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일홀도-408화 (408/600)

第八十二章 설담척살(說談刺殺) (3)

오늘 같은 날은 모이지 않을 수 없다.

요즘 들어서 가끔 모여 얘기를 나누는 편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가급적이면 거리를 두려고 했다. 아걸이 일홀도에 매진할 수 있는 시간을 티끌만큼이라도 더 주고 싶다.

하지만 오늘은 그냥 헤어지기에는 너무 짜릿했다.

“어떻게 조수지에 그 많은 시신이. 하! 그렇게 용의주도한 놈은 정말 잡기 힘든데.”

쌍겸이 말했다.

그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오늘은 정말 잡기 힘든 자를 잡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오늘만큼은 질 좋은 수주(水酒)를 준비했다.

‘술 방울 하나에 쌀 한 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귀한 곡주인데, 용케도 준비했다.

“한 잔 들어 봐. 입에 착착 감겨.”

나통이 말했다.

아걸은 빙긋 웃었다.

술은 칼을 무디게 만든다. 그러니 오늘은 사양…… 아걸의 표정에서 거절이 읽혔다.

나통은 한항을 쳐다보며 말했다.

“한항, 너 말 참 잘하던데, 예전에 뭐 하고 지낸 거야?”

“별로. 이것저것 하면서…….”

한항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사실, 한항은 변장술의 달인이라고 하는데, 변장술을 선보인 적이 없다. 어떤 목적이 있을 때만 혼자서 쓰는 것 같다. 남들이 보는 앞에서는 절대로 하지 않는다.

말도 그렇다. 한항은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 함양성에서 열변을 토할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함양성에서 진기를 돋궈 말을 이어갈 때…… 그의 음성에서는 묘한 울림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울림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한항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느낌이 확 들었다.

변장술의 달인은 몰라도 웅변의 달인은 맞는 것 같다.

“그나저나 난 취화원이 대단하다고 봐. 정말 고급 정보를 손에 쥐고 있었잖아.”

“정말 대단해. 그런 정보를 어떻게 모았지?”

“난 정보보다도 사람들을 모은 게 더 대단한 것 같아. 성에 모인 사람이 거의 이천 명이지?”

“이천 명 넘어.”

“그 사람들이 모두 취화원이 부추겨서 온 사람들이잖아. 목패 봤지? 그거 보자마자 소름이 쫙 끼치더라니까.”

은거 고수들이 술을 마시면서 즐겁게 말했다.

지금에서야 웃으면서 말할 수 있지, 그 당시에는 피를 조리면서 일을 진행했다.

취화원의 움직임은 아걸도 몰랐다.

취화원이 그만큼 비밀스럽게 움직였다. 아마도 몽설은 이 작업에도 간자를 색출하는 암계를 심어 놨을 것이다. 그러니 아걸에게는 딱 필요한 만큼만 알려 준 것이다.

함양성주가 허도기 사람이라면 허도기의 모든 것을 공유했다고 봐야 한다.

정보는 물론이고 무인까지도 공유했을 것이다.

취화원이 실종된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움직이면 당장 낌새를 눈치채고 대처했을 터이다. 하물며 그 숫자가 무려 이천여 명이나 된다. 상당히 많은 사람이 움직인다.

이 소리가 함양성주의 귀에 들어갔다면 당장 대응했을 것이다. 오늘처럼 무방비 상태로 당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어제 하루 동안, 취화원이 움직일 동안, 취화원 간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허도기에게 어떠한 정보도 전달하지 않았다.

어제 움직인 취화원 살수 중에 간자가 섞여 있지 않거나 아니면 간자 색출 작업이 벌어진다는 것을 눈치채고 성주가 당할 것을 알면서도 조심한 것이다.

취화원 간자들이 움직이지 않았으니…… 함양성주는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명부판관에 대한 정보는 허도기가 보내줘야 하는데 아무 대응도 없이 멍하니 있다가 당한 꼴이 되어 버렸다.

