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8화. 第七十八章 이지쟁(異之爭) (3)
저벅! 저벅!
성검문에서 무인 한 명이 걸어왔다.
비무를 진행하려고 나섰는지 손에 두루마리를 들어 있다.
오진북은 의자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다. 거만하게 비스듬히 누워서 몽설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혈무대 가운데로 걸어온 무인이 잠시 소요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조용!”
혈무대 밑에 있는 무인들이 일제히 입을 맞춰서 고함질렀다.
사람들은 입을 다물었다.
혈무대에 선 자가 큰 종이를 활짝 펴고 내용을 읽었다.
“을묘년(乙卯年) 사월(四月) 이레(七日). 성검문은 취화원 원주 몽설의 도전을 받아 혈무를 치른다. 일(一), 생사 불문한다. 일(一), 비무 결과에 원한을 갖지 않는다…….”
“풋!”
몽설은 피식 웃었다.
예전에 없던 격식이다. 혈무대 비무를 구경하지 않았으면 모를까, 이미 두 번이나 경험했다.
아걸이 싸울 때는 이런 격식을 진행하지 않았다.
아마도 오진북이 위세를 높이기 위해서 약간의 모양새를 만든 모양이다.
“두 사람 앞으로!”
혈무대 중앙에 선 사내가 말했다.
오진북은 그제야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함!”
그가 지루한 듯 하늘을 향해 크게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느릿느릿 중앙으로 걸어왔다.
오진북은 여유가 넘쳤다. 싸움을 하러 나온 게 아니라 장난 좀 치려는 장난꾸러기처럼 보였다.
몽설도 혈무대 중앙으로 걸어갔다.
가운데 선 사내가 양손을 들어서 두 사람 사이에 거리를 만들었다.
“그만 빠져.”
“네?”
비무를 진행하던 사내는 오진북의 느닷없는 말에 고개를 쳐들고 되물었다.
오진북이 그를 쳐다봤다.
“아, 네. 그럼 저는 이만.”
사내가 급히 혈무대를 떠나갔다.
“왜? 끝까지 허세 좀 부려 보지. 기왕이면 비무가 끝날 때까지 맡겨 보지 그랬어?”
스릉!
몽설이 검을 뽑으며 말했다.
비무를 진행했던 자가 두 사람의 거리를 벌려 놨기 때문에, 검권에 이르려면 네다섯 걸음 정도는 다가서야 한다. 상대가 쾌속하게 쳐 와도 즉시 피할 수 있다.
“어제 내 제안, 생각해 봤나?”
오진북이 흰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제안?”
“내 첩이 될 생각은…….”
“미친놈!”
“그렇지? 미쳤지? 이상하단 말이야. 나도 내가 미친 걸 아는데, 네가 이뻐 보여.”
“내가 어지간히 만만해 보였나 보네. 비무대 위에서 헛소리하는 걸 보면.”
몽설은 검을 들었다.
어떤 검법을 사용할까? 사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고민이 많았다.
그녀에게는 절정 검법이 두 개가 있다. 하나는 취화원 절기인 사생락이다. 또 하나는 시어머니의 검인 혈검이다. 성취도는 사생락이 낫고, 절대로는 혈검이 앞선다.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이 두 개의 검 중에 무엇을 사용할까?
’익숙한 것이…… 아냐, 성취는 낮아도 혈검을 쓰면 이길 수 있어. 어떤 공부도 상대할 수 있어.’
사생락은 증명되지 않은 살수검이다.
혈검은 혈해검신이 증명했다. 조명십해와 같이 중원 삼대 검공 위치에 올려놓았다.
증명되지 않은 살수검을 증명해 보고 싶은 마음이 강하다. 또 손에 익기도 했다.
혈검 역시 잊힌 검인 것은 마찬가지다. 현정부인이 사용했지만, 그때가 이미 이십 년 전이다. 지금은 어떤 사람도 혈검을 기억하지 못한다.
몽설은 이 두 검 중 무엇을 사용할지 혈무대에 오르는 순간까지도 결정하지 못했다. 하지만 혈무대에 오르자, 딱 하나의 검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혈검. 혈검을 쓰자.’
눈앞에 성검문이 보였다.
이십 년 전에는 이곳에 현정부인이 살았다.
혈무대에 오르자 마치 현정부인이 문루(門樓)에 올라서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걸의 어머니, 시어머니. 얼굴도 보지 못한 분.
어쩌면 현정부인은 남편 허도강이 죽는 순간, 세 자식도 함께 죽을 거라는 걸 눈치챘을 수 있다.
얼마나 가슴이 아프셨을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들이 곧 피에 젖어서 죽어간다. 허도기가 노린 이상 경고를 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이미 죽음은 정해졌다.
세간에 숨겨 놓은 자식이라도 무사했으면.
현정부인은 아걸이 복수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저 한목숨 부지하는 것만 원했다. 동냥질해서 비루먹어도 좋으니 살아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몽설은 현정부인의 마음을 온몸으로 느꼈다.
그날, 현정부인의 가슴을 아리게 한 자가 눈앞에 서 있다.
