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八十章 우연상우(偶然相遇) (2)
타닥! 타닥! 타닥! 타닥!
모닥불이 거세게 타올랐다.
장작은 아끼지 않고 듬뿍 쌓아서인지 불길도 어린아이 키만큼 솟구쳤다.
몽설은 멍하니 모닥불을 쳐다봤다.
불길 하나하나가 살아서 춤추듯이 올라간다. 참나무 타는 냄새가 구수한 향기를 풍기면서 퍼진다. 때마침 찬 바람이 불어와서 몸도 마음도 상쾌해진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하늘은 무척 깨끗하다. 별들이 깨를 뿌려 놓은 듯 촘촘히 박혀 있다.
휘이이잉!
또다시 산바람이 세차게 몰아치며 지나갔다.
모닥불의 따뜻한 열기와 산바람의 차가움이 섞이면서 차고 뜨뜻한 열기가 동시에 느껴졌다.
“그거 안 볼 텐가?”
장군이 보자기에 쌓인 혈검경 상권을 보면서 말했다.
“아직 결심이 안 서서요.”
“후후! 자네를 황상께 배알시키면 틀림없이 품에 안으실 거로 생각했지. 워낙 정에 굶주린 분이시니까.”
“부인이 스물네 명이나 된다면서요?”
“후우!”
장군이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무인이 자네처럼 나랏일에 관심이 없으면 좋을 텐데. 자네는 정말로 나랏일에 관심이 없군.”
“관심을 가질 일도…… 여유도 없죠. 저 살기 바쁘거든요.”
“그렇지. 무인은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이지.”
장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몽설은 나랏일 같은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시골 촌구석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보다 조금 더 많이 아는 정도? 그것도 전보영과 관계를 맺는 바람에 아주 조금 관심을 가진 게 그 정도다. 전에는 황제가 누구인지도 관심이 없었다.
황제의 부인이 누구이며, 자식이 몇 명인지 알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부모 같은 원주가 죽고, 동료들이 척살 당하는 마당에 무슨 배부른 소리인가.
장군이 말했다.
“황상에게 부인이 많은 데는 내 탓도 있네.”
몽설이 장군을 쳐다봤다.
장군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많은 나라를 공격했고, 정복했지. 하나를 무너트릴 때마다 인질을 거뒀는데, 인질 중에서 가장 좋은 인질이 왕의 자식이야. 왕자, 공주, 옹주. 특히 정략결혼은 인질을 잡아 두는 최상의 방법이지. 평생 붙잡아 놓을 수 있으니까.”
“잔인하네요.”
“전쟁이 원래 잔인해. 안 하는 게 가장 좋고, 해야 하면 이겨야 하고, 이기면 두 번 다시 덤벼들지 못하도록 확실히 짓눌러야 하지. 그게 오히려 희생을 막는 길이야.”
황상의 처나 첩으로…… 정략결혼.
황제의 얼굴도 모르고, 몇 번째 부인인지도 모른 채 무조건 낯선 나라로 끌려오는 여자들.
결코, 좋은 감정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말이네. 이게 황상에게도 참 잔인한 짓이었어. 내 칼에 부모 형제 연인이 죽었는데…… 한을 품을 여자를 황상에게 안긴 셈이지. 죽은 자보다는 아직도 산 자가 많고, 쓸데없는 짓을 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것을 아니까 별 탈이 없을 것이라고 본 거야. 그리고 이건…… 역대로 그래왔던…… 뭐라고 할까? 관행? 그렇게 해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적국으로 끌려온 여인은 인질이 된다.
황제의 첩이라도 되면 다행인 것이고, 노예로 부림을 당해도 어쩔 수 없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소용화(蘇容華)라고…… 북연(北燕)을 치고 데려온 공주인데, 상당히 예뻤지. 북연제일미(北燕第一美)라고 불렸으니까. 당연히 황상도 한눈에 반한 듯하고.”
장군이 회한 젖은 눈으로 모닥불을 쳐다봤다.
“황상의 침소에 들 때까지만 해도 순조로웠지. 병기 같은 것도 없었고, 공주도 차분했고. 한데, 황상이 입맞춤하려는 순간 입에 물고 있던 독단을 깨문 거야. 그 독단을 황제의 입에 밀어 넣었지. 자신의 혀가 녹는 것을 감수하면서.”
“음!”
취화원은 살수 문파다. 자신을 포기하고 상대를 죽인다는 게 어떤 것인지 안다. 하지만 소용화라는 여자를 이해한다. 자신이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장군이 말했다.
“소용화와 황상의 사이는 보통 연인 관계나 가문의 복수 같은 것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이야. 나라의 존폐가 달린 일인 거지. 둘 사이가 좋으면 나라의 영역이 북연까지 확장되는 것이고, 사이가 좋지 않으면 북연은 지옥이 돼.”
‘지옥이 되더라도…… 원수 품에 안길 수는 없어.’
몽설은 모닥불을 쳐다봤다.
