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0화. 第七十六章 야심(野心) (5)
허도기가 두 무릎을 살짝 굽혔다.
손을 검에 살며시 올려놓은 채, 눈길은 발밑에 두었다. 그리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부동(不動), 땅에 못 박힌 듯 움직이지 않는다.
허도기는 어떤 상대와 싸우든 이런 모습이다. 상대에게 선공을 양보한다.
서리가헌은 양보를 기꺼이 받아야 한다. 기필코 틈을 찾아서 선제공격을 가해야 한다. 허도기에게 선공마저 빼앗기면 칼을 뽑을 기회조차 없다.
스릉!
서리가헌이 칼을 뽑았다.
거리? 좋다. 일탄십검을 전개하기에 딱 좋은 거리다. 달려가면서 가속을 얻는다.
허도기의 검은 아까 봤다.
눈부신 검!
아까는 사실 검이 너무 빨라서 보지 못했다. 턱에 닿은 후에 겨우 봤다.
이십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옛날과 똑같다.
이런 검이 조명십해라고 했다. 사부만 없다면, 이런 무리를 일홀도에 섞을 수 있다고 했다. 풍도곡을 내주겠다는 말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일홀도를 얻겠다고 발버둥 칠 때, 불쑥 나타나서 단숨에 꺾어 버린 무공!
심장이 뛸 수밖에 없는 유혹이었다.
’이십 년. 결국은 같은 자리.’
이 순간, 서리가헌은 아걸을 떠올렸다.
일부러 생각하려고 했던 것은 아닌데, 불현듯 머릿속을 스치며 지나갔다.
아걸은 이런 검과 싸웠다.
세 번이나 싸웠다. 세 번 모두 패했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런 검과 세 번이나 부딪쳤다. 패할 것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자신이 가진 무공으로 최선을 다했다.
아걸은 패할 수밖에 없다. 이 검을 누가 이기나.
아걸이 패하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그런데 여기서 기적이 또 일어났다.
아걸이 세 번 모두 목숨을 부지했다.
정말 대견하지 않은가. 이런 검에 즉사하지 않고 목숨을 부지했다는 것은 하늘이 도운 것이다. 천우신조다. 그러면 아걸은 천우신조가 세 번 겹친 것인가?
이 정도면 천우신조도 아니다. 천명이라고 해야 한다.
아걸은 죽을 운명이 아니었던 것이다. 천명이 허도기보다는 아걸에게 있다고 본다.
“하하하하!”
문득, 서리가헌은 웃고 싶었다. 그래서 웃었다.
허도기는 그래도 요지부동이다. 서리가헌에 대해서 더는 궁금한 점이 없다. 서리가헌이 궁금해하는 것을 풀어 줄 용의도 없다. 지금은 승부의 시간이다.
“당신은 결국 질 거야. 아걸에게.”
서리가헌이 중얼거렸다.
허도기가 이 소리를 들었는지 모르겠다. 들었어도 그만, 듣지 못했어도 그만이다. 전혀 상관없다.
서리가헌은 모든 긴장감을 탁 풀어 버렸다.
삶과 죽음의 경계도 넘어섰다. 죽음 같은 건 생각하지 않는다. 머릿속이 말끔해졌다.
‘좋다!’
최상의 일탄십검을 펼칠 준비가 되었다.
탁! 타탁! 탁탁탁! 타타타탁!
서리가헌은 뛰기 시작했다. 일탄십검의 속도를 얻기 위해서 매우 빠르게 치달렸다.
다다다다닥!
순간, 서리가헌의 칼이 열 자루로 쫙 불어났다. 정확히, 한 치의 빈틈도 없는, 일말의 후회도 담기지 않은 일홀도, 일탄십검이 강하게 뻗어 나갔다.
쒜에엑!
어느 것이 진검이냐!
열 자루를 모두 막아라! 열 개로 분산된 네 힘과 하나로 집약된 내 칼이 부딪친다!
‘완벽…….’
그 순간, 쓱! 눈앞에서 뭔가가 번쩍 빛났다.
“큭!”
서리가헌은 짧은 신음을 토해 냈다.
승부는 끝났다. 자신이 졌다. 그러니 이만 멈춰야 한다.
하지만 몸은 의지와는 다르게 계속해서 휘청휘청 앞으로 걸어 나갔다. 손은 여전히 칼을 쥐고 있다. 계속해서 일탄십검을 뻗어 내려고 한다.
칼이 허공을 가리키고 있다. 칼 앞에 허도기는 없다.
허도기는 이미 옆으로 한 걸음 물러나 있다. 그는 검을 뽑지도 않았다. 처음과 마찬가지로 검이 얌전히 검집에 들어가 있다. 그가 살검을 펼치면 검을 보지 못한다는 말…… 진실이다.
‘빨라. 정말…….’
쿵!
서리가헌이 쓰러졌다.
“오랜 인연인데 이렇게 막을 내리는군. 이렇게 될 줄 알았어. 너를 처음 본 그날부터 우리 사이는 이렇게 끝이 날 줄 알았다고. 후후후! 옛 벗치고는 허망하게 가는군.”
