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1화. 第七十九 제기정신(提起精神) (1)
찌르르륵! 찌르륵!
풀벌레 소리가 구슬프게 울어댔다.
“헉!”
아걸은 경악성을 쏟아내며 눈을 번쩍 떴다.
아주 작은 풀벌레 소리가 마치 징 소리처럼 크게 울렸다. 검이 목을 쳐오는 소리로 들렸다.
허도기가 놀라운 발검술로 몸을 짓이겼다. 치명적인 검을 맞았는데도 또 찌른다. 너무 아프다고 소리 지르는데도 악마처럼 낄낄거리면서 고통을 안겼다.
“음!”
정신을 번쩍 차린 아걸은 나직한 풀벌레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가는 숨을 내뱉었다.
찌륵! 찌르르르륵!
야밤에 울어대는 벌레 소리가 유난히 청승맞았다.
아걸은 동굴 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작은 입구를 통해서 하늘을 쳐다봤다.
밖은 새카만 어둠으로 뒤덮였다.
깊은 밤인 것 같다. 달이 중천에 떠 있는 것을 보면 자정에 가까운 듯하다.
‘얼마나 누워 있었지?’
입구가 아주 작은 동굴을 찾아들었다.
여우가 굴을 파놓은 듯 아주 작은 동굴이다. 늑대도 들어올 수 없을 것 같다.
그런 동굴로 기어들어 와서 녹선마황을 상처에 붙였다. 그리고는 혼절했다. 며칠이나 누워 있었는지 알 길이 없다. 상당히 오랫동안 누워 있었다는 느낌만 든다.
아니, 이 동굴에서 며칠을 보냈는지 아는 방법이 있다.
아걸은 손을 들어서 녹선마황을 만졌다.
상처에 붙여 놓았던 녹선마황이 이미 핏물에 녹아서 사라져 버렸다.
상처는 많이 아물었다. 녹선마황이 고름을 먹고 상처를 아물게 하는 진액을 뿜어냈다.
‘이놈이 녹을 정도라면 십여 일은 누워있었다는 거네. 용케 굶어 죽지 않고…….’
녹선마황이 녹아서 체내로 스며들면서 영양분 역할을 했다.
이래서 녹선마황은 영물이다. 일홀문 출신이라면, 늘 큰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지참하고 다녀야 한다. 이놈이 있으면 적어도 목숨을 두어 번은 구한다.
검상을 입은 것치고는 상당히 오랫동안 누워 있었다.
검상 때문만은 아니다. 인독화 중독이 상상 이상으로 강했다.
독성으로 따지면 첫 번째 당한 독이 더 강했다. 그런 독도 거뜬히 이겨냈는데…… 독이 풀린 지 이틀이나 된 독에 당하고도 쩔쩔맸다. 먼저 중독되었던 독이 완전히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두 번째 독에 당한 탓이다.
거기에 허도기의 검이 매우 강렬했다. 그런 검을 맞고 즉사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다.
사형이 녹선마황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삶을 구원하는 데 일조를 보탰다.
녹선마황이 없었다면 꼼짝없이 죽었을 판이었다.
여러 가지 행운이 겹쳐서 또 한 번 살았다.
“후우!”
아걸은 한숨을 내쉬며 반철도를 들었다.
반철도는 원래 날을 날카롭게 갈지 않았다. 뭉툭하지도 않았지만, 날카롭지도 않았다.
반철도에 여기저기 이가 빠져 있다.
반철도에 새겨진 검 자국만 해도 무려 이십여 군데가 넘었다. 검으로 칼을 쳤는데 이만한 자국이 났다는 것은 허도기의 내력이 그만큼 강하다는 뜻이다.
사전사패(四戰四敗)!
할 말이 없다. 그래도 처음에 비하면 많이 나아졌다.
다음에 만나면 이길 수 있을까? 장담하지 못한다.
조명천검 조명십해에는 일홀도와 같은 검이 있다.
일홀도처럼 절대 무적으로 군림하는, 상대가 절대로 받지 못하는 검이다.
그 검이 무엇인지는 아걸도 모른다. 본 적이 없다. 아삼이 말해 줘서 아는 것이다. 사실은 아삼도 그런 검을 본 적이 없다. 아삼도 사부에게 들은 소리다.
아버지 대공 허도강은 그런 검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에 이공 허도기는 그런 검이 없었다.
그래서 허도기가 숨죽였던 것이다. 단지 사부가 성검문주와 호형호제한다고 해도 욕망을 억누르고 소축 생활을 했던 것만은 아니다. 원래 형이 강했다.
허도강도 그런 검이 있었기 때문에 사부를 만날 수 있었다.
