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9화. 第七十八章 이지쟁(異之爭) (4)
허도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말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 누구도 입을 열어서 말을 할 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놈은?”
“관에 모셨습니다.”
총관이 말하면서 대청 중앙에 놓인 관을 가리켰다.
저벅! 저벅!
허도기가 관으로 걸어가서 고개를 숙여 쳐다봤다.
오진북이 누워 있다.
깃발 위에 꽂힌 머리를 뽑아내고, 몸에 붙여서 바늘로 꿰맸다. 깨끗이 목욕을 시키고, 방부제를 바른 후에, 화장까지 시켰다. 무복 중 가장 화려한 옷을 골라서 입혔다.
가슴에는 그가 쓰던 검을 올려놓았다.
입관을 완전히 마쳤다.
관 뚜껑은 덮지 않았다. 아직 성검문주가 보지 못했다. 그래서 조문도 받지 않고 있다.
“연무환영심이 뚫렸다는 말이지?”
“네.”
총관이 대답했다.
총관은 연무환영심을 알지 못한다. 지금 주위엔 들어선 성검문도 중에 연무환영심이라는 무공을 아는 사람도 없다. 혹여 안다고 해도 풍문만 들었을 것이다.
연무환영심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거의 미지에 가까운 무공이다.
“그 당시 모습 그대로 펼쳐 봐.”
허도기가 돌아서며 말했다.
총관이 이런 말을 예상한 듯 바로 몇 사람을 가리켰다.
그들이 검을 들고 앞으로 나왔다.
그중 한 명은 몽설인 듯 검을 중단에 들고 반대편에 섰다.
이쪽에는 다섯 명이 섰다. 그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고 제각각 검초를 펼치며 달려들었다.
그들은 오진북처럼 연무환영심을 펼칠 줄 모른다. 그래서 마지막에 봤던 모습을 펼쳐 보이는 것인데, 오진북이 환영 다섯 개를 만들어 내서 다섯 명이 펼쳤다.
그들은 허상과 실체를 구분하지 못했다.
검을 들고 서 있는 자에게 가까이 다가온 다섯 명이 일제히 몸을 쳤다.
한 사람은 어깨를, 한 사람은 옆구리를, 머리를, 다리를…… 마지막 한 사람은 아직도 뒤에 있다. 옆구리를 치는 자의 등에 업어서 머리를 내리치려고 한다.
다소 늦은 검이다.
공격하는 자들의 모습만 봐서는 피할 길이 없어 보였다.
여기서 총관이 말했다.
“대응 수입니다.”
그러자 몽설 대역이 움직였다. 슬쩍 몸을 틀어서 어깨로 흘러내리는 검을 흘려냈다. 다른 검은 일체 무시하고 어깨에 흘러내리는 것만 피했다.
몽설을 쳐가던 검 네 자루가 사정없이 몸에 틀어박혔다.
다소 늦게 뒤따라온 검도 몽설이 피하는 동안에 다가섰다. 그리고 머리를 찍었다.
몽설은 오 검 중 사 검을 맞았다.
몽설 대역은 천천히, 아주 느릿하게 검을 들어서 오진북의 심장에 댔다. 찌른 게 아니라 슬쩍 대기만 했다. 일부러 찌르려고 검을 든 것이 아니다. 몽설은 검을 들기만 했는데 오진북이 들입다 심장을 틀어박았다.
오진북은 피할 방법이 없다.
그의 몸은 희한하게도 좌우에서 펼쳐진 환영에 갇혀서 움직일 수 없는 처지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검을 맞을 판이다.
하물며 어깨를 치지 못하고 흘러내리는 검 때문에 몸이 앞으로 쏠렸다.
꼼짝없이 검에 맞는다. 만약 좌우에서 덤비는 자가 지금처럼 실체라면 몸을 틀어내지도 못한다. 실제로 이렇게 재현해 보니, 어깨를 친 자는 움직일 곳이 없었다.
“하하하! 하하하하!”
허도기가 웃음을 터트렸다.
“연무환영심을 정확히 꿰뚫어 봤구나. 정확히 꿰뚫어 봤어! 이러니 죽을 수밖에. 하하하하하!”
허도기의 웃음 속에는 통쾌함이 담겼다.
오진북이 죽었다는 사실보다도 몽설이 연무환영심을 깬 것이 더 대단하다는 듯이 보였다.
“그런가. 혈검이 제대로 전수됐군.”
웃음을 그친 허도기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취화원 절기 사생락과 연무환영심은 같은 종류의 무공이다. 계파가 같다.
단지 사생락은 어둠 속에 몸을 숨기는 것이고, 연무환영심은 환술을 끌어낸다.
