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八十一章 지흠동풍(只欠東風) (4)
스읏! 탁!
술에 취해서 탁자에 엎어져 있던 사내가 검을 잡았다.
손은 원래 검 위에 올려져 있었다. 술에 취해서 쓰러졌지만, 손이 검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저벅! 저벅!
맞은편에서 불청객이 조용히 다가와 맞은편에 앉았다.
사내는 키가 작았다. 얼굴도 볼품없다. 나이는 사십 대로 보인다. 하지만 그게 이상하다. 어떨 때는 삼십 대, 또 어떨 때는 오십 대로 보인다.
역용술이 뛰어난 자다.
사내는 날카로운 예기를 풍긴다. 아니, 예기가 아니라 둔기(鈍氣)? 날카로운 것 같은데, 다시 보면 무디게 보인다. 싸움을 잘할 것 같다가도 바보처럼 보이는 것과 같다.
“후후! 이상한 놈이군.”
초가평이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말했다.
“앉아도 되나?”
앞에 앉은 자가 차분히 말했다.
“말도 이상하고. 후후! 이미 앉아 놓고 허락을 구한다? 네 허락은 필요 없다는 말로 들리는데.”
초가평이 취한 눈을 들어서 사내를 게슴츠레 쳐다봤다.
“많이 취했군.”
“너 뭐 하는 놈이야?”
사내와 초가평이 동시에 말했다.
“나? 이름은 말해도 모를 거고, 마유 사람이라고 하면 알아들을지 모르겠군.”
“풋!”
초가평이 피식 웃으며 엎어져 있던 탁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도 등 뒤 벽에 기대며 말했다.
“사부 곁에 날파리 한 놈이 찰싹 달라붙어 있다고 하더니, 그게 네놈이구나.”
“조명십해를 배울 재목이 못 되어서 마검을 수련한 주제에 말이 거칠군. 지금 네가 한 말, 사부 곁을 떠난 망나니가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베이고 싶구나, 너?”
“벨지, 베일지는 모르는 일이고. 용건이나 전하지. 이런 일은 다른 놈을 보내는 편인데, 네놈이 하도 망나니라서. 자칫 벨 수도 있겠다 싶었거든.”
“너는 베이지 않는다는 거네? 하하하!”
초가평이 웃었다.
맞은 편에 앉은 사내는 마유를 이끄는 마두, 사령이다.
이런 자가 괜히 왔을 리 없다. 사령이 직접 왔다는 것은 사부가 직접 명령을 내렸다는 뜻이다.
사부의 명령? 아니, 이제는 성검문과 인연을 끊었으니 부탁이나 전갈쯤 될 것이다. 명령 같은 것은 통하지 않는다. 사부가 직접 와서 말을 한다고 해도.
사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한다.
명부판관이 중원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다. 며칠 전에는 호도문주를 베어 버렸다. 죽인 것은 상관없다. 무인은 언제든 죽을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명부판관은 명성깨나 있는 자를 인간쓰레기로 만들어 버렸다.
평생 무림을 위해서 칼을 들어온 자가 죽었는데, 아무도 애도하는 사람이 없다.
호도문에서도 상(喪)을 걸지 않았다. 문주가 죽었는데도 죽음조차 드러내지 못한 채 조용히 사체를 처리했다. 삼일장, 오일장도 아니고 당일로 묻었다.
명부판관의 칼에 맞으면 인간에서 짐승으로 전락한다.
사부의 전갈은 명부판관과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예전에도 명부판관이 노렸잖은가.
“전갈이나 꺼내 봐.”
초가평이 사령을 쏘아보며 말했다.
“후후!”
사령은 웃으면서 서신을 꺼내 초가평에게 건넸다.
초가평이 대뜸 서신을 펼쳐서 탁자 위에 쫙 펼쳤다.
지나가는 사람도 눈길만 돌리면 볼 수 있다. 맞은 편에 앉은 사령은 당연히 본다.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눈썰미만 좋으면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사령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오히려 초가평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묵묵히 쳐다봤다.
