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일홀도-403화 (403/600)

第八十一章 지흠동풍(只欠東風) (3)

아걸은 여인을 만났다.

‘상당하군.’

여인을 만난 첫인상은 ‘대단하다!’라는 것이었다.

여인은 매우 빼어난 미녀다. 얼굴만 예쁜 미인이 아니다. 입고 있는 옷부터, 행동까지…… 모든 부분이 완벽하다. 더욱이 흰 이를 살짝 드러내면 웃는 모습은 매우 고혹적이다.

“암란(巖蘭)이라고 합니다.”

여인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맞은 편에 앉았다.

다루(茶樓)에 앉아 있던 모든 사람이 두 사람을 쳐다봤다.

한 사람은 거지나 다름없는 부랑아로 보이는데, 그 앞에 선녀가 앉는다.

쳐다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암란이라면……?”

“구곡주님 사사님께 지도받고 있습니다.”

“아!”

아걸이 고개를 끄덕였다.

구곡주 사사의 독문 무공은 색혼경이다. 색(色)에 기반한 살법을 펼친다.

사사는 미인계를 펼쳐서 실패한 적이 없다.

표정, 미소, 손짓, 몸짓…… 일거수일투족 모두가 욕정을 자극한다.

사사 휘하에서, 그것도 부곡주 위치에 오를 정도로 수련받았다면 암란 역시 색혼경에 기반한 살법을 전개할 것이다. 그러니 그녀가 유혹 덩어리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아! 라는 건 무슨 뜻이에요? 살짝 기분 나빠지려고 해.”

암란이 눈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별 뜻은 없습니다.”

“제가 그 뜻을 모를 것 같아요? 몸 함부로 굴리는 여자. 그러니 네가 눈웃음치는 것도 이해한다. 맞죠?”

“흠!”

아걸은 어색한 듯 헛기침을 했다.

“어멋! 그렇다고 당장 딱딱하시면 어떡해요. 상군이면 제게도 어른인데…… 편하게 대해 주세요. 상군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해드릴 수 있어요.”

‘하아!’

아걸은 속으로 탄성을 토해냈다.

취화원 살수는 각양각색이다. 똑같은 살수가 한 명도 없다. 모두 자신만의 비기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 색혼경에 기반한 암란의 살법도 인정받아야 한다.

이것은 암란만의 특기이자 살인을 위한 도구다.

확실히 암란의 이런 모습은 사내의 긴장감을 늦추게 만든다. 여인을 희롱할 수 있게 해 준다. 어떤 말을 해도, 여인을 추행해도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사사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상군은 이런 쪽에는 젬병이나 다름없으니 끼 부리지 말라고. 정말 그러신가 봐. 객지에 계시면 고적하시잖아요. 좀 즐기셔도 되는데…….”

“훗!”

아걸이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암란이 품에서 서신을 꺼내 건네주었다.

“그럼 저는 이만.”

암란이 일어섰다.

아걸이 일어서는 그녀를 보며 말했다.

“구곡주의 색혼경은 사공(邪功)이에요. 정법이 아니죠. 사법, 사술입니다. 색혼경에 대치되는 무공이 무정검(無情劍)인데, 무정검 역시 정법은 아니죠. 취화원에는 암영검이라는 좋은 검공이 있고, 부곡주 정도면 사생락도 전수하였을 것 같은데. 정법으로 가야 길이 넓게 열립니다.”

암란이 고개를 살짝 숙인 후, 돌아섰다.

암란은 정법으로 돌아서지 않는다. 앞으로도 계속 색혼경을 추구해 갈 것이다.

색혼경을 사람을 쉽게 죽인다.

암영검이나 사생락은 몹시 어렵다. 죽을힘을 다해서 싸우는 것보다 술을 얼큰히 마시고 취해서 쓰러진 사람을 독살하는 것이 훨씬 편하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살법이 통한다는 것이다.

대다수 사내에게 암란의 살법은 정확하게 먹혀들 것이다. 그녀의 색기에 휘말릴 것이고, 죽음이 빤히 보이는데도 그녀가 주는 술을 마실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무정검을 말했다.

색혼경에 대치되는 무정검을 만나면…… 사법은 깨진다. 너무 쉽게 죽여왔던 것처럼 자신 역시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뭐 이런!’ 하면서.

암란은 사술에 지나치게 현혹되어 있기는 하지만…… 일단 몽설이 파놓은 함정에는 걸려들지 않았다.

툭!

아걸은 그녀가 건네준 서신을 만지작거렸다.

다음 살해 대상자가 적힌 서신에는 아걸과 몽설만 아는 암계가 걸려 있다.

암란이 서신을 열어봤다면 깨알보다도 더 작은 밀랍이 떨어져 나갔을 것이다. 서신 안쪽 깊은 곳에 밀랍을 묻힌 듯 안 묻힌 듯 살짝 걸쳐놨다.

취화원 살수들은 이런 방면에 예민하다.

몽설이 걸어 놓은 암계는 취화원 살수, 그것도 부곡주를 대상으로 한 만큼 치밀하기 이를 데 없다.