그만큼 취화원이 바쁘게 움직였다는 소리도 된다.

“정말 기가 막혔어. 그 저수지에서 하얀 뼈가 드러나는데. 이게 사람 새끼가 이럴 수 있나 싶기도 하고.”

“난 그 식인어들. 어휴! 무슨 놈의 이빨이 톱니보다도 날카로워. 그냥 물리기만 하면 살점이 뎅겅 떨어져 나갈 것 같던데? 실제로 어제 몇 명 물린 모양이더라고.”

“그 뼈에 새기진 자국들 봐. 뼈를 그냥 단번에 싹둑 잘라 먹었잖아.”

그때다. 은거 무인들이 신명 나게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을 때, 아걸이 말했다.

“그 뼈, 만든 겁니다.”

“뭐!”

모두 깜짝 놀라서 아걸을 쳐다봤다.

“그 뼈들, 사람 뼈가 아니었어요. 짐승 뼈였습니다. 사람과 흡사하기는 한데 골격이 작았어요. 아마 원숭이나 그쪽 종류의 동물 뼈 같아요.”

“저, 정말인가?”

한항도 놀랐는지 되물었다.

아걸 말이 사실이라면 자신은 가짜 뼈를 가지고 일장 연설을 한 셈이다.

“뼈에 칼로 조각을 해 놓은 건데, 정말 눈치 못 챈 겁니까?”

아걸이 은거 무인들을 보며 말했다.

은거 무인들은 멍해졌다.

그게 정말 식인어의 이빨 자국이 아니었다고? 식인어와 완벽하게 들어맞았는데.

“하하하!”

아걸이 웃었다.

“정말인가 보네. 그럼 우린 오늘 가짜 뼈를 믿고 그렇게 큰소리를 쳤던 거야?”

“한 가지는 확실했던 거죠. 함양성주가 살인마라는 것, 그리고 시신을 저수지에 수장시킨다는 것. 이것만은 틀림없었어요. 단지 추정이 아니라 누군가 본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 정도로 확신했으니 이런 일을 진행한 거죠.”

“하아! 취화원주 몽설. 하아!”

쌍겸이 한숨만 토해 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는데.”

아걸이 말끝을 흐렸다.

“뭐가? 벌써 함양성주는 목을 매달았는데 뭐가 이상해? 여기서 이상하면 안 되지!”

한항이 못내 억울한지 볼멘소리로 말했다.

“함양성주한테 사람을 납치해 준 자들. 성주가 살인 욕구를 충족한 다음, 그 뒤처리까지 말끔히 해 준 사람들. 취화원이 그 사람들에 대한 정보를 내놓지 않았어요.”

“아! 그거. 나도 그거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나도. 난 그냥 그놈들은 놔주는구나 싶었지?”

은거 무인들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다. 그놈들 역시 진짜 나쁜 놈들이다. 함양성주의 손발이었다. 취화원이 왜 그들을 놓쳤지? 놓칠 리가 있나! 지금 그놈들을 뒤쫓고 있겠지.

그자들은 성주가 단독으로 고용한 자들이 아니다. 성주가 한 일은 완벽한 비밀을 요구한다. 사심이 조금이라도 깃들었다면 당장 협박을 당할 수 있다.

성주 휘하에 있던 자들은 사 년 동안이나 묵묵히 납치하고, 시신을 치웠다.

틀림없이 누군가가 도와준 것이다. 그러면 누가 도와주었겠나? 허도기밖에 더 있나. 허도기가 아니면 그토록 입이 무거운 자들을 고용할 수 없다.

“취화원이 그놈들 뒤를 쫓고 있을 거야. 야. 원주. 정말 대단하네. 너 조심해야겠다. 자칫하면 잡아먹히겠어.”

“풋!”

아걸이 실소를 흘렸다.

“어? 웃어? 선배 말이 농담을 들리냐?”

“아니요. 전혀 농담으로 안 들려요.”

