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일홀도-386화 (386/600)

#386화. 第七十八章 이지쟁(異之爭) (1)

사람들은 지극히 예쁜 여자를 절세가인(絶世佳人)이라고 부른다. 절세가인은 단순히 예쁜 것이 아니라 일대(一代)에 견줄 여인이 없을 만큼 빼어난 여인을 말한다.

결국, 절세가인을 본 사람은 거의 없다.

예쁜 여자에게 아부를 떠느라 절세가인이라고 부를 수는 있지만, ‘견줄 수 없는 외모’를 만나 보는 것은 조상이 은덕을 베풀어야만 가능하다.

그런데 그런 일이 벌어졌다.

절세가인이 찾아왔다.

여인의 취의(翠衣)를 입었다.

세상에 비췻빛 옷을 입은 여인은 많지만…… 이 여인은 비췻빛 옷이 이토록 화려하고, 단아하며, 아름다운 옷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해 준다.

“어, 어떻게……?”

수문 무인이 말을 더듬거렸다.

여인은 허리에 검을 차고 있다. 하지만 무인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멋이나 형식으로 검을 찬 것처럼 여겨진다. 진짜 검사여도 좋을 것 같다. 이토록 어여쁜 여인이 검을 휘두르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황홀하다.

여인은 묵묵히 혈첩을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수문 무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빨간색 봉투에 담긴 서신이라면 혈첩밖에 없다. 혈첩을 몰라서 묻는 게 아니다. 너무 예쁜 여인이 혈첩을 내미니까 어떤 일인지 의아해서 묻는 것이다.

“혈첩이에요.”

여인이 옥구슬 굴러가는 듯 맑은 음성으로 말했다.

“혈…… 첩? 혈첩인 것은 아는데…… 누구의 혈첩인지?”

수문 무인은 여인이 혈첩 심부름을 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성검문에 넣는 혈첩이에요.”

여인이 또박또박 말했다.

“서, 설마 소저께서 직접…… 비무를 하겠다는 건……?”

“네.”

수문 무인은 여전히 혈첩을 받지 못하고 입만 쩍 벌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도대체 무슨 일인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성검문이 창건된 이래 여인이 혈첩을 넣기는 처음이다.

사실 성검문은 위세가 말이 아니게 망가졌다. 소축십검이 와르르 죽어 나간 것도 문제지만, 혈무대에서 명부판관에게 패배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그동안 무적을 자랑하던 혈무대가 소축십검의 피로 얼룩졌다.

성검문도 사람이 만든 문파이니 실수가 있을 수 있다. 어쩌다가 한 번 패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다음에 이어진 혈무대 비무에서도 패했다.

이제는 옛날의 성검문이 아니다.

다음 혈무대 비무에서 또 패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싸울 수 있는 사람도 많지 않다.

그런데 이제는 여인까지 나서서 혈첩을 전해?

“소, 소저 이게 무슨 뜻인지 알고 주시는 것인지?”

수문 무인이 다시 물었다.

무인은 아무래도 절세가인이 무엇인가를 잘못 알고 혈첩을 전한 것으로 생각했다.

눈앞에 선 여인은 혈무대의 뜻조차 모르는 게 아닐까? 일단 비무대에 올라서면 살아서 내려오지 못한다. 그래서 피 혈(血) 자를 쓴다. 반드시 피를 흘리기 때문이다.

무인은 절세가인에게 친절히 설명해 주고 싶었다. 그만큼 여인은 아름다웠다.

여인이 방긋 웃으면서 말했다.

“취화원 원주 몽설이에요. 취화원 원주가 성검문에 도전하는 건데, 괜찮죠?”

“네, 넷?”

수문 무인은 깜짝 놀라서 입을 쩍 벌렸다.

이, 이 여자가 취화원 원주?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가 그 악귀 같은 집단의 총수? 아니, 아니…… 가만! 그럼 한낱 살수 집단이 천하제일 대문파에 도전장을?

‘취화원 원주’라는 말이 지닌 의미는 상당히 크다.

무림 살수 집단의 문주가 천하제일 문파 성검문에 도전장을 냈다. 그러면 이게 어떻게 되는 건가? 무림악(武林惡)이나 마찬가지인 살수 집단에서 도전해와도 되나?

“자, 잠시만…… 잠시만요. 안에 보고를 해야 해서. 잠시만 기다리고 계시면.”

수문 무인이 더듬거렸다.

성검문은 혈첩을 받을 때, 윗사람에게 보고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혈첩을 주면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접수한다. 그리고 반드시 비무를 한다.

만약, 상대가 혈첩을 던진 후에 비무를 하지 않겠다고 하면 어떻게 되나?

혈무대에 올라서 무릎 꿇고 사죄하면 된다.

