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八十章 우연상우(偶然相遇) (1)
“장군. 어찌 저 여자는 내 말을 못 믿는 것 같은데?”
사내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그럴 리 없습니다.”
사내는 분명히 농담으로 말했다. 하지만 조 장군은 허리를 숙이면서 진심으로 답했다.
“궁금해서 그러는데, 너는 분을 안 바르나?”
사내가 몽설에게 물었다.
“네. 발라 본 적이 없습니다.”
“왜?”
“살수는 냄새를 죽여야 합니다. 분 냄새나 연지처럼 향긋한 냄새, 쓰레기나 시궁창 같은 악취, 며칠 동안 감지 않은 머리 냄새, 몸에서 나는 인내까지 철저히 죽여야 합니다.”
몽설도 고개를 숙인 채 답했다.
“그런데도 곱군.”
“감사합니다.”
“빈말이 아냐. 내 여자…… 아니, 말은 제대로 해야지. 내 처첩이 몇인 줄 알아?”
“모릅니다.”
“스물넷. 장군, 맞지?”
“네. 맞습니다.”
사내는 자신의 부인 숫자에 대해서 장군에게 물었고, 장군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아이는 몇이지?”
자기 자식 숫자를 장군에게 물었다.
“왕자님이 열세 분, 공주님이 열여섯 분이십니다.”
사내가 폭포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여자가 이렇게 많고, 자식들이 이 정도면 얼굴도 기억이 나지 않아. 가물가물해. 처자식이라는 것이 매일 보는 것도 아니고 몇 달에 한 번 보니…… 이야기가 빗나갔군. 넌 내 여자 누구보다도 피부가 고와. 내 여자들은 정말 화장을 많이 하거든. 그런데도 네가 고와. 한눈에 피부가 고운 것부터 보였어.”
“…….”
몽설은 대답하지 못했다.
“천하절색에 피부도 곱고, 젊고…….”
사내가 몽설을 쳐다봤다.
순간, 몽설은 뱀이 몸을 훑고 지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상당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사내가 말했다.
“후후! 내가 이 정도 말하면…… 무섭지 않나? 내 입에서 어떤 말이 툭 튀어나올지 알고. 내가 말을 하면 넌 듣든가, 죽어야 하는데. 들을래, 죽을래?”
몽설은 조 장군을 힐끔 쳐다봤다.
조 장군은 전혀 동요하지 않고 묵묵히 시립해 있었다. 어떤 말을 주고받든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듯 보였다.
“일단 어떤 말씀을 주시는지 들어보고 판단하겠습니다.”
“아니, 아니. 내 말에는 판단이라는 말이 통하지 않아. 따르든가, 죽든가.”
“그럼 제 말을 수정하겠습니다. 들어본 후에 결정하겠습니다.”
“차분하군.”
“…….”
“결기도 있고. 네가 뭐 별거냐는 거지?”
“황송합니다.”
“전혀 황송하지 않잖아. 말만 그렇지.”
“그만 놀리시지요. 취화원주, 농이라는 것을 모르는 각박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조 장군이 처음으로 거들었다.
그러자 사내가 고개를 돌려 조 장군과 몽설을 쳐다봤다. 그리고 몽설을 보며 자신의 옆에 있는 바위를 톡톡 쳤다. 와서 앉으라는 말이다.
“서 있겠습니다.”
몽설이 허리를 숙이며 답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사내도 물러서지 않았다. 다시 한번 손으로 탁탁 쳤다.
몽설이 또다시 사양하려고 할 때, 조 장군이 팔꿈치로 슬쩍 그녀를 떠밀었다.
몽설이 장군을 보자, 장군이 눈짓까지 보내왔다.
몽설은 두 손을 모아 시립한 채, 조심스럽게 걸어서 사내가 앉으라는 바위에 살짝 앉았다.
“고개를 들고 폭포를 봐봐. 시원하지?”
“네.”
“아까…… 혈해검신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지?”
“네.”
“혈해검신이 너 같았을 거야. 당당하고, 기개 있고, 난 너와 상관도 없는데 무슨 헛소리냐. 말대꾸도 또박또박하고. 거기에 무공까지 높아. 그러면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지. 안 그래?”
“네.”
몽설이 소신껏 대답했다.
사실, 혈해검신까지 들먹일 필요가 없었다. 자신 역시 같은 기분이었다. 사내가 처첩을 말하고, 얼굴을 말하고, 은근히 ‘너 욕심 난다’라는 투로 말할 때, 기분이 좋을 리 없다.
‘당신 호위는 천금을 줘도 거절해.’
몽설은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그러니 사내 옆에 앉아 있는 지금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이러다가 불쑥 손이라도 잡아 오면 어떻게 뿌리쳐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조용히, 아니면 과감하게?