지금 생각은 그렇다. 하지만 자신이 정작 소용화의 입장이 되면 어떤 행동을 할지 모르겠다.
“나는 나라의 기반을 튼튼히 한다고 인질을 끌고 온 것인데, 공주 이장에서 황상은 나라를 망하게 한 자의 수괴였던 거야. 이 사람만 없었으면 내 나라가, 내 민족이, 그렇게 많이 처참하게 유린당하지 않았을 텐데.”
“그 후부터 황상은 잠자리를 끊었네.”
“네.”
“잠자리는 하지 않아도 황궁에 들어오는 여인은 계속 이어졌지. 후후! 솔직히 황상의 은혜를 입지 않은 부인도 꽤 있어. 잠자리를 하지 않은 부인이지. 후후후!”
타탁! 타탁! 타타탁!
모닥불이 높이 타올랐다.
“황제라고 다 좋은 것만은 아니네.”
장군이 한숨을 토해 내듯 말했다.
황상은 적자가 아니다. 황권을 거론할 때면 순위에 들지도 못했던 귀비의 자식이다. 그것도 귀비가 강제로 유폐되었다가 결국은 사약을 받고 죽었다.
황상은 당장 내쳐졌어도 당연했다.
오음절맥이라서 몸도 허약하고, 집중을 못 하니 학문도 깊지 않았다. 주변에 사람도 모이지 않았다. 생모가 무인 출신이라서 황궁 내에 세력 기반도 없었다.
그런 왕자가 황상이 되었다.
선황의 애원(哀怨)은 못난이 왕자에게 머물렀다. 늘 불쌍하고, 애처롭고, 후회가 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선황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한 여인이 있었다.
- 왕자를 죽게 하지 마라.
선황이 조 장군을 불러서 유일하게 한 말이다.
그런 만큼 황상도 조 장군을 신뢰했다. 또 이모의 시가인 성검문을 좋아했다. 성검문주가 천하제일인 소리를 듣는 허도기이니 당장 불러서 옆에 앉힌 것은 당연하다.
현재, 황상이 공부의 의도를 모를 것으로 생각하나? 안다. 알면서도 바로 치지 않는 것은 역시 믿음 때문이다. 공부라면 반드시 제자리로 돌아갈 것이라고 믿고 있다.
황상은 전보영 수장인 탁호가 죽은 사실도 알고 있다.
마유 마인들이 움직여서 암살당했다는 사실도 파악해 놨다. 그런데도 아직 공부에 대한 신뢰를 거두지 않았다. 이십 년 동안 공부를 믿었던 마음은 그만큼 컸다.
그런데 그 마음이 몽설을 보는 순간 크게 흔들렸다.
몽설은 공부만큼이나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다. 어떤 면에서는 공부보다도 더 가까운 친족이다. 몽설의 남자인 아걸과는 외가 핏줄이 섞이기도 했다.
조 장군이 장군부를 던져가면서까지 몽설을 황상에게 배알시킨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신뢰는 신뢰로 무너트린다.
가장 좋은 보검은 또 다른 보검으로 잘라낸다.
몽설은 황상이 자신에게 지고지상한 명령을 내릴 때, 곧바로 조 장군의 의도를 알아챘다.
황상이 그 말을 할 때, 조 장군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조정에서 반대할 것이 분명한 일이고, 세상이 몹시 시끄러워질 일인데도 지극히 편안해 보였다.
그래서 알았다. 조 장군의 진실한 목적을.
“장군님은 참 무서운 분이시네요.”
“그런가?”
“지장이라고 들었어요. 지략이 비상하시다고.”
“어쩌다가 운이 좋아서…… 생각하는 대로 맞아 들어갔을 뿐이지.”
“제가 장군부를 찾아갔을 때만 해도 장군님을 지켜드리기 위해서 뭐든지 다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장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을 보면 알지. 그런 마음, 바로 알았네.”
“지금은 그럴 마음이 없습니다.”
“이해하네. 아무래도 남에게 이용당하는 것은 기분 나쁘지. 하지만 이번 일은…… 사심이 전혀 없어. 그래서 나도 당당하네. 자네에게 떳떳할 수 있어.”
장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장군은 황상에게서 공부의 신뢰를 거두기 위해 몽설을 이용했다.
하지만 이 신뢰를 거두는 것 속에는 조 장군에 대한 신뢰도 포함되어 있다.
공부에 대한 신뢰가 거둬진 만큼, 장군에 대한 신뢰도 그만큼 무너진다.
황상이 말했다. 몽설에게 명령 없이도 집행할 수 있는 무소불위의 집법기관을 만들어 주라고.
대단히 무서운 말이다.
만일 몽설이 역심을 품는다면 황상은 반항도 해보지 못하고 죽는다. 황상 곁에서 모든 검을 치우고, 취화원 칼이 주변을 에워싼다. 더욱이 취화원은 황상이 장악한 조직도 아니다. 몽설을 잘 아는 것도 아니다. 처음 만났다.
