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八十二章 설담척살(說談刺殺) (5)
아걸은 푹 쉬었다.
초가평이 ‘오늘은 쉬자’라는 말을 받아들일 줄은 몰랐다. 늦은 밤이지만, 칼을 써야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소축십검은 상대에게 여유를 주지 않으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술 한 잔이라도 걸칠 걸 그랬나.
오늘 구해온 수주는 매우 질 좋은 술이다. 황열이 함양성에서 빼내 왔는데, 족히 삼사십 년은 묵은 술 같다. 술독 덮개를 벗기기도 전에 주향이 물씬 풍겼다.
아걸은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한두 잔쯤은 마셔보고 싶었다.
하지만 술을 마셨다면…… 사정이 달라진다. 초가평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술을 먹었으니 오히려 더 기다려 줄까? 정당한 승부를 내기 위해서 술 깰 때까지 기다릴까?
이런 말은 같은 사문(師門)에서나 통한다.
사형제끼리 무공의 고하를 가릴 적에나 취기가 가실 때까지 기다린다.
일단 무림에 나서면 그때부터는 무공의 고하를 가르는 비무는 존재하지 않는다. 서로 병기를 맞댈 이유는 딱 하나다. 상대방을 죽일 때뿐이다.
병기를 맞대는 이유는 천차만별이다.
방금 말한 이유, 무공의 고하를 가르는 것도 싸우는 이유 중 하나다. 네가 나보다 강하다고? 해 보자! 이런 어린애 같은 승부욕이 생사를 가른다.
무림에서는 상대방의 무공을 꺾고자 하는 사람은 없다. 상대방을 죽이는 것이 목적이다. 어떤 병기를 쓰던, 어떤 종류의 무공을 사용하든 무조건 꺾어야 한다.
마공, 사공, 정공…… 가리지 않는다. 암기를 써도 무방하다. 함정을 파서 죽여도 할 말이 없다.
상대방의 약점을 찾고, 적극적으로 취약점을 공격한다.
단순히 무공의 고하만 가린다면 일홀도 문주 중 죽은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암살당하고, 독살당하고, 협공당하고…… 취해서 칼 맞아 죽느니 차라리 술 안 마시는 게 낫다.
스읏!
아걸은 일어섰다. 그리고 습관처럼 개울로 가서 목욕했다. 그때,
쒜엑! 쒜에엑! 쒜에엑!
사방에서 암기가 몰아쳐 왔다.
‘이런! 암기로 시작하나?’
아걸은 즉시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타타탁! 타탁!
암기들이 바위를 후려치며 튕겨 나갔다.
지난밤, 저들은 아걸이 잠든 곳에 독사를 풀었다. 길든 독사 수백 마리가 달려들었다.
아걸은 산에서 노숙을 하는 만큼, 잠들기 전에 약간 대비를 해 놓는다. 잠자리 주위에 녹나무 송진을 두루 펼쳐 놓는다. 그러면 지네나 뱀들이 달려들지 못한다.
산에서 잘 때는 뱀보다도 지네가 괴롭다.
뱀은 사람을 피해가는데, 지네는 마구잡이로 달려든다. 산지네는 독성도 강해서 한 번 물리면 상당히 고통스럽다. 죽을 정도는 아니지만, 퉁퉁 부어오른다.
아걸은 뱀들이 달려드는 것을 알면서도 편히 잤다.
날이 밝은 후에도 저들은 직접 공격해 오지 않는다. 숨어서 암기를 날렸다.
아걸과 싸우면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직접 공격하지 못하고 밤에는 뱀으로, 아침에는 암기로 공격하는 것이다.
바위 뒤에서 잠시 기다렸지만 더는 공격해 오지 않았다.
스읏!
아걸은 몸을 일으켰다.
저들이 산에 쫙 깔려 있지만, 전혀 개의치 않고 개울로 걸어갔다. 그리고 옷을 벗었다.
언제나처럼 아침 목욕을 즐긴다. 적들이 보는 앞에서.
쒜엑! 쒜에엑!
검이 쏘아져 왔다.
이상한 검초다. 검초의 변화보다는 신법에 치중해 있다. 몸의 빠름으로 검을 구사한다.
‘치고 빠진다.’
아걸은 상대방의 검초를 보자마자 즉시 의도를 눈치챘다.