초가평이 여전히 손에 검을 쥐고 있다.
초가평은 일사검광을 수련했다. 그전에도 소축십검 중 검속이 가장 빨라서 뇌(雷)로 불렸던 자다. 그런 자가 특별 연공을 통해서 일사검광을 수련해냈다.
무림 명숙이 일사검광에 쓰러졌다.
사부 허도기에게까지 한 수 겨루자고 한 검이다.
그 검이 사령을 노리고 있다. 검에서 일어난 예기가 사령을 칭칭 옭아맸다.
사령은 검기에 얽혀서 고개조차 숙이지 못했다.
‘강하다!’
조명십해가 강한 줄은 알았지만, 몸으로 깨닫기는 처음이다.
허도기는 조명십해를 드러내지 않는다. 오진북은 초가평만큼 빠르지 않았다. 현재 성검문을 이끄는 진개도 쾌검과는 거리가 먼 편이다.
사령은 조명십해 중 쾌검의 진수를 여기서 맛봤다.
조금이라도 허튼수작을 부리면 당장 검이 뽑힌다. 초가평은 검을 뽑는 데 전혀 망설이지 않는다.
“후후후! 역시. 역시 사부다워. 이래야 사부지. 큭큭큭!”
초가평이 웃었다.
서신 내용은 아걸을 죽이라는 내용이다. 밑도 끝도 없이, 성검문을 떠난 적이 없는 제자에게 명령하듯이 무조건 아걸을 베라는 내용만 담겨 있었다.
이런 명령, 무시하면 그만이다.
“사는 어디 있나?”
초가평이 물었다.
“제자가 사부 위치를 왜 외인에게 물어?”
사령이 대답을 피했다.
“후후후! 강호에서는 명부판관이 나타나서 옛 기억을 되살리고 있는데…… 사부가 직접 나올 수 없다면 중원에 없는 거지. 또 세외 나들이 중인가?”
“서신은 전했으니 용건은…….”
사령이 일어서려고 했다.
초가평이 사령의 행동을 무시하고 말했다.
“사부가 성검문에 틀어박혀 있었다면 벌써 나왔겠지. 이렇게 떡하니 종이 한 장 끄적여서 보내는 건 성검문에 없다는 뜻이고. 후후! 사부도 참 지독한 사람이야. 이미 인연이 끊어진 사람한테까지 이런 걸 보내니.”
“어차피 아걸이 살아 있다면 검 한번 맞댈 사이 아닌가. 아걸이 허도강의 아들이라면…… 그가 셋째 형을 죽인 자를 내버려 둘까? 옛일을 들추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하도 상관없다는 투로 말하니 배알이 틀려서. 후후!”
“네놈이 정말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이봐, 아무리 볼품없어 보여도 내가 마유 수장이야. 너무 얕보지 말라고. 그리고…… 공부가 왜 이걸 내게 시키지 않고, 못난 제자에게 준 줄 아나?”
사령이 서신을 톡톡 건드렸다.
초가평이 묵묵히 사령을 쳐다봤다.
“내가 칼을 빌려주지 않으니까. 공부와 우리 마유의 인연은 끝났어. 다만 오음산에 나타났던 자, 공부와 아걸의 싸움을 방해했던 자가 누군지 알아본다고 약속했는데, 아직 그자가 누군지 알아내지 못했지. 그런 꼬투리 때문에 이런 심부름을 하는 거야.”
사령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초가평의 검쯤은 얼마든지 받아 줄 수 있다는 투로 보인다.
“하하하! 재밌는 놈이군.”
초가평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 당시 오음산에 있던 놈은 마유밖에 없어. 마유가 오음산을 통제하고 있는데, 누가 산에 들어갈 수 있을까. 사부와 아걸의 싸움을 방해한 놈, 너 아냐?”
“후후! 억측이 지나치군.”
