다.
“아걸…… 아걸. 그렇지. 아걸. 내가 나서면 단번에 정리되기는 했지. 그런데 왜 정리하지 않았느냐 이 말 같은데…… 자네 같으면 자네한테 도움이 되는 자를 일부러 죽이겠나?”
이번에는 서리가헌이 미간을 찡그렸다.
“역시 그랬습니까?”
“그랬지.”
허도기가 말했다.
“아걸은 묘한 존재야. 아걸 같은 놈을 뭐라고 말해야 하지? 내 편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라고 해야 하나. 서로 죽이겠다고 칼을 들고 으르렁대니 적인 것만은 분명한데, 하는 행동을 보면 날 도와주고 있어. 그러니 내가 죽일 이유가 있나.”
퉤엣!
서리가헌이 입안에 든 꿩 뼈다귀를 뱉어 냈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다.
아걸은 전보영, 대장군부와 인연이 깊다. 또 아걸은 허도기의 적이다. 허도기의 아성을 부수고 있다.
여기서 답이 나온다.
대장군과 전보영은 아걸을 주시한다. 아걸을 통해서 무림을 정리하려고 한다. 아걸이 허도기의 상대라고 인정했기 때문에 생기는 착시 현상이다.
아걸이 움직이는 동안 허도기는 자유 상태다. 무엇을 해도 아걸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는다.
그동안 아걸이 한 일이 무엇인가? 아무것도 없다.
아걸이 야천을 가졌으면 뭐 하나? 다시 뺏겼잖은가.
적랑대에서 분리되어서 아걸을 도왔던 간자들은 모조리 다 죽었다. 그만큼 적랑대는 힘이 약해졌다. 이제는 제 기능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다.
아걸은 취화원과도 연관이 있다. 한때는 취화원이 매우 강성해지는 느낌마저 받았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게 됐나. 뿔뿔이 흩어져서 지하로 숨었다.
허도기가 말했다.
“그동안 나는 내 숙적들을 모두 제거했어. 무림이 정리되었다고나 할까? 후후! 내게 비판적이던 명숙들이 소리소문없이 사라진 것이지. 호황위라고 의심되었던 자들인데…… 일거양득이지. 한칼에 한 명을 죽여서 근심 두 개를 덜어버린 거야.”
“후후! 짐작했습니다.”
서리가헌이 웃었다.
무림 명숙들이 낯선 자의 도전을 받았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죽었다.
이 도전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같이 허도기에게 비판적인 사람들이었다. 또 무공이 높아서 따르는 사람도 많았다. 허도기를 좋게 말하지 않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들과 연관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들이 모두 죽었다.
이쯤 되면 이 생사 결전은 허도기 작품이라고 봐야 한다.
허도기가 웃으면서 말했다.
“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엊그제 전보영주 탁호도 죽었지. 이제 대장군도 죽을 거라더군. 아마 내가 오음산에서 벗어날 때쯤이면 이미 명을 달리 하지 않았을까 싶네만. 하하하! 알았는가? 모두 아걸을 주시하는 동안 나는 내 일을 차곡차곡 진행한 거지. 이런 마당에 뭐가 급하다고 아걸을 죽여.”
허도기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한 가지 더 묻죠. 말이 났으니까 말인데, 야천은 뭐하러 건드린 겁니까? 그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서.”
“야천. 후후! 정말 중요한 것이 야천인데, 야천을 너무 무시하는군. 하하하! 천강무신(天降武神)이라는 말, 들어봤나?”
서리가헌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무신, 천신이라는 말인데. 지금 그 소문이 돌고 있어. 야천을 통해서. 천강무신. 당금 무림에서 천강무신이라면 말을 들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나밖에 더 있나. 천강무신 하면 내가 생각나겠지.”
“야천에 시킨 겁니까?”
“맞아. 내가 시켰어.”
“그 소문 한 마디 퍼트리는 것이 마유 마인을 동원할 정도로 중요한 겁니까? 그 정도 소문이면 야천 구룡회를 통해서 퍼트렸어도 충분했을 텐데요.”
“처음에는 그러려고 했지. 그런데 아걸이 야천을 건드리잖아. 내겐 좋은 기회가 생긴 거야. 이 기회에 아예 야천을 내 손에 넣는 것도 좋겠다 싶었거든.”
“야천 같은 비루한 집단이 왜 중요한 겁니까?”
“그게 잘못 생각한 거라니까. 야천은 천하인의 눈이자, 귀이자, 입이야. 가장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 밑바닥에서 쥐톨 만큼 힘을 쥐고 있는 자들. 실질적으로 민초를 짓누르고 있는, 관원보다 더 밀접하게 민초와 섞여 있는 자들. 그런 놈들을 통해서 소문이 퍼지면 거짓도 진실로 둔갑해.”
“노리는 건 역시 황궁입니까?”
“하하하!”
허도기가 하늘을 쳐다보면서 웃었다.