허도기는 한동안 서리가헌을 내려다봤다.
이상하게도 일홀도를 얻겠다고 발버둥 치던 젊은 날의 서리가헌이 보였다.
서리가헌은 여전히 앳됐으며, 활기찼으며, 도전하려는 의지가 깊었다. 칼에 대한 집착이 남달랐고, 무(武)에 대한 이해가 누구보다도 높았다.
너무 강해서 옆에 두지 못한 칼이다.
“잘 가게.”
허도기는 서신을 꺼내 칼 밑에 놓았다.
이 시신은 아걸에게 발견될 것이다. 발견되지 않을 수 없다. 표식을 해 놓을 것이니.
허도기는 조용히 걸어갔다.
* * *
펑!
하늘에서 성검문 화탄이 터졌다.
하늘에 연녹색 가루가 넓게 퍼졌다. 그 한 가운데도 분홍빛 줄이 쭉 그어졌다.
‘성검문주?’
아걸은 살며시 웃었다.
왔나. 성검문주…… 오지 않을 수 없었겠지.
하늘에 퍼진 화탄은 성검문주만 사용하는 것이다. 오음산에서 성검문주만 사용하는 화탄이 터졌다.
허도기가 성검문 문도에게 신호를 보내기 위해서 화탄을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음산에서 전쟁이 벌어진 것도 아니고, 화탄을 쓸 이유가 전혀 없다.
두 가지 사실을 말해 준다.
허도기가 오음산에 있다.
사실, 아걸은 막 오음산을 벗어나려던 참이었다.
오음산의 온 목적은 달성했다. 음산사마에 대한 궁금증을 하나 가득 간직하고 떠나려고 했다.
그런 와중에 폭죽이 터졌다.
허도기가 그냥 가지 말고 칼 한 번 섞자고 유혹한다.
놀랍지는 않다. 허도기가 올 것을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드디어 싸움이 시작되었구나 하고 생각될 뿐이다.
아걸은 화탄이 터진 곳으로 걸어갔다.
“사형…….”
한 사람이 쓰러져 있다. 저런 식으로 쓰러져 있을 사람이 아닌데, 볼품없이 누워 있다.
사형이 죽었다.
사실은 사형이라고 불러서도 안 되는 사람이다. 사부를 시해하는 순간, 사형제의 의리는 끊어졌다. 서리가헌은 오로지 칼을 맞댈 원수일 뿐이다.
쓰러져 있는 사형을 보자 만감이 교차했다.
사형의 손은 꽉 움켜져 있다. 아직도 칼을 쥐고 있는 듯 강한 악력이 느껴졌다.
얼굴은 편안해 보인다.
검에 찔린 아픔이나, 세상을 떠난다는 절망감을 보이지 않는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는 편안함만 엿보인다.
‘할 것 다 했으니 된 것 아니겠니?’
사형은 정확히 심장이 뚫렸다. 딱 심장만 뚫렸다. 심장 뒤로 검이 빠져나가지 않았다. 가슴을 가르고 들여다본 것은 아니지만 검흔을 보면 상처의 깊이도 짐작할 수 있다. 검이 깨끗하게 심장만 뚫고는 쑥 빠져나갔다.
피가 상당히 쏟아졌을 것이다.
고통은 매우 짧았다. 심장이 뚫리면 곧바로 의식을 잃는다. 아픔을 느낄 시간이 길지 않다. 몸은 쓰러진 후에도 계속 경련을 일으키지만, 그 경련은 본인이 의식하지 못하는 경련이다.
사형의 죽음은 초야에 묻힐 수 있었다. 오음산 깊은 산골짜기 한구석에서 죽었는데, 누가 시신을 찾아내겠나. 설혹 지나가는 사람이 봤다 한들 칼을 뽑은 채 죽은 무인인데, 가까이 와서 들여다보기나 하겠나.
산짐승 먹이가 되어서 흩어질 것이다.
허도기가 신호를 보내 주지 않았다면, 사형이 죽었다는 사실조차도 몰랐을 것이다.
허도기는 왜 사형의 죽음을 일부러 알려 주는 것일까?
사형이 이런 식으로 초야에서 쓸쓸히 죽어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음산에는 서리가헌 외에도 일홀문도가 또 있다. 그러니 적어도 같은 문도끼리 시신을 수습해 줘라. 그런 의미로 화탄을 날린 것으로 보인다.
이례적인 호의다.
무인은 싸움이 끝나면 냉정하게 돌아선다. 죽은 자는 거들떠보지 않는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산 자의 몫, 죽은 자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다.
그러니 성검문주나 되는 사람이 일부러 화탄까지 쏘아서 알려 준 것은 상당한 호의다.
아걸은 허도기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었다.
허도기는 자신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올 수 있는 칼로 사형을 꼽았던 것 같다.
내게 도전할 사람 그리고 날 이길 사람은 너!