오진북은 팔 장로와 취화원 수하들을 죽인 자이자, 현정부인의 원수다.
현정부인의 검으로 오진북을 처단한다.
비록 혈검경에 익숙하지 못하지만, 아직도 성취도가 미약하지만…… 그리고 상중하(上中下) 삼권(三卷) 중 상권은 구경도 못 해 봤지만…… 미완성 검공을 사용한다.
‘그래. 혈검이야. 여기서 쓸 검은 혈검밖에 없어.’
몽설은 마음이 편해져서 빙긋 웃었다.
몽설의 웃음을 오해했는지, 오진북이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선택권을 줄까?”
몽설이 오진북을 쳐다봤다.
“두 가지 조건을 걸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 봐.”
“헛소리 그만하지. 언제부터 혈무대 비무에 선택권이 걸렸어?”
“조건은 내가 널 삼 초 이내로 제압하겠다는 것. 삼 초 이내로 널 제압하면 내 첩이 돼라. 헌 계집이니 처로 맞이할 수는 없고, 첩이 되어서 날 모셔.”
몽설은 대답하지 않았다.
츠읏!
몽설은 벌써 검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소축십검 중 약한 사람은 없다. 이들은 중원 어떤 무인의 혈첩도 모두 받는 자들이다. 구파일방 장문인, 오대세가 가주가 도전해 와도 이들이 나선다.
이들은 아걸에게 소축십검이 죽어가면서 한층 더 강해졌다. 허도기가 특별히 폐관수련을 통해서 아주 강한 무인으로 재탄생시켰다는 후문이다.
오진북이 말했다.
“만약 내 말을 거부하면 취화원을 쓸어버린다. 알잖아? 내가 어떻게 쓸어버리는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 혈무대 비무에 뒤끝이 없다는 말은 개나 먹으라고 하고. 난 취화원을 쓸어버릴 거야. 내 말을 듣지 않으면.”
“오진북.”
“…….”
“헛소리 듣기 지루해서 죽겠다. 안 싸워? 나, 돌아가?”
“하하하하!”
오진북이 웃었다.
“정 죽는 게 소원이라면. 하지만 말했지? 난 너 안 죽여. 사지 근맥을 잘라서 침상에 눕혀 놓으려고. 오늘 밤, 기대해. 네 일생에서 가장 치욕스러운 밤이 될 거야.”
스릉!
오진북이 검을 뽑았다.
몽설은 오진북의 말을 전혀 귀담아듣지 않았다.
간혹 무인 중에는 싸움 전에 더러운 소리를 해서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자가 있다. 격장지계(激將之計)라고 말하는데, 효과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니 뭐라고 할 수는 없다. 일단 더러운 말을 들으면 화가 나고 흥분되니까.
흥분의 검의 적이다.
이런 말은 아예 안 듣는 게 좋다.
츠읏!
몽설은 이미 머리 한가운데 있는 니환궁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머릿속에서 검 한 자루가 곧추세워졌다. 혈검경의 검, 정신이 만든 검, 니환일검이다.
파라라라락!
혈검을 일으키자, 피 순환이 매우 빨라졌다.
몽설의 안색은 술에 취한 듯 붉게 물들었다. 빠른 피 순환이 혈색까지 변하게 만들었다.
혈검신기(血劍神氣)가 전신을 휘돌아 니환일검에 운집되었다.
마음은 얼음처럼 차게, 몸은 얼음처럼 굳건하게, 눈은 얼음처럼 고요하게.
삼빙(三氷)도 풀어져 나왔다.
몽설은 이미 오진북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검으로 들어가 있었다.
혈검신기가 몸 안에서 휘돌고, 몸 밖은 삼빙이 감쌌다.
그녀는 바위처럼 굳건하게 서 있다. 하지만 몸 안에서는 진기가 맹렬하게 움직였다.
니환일검이 영성을 띄면서 반짝거렸다.
그녀의 니환일검은 아걸을 통해서 극도로 활성화되었다. 아걸이 수련 대상으로 나서주었다. 직접 일홀도로 받아주었다. 자칫 아걸의 목숨까지 빼앗을 뻔했던 위험한 수련이었다.
그런 수련을 통해서 나름대로 검다운 형태로 만들어 놨다고 자부한다.
니환궁은 삼단전 중 상단전이다. 영성을 관할한다. 그러면서도 중단전과 하단전의 진기도 끌어온다. 머릿속이 활성화되면서 주위는 극도로 조용해졌다.
파파팟! 파파팟!
오진북의 신형이 두 개, 세 개로 흩어졌다.
‘허(虛), 허, 허, 실, 허.’
몽설의 니환일검은 허상 중 실체를 잡아냈다.
오진북이 연무환영심을 수련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소축십검이 아걸에게 죽어 나가자 허도기가 오진북에게만 특별히 하사한 공부다.
몸이 안개에 가려진 듯 희뿌옇게 변한다. 그의 신형이 환영처럼 흐릿해진다. 환영과 신형이 일제히 덮쳐온다. 사방에서 각기 다른 초식을 펼치며 다가온다.
연무환영심은 환공, 환술의 극치다. 어떤 신공도 실체를 파악해 내지 못한다.