누가 더 능숙한 검초를 펼치느냐에 따라서 결판이 난다.
하지만, 검초의 오묘함은 분명히 연무환영심이 한 수 위다. 연무환영심은 실체와 환영을 구분 없이 섞어 놓는다. 환영을 찾아내기가 정말 어렵다.
여기에서는 연무가 크게 작용한다.
몸 주위에 흐릿하게 번지는 연무에는 몽환초까지 섞여 있다. 이 연무가 실체와 환영을 구분해 내지 못하게 만든다. 몽환초를 마구 흔들면서 실체가 달려간다.
사생락은 정검(靜劍)이다. 고요함 속에서 퍼뜩 피어나야 한다.
얼핏 보면 몽설이 펼친 검은 사생락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생락 역시 밝은 대낮에 펼치려면 회색 연무를 흘려야 하는데, 이 둘이 섞이면 사생락은 장님이 된다.
만약에 몽설이 사생락을 펼쳤다면 수련 여하를 불문하고 연무환영심의 밥이 되었다.
몽설이 펼친 검이 낯설지는 않다.
허도기는 이런 검을 안다. 연무환영심을 정확히 꿰뚫어 볼 수 있는 검, 혈검이다.
과거 형수가 사용했던 검, 혈해검신의 검!
“혈검이 전해진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걸 제대로 수련했군. 상권도 없이. 심경과 초식만으로…… 이 정도 만들어 냈다는 거지. 후후! 몽설도 당신 핏줄을 이어받았다는 건가?”
허도기는 죽은 일홀문주를 떠올렸다.
일홀문주의 핏줄이라면 성검문 용골 못지않다.
일홀문주는 당시 중원 최고의 칼이었다. 대공 허도강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문주의 아내는 취화원 제일 살수다. 살수로 죽지 않고 은퇴를 한 정통 살수다.
그 핏줄이 어디 가나.
“지도를 가져오겠습니다.”
총관이 말했다.
“지도를 가져와라!”
“네!”
총관의 명령에 성검문도가 미리 준비해 놓은 지도를 가져와 쫙 펼쳤다.
“현재 취화원 살수들이 흩어져 있는 곳을 파악해 놓았습니다. 이 점으로 찍힌 곳에 머물고 있습니다. 가장 먼 곳에 있는 자도 열흘이면 쫓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냐?”
허도기가 지도를 들여다봤다.
“열흘 뒤에는 일제히 소탕할 수 있습니다. 임시 문주님께서 취화원을 소탕해 버린다고…….”
순간, 어디에선가 묘한 소리가 울렸다.
철컥!
“컥!”
말을 잇던 총관이 목을 움켜잡고 비틀거렸다.
목을 움켜잡은 두 손을 비집고 가는 핏줄기가 흘러나왔다. 눈은 퉁방울처럼 부릅떠졌다.
그가 털썩 무릎을 꿇더니 앞으로 쓰러졌다.
“오진북 곁에 이놈이 있었다지?”
“네.”
총관의 명을 받던 수하가 덜덜 떨면서 말했다.
“진북이가 사람 보는 눈이 없구나. 이런 간사한 자를 옆에 두고. 끌고 나가서 태워 버려.”
“넷!”
성검문도는 즉시 총관의 시신을 들고 나갔다.
허도기는 성검문의 성웅(聖雄)이었다. 성검문도를 늘 자상하게 보살폈다. 그들 앞에서 직접 검을 뽑아 수하를 죽이는 일은 진정 처음이었다.
잠시 후, 대청이 텅 비었다.
허도기는 오진북의 시신도 내가게 했다. 비무에서 패한 자가 조문을 받는 것도 우습다. 그러니 뒷산 어딘가에 조용히 묻으라고 지시했다.
성검문이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사령.”
“네!”
천정에서 대답 소리와 함께 흑의인이 내려섰다.
“오음산에 들어온 놈이 있었다. 누군지 아나?”
사령은 대답이 없었다.
오음산은 마유 마인들이 쫙 깔려 있었다. 그들을 사령이 직접 지휘했다. 허도기의 질책은 마유 마인들이 펼친 포진을 뚫고 들어선 자가 있다는 것이다.
“어떤 놈인지 알아봐.”
허도기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사령이 지극히 공손하게 대답했다.
허도기는 사령과 마유 마인들이 물러나는 것을 봤다.
아걸이 독에 중독된 채 종적이 묘연할 때도 마유 마인들이 곳곳을 지켰다.
허도기와 아걸은 사령이 물러간 직후에 부딪혔다.
누군가가 있었다면 그때 들어선 것이다. 그 짧은 순간에 허도기가 싸우는 곳까지 달려갔다. 그러자면 전력을 다해서 질주했어야 한다.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그런 자를 허도기가 찾아내지 못할 리는 없다. 분명히 마유 마인들이 물러가기 전에 들어와 있던 놈이다.
