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7화. 第七十八章 이지쟁(異之爭) (2)
취화원 원주가 성검문에 혈첩을 전했다는 사실은 초도성을 뒤흔들었다.
성검문이 당당하게 결전장을 내걸었다.
혈첩은 전하고 반 시진도 안 되어서 혈무대 앞에 목패가 세워졌다.
내일 정오에 취화원주 몽설과 대리 성검문주 오진북이 생사 혈전을 벌인다는 공고판이다.
이로써 혈무대 비무는 공식화되었다.
“이전에는 명부판관에게 패했지?”
“그건…… 패했다고 해야 하나? 명부판관과 싸운 사람이 정국장군이었잖아. 명부판관은 성검문주에게 도전했고.”
“어쨌든 성검문주가 권리를 완전히 넘겼으니까.”
“공식적으로야 패한 거지. 이유야 어쨌든 정국장군이 패해서 죽었으니까.”
“성검문주는 이겼잖아.”
“그게 이긴 건가? 싸움을 말린 거지.”
“이긴 건 이긴 거지 뭐. 박박 우긴다고 호박이 수박 되나?”
“아냐. 성검문이 진 거야. 나중에 성검문주가 이 싸움은 명부판관이 이겼다고 공식 선언했잖아.”
“그럼 이번에는 꼭 이겨야겠네?”
“이겨야지. 두 판 내리 내줬으니까.”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했나? 초도성 사람들은 몽설 걱정은 전혀 하지 않았다. 오로지 성검문만 걱정했다.
내일 있을 비무는 성검문 입장에서는 반드시 이겨야 할 절대 승부처였다.
물론 오진북이 몽설에게 질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없었다.
오진북은 성검문주 허도기가 추후에 성검문을 물려주겠다고 공식 선언한 제자다. 실질적으로 현재 성검문주의 대리 직무를 충실하게 해내고 있다.
사실 소축십검 중에는 남은 사람이 오진북밖에 없다.
둘째 초가평은 성검문을 떠나 무림을 떠돌고 있다. 넷째 진개는 팔 하나를 잃고 고심참담한다. 그러니 멀쩡한 제자는 오진북밖에 없는 셈이다.
“취화원 무공이 뭐지?”
“취화원 제일 절기는 암영검이고…… 원주가 수련한 무공은 사생락이라고 하지, 아마?”
“사생락이 강한가?”
“강해 봤자 얼마나 강하나. 조명천검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특히 오진북이 펼치는 조명십해는…… 이휴!”
말하던 자가 부르르 치를 떨었다.
“듣자 하니 취화원주가 도전한 게…… 오진북이 취화원 팔 장로를 죽였대. 그래서 그 복수를 하는 거라는데?”
“어디서 들었어?”
“혈첩을 전하면서 한바탕했나 봐. 둘이.”
“에이, 그러면 확실히 승부는 끝났다. 취화원주가 너무 무리했네. 상대를 잘 알아보고 덤비지. 복수심이 들떠서 앞뒤 재지 않았다는 거잖아.”
“무리지?”
“무리지. 조명십해를 어떻게 이겨.”
취화원주가 너무 무리했다. 뭐가 뛰니까 망둥이도 뛴다. 성검문이 꽤 화났을 거다. 감히 여자가 혈무대에 올라설 생각을 하다니. 겨우 사생락 정도 가지고.
사람들은 너무 쉽게 결론을 냈다.
결국은 오진북이 몽설을 죽일 것이라는 거다.
“아걸이 오음산에서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요?”
몽설은 침착했다.
‘흔들리면 안 돼.’
몽설은 스스로 다짐했다.
일홀도의 안주인은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어느 날 문득 아걸이 죽었다고 말해 와도 전혀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태연하게, 굳건하게.
이런 마음은 일홀도의 안주인이라서이기보다는 무인의 아내라면 모두가 가지고 있는 공통점인지도 모른다.
다만 다른 무인들은 생사 결전이라는 것을 그렇게 자주 하지 않는다. 평생 한두 번 하면 많이 한다. 어떤 사람은 무인이라면서도 생전 결투 한 번 하지 않고 여생을 보낸 사람도 있다.
거기에 반해서 일홀도는 수시로 싸운다. 상대도 하나같이 강한 사람뿐이다.
오늘 멀쩡히 깔깔대고 웃다가도, 내일 문득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와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런 준비를 하고 있어야만 한다.
“허도기는요?”
“…….”
장오(張五)라고 이름을 밝힌 사람이 말하기 곤란한 듯 입을 다물었다.
“괜찮아요. 말해 주세요.”