단순히 지금 눈에 보이는 조명십해만으로는 사부를 이기지 못한다. 자신은 꺾을지언정 사부에게는 안 된다.
절대 무적 검!
아걸은 그 검을 경계했다.
옛날에는 갖지 못했던 검이라고 해도, 그로부터 이십 년이 지났다. 허도기 같은 검재라면 그런 검을 가지고도 남을 시간이다. 아니, 가졌다고 확신한다.
아걸은 허도기와 싸우는 동안 그 검이 언제 터져 나올지 항상 긴장하면서 기다렸다.
일반적인 발검술조차 상대하지 못하는 처지에 절정 검초까지 구경할 수는 없다. 허도기의 모든 것을 넘어서야만 그 검이 튀어나올 것이다.
아걸은 모든 걸 경험했다.
발검을 경험했고, 조명십해와 싸웠다.
아마도 다음에는 그 검이 튀어나올 것이다.
일홀도 같은 검, 절대 무적 검.
‘좋아! 내가 조금 더 강해지면 되지.’
아걸은 아픈 몸을 일으켰다.
“끄응!”
촤아악! 촤악!
차가운 물로 몸을 씻었다.
아주 깊은 상처를 입은 후에는 반드시 찬물로 목욕하는 습관이 생겼다.
아팠던 동안 몸에 묻었던 땀과 피를 씻어내고, 무엇보다도 패배의 충격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식이다. 굳이 의식이라고까지 말할 수도 없는 작은 습관이다.
‘또 하나 생겼군.’
아걸은 아랫배를 보며 웃었다.
아랫배에 검 자국 하나가 또 생겼다.
그의 몸은 가루로 베이고, 세로로 베이고, 찔리고…… 온갖 흉터로 가득했다.
자국 하나하나마다 사연이 다 있다.
‘늙을 때까지 죽지 않는다면 심심하지는 않겠어. 이 상처를 보면 누군가가 떠오를 테니.’
아걸은 휘적휘적 걸어서 사형의 묘지로 갔다.
사형의 묘지는 자신이 파놓은 상태 그대로였다. 누군가 손댄 흔적이 전혀 없었다. 혹시나 짐승들이 와서 시신을 훼손할까 봐 걱정했는데, 그런 일도 없었다.
아걸은 돌을 주어서 사형의 무덤에 덮었다.
‘봉분을 두 번이나 만들 줄이야.’
사형의 칼은 묘지 옆에 제멋대로 뒹굴고 있었다.
칼을 주어서 묘비 대신 제대로 꽂았다.
“사형, 이제 갑니다.”
아걸은 봉분을 어루만졌다.
사형은 사부의 원수다. 하지만 죽음이 모든 걸 해결해 주었다. 이상하게도 사형이 죽자 모든 미움이 사라졌다.
죽음은 많은 것을 풀어준다.
죽어도 풀리지 않는 원한이 있기는 하다. 몽설이 아마도 그런 원한을 가지고 있을 텐데. 사형 둘이 모두 죽을 것을 알면 어떤 말을 할까?
아걸은 이가 수북이 빠진 반철도를 허리춤에 꽂고 오음산을 걸어 나갔다.
* * *
따각! 따각! 따각!
마차가 장군부를 스쳐 지나갔다.
흔히 있는 일이다. 장군부는 큰길로 둘러싸여 있어서 항상 마차가 지나간다.
이번에도 한 개가 지나갔을 뿐이다.
몽설은 마차에서 빠져나와 후문 안으로 들어섰다.
후문은 그녀가 소리 내지 않고 들어설 수 있게끔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따각! 따각! 따각! 따각!
몽설은 멀어져 가는 마차 소리를 들으면서 장군부 후원을 살폈다.
몸이 단단해 보이는 무인이 다가와 포권을 취했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이리 오시죠.”
무인이 자기소개도 하지 않았다. 다짜고짜 몽설을 데리고 후원 옆에 있는 쪽문으로 들어섰다.
몽설은 그를 따라갔다.
“오진북을 꺾으셨다고요?”
“네.”
“원주님 무공이 그 정도인 줄 몰랐습니다.”
“운이 좋았어요.”
“소축십검을 운으로 꺾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혈검이 대단하다는 건 압니다.”
“혈검을 아세요?”
“언제 기회가 되면 구경 한번 시켜주십시오.”
“제 검이 살수 검인 건 아시죠? 아무 기회가 생기지 않는 게 좋지 않나요?”
몽설이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무인이 고개를 돌려 몽설을 쳐다봤다. 하지만 이내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서며 그녀를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장군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고마워요.”
몽설은 무인이 열어 준 대청으로 들어섰다.
대청은 무려 문이 세 겹이나 되었다.