다른 방법도 있다. 성검문을 농락한 죄로 성검문 추살단과 싸우면 된다. 성검문주가 ‘이제 됐다.’ 하고 인정할 때까지만 싸우면 목숨을 구할 수 있다. 물론 그때까지 살아 있다면.

수문 무인은 첫 번째 규칙부터 어기고 있다.

몽설은 빙긋 웃었다.

“그러세요. 비무 날짜는 임의로 정해도 된다고 해서, 내일로 했어요. 시간은 정오. 성검문에 싸울 무인이 없다면 약속 날짜를 받아 오셔도 돼요.”

몽설이 또박또박 말했다.

초도성에 두 번이나 왔다.

그때마다 아걸의 혈투를 봤다. 상대는 소축십검이었고, 아걸의 당시 무공으로는 상대하기 벅찼다.

그런 무공으로 감히 허도기와 싸우겠다고 나섰다.

참 못 말리는 사람이다.

그런데 지금은 자신이 와 있다. 역시 상대는 소축십검이다. 자신도 아걸처럼 상대하기 벅찬 자와 맞서고 있다. 객관적으로는 소축십검이 훨씬 윗길의 고수로 판단된다.

아걸은 누구와 싸울지 몰랐지만, 자신은 안다. 다섯째 점박이 오진북이다.

팔 장로, 그리고 취화원 살수들의 복수!

몽설은 취화원 원주답게 암살을 할까 하는 생각도 했다. 대리 성검문주 오진북이 팔 장로와 취화원 살수들을 죽였으니 원주 자격으로 문도의 복수를 하는 것도 타당하다. 그럴 경우, 암살을 시도해도 하등 이상하지 않다.

취화원 이름으로 오진북을 암살할 이유도 뚜렷하다.

팔 장로는 일전통을 장악한 후, 악행을 행하지 않았다. 일전통을 매음굴에서 변화시키려고 노력했다.

오진북은 그런 사람을 죽였다.

특별하게 죽일 만한 악행이 없었는데도 죽였다는 것은 반대로 말하면 오진북이 악행을 저질렀다는 말이 된다.

취화원 이름으로 암살할 수 있는 대상이 된다.

또 암살을 행하는 쪽이 취화원 명성을 떨치는 데도 한결 낫다. 아주 강력한 위협이 되지 않겠나.

취화원을 건드리면 누구든지 이렇게 된다! 그러니 건들지 마라!

무림에 대한 경종을 울릴 수 있다.

몽설은 정면 승부를 택했다.

아걸이 허도기와 정면 승부를 가리고 있다.

아걸은 자신이 강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허도기보다 못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정면 승부를 택했다. 왜? 그가 일홀도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홀도를 추구하는 한, 상대가 누구든 정면 승부다.

자신은 아걸의 부인이다. 일홀도의 안주인이다. 취화원이라는 살수 집단을 이끌고 있지만, 일홀도라는 이름에 먹칠을 할 수는 없다. 적어도 자신이 나서는 싸움만큼은 뒤로 숨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정면 승부를 택했다.

길을 오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다.

이것이 좋을까 저것이 좋을까. 정말로 고민을 많이 했다.

자신이 오진북을 이길 수 있느냐 하는 문제도 고민거리였다. 소축십검은 쇠퇴했지만, 여전히 무적이다. 둘째 초가평은 무림 명숙 십여 명을 척살한 흉수로 지목되고 있다.

너무 강하다.

한 가지 위안이라면 이런 자들도 일홀도에는 무릎을 꿇었다는 것이다. 아걸을 말하는 게 아니다. 서리가헌, 서리형개에게 움쭉도 하지 못했다.

물론 소축십검은 그때보다 더 강해졌다.

결코, 위안이 될 수 없는 말, 오히려 좌절을 불러오는 말이지만 현실이 그렇다. 지금 같아서는 서리가헌에게도 당당히 검을 들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아걸 수준이다.

이런 자를 암살하지 않고 정면 승부로 이기겠다는 게 정말 현명한 결정일까?

어쨌든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오진북에게 정면 도전을 했다.

‘혈무대에서 팔 장로를 죽인 죄가…… 받아 낼 거야.’

“뭐라고? 취화원 원주 몽설?”

“네.”

오진북 앞에 혈첩이 내밀어졌다.

“몽설? 하하하! 하하하하!”

오진북은 깔깔대고 웃었다.

“성검문이 개판이 되니까 이제 개나 소나 마구 덤벼드네. 하하하하! 어디 볼까?”

오진북이 혈첩을 받아서 펼쳤다.

정식 비무 요청이다. 장소는 혈무대. 날짜는 내일 정오. 결전장(決戰帳)은 써도 좋고 안 써도 좋다.