일단, 밀랍은 여전히 존재한다.

암란은 서신을 들여다보지 않았다. 서신을 열어 보면 명부판관이 어디로 가는지 알게 된다. 차후 어디서 누구를 살행할 것인지 알게 된다.

허도기의 간자라면 당연히 알아야 하는 정보다.

서신을 열어 봤다고 해서 반드시 간자라고는 할 수 없다. 단순히 서신 내용이 궁금해서, 다음 척살 대상자가 누군지 궁금해서 열어 봤을 수도 있다.

밀랍이 떨어졌다면? 일단 암란은 주의 대상이다. 더 예민하게 관찰해야 한다. 조금 더 깊은 함정을 파서 다시 한번 확인해야 한다. 그때도 걸려들면…….

밀랍이 떨어져 있으면 아걸도 조심해야 한다.

다음 목적지에서 허도기와 만날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 어쩌면 역으로 깊은 함정을 파놓고 기다릴 수도 있다.

차후 가는 곳이 노출되었으니 무조건 조심해야 한다.

암란이 허도기의 간자라고 해도 일부러 서신을 열어 보지 않았을 수도 있다.

서신에 걸린 암계가 반드시 허도기의 간자를 가려내는 방법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뭔가 찜찜한 기분을 느끼면 일부로 열어 보지 않을 수도 있다.

이쪽 생각을 역으로 짚는 것이다.

몽설은 구곡주 휘하 부곡주 열여덟 명을 고루 보내오고 있다.

누가 서신을 열어 보는지 알아보려는 조치인데, 이제 네 명째…… 아직은 열어 본 사람이 없다.

스읏!

아걸은 서신을 열고 내용을 읽었다.

- 함양(咸陽) 고준택(高竣擇).

네 번째 척살 대상자다.

지명 하나에 이름 하나만 적혀 있다. 함양 땅을 밟으면 고준택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만큼 지역 명사(名士)라는 거다. 지역 토착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자다.

이름 밑에는 고준택이 어떤 죄를 지었는지 적혀 있다. 바로 자신이 세상에 알려야 하는 내용이다. 명부판관의 위명을 욕보이지 않으려면 이 내용은 반드시 사실이어야 한다.

아걸은 서신을 품에 찔러 넣고 일어섰다.

몽설이 호황위다.

몽설은 자신의 생각을 황명이라는 이름으로 직접 수행한다. 그리고 군병이 복종한다.

몽설은 일거에 나라에서 제일 영향력이 강한, 가장 최상위 권력자가 되었다.

황상이 몽설에게 들려준 사연은 아걸도 들어서 알게 되었다.

자신과 황상이 이종사촌이라는 사실이 전혀 실감 나지 않는다. 또 굳이 실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것에 덕 볼 생각은 전혀 없다.

그러나…… 아무리 몽설이 이종 질부라고 해도…… 이종 질부가 아니라 친누이라고 해도 이만한 권력은 주어지지 않는다. 있을 수 없는 혜택이다.

너무 파격적인 혜택이라서 황상의 저의가 의심되기도 한다.

몽설을 호황위 군주로 만든 진짜 이유는 오직 황상만 알고 있다. 황상과 몽설의 다리를 놓아 준 조 장군마저도 이 정도로 파격적인 혜택은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정도는 몽설도 생각하고 있다.

실질적으로 호황위 군주가 되어서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이 권력의 무서움을 모른다면 말이 안 된다.

몽설은 이미 알고 있다.

‘잘하겠지. 지금 칼날을 밟고 섰다는 것…… 모르면 안 돼. 한 발만 삐끗해도 죽어.’

아걸은 몽설을 염려한다.

꼭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처럼 불안하다.

“풋!”

아걸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피식 웃었다.

예전에 몽설이 자신과 똑같은 걱정을 했다.

자신만 보면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 같다고 했다. 잠깐만 한눈을 팔면 꼭 무슨 일을 저지를 것 같아서 잠시도 눈길을 돌리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번에는 자신이 같은 심정으로 몽설을 보고 있다.

사실로 따지면 아걸과 몽설 중 누가 더 위험하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두 사람 모두 위태롭다.

자신이 몽설을 염려하는 것처럼 몽설도 자신을 염려할 것이다.

아걸은 머리를 세차게 휘둘렀다.

당분간 명부판관에 집중한다.

사실, 명부판관에 집중한다고 해서 자신이 특별히 할 것은 없다.

자신은 몽설이 지정해 준 사람을 찾아가서 명부판관임을 밝히고 죽이면 된다.

살행하기 전까지의 일은 취화원이 알아서 해 준다.

살행한 후에는 은거 무인들이 뒤처리한다. 명판을 세워서 죽은 자의 죄를 밝힌다. 증거도 찾아내서 세상에 공개한다. 명부판관의 소문을 내는 것까지 도맡았다.

아걸이 한 일이라고는 직접 살인밖에 없다.