“혈인이 되어서 오음산을 나섰다고…… 허도기가 혈인이 될 정도면 상대는 아마도 아걸이 아닐까 하는…….”
장오가 말을 잇지 못했다.
‘흔들리면 안 돼. 흔들리면!’
몽설은 피식 웃었다.
“허도기가 혈인이 된 건 아걸 때문이 아니에요. 아걸은 그만한 무공이 안 돼요. 일 초 승부에서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면 당했을 거예요. 허도기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은데, 무슨 일일까요? 아걸과는 상관없을 거예요.”
“네. 알아보겠습니다.”
“고마워요. 또 소식 오면 알려 주세요. 내일 제가 살아남으면.”
“무슨 소릴 하십니까! 반드시 이기실 겁니다.”
“그랬으면 좋겠네요.”
“꼭 이기실 겁니다.”
“네.”
몽설은 환하게 웃었다.
장오가 문을 닫고 나갔다.
적랑대는 이번 야천 싸움에서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그런데도 계속 몽설에게 소식을 보내준다.
적랑대주 임지정, 고마운 사람이다.
- 취화원과 적랑대는 유일하게 남은 살수 문파니까.
그의 말은 장기적인 유대를 뜻한다.
현재는 취화원이 열세에 있지만, 언젠가 우월한 입지를 차지하면 적랑대를 도와달라는 뜻이다.
서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동지가 되자는 거다.
무림을 살아가면서 이런 동지가 있다는 것은 매우 든든하다. 또 임지정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다.
이번에도 성검문 오진북을 노린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사람을 보내서 수발을 들게 했다. 진중하고 눈치 빠른 사람이라서 이것저것 소식을 물어왔다.
몽설은 장오가 나갈 때까지 앉은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쾅!
장오가 문을 닫자, 그제야 몸이 휘청거렸다.
‘설마 죽은 건 아니지? 죽었으면 죽었다고 말해 줄 사람이야. 꿈에라도 나타나서 인사할 거야. 그렇지? 아직 살아 있으니까 연락을 안 하는 거야.’
몽설은 장오가 닫고 간 방문을 멍하니 쳐다봤다.
생각은 아걸이 살았을 것이라고 되뇌지만, 사실은 죽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허도기가 오음산 밖으로 나왔다고 한다.
두 사람이 들어가서 한 사람이 나왔다면 뻔한 거 아닌가. 더욱이 허도기가 피투성이였다고 한다. 일홀도가 이를 악물고 버티면 그렇게 될 수도 있다.
‘아!’
그녀는 비로소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주위에 아무도 없자,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려 왔다.
덜덜덜!
몽설은 자신이 떨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태연함을 유지하려고 해도 저절로 몸이 떨렸다.
너무 추워서, 너무 떨려서…… 양팔을 꼭 껴안았다. 그리고 잔뜩 몸을 움츠렸다.
‘떨면 안 돼. 내일 싸워야지. 아걸이 죽은 것도 아닌데 왜 이러지? 이러면 안 돼!’
그래도 덜덜 떨린다. 너무 떨린다.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린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알겠다. 정말 사시나무처럼 부르르 떨어댄다.
‘죽지 않았을 거야. 죽지 않았어. 절대로 죽지 않았어.’
몽설은 계속 같은 말만 뇌었다.
하지만 머릿속에는 피투성이가 되어서 쓰러져 있는 아걸 모습이 퍼뜩퍼뜩 떠올랐다.
그런 생각이 일어나니 떨리는 것을 멈추지 못하겠다.
맞다. 아걸이 죽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드디어 아걸의 일홀도가 막을 내렸나.
몽설은 너무 떨려서 물을 마시려고 주전자를 집어 들었다.
달그락! 달그락! 달그락!
그녀는 주전자를 들 수도 없었다.
손이 덜덜덜 떨린다. 수전증에 걸린 사람처럼 마구 떨려서 주전자가 들어 올려지지 않는다.
그녀는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두 무릎 사이에 머리를 푹 숙였다.
‘아아! 안 돼. 이렇게 가면…… 우리…… 혼인도 안 했잖아. 너무해. 혼자 돌아다니다가 죽는 법이 어디 있어! 아아!’
그녀는 열병 걸린 사람처럼 이 앓는 소리를 냈다.
너무 힘들다.
너무 고통스럽다.
“필요한 거 없으신지요?”
어제 왔던 장오가 다시 왔다.
“괜찮아요. 필요한 거 없어요.”
몽설이 침착하게 말했다.
몽설은 평정을 되찾았다. 너무 침착해서 오히려 장오가 고개를 갸웃거릴 판이다.