한 마리도 세상에 알려도 좋고, 비밀로 해도 좋다는 말이다.

어찌 보면 광오한 도전이다. 그리고 성검문을 아예 깔아뭉개는 오만함도 엿보인다.

장소가 혈무대라면 세상 사람들이 다 알게 된다. 그런데 뭐? 결전장을 안 써도 좋다고? 혈무대에서 싸우면서 어떻게 세상에 비밀로 하나. 웃긴 계집이다.

“계집은?”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이거 받을 테니까 내일 오라고 해.”

오진북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안 나가 보십니까?”

총관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내가 그깟 계집애를 만나야겠니?”

“두 가지 말씀을 드리면…….”

“넌 그따위 말투가 지겨워. 꼭 뭐 대단한 것처럼…… 그래, 뭔데? 말해 봐?”

“먼저 도전자를 만나보는 게 성검문 규칙입니다.”

“빌어먹을! 그놈의 규칙! 규칙! 규칙!”

오진북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둘째도 있습니다.”

“또 뭐야!”

“취화원 원주 몽설. 천하절색입니다. 비록 아걸에게 몸을 내 준 계집이기는 하지만…….”

“그래?”

오진북이 일어섰다.

사실 취화원 원주 몽설이 천하절색이라는 말은 오래전부터 나돌았다. 하지만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고, 예쁘다고 소문난 여자를 직접 만나보면 늘 실망스러웠다.

그런데 신중하기로 소문난 총관이 천하절색을 입에 담았다.

그러면 정말로 예쁜 것이다.

오진북은 그녀가 도대체 얼마나 예쁜지 얼굴 한 번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얼굴이나 보지. 정말 예쁘면 너무 아까운데? 내일 어떻게 베지? 그래도 베긴 해야겠지? 하하하!”

오진북이 웃었다.

두 사람은 차 한 잔 없이 성검문 정문 앞에서 마주 섰다.

“예쁘군.”

오진북의 첫인사였다.

“당신이 오진북?”

“오진북? 다짜고짜 반말이군. 우리 언제 만난 적이 있나?”

“없어.”

“꼭 아는 사람처럼 말해서. 다른 사람은 이름 대신 성검문주라고 부르지.”

“오진북이 좋아. 그 뒤에 일전통 개망나니라는 말을 붙이려고 했거든. 성검문주 개망나니라고 부르는 것보다는 낫잖아?”

“하하하! 하하하하! 그러니까…… 그 계집애들 죽였다고 지금 여기 와서 이러는 거야?”

“그래.”

“귀엽군.”

“내일 죽어서 염라대왕에게 가면 귀여운 계집에게 죽어서 왔다고 말해. 그 정도는 봐줄게.”

몽설의 음성은 차가웠다.

단지 차분하게 가라앉고, 나직나직하게 말한 것뿐인데 얼음이 풀풀 피어나는 듯 차갑게 들렸다.

“약속하지. 내일 널 살려 준다. 대신 내 침소로 기어들어 와. 취화원 계집들, 몸도 팔지? 원래 사람 죽이는 계집들이 목적을 위해서라면 물불 안 가리잖아.”

“나도 약속해. 내일 당신을 죽인 후에 머리를 떼어 내서 혈무대 깃발에 꽂아 놓을 거야. 죽어서라도 세상 굽어봐. 생전에 못 했던 것, 원이라도 풀라고.”

“하하하! 아걸 계집이라고 말을 막 하네.”

“혈무대 잘 봐 둬. 당신 머리가 걸릴 곳이야.”

“말하는 걸 보니 곱게 침대로 기어들 것 같지는 않고…… 그럼 근맥만 끊어 버릴까? 그다음에 고민해야겠어. 어떻게 사랑해 줄지. 대도 센 거 같고, 얼굴 예쁘고, 몸매 괜찮고. 이미 헌 계집이라 그게 좀 흠이기는 하지만.”

오진북이 웃었다.

그 말에 몽설도 웃었다.

“당신 죽었네. 나는 당신 목을 치겠다는데, 당신은 음탐한 생각을 하고 있어. 그러니 죽을 수밖에. 소축십검이 왜 다들 형편없이 죽어간 줄 알아? 정신머리가 너 같아서 그래. 소위 명문이라면서 그런 정신머리 갖고 되겠니? 너 같은 게 우리 취화원에 들어오면 변소 청소밖에 못 해. 성검문도 다 됐네. 혈첩 접수했지? 내일 봐.”

몽설이 웃으면서 등을 돌렸다.

“하하하! 여자가 정말 대 한 번 세단 말이야. 마음에 들어. 딱 아걸 같은 들개 마누라야. 하하하!”

오진북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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