이번 일은 마유의 명예를 걸고 찾아내어야 할 일이다.
허도기가 말했다.
“마유를 몇 명이나 쓸 수 있나?”
“없습니다.”
사령이 간단히 대답했다.
허도기가 사령을 쳐다봤다.
“저에게 주어진 임무 중 두 가지를 완수했습니다. 이제 대장군만 죽이면 임무는 끝납니다. 지금 제 수하들은 장군가에 밀집하고 있습니다. 한 명도 드리지 못합니다.”
“후후! 그래?”
허도기가 웃었다.
사령에게 준 임무 중에는 아걸 참살도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아걸을 중독시키는 데도 성공했다. 그리고 허도기에게 인계했다. 뭘 더 하라는 건가.
사령의 뜻을 읽지 못할 리 없다.
“알았다. 남은 일만 확실히 하도록.”
“네.”
“가 봐. 아! 오음산에 들어온 놈…… 그 일은 어떻게? 해 줄 건가?”
“그 말씀은 마유가 아닌 제가 직접 받은 것으로 하고 수행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우린 앞으로 만날 일이 없나?”
“보고드리러 한 번 더 오겠습니다.”
허도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어.”
“아직 임무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말씀은 나중에 받겠습니다.”
쒜에엑!
사령이 사라졌다.
“후후!”
허도기는 멀어져가는 사령을 보면서 옅은 웃음을 흘렸다.
그르르릉!
허도기는 석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밀실에서는 퀴퀴한 곰팡내가 확 풍겨왔다. 그리고 그 안에 늑대 한 마리가 파란 눈을 번뜩이며 앉아 있었다.
“좋아졌군.”
허도기가 진개를 보면서 말했다.
“크크크! 사부! 좋아졌다면 검 한번 섞어 봐야지.”
진개가 거칠게 말하며 일어섰다.
“쯧! 이놈이나 저놈이나 어찌 좀 괜찮은 무공을 주면 혓바닥부터 짧아져? 그럴 시간 없다.”
허도기의 말에 진개가 눈빛을 빛냈다.
허도기는 이런 사람이 아니다. 도전을 받으면 즉시 대응한다. 특히 소축십검에게는 하인 대하듯 했다. 제자가 아니라 목숨을 맡긴 수하일 뿐이다.
“오진북이 몽설에게 당했다.”
“큭! 큭큭큭! 큭큭!”
진개가 키득거리면서 웃었다. 소축십검이 죽었는데 전혀 애통해하지 않는다.
허도기가 말했다.
“초가평은 자가파문을 택했다. 그러니 이제 소축십검 증 남은 놈은 너 하나야. 어떤 놈이 최후까지 살아남을까 궁금했는데, 네 놈이 될 줄은 몰랐다.”
“키키! 그래서? 나한테는 뭘 시키려고?”
진개의 눈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시킬 것은 이미 다 시켰다. 남은 놈은 너 하나니…… 늑대를 만들었으니 이제 사람을 만들어야지. 그래야 네놈을 사람들 앞에 내세울 거 아니냐.”
허도기가 진개의 위아래를 쓱 훑어봤다.
“큭큭큭! 헛소리! 내가 수련한 무공이 마공 중의 마공, 분뢰절맥이라는 사실을 잊었나? 이제 난 영원히 음지에서…….”
“조명천하(照明天下).”
순간, 키득거리며 말을 이어가던 진개가 입을 뚝 다물었다.
“일단 외모부터 다듬자. 나와.”
허도기가 뒤돌아섰다.
“사, 사부! 방금 뭐라고?”
진개가 눈에서 기광을 번뜩이며 물었다.
그는 사부를 믿지 않는다. 사부는 소축십검이 죽어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하지만 마지막 말, 마지막 말!
“내 뜻이 어디 있는지는 알 것이고…… 성검문, 이 무림에는 주인이 없다. 네놈이 해야지. 일단 네 모습부터 뜯어고치고, 인간다운 인간을 만든 다음에 무공 하나 더 배우자. 그래야 명실공히 성검문 문주 노릇을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면 제 할 일은 무엇입니까.”
“분뢰절맥을 조명천하에 숨겨 봐라. 그게 네 할 일이야.”
“조, 조명천하!”
진개가 말을 더듬거렸다.
조명천하는 조명십해의 최정화다.
성검문주만이 수련하는, 대리 성검문주였던 오진북도 알지 못하는, 이 세상에서 오죽 한 명 사부 허도기만 아는 절대 검공이다.
“조명천하를!”
저벅! 저벅!
허도기는 진개의 대답도 듣지 않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