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八十章 우연상우(偶然相遇) (5)
버리는 일이…… 이게 일홀도에 도움이 되나? 일홀도를 이루려면 오히려 정반대로 더 날카롭게 진행해야 하지 않나? 도신일체를 넘어서 몸이 칼이 되어야 하지 않나?
신도(身刀), 몸이 칼이다.
아걸의 일홀도는 몸이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든 신경이 곤두서 있어야 한다.
배를 타고 강을 따라 흘러내려 오면서 늘 신도를 떠올렸다.
모르겠다. 이게 맞는지 모르겠는데, 지금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싶다. 이것은 머리로 계산한 수련이 아니다. 몸이 곧 칼, 신도를 떠올리니 숨이 막혀서 못 살겠다.
평생 몸이 칼인 상태로 어떻게 사나.
허도기와 싸울 때는 그런 상태가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조금이라도 편해지고 싶다.
만약 이러다가 신도를 잃는 경우도 생각할 수 있다.
도신일체라는 것이 이루고 싶다고 이뤄질 수 없듯 신도 역시 갖고 싶다고 가져지는 것이 아니다.
지금은 신도를 이룰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날카로워졌다. 그래서 신도가 저절로 나타난 것이다. 아걸이 애써서 칼을 꺼낼 필요도 없이 저절로 칼이 떨쳐 나간다.
애써서 신도를 버린다?
이러다가 영영 잃어버리는 수가 있다.
이래서 많은 무인이 이미 얻은 칼을 버러지 못한다. 버릴 이유도 없다.
아걸은 숨이 막혀서, 이대로는 정말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버리기 시작했다. 허도기와의 싸움은 뒷전으로 미루고 당장 숨 좀 쉬자는 생각뿐이었다.
아직도 싸워야 할 상대가 많다.
소축십검 중 초가평과 진개가 남아 있다. 진개는 오진북을 이어서 성검문 문주가 되었고, 초가평은 무림 명숙을 죽인 후에는 종적을 감췄다.
그들 모두 언젠가는 부딪친다.
자신이 애써서 찾아갈 필요도 없다. 그들 역시 아걸과는 한순간도 공존하지 못한다. 언젠가는 자신들을 노린다는 점을 안다. 그래서 그들이 먼저 찾는다.
지금 상태에서 그들과 만나면? 글쎄? 이긴다고 장담하지 못한다.
오음산에서는 허도기와도 팽팽하게 싸웠지만, 지금은 그때보다 두세 배는 무뎌졌다.
아걸은 제일 먼저 이런 생각부터 지웠다.
허도기와 소축십검을 생각하면 신도를 버리지 못한다.
팽팽하게 곤두선 신경, 개미가 기어가는 것조차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감각, 그때마다 퍼뜩퍼뜩 떠오르는 삼십육 문주의 수많은 절공들…… 아! 숨이 막힌다.
지금까지는 이런 느낌을 참고 견뎌왔다.
아니, 이런 느낌조차 자각되지 않았다. 지금까지와는 정반대로 감각이 예민해질수록 좋았다. 상대방의 칼이 그만큼 빨리 느껴지고 즉시 대응할 수 있는데 좋지 않을 리 없다.
더, 더, 더, 더……!
아걸은 더 깊은 경지, 더 강한 칼만 추구했다.
배를 탈 때만 해도 그렇다. 신도를 생각하기 전까지는 반드시 자신만의 일홀도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음에는, 이다음에는 반드시 허도기를 벤다!
그러다가 한순간 숨이 막혔다.
풀벌레 울음소리가 들린다. 듣고 싶지 않은데, 신경에 거슬린다. 바람 소리도 세차다. 이 세상이 말하는 모든 소리가 고막을 후려쳐온다.
이러다가 미치는 거 아냐?
지금 아걸은 일홀도를 얻기 위해서 버리는 것이 아니다. 살기 위해서 버린다. 여기서 조금만 더 일홀도를 추구하면 당장 심마(心魔)가 찾아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과 싸우는 일은 절대로 없다.
상대를 적으로 생각하면 당장 모든 것이 확! 살아난다.
싸움은 아걸의 본능이다. 싸움이라는 생각만 일어나도 당장 온 정신이 날카롭게 곤두선다.
그러니 절대 싸워서는 안 된다. 그래서 시비가 걸리면 고개 숙여서 인사한다. 몇 대 때리면 맞는다. 심한 모욕을 당해도 웃는다. 그리고 얌전히 물러난다.
모든 생각을 다 지워 버린다.
오늘은 뭘 버렸지? 자존심도 버렸고, 자만심 같은 것은 없는 것 같고, 체면도 버렸고.
‘오늘은 버린 게 없네.’
아걸이 중얼거렸다.
오늘 버린 것들은 어제 버린 것들의 연속이다. 삶이라는 것은 어느 한 단면이 딱딱 맞아떨어지는 게 아니다. 오늘 자만심을 버렸다고 해서 버린 자만심이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내일이 되면 더 강한 자만심이 고개를 쳐든다.