“혈무대 주변에 사람들이 잔뜩 몰려 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좋은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사람들이 몰려드는 통에…….”
“벌써 두 번이나 경험해 봤어요. 잘 알고 있어요. 너무 염려하지 않으셔도 돼요.”
몽설이 웃었다.
언제 떨고, 언제 아팠냐는 듯이 그녀는 태연했다.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개인적으로 여쭤볼 게…….”
“네. 뭔데요?”
“취화원 절기 사생락으로 조명십해를 상대하실 수 있으신지?”
“염려되세요?”
“충분히 상대하실 수 있으실 거라고 믿습니다만, 조명십해가 워낙 뛰어난 검공이라서.”
“최선을 다해 봐야죠.”
“이기시면 동문(東門)으로 오십시오. 마차를 준비해 놓고 기다리겠습니다. 이기시면 뒤도 돌아보지 마시고 바로 나오십시오.”
“왜요?”
“성검문에는 이제 소축십검이 세 명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하나는 스스로 파문해 버렸고, 하나는 폐인이 되다시피 했으니 사실 오진북만 남은 셈이에요. 만일 오진북이 해코지를 당하면 성검문 공봉들이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설마 암습이라도 하겠어요.”
“사실은 그게 염려되어서…….”
“호호호!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 취화원은 살수 집단이에요. 살수 집단 원주를 암습해서 어쩌겠다고요? 그런 싸움은 우리가 아주 잘해요.”
“일단 동문에 마차를 마련해 놓겠습니다.”
“그런데 너무 성급하신 거 아니에요. 질 수도 있는데.”
“이기실 겁니다. 반드시.”
장오는 시신을 수습할 준비도 갖췄다. 다만 불길할까 봐 말을 하지 않을 뿐이다.
“고마워요.”
몽설이 진심으로 말했다.
몽설은 정오를 일향경(一香頃)쯤 남겨두고, 머물던 집을 나섰다.
그녀는 어제 입었던 취의를 입었다. 싸우려는 옷이 아니라 나들이옷이다.
저벅! 저벅!
그녀가 혈무대를 향해서 걸었다.
그녀가 나타나자 사람들이 길을 쫙 열어 주었다.
“아! 예쁘네.”
“살수 집단 두목 같지 않은데? 어떻게 저 얼굴로 살수 집단을 이끌지. 닭 한 마리 비틀지 못하겠는데.”
“쉿! 말조심해.”
사람들이 쑥덕거렸다.
누구도 함부로 험담을 늘어놓지 못했다.
취화원 문주가 성검문에 혈첩을 던졌는데, 예하 살수들이 가만히 구경만 하겠나. 틀림없이 초도성에 들어왔을 것이다. 지금도 주위에는 취화원 살수가 있을지 모른다.
그러니 취화원 원주에게 욕설을 하거나 나쁜 소리라도 하면 즉시 암살될 우려가 있다. 옆에 와서 슬그머니 독침을 쿡 찌르고 가면 누가 알겠나.
사실 이런 말은 사람들 사이에 많이 나돌았다.
취화원이 이번 기회를 틈타서 성검문 요인을 대거 암살한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그런 마당이니 원주에게 험한 말을 할 사람은 없었다.
몽설은 혈무대를 향해 걸어갔다.
“아! 정말 예쁘다.”
누군가 찬탄을 보냈다.
“예쁘기만 해? 저 당당한 기세 봐. 똑 부러지기까지 하잖아.”
“취화원 원주인데 오죽하겠어. 보통 사람보고 살수를 하라고 해도 못 하는데, 하물며 살수를 이끄는 원주잖아.”
“이 사람, 말조심하라니까.”
“왜! 나쁜 말도 아닌데.”
사람들이 몽설을 보고 연신 수군거렸다.
몽설은 그들 곁을 지나가면서 그들이 하는 말을 모두 들었다.
어떤 말도 개의치 않는다.
몽설은 혈무대만 쳐다봤다.
그동안 취화원이 수집한 정보들, 아걸에게 들은 것들, 자신이 본 무공들, 모든 것을 총망라해서 오진북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만 생각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팔 장로와 얘들 복수는 해야 해.’
저벅! 저벅! 저벅!
혈무대가 눈에 보였다.
그녀는 일정한 걸음으로 혈무대를 향해 걸어갔다.
오진북은 벌써 나와 있었다.
혈무대 위에 의자를 놓고 비스듬히 기대앉아서 몽설이 오는 모습을 지켜봤다.
몽설은 차분히 혈무대 위로 걸어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