“근데 왜 웃어?”

“이미 잡아먹힌 사람인데, 뭘 더 잡아먹힙니까?”

“너 벌써 올가미에 묶였냐?”

“그럼요. 몽설이 한마디만 하면 꼼작 못 하잖아요. 이미 다 보고 계시면서 뭘 새삼스럽게.”

“하! 내 참 기가 막혀서. 우리가 이거 저런 바보를 지금 추종하고 있는 거야? 아! 미치겠네. 이봐! 여자는 말이야. 초장에 콱 잡아야 한다니까.”

쌍겸이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거참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그런 말도 사람 봐 가면서 하는 거지. 원주가 어디 때려잡는다고 잡힐 여자야? 저러니 지금까지 혼자 살지. 쯧!”

나통이 혀를 찼다.

“에라이! 그래, 너 잘 잡혀서 살아라.”

“하하하!”

은거 무인들은 통쾌하게 웃었다.

첫 번째로 희대의 살인마를 잡은 것이 통쾌했다.

그자가 허도기의 측근이든 아니든 상관하지 않는다 그런 자를 잡아서 죽였다는 게 통쾌하다. 그자는 함양성 성주다. 누가 그런 자를 건드릴까.

그자의 살인은 앞으로도 계속 지속할 뻔했다.

여기서 멈춘 게 다행이다. 아니, 취화원이 첫 번째 척살 대상자로 그를 거론되지 않은 게 이상할 뿐이다.

취화원은 시기를 조율했다.

언제쯤 되어야 명부판관의 이름이 사람들에게 각인되며, 그를 믿게 될 것이며…… 이런 모든 상황을 조율해서 네 번째로 함양성주 같은 거물을 택한 것이다.

이제 명부판관의 이름은 전 중원에 널리 알려졌다.

예전에도 명부판관은 유명했다. 악행을 저지르는 자는 언제든 명부판관이 찾아간다는 방식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 당시 성검문으로 가면서 행했던 살행들 속에는 함양성주 같은 거물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사람들 속에 숨어 있는 살인자들을 찾아내서 척살했다.

인면수심, 도저히 살인마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사람들의 실체를 드러내서 놀라게 만들었다.

그때의 명부판관과 지금의 명부판관은 위명이 완전히 다르다.

그때도 나쁜 자들을 골라서 죽인다는 인상이 강했지만, 지금은 명부판관의 말이 완전히 법이 되었다. 명부판관이 ‘나쁜 놈이다!’ 하면 나쁜 놈이 되어 버린다.

“그 저수지가 한 번 터진 적이 있기는 했지. 그때 뼈와 식인어가 유출되지는 않았다고 해도…… 그 사건을 이렇게 엮은 거잖아. 원주가 일 만드는 솜씨가 보통 아니야.”

“이제 슬슬 원주의 본색이 드러나는 건가?”

“원주다워지는 거지. 이미 취화원을 이끌고도 남을 여장부가 됐어. 호황위 군주까지 맡았다면…… 어휴! 아걸, 저놈이 아니면 감당하지 못할 여자야.”

“몽설이 참 많이 컸네. 여리디여렸는데.”

“하하하!”

“저수지가 터진 것까지 알고 있는 것을 보면 취화원 정보망도 완전히 구색을 갖춘 거지?”

“상당히 발전하긴 한 거지. 취화원은 워낙 사람이 없었는데…… 이 정도면 장족의 발전이야.”

은거 무인들이 술을 마시면서 농담을 즐겼다.

“저는 그럼 이만.”

아걸이 일어섰다.

“오늘 같은 날은 술 한잔해도 돼. 너무 팍팍하게 사는 것도 좋지 않아.”

“하하! 왠지 오늘은 더 정신을 맑게 해두고 싶어서요.”

“그래, 그럼 가봐. 우린 더 마셔야겠어. 오늘 하루는 코가 삐뚤어지게 마셔야지. 앞으로 이삼일 동안은 아무 일 없잖아. 다음 대상이 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비석 장태전이 말했다.