사실 인간은 버릴 수 있는 게 없다.
매일매일 버리지만, 순간순간의 버림일 뿐이다. 영원히 사라지는 것은 없다.
그래서 매일 버리는 연습을 한다.
덕분에 한 가지 얻은 것은 있다. 밤에 잠은 잘 잔다.
아걸은 독한 화주를 준비했다.
사각! 사각!
나무를 대충 깎아서 그릇 비슷하게 만들었다. 술잔 여섯 개를 만든 것이다.
연잎을 잘라서 땅에 깔고, 그 위에 술잔을 빈 둘러놨다.
마른 나무를 구해서 모닥불도 피웠다. 그리고 마을에서 지붕을 새로 갈아주고 얻어온 닭 일곱 마리를 구웠다.
닭이 노릇노릇하게 구워졌을 때, 은거 무인 여섯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거 우리 마시라는 거지?”
쌍겸이 술독을 낚아채며 말했다.
아걸은 빙긋 웃었다.
“야! 어쩜 사람이 그러냐! 우리가 뒤따라오는 거 알고 있었지? 그러면서도 모른 척해! 넌 오랜만에 반갑지도 않냐! 엄한 사람 생으로 뇌옥에 처넣기나 하고!”
비석 장태전이 화난 듯 말했다.
아걸은 그들의 앞에 놓인 나무 잔에 화주를 따랐다.
“그래서 이렇게 한 잔씩 드리는 거 아닙니까.”
“뭐야? 생색내는 거야?”
“건배!”
아걸을 잔을 들어 올리면서 말했다.
“응? 건배?”
“네가 웬일이냐? 건배를 다 하게?”
“너 술 안 마시잖아!”
아걸은 ‘건배’ 한마디만 했을 뿐인데, 은거 무인들이 대거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배워 보려고요. 이거 맛있습니까?”
“그래, 사내라면 술도 좀 마시고 그럴 줄 알아야지. 잘됐네. 쭉 들이켜 봐!”
아걸은 화주를 입에 댔다.
순간, 역한 술 냄새가 콧속으로 확 스며들었다.
냄새가 좋지 않다. 솔직히 비위가 뒤틀린다. 맛은 어떨지 모르겠는데, 냄새는 인상을 찡그리게 만든다.
술이 처음은 아니다. 예전에도 마셔 본 적이 있다. 아삼이 권해서 마시기도 했고, 상처의 아픔을 잊기 위해서 마신 적도 있다. 사는 게 힘들어서 마시기도 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자신은 사실상 술하고 맞지가 않다.
술 냄새부터가 싫다. 하지만 단숨에 쭉 들이켰다. 술이 뱃속으로 흘러들어서 화끈한 기운을 일으킬 것이다.
화아악!
예상했던 대로 뱃속에서 불이 붙었다.
빈속에 마시는 술은 창자부터 태운다. 목구멍을 조여오는 것은 그다음이다.
“크윽!”
아걸은 인상을 찡그렸다.
“하하하! 술 마실 줄 아네? 잘 마시는데? 일부러 안 마신 거야? 칼 때문에?”
“가끔은 취하는 것도 좋아.”
은거 무인들이 활짝 웃으면서 술을 마셨다.
아걸이 괴이한 행동을 해서 걱정을 많이 했는데, 이제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것 같지 않은가. 그러니 오늘만은 허리띠를 풀어놓고 마음껏 마셔도 될 것 같다.
“이건 한 사람당 한 마리? 햐! 잘 구웠는데?”
변장술의 달인인 한향이 닭을 집어 들며 말했다.
“오늘 하루 종일 일하고 얻어온 닭입니다. 땀이 잔뜩 밴 닭이니까 간은 맞을 거예요.”
“어쭈! 농담도?”
쾌검을 잘 쓰는 나통이 다소 놀란 듯 아걸을 쳐다봤다.
아걸은 피식 웃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뭐 한 거야? 이해를 하려고 해도 도무지 이해가 안 되어서.”
쌍겸이 화주를 쭉 들이켜며 말했다.
“맞아. 나도 묻고 싶었어. 자네 정도 되면 이런 방법도 쓰나 하는 생각도 들고. 이런 식으로 돌아다녀서 고수가 되는 방법은 없는데 말이야.”
한향이 말했다.
아걸이 움직이는 모습은 은거 무인들도 모두 해본 방법들이다.
그들 모두 모든 걸 버려봤다. 세상을 등지고 홀로 살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나. 아픔도 있고, 세상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그래서 이런 방법을 안다.
버린다는 것의 의미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그들이 보기에 아걸은 무엇인가를 잔뜩 버리는 중이다. 무엇을 버리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모욕을 당하고, 자신을 학대하고, 가진 것을 버린다고 해서 나아지는 것은 없다.
칼은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은거 무인들은 안다. 해봤기 때문에.
술집에서 주지육림에 빠져 있는 것과 산에서 칼을 닦는 것은 정신 상태가 완전히 다르다.
칼을 쓰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정신을 가다듬어야 한다.