“넌 큰 실수를 세 가지나 했어. 첫 번째, 사부가 네 놈을 찾아내지 못할 것이라는 착각. 두 번째, 네 놈이 일홀도를 벨 수 있다는 오만. 세 번째, 아걸을 살려 주는 게 사부를 견제하는 방편이 될 수 있다는 계산 착오.”
“…….”
사령이 침묵했다.
“아걸이 있어야 마유가 중원에 터를 잡는 데 힘이 된다고 생각했던 모양인데, 네놈 이름이 사령이라고? 사령. 네놈 잔머리는 내 눈에도 보여. 사부가 모를 것 같나?”
초가평이 웃었다.
“억측이 지나치면 칼을 부르지.”
“가라. 네놈 피는 내 검에 맞지 않아. 보아하니 사부에게 기가 눌려서 안전보장 차원에서 수를 늘린 것 같은데…… 넌 사부 손에 죽겠다. 조만간.”
사령은 전혀 표정 변화가 없다. 겉모습만 봐서는 전혀 동요하지 않는다. 초가평이 억측을 하는 게 아닐까 의심까지 든다. 실제로 초가평이 한 말은 추론이다.
북! 북!
초가평은 사부의 서신을 찢어 버렸다.
“아! 사부에게 대답을 전해줘야 하나? 내 길 위에 아걸이 있으면 싸울 것이고, 사부가 있으면 사부와 먼저 싸우게 될 것이고. 이미 이래라저래라할 사이는 아니니까. 귀찮은 편지질을 하지 말라고. 딱 이대로만 전해.”
“그러지.”
사령이 일어섰다.
아걸은 함양으로 간다. 다음에 죽일 자가 함양에 사는 고준택이라는 자다.
이번에 네 번째 척살이다.
사부가 이 정도까지 파악해 놓고도 움직이지 않는 걸 보면 확실히 중원에 없다.
사부는 이런 정보를 어디서 얻는 것일까?
사부가 오음산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대장군부터 공격할 줄 알았다.
호랑이를 잡는 방법에는 일격에 숨통을 끊어 놓는 수도 있지만, 이빨과 발톱을 뽑아내서 공격할 능력을 없애버린 후에 느긋이 잡는 방법도 있다.
대장군을 잡는 것은 후자다.
황제의 손에서 군대부터 빼내어 저항할 능력을 상실케 한 후, 차분히 양위 받을 생각이다. 주변을 정리한 후에 무혈입성(無血入城)을 생각해왔다.
그런데 호황위가 나타나면서 상황이 일거에 확 변했다.
대장군은 황궁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다. 듣자 하니 군부로 활동이 제한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곧바로 황제의 명으로 호황위가 활동한다고 공식 선포했다.
무혈입성이라는 오랜 염원이 일거에 날아가는 순간이다.
이제 사부에게 남은 수는 일격에 숨통을 끊는 방법밖에 없다. 그리고 이 방법은 사부가 제일 잘한다. 능숙하게 한다. 이런 방법을 진작 사용했다면 십여 년 전에 찬탈했을 것이다.
‘이십 년. 후후! 사부는 그 성격 때문에 망해.’
초가평이 걸었다.
사부는 돌다리도 두들기면서 건넌다.
옛날…… 소축에 틀어박히기 전…… 형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일홀문주에게 진압당한 기억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평생을 짓눌러 온 기억이다.
당시, 형은 동생을 살려 주었다. 소축에서 근신하는 것으로 모든 상황을 눈감아 버렸다.
역모는 바로 참형이다.
한 번 실수는 평생 쌓은 모든 것을 무너트린다. 그래서 실수하지 않기 위해 이십 년을 노려왔다.
확실히 무림의 제왕이 되는 것과 정권을 탈취하는 것은 많은 부분이 다르다. 황상 자리가 무림의 제왕 자리였다면 사부는 벌써 차지했을 것이다.
그놈의 민심이 뭔지, 정국이 무엇인지.