하지만 그렇게 인정한 칼은 이십 년 동안 주저앉았다. 이십 년 동안 일어서지 못했다. 사람을 잘못 본 것인지, 일홀도를 잘못 본 것인지…… 어디에서 조각이 어긋났는지는 모르지만 딱 한 조각이 빠진 것은 분명하다.
허도기는 그 점이 안타까워서 안타까운 것이다.
자신에게 다가올 수 있는 칼이었는데.
아걸은 사형의 칼 밑에 놓인 서신을 봤다.
누가 보내는 서신인지 짐작된다. 설마 심장에 검 맞은 사람이 놓았겠나.
허도기가 자신을 부른다.
아걸은 서신에는 눈길을 주지 않았다. 사형 옆에 앉아서 푸른 하늘을 쳐다봤다.
허도기는 아마도 하루나 이틀 정도는 더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그러라고 일부러 서신을 남겨 놓고 떠났다. 서리가헌을 충분히 애도하고, 떠나보낸 후에 찾아오라고 한다.
“풋!”
아걸은 피식 웃었다.
오늘 땅을 많이 판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금도 땅을 파고 왔는데 또 땅을 판다.
“참…… 사형들은 비겁한 사람들이야.”
아걸이 서리가헌에게 말을 걸었다.
“이렇게 가면 몽설은 어떻게 하라고? 적어도 칼은 한 번 섞어 주고 떠나야지.”
아걸은 사형 옆에 드러누웠다.
하늘에 구름이 흘러간다. 땅에서는 사람이 베이고, 찔리고, 죽어가는데 구름은 무심히 흘러가기만 한다.
한동안 땅을 파지 못했다. 사형을 묻지 못했다.
문득 일홀문도 중에 살아남은 사람이 자신밖에 없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막내 사형 동박은 자신이 죽였고, 서리형개는 비명이 갔고, 서리가 어느 허도기에게 베였다.
어떤 죽음이 가장 무인다운, 일홀문도다운 죽음일까?
대사형이 가장 행복할 것 같기는 하다. 적어도 중원제일검에게 칼을 맞지 않았나.
동박의 죽음은 비웃음을 당했고, 서리형개는 들개 밥이 되었다. 서리가헌은 비웃음을 당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막내 손에 묻히는 행운까지 얻었다.
대사형의 죽음이 가장 일홀문도다운 죽음일까?
갑자기 치민 생각이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일홀문도는 전부 비명횡사했다.
전대 문주를 말하는 게 아니다. 전대 문주들은 그래도 자신의 칼이라도 후대에 남겼다. 전대 문주들과 같이 경쟁했던 사형제들, 서리가헌이나 서리형개, 동박 같은 사람들은 검조차 남기지 못했다.
서리가헌의 일탄십검은 이제 세상에서 잊힌다. 서리형개의 화염도도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동박은 어떤 칼을 썼더라?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나마 후인이 기억할 만한 칼은 자신의 일월도다. 아직 일홀도가 명확하게 정립되지는 않았지만, 누군가에게 기억되는 칼이 있다면 자신의 일월도일 것이다.
그러면 사형들의 존재는 뭐가 되나? 그저 한세상을 살다 간 것뿐이다.
이런 식의 칼, 이렇게 해서 가장 강한 칼을 만들어내는 것이 의미가 있나?
‘의미가 없지. 칼은 의미가 없는 거야.’
아걸은 일홀도에 대해서 회의가 생겼다.
일홀도를 가지려고 발버둥 칠 필요가 없다. 칼은 칼일 뿐이다. 가장 강한 칼을 가지려고 발버둥 칠 필요가 없다. 칼은 지금 가진 것만 해도 충분하다. 삶 속에 칼이 존재해야 마땅하다. 칼 속에 삶이 있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칼은 삶 속에 녹아 있어야 한다. 칼이 주인이 되면 안 된다.
지금까지 일홀도는 칼이 주인이었다.
칼을 쥔 무인은 칼에 끌려다녔다. 그래서는 안 된다. 무인이 칼을 써야지 된다. 칼에 끌려다니면 안 된다.
서리가헌이나 서리형개, 동박…… 모두 칼에 끌려다녔다.
그들이 일탄십검을 쓰고 화염도를 펼친 게 아니다. 사실, 그들은 어떤 칼을 쓰는지도 몰랐다. 일탄십검도 언젠가는 버릴 칼이었다. 더 강한 칼을 습득하면.
더 강한 칼을 만들기 위해서 끌려다닌 것이다.
아걸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죽은 사형을 봤다.
사형의 죽음을 보고 큰 가르침을 얻었다. 이것은 오로지 사형의 가르침이다.
손을 들어서 처음으로 사형의 등을 어루만졌다.
사형의 몸에는 아직도 온기가 남아 있다.
“칼은 칼일 뿐…….”
아걸은 땅을 팠다.
서리가헌을 묻고, 묘비 대신 칼을 꽂았다.
사형은 그래도 행복할 것이다. 일홀문에서 유일하게 남은 사제가 마지막을 함께 하고 있으니.
아걸은 서리가헌의 봉분 앞에서 꼬박 하루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