이런 일은 역사 이래 없었다.
이런 기관이라면 조 장군조차도 출입을 통제할 수 있다.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황상에 별궁에 가둬둘 수도 있다. 몽설이…… 황제가 될 수 있다.
타닥! 타닥! 타닥! 타닥!
모닥불이 거세게 타올랐다.
황상이 기거하는 자그마한 저택에는 초저녁부터 불이 꺼졌다. 날이 어두워질 무렵, 잠시 불이 밝혀졌다가 바로 꺼졌다. 그리고 캄캄한 어둠에 묻혔다.
황상의 침실만 어두운 것이 아니다. 저택 전체에 아주 조그마한 촛불 하나 밝히지 않았다.
보초도 없다.
저택이 아예 텅 비었다.
“살수가 옆에 있는데도 잠이 잘 오시나 봐요.”
몽설이 어둠에 잠긴 저택을 보며 말했다.
“자네가 지키고 있잖나.”
“저는 살수예요. 살수가 돈에 움직이는데, 가장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걸 모르시나 봐요.”
“말했잖은가. 황상에게 자네는 피붙이라고. 이종 질부이기는 해도 가장 가까운 피붙이지. 참 괴로운 말이지 않나? 자식이 몇 명인데, 그들보다 이종 질부가 가깝다니.”
황상은 폭포에서 몽설과 만난 후, 주변에 깔린 모든 군사를 삼 리 밖으로 물렸다.
삼 리 안에는 딱 네 사람만 존재한다.
황상과 환관, 그리고 조 장군과 몽설이다.
두 사람은 저택 안에 있고, 두 사람은 저택 밖에서 모닥불을 피운 채 밤을 밝히는 중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몽설이든 조 장군이든 작심하고 검을 들면 황상은 죽는다. 또 허도기가 이런 사실을 알았다면 만사 제쳐놓고 공격을 가해올 것이다.
이게 단순히 몽설을 믿기 때문인가?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리다. 몽설을 믿기 때문에 저들을 물린 것은 맞다.
또 자신을 지켜주는 군사 중에도 자신을 노리는 자가 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항상 취침할 때는 군사를 삼 리 뒤로 물려서 안전을 도모했다.
비참한 현실이다.
자신을 지켜주는 자 중에 살의(殺意)를 지닌 자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실일 수도 있고, 단순한 의심일 수도 있지만, 무척 피곤한 일이다.
황상은 오늘 잠을 편히 잘까? 아니면 살수가 옆에 있어서 오히려 뜬눈으로 밤을 새울까.
어쨌든 불은 이른 저녁부터 꺼졌다.
“장군님은 어떻게 하시려고요?”
몽설이 물었다.
밤은 길다. 뜬눈으로 밤을 밝히려면 아무 말이라도 나누는 것이 심심찮다. 또 그럴 필요도 없다. 두 사람 사이에는 나눠야 할 말이 정말 많다.
“일단은 내 수하들이 막아 주겠지만…… 그 정도는 뚫을 수 있을 것이고…… 이번에는 피하기가 쉽지 않겠지. 그래서 서둘러 자네를 데려온 것이기도 하고.”
“장군님도 목숨을 내놓으셨네요.”
“하하하! 난 항상 목숨을 내놓고 다니네. 어느 전장에 가도 목숨을 내놓지 않은 적이 없어.”
“오늘 여기서 벌어진 일을 공부가 알면 첫 번째 타격 목표는 장군가와 취화원이 될 거예요. 하지만 취화원은 황궁 안으로 스며들 테니, 결국은 모든 화력이 장군가에 집중되겠죠.”
몽설이 웃으면서 말했다.
“자네 머리가 비상하다는 소리는 들었네. 맞군.”
조 장군이 웃었다.
“어차피 나야 곪은 고름 아닌가. 공부에게는 아주 완벽히 썩은 고름이겠지. 칼로 도려내야 하는.”
“장군께 공부는요?”
“같은 생각이지. 조 장군을 밀어주는 자가 마유만 있는 것은 아니네. 이미 짐작하고 있겠지만.”
“또 누구죠? 아시는 대로 말해 주세요.”
“세외(世外) 팔국(八國).”
“세외 팔국요? 그 나라들이 전부 다요?”
몽설이 놀라서 되물었다.
세외 팔국은 조 장군이 점령한 나라들이다. 아까 말한 소용화라는 공주의 나라, 북연도 세외 팔국 중 하나다. 그들이 힘을 길러서 들이친다면…….
이건 무림이 감당할 수 있는 싸움이 아니다.
일홀도와 성검문의 싸움은 어린애 장난처럼 여겨진다. 정말로 공부가 그렇게까지 일을 벌인 것인가?
“일이 어느 정도나 진행되었어요?”
몽설이 정색하고 물었다.
지금까지는 지나가는 말처럼 가볍게 말했는데…… 세외 팔국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매우 진지해졌다. 자칫하면 이 나라…… 전란에 휩싸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