사부는 그쪽 세계로 흘러드는 순간, 망해 버렸다. 만약 성검문에 남아서 무림을 통제했다면 지금쯤 무림 전체가 사부를 황제로 떠받들고 있을 것이다.
명부판관이나 취화원 따위가 움직일 수나 있겠나. 풍도곡 같은 것은 진작 날려버렸다. 정동 무인? 그런 것 역시 봐주지 않는다. 마유나 야천도 눈치 보기에 급급했을 것이다.
무림을 다행으로 생각해야 한다. 사부가 저쪽 세계로 넘어가는 바람에 무림만 숨통이 트였다.
사부는 무림에는 일절 관심을 두지 않았다. 소축십검만으로도 충분히 유지되고 있었으니까. 눈길을 주지 않아도 천하제일 문파로 이십여 년을 굳건히 버텨왔으니까.
사부가 완전히 다른 세계에 머물면서 가끔 무림에 들리곤 했는데, 그런 위세만으로도 성검문은 이십 년 동안이나 천하제일 문파로 군림했다.
성검문의 위세는 사부 때문에 유지된 것이다.
저벅! 저벅!
초가평은 함양 방향으로 걸어갔다.
사부의 서신을 찢어버리며 저항했지만, 발길이 무의식적으로 함양으로 향한다.
소축십검 중 여덟 명을 죽인 자, 사형제를 거침없이 베어낸 자, 그자가 있는 곳을 알려오니 모른 척할 수가 없다. 저절로 함양으로 가게 된다.
사부는 자신이 이럴 줄 알았다.
‘결국은…… 이렇게 되네. 후후!’
사부의 손을 완전히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아무 의미 없는 편지 한 통에 휘둘려서 함양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후후후!”
초가평은 웃었다.
자신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이것이 무림이다. 무인은 늘 초강자를 향해 달려간다.
누가 죽을지는 싸워봐야 안다.
적을 죽일 수도 있지만, 자신이 죽는 경우도 생긴다. 어떤 경우도 배제하지 못한다.
보통 사람들에게 이런 싸움을 시키면 상당히 쭈뼛거릴 것이다. 이런 싸움을 누가 하고 싶겠나.
초강자의 세계는…… 엄밀히 말하면 상대방의 무공을 알지 못한다. 이게 맞는 말이다. 강하다는 것, 어떤 무공을 사용한다는 것 정도는 안다. 하지만 이길지 질지는 모른다.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 무인은 미친놈들이다.
상대방을 죽일 이유도 없다. 원수진 것도 없다. 오직 누가 강한지 알아보기 위해서 달려간다. 그런 일을 한 번으로 그치는 것도 아니다. 평생을 그런 식으로 싸운다.
이게 미친놈들이지.
칼로 부귀영화를 얻겠다는 족속은 무인이 아니다. 칼은 부귀영화를 가져다주지 않는다. 푹신한 침상과 어여쁜 아내를 안겨 줄지라도 언젠가는 자신을 죽인다.
무인은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상대방을 꺾었을 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저려 울리는 전율을 제대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면 족한 것이다.
오늘도 한 산을 넘었구나. 내일은 또 어떤 산이 기다릴까.
그러면서 살아간다.
더 높은 산을 향해서 꾸준히 달려가는 것은 일홀도만이 아니다.
예전에는 성검문도 그랬다. 전임 성검문주 허도강, 그의 아들들 허문승, 허문학, 허문기…… 모두 다 그랬다.
성검문이 비무대의 명칭을 혈무대라고 잔인하게 지은 것은 그곳이 바로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기 때문이다. 혈무대에 선 자,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죽는다. 이것이 바로 무인의 속성이다.
무인은 싸우는 자들이었다.
이십 년 전, 사부는 싸우는 자들을 암계로 무너뜨렸다. 칼로 부귀영화를 가져왔다. 그러니 성검문을 장악한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소축십검은 그날 이후, 퇴보만 거듭했다.
무인은…… 죽는 날, 비로소 산다.
저벅! 저벅!
초가평은 함양을 향해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