드륵! 하나가 열리고, 드륵! 두 개가 열렸다. 드륵! 세 번째 문이 열렸을 때, 몽설은 비로소 탁자에 앉아 책을 보고 있는 중년인을 보게 되었다.
“어서 오시게.”
중년인이 일어나서 그녀를 맞이했다.
“여긴 철옹성이네요.”
몽설이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그녀가 지나온 길, 대청 두 개에는 도검이 숨어 있다. 수십 개가 넘는 칼날이 그녀를 노렸다. 담이 약한 사람이라면 다리가 덜덜 떨려서 움직이지도 못했을 것이다.
조위 장군은 키가 다소 작고, 얼굴은 진중한 미남이었다. 초로에 접어든 나이지만 아직도 근육은 단단해 보였다. 대체로 자상하다는 인상을 풍겼다.
장군이라고 하면 매우 사납고 흉포할 것 같은데, 조위 장군은 지장(智將)의 면모를 여실히 드러냈다.
“연통은 받았네.”
“네.”
“이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무슨 일로?”
“전보영주가 죽은 일 때문에 왔어요.”
“음. 전보영주 다음으로 날 노린다는 거겠지?”
“네.”
“준비하고 있네.”
“마유 마인들이 올 거예요.”
“대충 알고 있지.”
장군이 찻주전자를 들어서 몽설의 잔에 차를 따라왔다.
또르록!
맑은 차가 찻잔을 채웠다.
“그것 때문에 온 건가?”
“네.”
“날 보호해 주겠다고?”
“네. 공짜로 해드리려고요.”
“무엇 때문에?”
“그냥 호의, 받으세요.”
“거절하지.”
장군이 일언지하가 거부했다.
몽설이 장군을 쳐다봤다.
“후후! 나라고 자네의 호의를 모르는 바 아니고…… 자네가 무슨 뜻에서 호위를 해 주겠다는 건지 진의도 알고 있네. 다 알고 있지만 받아들일 수 없네.”
이상한 말들이 오고 갔다.
한 사람은 억지로 호위를 서주겠다고 하고, 한 사람은 거부한다.
“왜요?”
몽설이 차분히 물었다.
“자네가 아걸의 부인이기 때문이지.”
“그게 문제가 되나요?”
“아걸이 지금 생사불명이네. 그런 상태에서 자네까지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어. 나를 노리는 게 실패하면, 왜 실패했는지 원인을 찾을 테고, 그 원인을 제공한 쪽에 화살을 돌리겠지. 그건 자네가 받아내야 해. 그런 일을 시킬 수 없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하지.”
조위 장군이 말했다.
“저도 그래서 장군님을 보호하려고 합니다.”
몽설이 말했다.
“그 사람이 살아 있으면 틀림없이 여기로 올 거예요. 장군님을 보호하러. 결코, 마유 마인들이 장군님을 해치게 내버려 두진 않겠죠. 그 사람이 생사불명이니 제가 그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참고로 저희 취화원 모든 살수가 반대한 일이라는 것만 알아주세요.”
조위 장군과 몽설은 서로를 쳐다봤다.
“아걸이 내 자식을 죽인 건 아나?”
장군이 한참 만에 말했다.
“네. 그 비무 때, 저도 혈무대 아래에 있었어요. 지켜봤습니다.”
“공부 때문에 내 아들이 죽었고, 공부 때문에 아들을 죽인 자와 손잡았지. 지금은 아들을 죽인 자의 부인이 날 보호하겠다고 하는군. 하하하! 차 들지.”
장군이 웃으며 차를 들었다.
몽설도 차를 들이마셨다.
장군은 차를 다 마실 때까지 말을 하지 않았다. 차를 조금씩 음미하면서 마셨다.
차를 다 마신 후에도,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은 후에도 침묵했다.
몽설은 답변을 기다렸다.
이번에도 거절한다면 물러설 생각이다. 아걸을 내세운 이상, 자신에 대한 거절은 아걸을 거절하는 것과 같다. 능력 여하에 불문하고 거절한 것이다.
한참 만에 장군이 입을 열었다.
“취화원을 사지.”
“팔지는 않아요.”
“나는 됐네. 난 보호해 줄 사람이 많아. 대신 한 사람을 보호해 주게. 값은 이 장군부로 하지.”
“네에?”
몽설이 깜짝 놀라서 장군을 쳐다봤다.
“이 장군부에 있는 병기, 비급, 재화…… 사람만 제외하고 모두 다 청부금으로 주지. 이만하면 어떤 살수 문파라도 평생 최대 청부일 텐데, 하겠나?”
장군이 진중하게 말했다. 결코, 농담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