아걸은 산으로 발길을 옮겼다.

오늘도 노숙한다. 산에서 찬바람과 이슬을 견뎌내며 하룻밤을 보낸다.

요즘은 날이 풀려서 벌레들이 기승을 부린다.

풀밭에서 자고 나면 온몸에 벌레가 기어드는 통에 목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오늘은 반철도에 피를 묻히지 않았다.

상대가 상당한 거물이었는데…… 그저 모습을 드러내고, 말 몇 번 하자 일이 마무리되었다.

그러니 오늘 같은 날은 술 한잔해도 될 것이다.

하지만 술은 칼을 무디게 한다. 이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칼을 쓸지 모를 때는 특히 그렇다.

아걸은 산으로 들어가기에 앞서서 널찍한 공터에 섰다.

휘이이잉!

찬바람이 소나무 숲을 스치며 지나갔다.

아걸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달이 밝다. 별도 총총하다. 깨를 뿌려 놓은 듯 수많은 점이 박혀 있다. 날씨도 선선하니 딱 좋다. 숲의 기운이 물씬 전해져 온다.

“오늘은 칼을 쓰기 싫은데.”

아걸이 중얼거렸다.

“후후후!”

음침한 음성과 함께 어둠 속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오늘 아주 인상적이었다. 명부판관이라기에 무지막지하게 칼만 휘두를 줄 알았더니 그런 잔수도 쓰고. 정말 대단해. 점점 강해진다는 느낌이야.”

나타난 사람은 초가평이다.

그가 숲에서 걸어 나왔다. 사실, 그는 오래전부터 따라붙었다. 은거 무인들이 몰랐을 뿐.

아걸은 초가평의 존재를 눈치챘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예전의 소축십검이었다면 당장 기척을 감지했을 텐데…… 초가평이 훨씬 강해졌다는 뜻이다.

“오늘은 쉬자.”

아걸이 말했다.

“그것도 괜찮지. 내일?”

“내일 사시(巳時)로 하지. 아침 먹고, 차 한 잔 마시고, 소화도 시킬 겸 몸을 푸는 것도 좋을 테니까.”

“이런 산속에서 차까지 마시나? 다구(茶具)도 없어 보이는데.”

“말이 그렇다는 거지. 여유가 없어졌군. 농담은 농담으로 받아들여야 재미있는데.”

“그런가? 후후! 네가 시간을 정했으니 장소는 내가 정할까? 이 산 정상 어때? 오면서 이쪽 길로 왔는데 정상이 꽤 미끄러워. 바위가 삭아서 굵은 모래야. 조금만 방심해도 쭈르륵 미끄러져. 칼을 쓰기에는 아주 좋은 장소 아닌가.”

아걸은 고개를 끄덕였다.

초가평은 더 할 말이 없는 듯 뒤돌아섰다. 그러다가 다시 돌아섰다.

“아! 나한테 널 죽여달라고 한 사람이 우리 사부인데, 그 양반 그거참 못된 버릇이 있어. 꼭 뒤를 확인하는 버릇이 있거든. 여기 중간중간에 다른 놈들이 있는데, 내 아랫놈들 아니니까 오해하진 마라. 난 그런 놈들 안 써.”

아걸 주위에는 많은 사람이 포진돼 있다.

초가평은 그들을 말하는 것 같다. 무공이 상당히 높아서 거의 기척을 드러내지 않는다.

허도기는 참 많은 사람을 부린다.

초가평이 말했다.

“어떤 놈들인지…… 수준이 상당히 높은 것으로 봐서는 아마도 마유 놈들이 아닐까 싶다. 그놈들이거나 아니면 적위군이거나. 좌우지간 나랑은 상관없어.”

초가평이 손을 들어서 휘휘 흔들었다. 내일 보자는 뜻 같다.

아걸은 달빛을 감상했다. 누구라도 상관없다. 다가오면 벨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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