사내가 말했다.
“혈해검신이 몰랐던 거지. 선친이 뭘 할 수 있는지. 선친 눈 밖에 나면 이 땅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을. 무공으로 선친을 겁박하는 것도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
몽설은 불쾌한 기분으로 묵묵히 듣기만 했다.
“선친과 만난 후 이 년 후, 혈해검신이 제 발로 선친을 찾아왔어. 그리고 이걸 놓고 갔지.”
사내가 옆에 놓여있던 보자기를 들어서 몽설의 무릎에 올려놨다.
“이게 무엇인지……?”
“혈해검신이 남기고 간 신경이다. 원래는 하권이었으나 상권이 된 비운의 비급이지.”
“네? 신경이요?”
몽설은 깜짝 놀라서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다가 다시 곧바로 고개를 떨궜다.
옆에서 묵묵히 듣고 있던 조 장군도 신경이라는 말에 깜짝 놀란 듯했다. 정녕 장군조차도 지금 사내가 말하고 있는 비사는 몰랐던 게 분명했다.
“혈해검신이 신경을 놓고 갔는데, 왜 놓고 간 줄 아느냐?”
“모릅니다.”
몽설이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대답했다.
“심경과 검경만 가지고도 혈검을 펼칠 수 있지. 하지만 신경까지 더해지면 가히 천하무적. 선친을 두려움에 떨게 만든 무공이 나오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느냐?”
“네. 모르겠습니다.”
“혈해검신은 자신의 무공이 사내를 두려움에 떨게 했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안 거지. 그런 무공을 계속 가지고 있다가는 멸문의 화를 당한다는 것도. 그래서 뭐라고 할까? 선친에게 일종의 인질을 내놓고 간 셈이야.”
사내가 ‘인질’이라는 말을 언급했다.
혈해검신이 비급을 담보로 내놓았다는 말이다.
사내는 역시 황상이다. 하지만 아무라 황상이라고 해도…… 무인에게 비급은 생명이나 다름없는데. 또 어떻게 비급이 인질로 둔갑할 수 있지?
“혈해검신이 이 비급을 내놓은 이유는 ‘혈검은 결코 완벽해질 수 없습니다. 안심해도 좋습니다’ 하는 뜻이겠지. 실제로 혈해검신에게는 딸이 두 명 있었는데, 두 딸에게도 신경을 전수하지 않았어. 영원히 묻힌 거지.”
“혹시 혈해검신의 따님이 현정부인…… 이신가요?”
꿀꺽!
몽설은 질문하면서도 긴장이 되어서 마른 침을 삼켰다.
“맞아. 혈해검신의 큰딸이 이귀비(李貴妃)이고, 작은딸이 현정부인이야. 당시 선친은 큰딸을 납치하다시피 해서 첩실로 삼았지. 현정부인은 성검문주와 혼인 직전이었는데, 그 혼인도 어떻게 될지 모를 판이었고.”
“비겁하네요.”
“큰딸과 작은딸…… 모두가 인질이니, 신경으로 인을 바꾼 거지. 후후후!”
사내가 씁쓸하게 웃었다.
“받아라. 이게 있어야 혈검이 완전해져.”
사내가 손을 들어서 보자기를 툭 쳤다.
“혈해검신께서 그런 뜻으로 혈검을 남기셨다면 저도 받을 수 없습니다.”
몽설이 보자기를 다시 내밀었다.
“선친이 납치하다시피 끌고 온 이귀비가 어찌 되었는지 아느냐?”
“불행하셨겠지요.”
“불행했지. 대가 굉장히 센 분이신데…… 현정부인의 앞날을 위해서 순순히 납치당하셨거든. 그러니 선친과 관계가 좋을 리 없고. 자식을 낳았는데, 후후! 황제를 얼마나 원망했는지 핏덩어리의 오음(五陰)을 끊어 버렸어.”
“어멋!”
몽설이 깜짝 놀랐다.
오음절맥(五陰絶脈)!
오음절맥을 당한 사람은 음양이기가 뒤엉켜서 스무 살을 넘기지 못하고 죽는다. 어떤 영약도 듣지 않고, 천하 신의가 옆에 붙어살아도 소용없다.
사개가 말했다.
“네가 보기에는 내가 오래 살 것 같으냐?”
“앗!”
몽설은 이번에는 더 크게 놀랐다.
병약한 사내, 힘없는 말투, 축 늘어진 모습…… 하지만 사내 나이는 마흔이 넘었다.
몽설은 말을 하지 못했다.
“내가 이귀비의 아들이다. 오음절맥을 당한. 후후! 어머니는 그 일로 별궁으로 쫓겨나서 돌아가셨고…… 지금도 황후(皇后)로 추대되지 못하고 있지. 자식이 황제가 되었는데도.”