사실 직접 살행도 은거 무인이 맡을 수 있다. 그들이 명부판관 이름을 내세우면 된다. 하지만 이 일을 하는 중에 허도기를 만날 수 있어서 살행만은 아걸이 직접 한다.

그러니 평소와 다름없이 행동하면 된다.

칼을 버릴 필요가 없다. 몽설을 위해서 일홀도를 버린 게 아니다. 지금까지와 다를 바가 전혀 없다.

함양까지 가면서 버리고 싶은 것들을 버린다.

몽설을 걱정하는 마음이 늘었고, 명부판관에 관한 생각이 조금 깊어졌을 뿐.

이번에는 허도기를 무너트린다. 성검문도 쓰러트린다. 그만한 각오로 시작했다.

혈무대에서 성검문주를 이기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런 일은 최강자를 가리는 일이 될 뿐, 성검문이나 허도기를 무너트리는 일이 되지 않는다.

설혹 허도기를 쓰러트려도 마찬가지다.

천하제일 문파 성검문이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 공부 허도기를 쓰러트리는 것이 아니다. 무력으로 쓰러트리면 다시 재기가 가능해진다. 각고의 노력으로 수련을 한 후에 다시 옛 명성을 회복하면 된다. 그리고 한 번 졌다고 해서 무인이 무너지지는 않는다. 죽지 않는 이상은.

성검문은 마땅히 사라져야 할 문파, 허도기는 인간 말종이 되어서 쓰러져야 한다.

벌써 살행이 세 번이나 있었다.

슬슬 명부판관에 대한 소문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살행이 일곱 번에서 여덟 번쯤 이어지면 그때부터는 본격적으로 허도기를 거론한 생각이다.

명부판관이 허도기를 노린다.

“명부판관이 노리는 자는 피할 수가 없나 봐. 죄다 죽어 나가잖아. 그렇게 잘나가던 사람들이.”

“그래도 명부판관은 기회를 준다던데?”

“무슨 소리야? 기회라니?”

“하루 전에 미리 죽이겠다고 통보한대. 본인 스스로 죄를 이실직고하고 합당한 조처를 하면 살려 준다던가? 좌우지간 미리 알려 주기는 한대.”

“그럼 무조건 죽이는 게 아니네?”

“적어도 죽는 당사자는 안다는 거지.”

“쯧! 그런데도 버틴 거야?”

“아이고, 나 같아도 버티겠다. 호도문주(虎刀門主) 알지? 그 사람이 왜 죽었는지.”

“아! 나 그 소식 듣고 깜짝 놀랐잖아. 세상에 호도문주가.”

사람들은 호도문주가 참살당한 사건을 듣고 깜짝 놀랐다. 사실, 그전에도 명부판관의 살행이 두 번이나 있었지만, 호도문주 척살 사건부터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평소, 호도문주는 매우 광명정대한 사람이었다. 약자가 핍박받는다는 소리만 들리면 물불 안 가리고 쫓아가서 호도를 휘두르는 의협지사였다.

그런 그가 남색(男色)을 즐겼다.

대상은 열 살이 채 되지 않는 동남(童男)으로 색정을 즐긴 후에는 죽여서 살인멸구했다. 뒷산에서 캐낸 아이들의 머리뼈만 무려 이백 구에 이르렀다.

그야말로 경악할 노릇이다.

“그런 죄를 저질러 놓고 어떻게 이실직고해. 차라리 죽고 말지. 에휴! 못해, 못해.”

말을 하던 사람이 진저리를 쳤다.

“명부판관은 그런 일을 어떻게 안 거야? 좌우지간 귀신이 따로 없다니까.”

“그 사람이 아니었으면 호도문주가 저지른 일은 세상에 알려지지도 않았지. 지금도 어린애를 유괴해서 간살하고 있을걸? 말세가 따로 없다니까.”

힘을 가진 자가 저지른 죄는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죄를 힘으로 찍어 누른다. 혹여 죄를 알고 있는 자도 쉽게 말하지 못한다.

이것이 권력자의 비리다.

명부판관처럼 힘으로 밝히지 않으면 밝힐 수가 없다.

“다음은 어떤 놈일까?”

“명부판관이 오 일 간격으로 죽여대고 있으니까…… 오늘이 나흘째지? 호도문주가 죽은 게.”

“맞네. 나흘 째네. 그럼 오늘쯤에는 다음 놈이 통보를 받았겠네. 이실직고해라! 하고.”

“하! 누군지 오늘 하루가 지옥 같겠네.”

“죄를 고백할까?”

“못한다니까. 차라리 죽은 후에 터지는 걸 택할걸? 아니면 무인을 사서 명부판관을 공격하던가. 순순히 당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안 그래?”

반격할 가능성이 더 크다.

명부판관이 죽인 자들은 하나같이 돈 많은 거부이거나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명망 있는 무인이다.

얼마든지 무인을 고용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번에 명부판관이 노리는 자는 누굴까? 피습이 선택된 자는 어떤 선택을 할까?

사람들은 명부판관의 다음 행보를 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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