“내가 공부로 있으면서 얻은 교훈이 뭔 줄 아나? 황권은 힘으로 얻는 게 아니라는 거야. 대의(大義)가 있어야 해. 대의가 없는 황권 찬탈은 한낱 역모에 불과하지. 역모는 또 역모를 불러오고 세상이 시끄러워져.”
허도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는 대의명분을 쌓아야 할 필요가 있는 거고. 이제 그 시작일 뿐이야.”
“그걸 이십 년에 걸려서 배우신 겁니까?”
“아니. 이건 이십 년 전에 알았던 거고.”
허도기가 장작을 들어서 모닥불을 쑤셨다.
꺼져가던 불길이 확 살아났다.
“야천을 지금 장악한 것은 이제 때가 익었으니까 그런 거고. 황권 찬탈이 대의명분만 있다고 되는 일인가? 하나가 더 있어야지. 혼돈 그리고 강력한 실정.”
“그런 일, 일어납니까?”
“일어날 거야. 변방에서, 군부에서, 나라 안에서. 동시에. 그게 이제 지금인 거지.”
서리가헌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옛날, 허도기와 꿩고기를 먹을 때는 성검문 찬탈 소식을 들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이제 때가 됐다’라는 말을 했다. 그리고 반년 조금 지나서 성검문이 뒤집혔다.
그때, 자신이 맡은 역할이 사부 독살이다.
이미 천하에 증명된 중원 최고 검공, 조명십해를 전수하겠다는 감언이설이 크게 작용했다. 도읍 하나를 직할지로 주겠다는 말은 귓가로 흘려들었다.
일홀도에 조명십해가 첨가하면!
그러니까 그때까지도 자신들은 일홀도를 정확하게 알지 못했던 것이다. 일홀도를 충분히 수련했다고 생각했는데, 하산시키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자신들이 수련한 것은 도법이었을 뿐, 일홀도가 아니었다.
“이제 일홀문만 사라지면 무림이 정리되는 겁니까?”
“바깥쪽에서 준비가 끝났다네? 그러니 어째. 이제 정리해야지. 지금 정리 중이야. 그런데 내 손이 아니면 정리가 안 되는 사람들이 있지. 그러니 할 수 있나. 내가 나서야지.”
서리가헌은 꿩고기를 다 먹었다.
그는 고기를 뀄던 나뭇가지를 불 속에 집어넣었다.
타닥! 타닥!
모닥불이 금방 나뭇가지를 삼켰다.
“다 들었나?”
“왜요? 그만 드시게요?”
허도기는 절반쯤 먹었다. 서리가헌의 궁금증을 풀어주느라고 고기를 많이 먹지 못했다.
“나야 앞으로도 먹을 날이 많으니까.”
허도기가 먹고 있던 꿩고기를 모닥불에 던져버렸다.
“잘 먹었나? 배가 든든해야 뭐든 하지.”
“일홀도를 이미 이긴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서리가헌이 무심히 칼을 잡았다. 순간!
착!
허도기가 검을 뽑았다.
허도기의 검이 서리가헌의 턱 밑에 닿았다. 한 치만 더 깊게 찔렀으면 목젖이 꿰뚫릴 뻔했다.
“내 검이 보고 싶다고 했지? 그래서 보여 주는 거야. 내가 아무리 보여 주려고 해도 내 검을 보는 사람이 없어. 이렇게 보여 주지 않으면 자네도 보지 못했을걸?”
스읏!
허도기가 다시 검을 검집에 넣었다.
“자네 덕분에 오늘의 내가 있다는 점, 잊지 않았어. 당시, 나를 꺾을 수 있는 사람은 일홀문주뿐. 그렇게 제거하지 못했다면 오늘의 나는 없었을 거야.”
꿀꺽!
서리가헌은 마른 침을 삼켰다.
이런 말은 처음 듣는다. 당시, 허도기와 사부가 진력으로 싸웠다면 누가 이겼을까 하는 의문이 종종 들었다. 허도기가 너무 강해서 오히려 사부가 밀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지금 허도기가 말하고 있다. 사부가 이겼을 거라고.
“나와 상대한 사람 중에 내 검을 본 사람은 없어. 자네가 내 검을 보고 죽은 첫 번째 상대가 될 거야. 그때 그 일로 내가 이십 년을 살았으니 그동안 있었던 일을 말해 준 것이지. 참 오랜만에 수다를 실컷 떨었어. 하하하! 이 검, 이제는 보지 못할 거네. 그러니 더 조심하고, 더 분발하고.”
허도기가 활짝 웃었다.
서리가헌은 눈을 부릅떴다.
방금 허도기의 검이 턱에 닿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아니, 검이 턱에 닿을 때까지 어떤 움직임도 일으키지 못했다.
싸움은 바로 이어진다.
자신이 칼을 뽑을 것이며, 허도기가 검을 찌를 것이다. 하지만 검을 볼 자신이 없다.
이렇게 빨랐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