‘후욱!’
몽설은 드디어 ‘황제’라는 말을 들었다.
사내는 황제가 맞다.
황제가 손을 들어서 몽설의 어깨에 올렸다. 그리고 어깨를 어루만졌다.
“예(禮)가 아니라는 말은 하지 말고…… 잠시만 어깨 좀 맡겨라. 촌수로 따지면 나와 아걸은 이종(姨從)이지. 넌 이종 질부가 되는 셈이고. 이종 질부의 어깨를 만지는 건…… 패륜일까? 하지만 넌 내가 세상에 태어난 후, 내 목숨을 노리지 않는 첫 번째 친척이야. 그러니 잠시 좀 있자. 반갑구나.”
어깨를 만지는 손에는 힘이 없었다. 금방이라도 스르륵 흘러내려도 하등 이상하지 않았다.
“오음절맥을 당하면…….”
몽설이 뒷말을 꿀꺽 삼켰다.
세상에 알려진 바로는 스무 살을 넘지 못하고 절명한다. 한데, 황제는 마흔을 넘기고 쉰에 가깝다.
“어머니란 분이 오음을 끊으면서도 한 가닥 정은 남았던지…… 후후! 덕분에 조금 오래 버티고 있다.”
황제가 어깨를 툭툭치고는 팔을 내렸다.
“신경, 받아라. 받아서 혈검을 완성해. 당시 어머니가 황제를 그렇게 미워했던 건 단순히 납치해서가 아니었지. 당시, 혈해검신은 천하제일을 노리고 있었다. 성검문주, 일홀문주와의 승부가…… 하지만 신경을 펼치지 않고는 이길 수 없는 사람들이었고…… 황제가 혈해검신을 좌절시킨 데 대한 분노가 컸지.”
“네.”
“이모가 비명횡사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공부를 불러들였더니…… 후후! 요즘 이상한 말이 나돌아.”
황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몽설은 이제야 공부 허도기가 황제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받게 된 이유를 알았다.
허도기는 이모의 시동생이다. 이모부의 동생이다.
삭막한 황궁 생활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올라서기에는 충분한 조건이다.
“후후! 공부에게 조명천하를 좀 보여달라고 그랬더니 그걸 그렇게 안 보여 줘. 공부도 혈해검신의 전례를 알고 있었던 거지. 조명천하를 보여주면 내가 두려움에 떨 거고 그러면 뭐든 하나는 내놔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겠지. 약은 사람이야. 공부는.”
황제가 처연하게 웃었다.
“안으로 드시죠. 물바람이 셉니다.”
장군이 조용하게 말했다.
“시원하고 좋잖아. 이렇게 좋은 사람도 있고.”
황제가 환하게 몽설을 쳐다봤다.
“아걸은 일홀도라고?”
“네.”
“일홀도도 보고 싶은데. 볼 수 있을까?”
“기회를 마련해 보겠습니다.”
“아직 혼인은 안 했다고 들었는데?”
“네.”
“나 죽을 날이 얼만 안 남았어. 나 죽기 전에 모든 일 마치고, 혼인하는 모습도 보여 주고.”
“노력해 보겠습니다.”
“후후후! 재미있겠어. 그걸로 혈검을 완성하면 아걸과 싸울 건가? 천하제일은 가려야 하잖아?”
“천하제일은 없습니다.”
“근거는?”
“아걸은 제가 본 무인 중 단연 최고예요. 정말 강해요. 그런데도 아직 일홀도를 찾지 못하고 있어요. 공부와 네 번이나 싸웠고, 소축십검을 죽이고…… 그런데도 아직까지 천하제일이 되지 못하고 남의 무공만 쓰고 있어요. 저는 설혹 아걸이 본인만의 칼을 얻는다고 해도 그 칼이 천하제일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해요.”
“취화원이라고?”
“네? 네.”
“장군.”
“네.”
조장군이 대답했다.
“취화원은 내 직속으로 넣어. 내 명령 없이 전권을 행사할 수 있는 최고 집법기관으로. 단, 기한은 내 생존 시까지만. 내가 죽으면 취화원은 다시 강호로. 해 주겠지?”
“화, 황제님!”
몽설이 너무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황제의 명령은…… 몽설에게 황제 노릇을 하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아삼은 금룡패 정도를 원했는데…… 이건! 이것은!
황제가 몽설의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로 손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내 호위는 됐고…… 내가 사람을 잘못 들여서, 이 나라가 힘들어. 뿌리를 뽑고 있는데, 힘을 쓸 일이 많아. 질부 수하들, 많이 다치겠지만…… 해 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