몽설도 눈을 뜨고 있다. 오진북을 본다. 허상과 신형을 본다. 그리고 니환일검이 가리키는 자를 쫓아간다. 허상은 버리고 신형만 쫓아간다.
어깨 위로 검이 떨어졌다.
허상이 쳐 낸 검은 볼 필요가 없다. 실체가 펴낸 검만 본다.
그런데 이놈, 진짜 미친놈이다. 이놈은 진짜로 자신을 첩실로 들일 생각인 것 같다.
생사혈전에 어깨라니! 당연히 머리를 쳤어야지.
몽설은 검이 다가서기를 기다렸다. 꿈쩍도 하지 않고 기다렸다. 어깨를 노린다면…… 최악의 경우, 팔을 잃으면 된다. 이제는 아무런 부담도 없어졌다.
니환일검, 믿는다!
니환일검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직은 기다리라고 한다.
파랑! 파랑! 파라라라랑!
니환일검이 가늘게 떤다. 울음을 토해내는 듯 구슬프게 운다.
하지만 이런 떨림은 삼빙에 의해서 몸 밖으로 표출되지 않았다. 몸은 여전히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니환일검은 떨고 있지만, 손에 든 검은 고요하기만 했다.
드디어 오진북의 검이 어깨로 떨어졌다. 어깨를 격중시키려고 한다. 지금 움직이지 않으면 어깨를 잃는다. 찰나, 니환일검이 슬쩍 방향을 틀었다.
그녀의 상반신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쒜에엑!
오진북의 검이 가슴을 훑으면서 밑으로 떨어졌다. 동시에 그녀가 들고 있던 검이 조용히, 살며시, 앞으로 슬쩍 들렸다.
퍼억!
소리는 둔탁했다. 아주 거셌다.
몽설은 지극히 조용히 움직였는데, 그녀의 검은 매우 난폭하게 오진북의 심장을 뚫고 들어갔다.
“컥!”
오진북이 크게 놀란 듯 눈을 부릅떴다.
몽설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서 오진북을 쳐다봤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너 죽는다고 했잖아. 일 초. 일 초 상대밖에 안 되네. 소축십검이라는 자가. 넌 오늘 성검문 위명을 땅에 떨어트렸어. 오늘부터 성검문은 나락으로 떨어질 거야. 한낱 살수 문파 문주에게도 머리가 잘린 놈 때문에.”
오진북이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입술을 달싹거렸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털썩!
그가 무릎을 꿇었다.
몽설은 심장에서 검을 빼냈다. 동시에 다시 검을 휘둘러서 오진북의 머리를 잘라냈다.
이는 혈무대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던 일이다.
상대가 죽으면 그걸로 끝난다. 시신을 훼손하는 일은 없다. 죽은 자에게 두 번, 세 번 칼질하는 것은 무도(武道)가 아니다. 그러니 시신을 훼손했다는 건 성검문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된다.
몽설은 거침없이 그런 일을 한 것이다.
몽설은 오진북의 머리를 들고 혈무대에 꽂힌 깃발 위로 신형을 쏘아냈다.
타악!
오진북의 머리를 깃발 위에 꽂았다.
몽설은 혈무대에 내려섰다. 그리고 구경하는 뭇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취화원 원주가 오진북을 죽여서 팔 장로와 예하 취화원 수하들의 복수를 마쳤다. 누구든 명분 없이 취화원을 건드리는 자는 내 검을 받아야 한다. 성검문이라고 해도!”
휘릭!
몽설은 피 묻은 검을 휘둘러서 혈무대에 꽂았다.
저벅! 저벅!
그녀는 혈무대를 내려갔다.
그녀를 가로막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도 없었다.
장오는 오진북이 죽을 경우, 공봉들이 공격해 올 것을 염려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공봉들도 대낮에 암습을 가하지는 못한다. 급습하더라도 어두운 밤이나, 외진 곳에서 해야 한다. 혈무대 비무를 마치고 내려선 사람을 바로 공격하는 것은 누구도 이해하지 못한다.
몽설은 시신을 훼손해서 혈무대를 더럽혔다. 하지만 이것은 성검문이 알아서 할 일이다.
저벅! 저벅!
몽설은 인파 사이를 걸었다.
취운이 보였다.
‘오지 말라니까!’
월영도 보였다. 월영의 얼굴에서는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바보같이.’
몽설은 그녀들을 모른 척했다.
살수들은 얼굴을 드러내면 드러낼수록 불리해진다. 취화원주가 모습을 드러낸 것만 해도 대단히 파격적인 일이다.
이제 그녀는 취화원과 관계된 모든 일에서 첫 번째 표적이 된다.
원래 원주는 제일 표적이지만, 용모파기를 작성할 수 있으므로 첫 손으로 꼽히게 되었다.
소호, 청란, 규화…… 화요, 적화, 소명, 사사.
그러고 보니 모두 와 있다.
‘그렇게 숨어 있으라고 해도 말들 되게 안 듣네. 돌아가면 혼 좀 나야겠어.’
몽설은 그녀들에게 일별도 주지 않은 채 대로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