아걸은 주지육림에 빠져 있는 것과 같다. 이런 식으로 흘러 다니는 것은 몸도 망가트린다. 무인의 날카로움을 순식간에 날려버리는 아주 나쁜 생활이다.
그래서 물은 것이다. 왜 이런 일을 하냐고.
아걸이 술잔에 술을 따랐다.
“이거 제가 준비한 건데, 독하네요. 알딸딸해요.”
“벌써? 알딸딸해지려면 아직 멀었지. 몇 잔 마시지도 않았는데 취한 척하면 곤란해.”
“아닌데. 뱃속에서 불이 나는 것 같은데.”
“하하하! 그럼 더 마셔야지. 한고비 지나면 기분이 좋아지는 거 알지? 취해 보자고.”
쌍겸이 말했다.
아걸이 대답을 회피한다. 왜 이런 일을 벌이는지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 묻지 않았다.
술이 어느 정도 들어갔다.
아걸도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혀도 꼬여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술을 어디서 배운 거야? 왜 강술만 들이켜. 자자, 안주도 먹어가면서.”
비석 장태전이 닭 다리를 뜯어서 아걸에게 내밀었다.
아걸이 닭을 받아서 씹어 먹었다.
“이건 맛이 다르군요. 같은 닭 다리인데 술 취해서 먹으니 맛이 완전히 달라졌어요. 후후!”
“취했네. 취했어.”
황열이 말했다.
아걸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제가 삼십칠 대에요. 삼십칠 대. 일홀문 삼십칠 대. 서리가헌, 서리형개, 동박, 그리고 저 서리흔.”
‘서리흔?’
은거 무인들은 ‘서리흔’이라는 말에 일제히 침묵했다.
아걸에는 이름이 두 개 더 있다. 아버지의 성을 따른 허흔, 그리고 일홀문의 이름인 서리흔. 아걸을 아는 사람 중에서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아걸은 그중 서리흔이라는 이름을 말했다.
정식으로 일홀문도라는 사실을 세상에 드러내려는 것인가?
“이 네 명 중에서 동박 사형만 서리 성씨를 받지 못했어요. 칼은 비슷한데. 그 이유를 몰랐는데…… 후후! 이제는 알겠어요. 왜 동박 사형이 서리 성씨를 못 받았는지.”
“왜 못 받았나?”
황열이 물었다.
풍도곡 칼 귀신 세 명은 명성이 자자했다. 세 명 중 동박만 서리 성씨를 쓰지 못한다는 사실도 비밀이 아니다. 강호인이면 대다수가 알고 있다.
“동박 사형은 칼이 전부였어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칼로 꽉 채워져서 서리 성씨를 집어넣을 공간조차 없었다 이겁니다. 성씨를 넣어줘야 하는데 넣어줄 공간이 없어. 그러니 주지 못한 거죠. 너무 팽팽하게 당겨져 있어서.”
아걸은 알 듯 모를 듯한 말을 했다.
“일홀문에서 무공은 문제가 아니었던 겁니다. 일홀문도로 선택받았으면 일단 재능은 인정한 거고…… 성을 언제 주냐? 우선 자신의 칼을 갖고, 그리고 성을 넣어줄 공간이 있을 때 준다 이거죠. 공간! 공간은 여기서 만들어야 합니다.”
툭!
아걸이 자신의 심장을 쳤다.
“내가 서리 성씨를 받은 것은…… 우선 시간이 없었고, 허씨! 성검문 용골이라는 이유가 컸고…… 그래서 앞으로 잘 크겠지 하고 주기는 했는데…… 이놈의 서리흔이라는 이름이 들어갈 공간이 없어요. 여기가 꽉 차서.”
툭!
아걸이 다시 심장을 쳤다.
“그 이름을 쓰고 싶은 건가?”
황열이 물었다.
“사부님한테 인정받지 못한 동박은 제 손에 죽었고, 둘째 사형 서리형개는 비명에 갔고, 첫째 사형 서리가헌은 허도기에게 죽었고…… 남은 건 나 하나.”
“그 소문이 사실인가? 긴가민가했는데!”
“괜한 소문은 아니다 싶긴 했어.”
은거 무인들이 인상을 찡그린 채 말했다.
서리가헌이 허도기에게 죽었다는 소문은 강호에 자자하게 퍼졌다. 하지만 완전히 믿을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일단 서리가헌이 죽는 모습을 본 사람이 없었다. 시신을 봤다는 사람도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제 손으로 사형을 묻었습니다.”
아걸이 말했다.
“삼십칠 대 일홀문도 중에 남은 사람은 서리흔. 그런데 이름을 올려놓을 곳이 없어요. 그래서 올려놓을 자리를 만들어 봤죠. 자존심도 버리고 칼도 버리고…… 그런데도 그 이름이 올라가지 않아요. 이거 압니까? 서리흔이라는 이름이 내 덩치보다 더 크다는 거. 나보다 큰 놈을 어떻게 넣어.”
“음!”
은거 무인들은 묵묵히 들었다.
아걸이 말하는 것은 일홀도의 완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