사실, 상대방이 펼치는 무공은 어떤 의도를 지니고 있지 않다. 원래 검초가 이런 식이다. 검은 변화를 담당하고, 몸은 속도를 보장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신법, 보법이 매우 빠르고 현란하다.
스읏!
아걸은 발가벗은 채 반철도를 들었다. 그리고 즉시 회선도를 펼쳤다.
휘리리릭!
그의 몸이 팽그르르 휘돌면서 무인을 마주쳐갔다.
상대방에 비하면 매우 느린 칼이다. 팽그르르 도는 모습이 매우 둔탁해 보인다. 더욱이 상대방은 이미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듯, 뒤로 빠지고 있다. 순간,
쒝! 퍽!
회선도가 느닷없이 목도일참으로 변했다. 순식간에 무인을 쫓아갔고, 단숨에 살을 베고 뼈를 끊었다.
“컥!”
무인이 비명을 지르며 철퍼덕 개울 물에 엎어졌다.
무인의 몸에서 흘러내린 핏물이 개울 물을 빨갛게 물들였다.
스읏!
아걸은 주위를 둘러봤다.
숨어 있는 무인들이 거의 스무 명에 이른다. 그들 모두 일제히 살의를 드러냈다.
이들은 자신들이 아걸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초가평과 접전을 치르기 전에 기운을 빼놓을 생각이다. 부상을 입힐 수 있다면 더없이 좋다.
어제 상처를 입었다면 오늘 싸움을 피할 수도 있다. 초가평을 만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약간만 상처를 입어도 정상에 오를 것이다.
초가평에는 티끌만 한 부상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이들은 초가평을 믿지 않는다. 지금 상태로는 아걸에게 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약간이라도 도움을 주어서 승기를 쥐게 하려는 의도다.
‘당신도 참 안 됐군. 후후!’
아걸은 초가평을 떠올렸다.
이미 사문에서 파문된 사람인데, 아직도 사부의 명을 듣고 자신을 죽이러 왔다. 그러면 사부란 사람은 철저히 믿어 줘야 하는데, 믿지도 않는다.
허도기는 소축십검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초가평은 일사검광을 수련해 냈다. 그 후, 허도기에게 승부를 요청했다고 한다.
허도기도 언젠가는 검을 받아 주겠다고 말했다.
그 정도의 검이라면 믿을 수 있어야 하지 않나? 아니, 더 못 믿는다. 허도기에게는 초가평이 여전히 어려 보인다. 미숙해서 금방 깰 수 있는 검이다.
또 허도기는 아걸과도 싸워 봤다. 아걸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확실히 안다.
두 사람을 모두 아는 사람이라면 승부도 예견한다.
이대로 싸우면 초가평이 무너진다고 봤다.
그래서 이들을 보냈다. 이들의 목적은 아걸에게 상처를 입히고 진력을 빼는 데 있다.
쉽게 달려들지 않는다.
방심할 때를 노려서 달려드는 것도 심력(心力)을 고갈시키는 데 즉효다.
아걸은 그들이 지켜보고 있는 앞에서 개울 물에 반철도를 씻었다.
칼에 묻은 핏물이 흐르는 물에 씻겨 나갔다.
그는 반철도를 옆에 있는 바위에 올려놓고 다시 개울 속으로 들어갔다.
편안한 마음으로 목욕을 한다.
쒜엑! 쒜에엑! 쒜에엑
기다렸다는 듯이 또 한 명이 달려들었다.
이번에 나타난 자도 신법이 무척 빠르다. 몸이 먼저 달려들고 검이 뒤에서 튀어나온다.
아걸은 이들의 무공이 자신의 자연검과 흡사하다는 생각을 했다.
요즘 그가 추구하는 일홀도는 신도(身刀)다. 몸이 곧 칼이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런 면에서 칼보다 신법이 빠른 이들 무공에 공감한다.
다만 이들은 아직 자신의 상대가 아니다. 이들의 몸놀림이 환히 보인다.
쉬잇!
아걸은 허공으로 치솟아서 상대방의 머리를 타격했다.
촌경, 일촌살타다. 서로 몸과 몸이 부딪칠 정도로 가까이 접근했다. 상대방은 벌써 검을 쳐냈다. 아걸은 상대가 떨친 검을 피해낸 후, 반철도를 내리쳤다.
빡!
상대방의 머리가 깨져 나갔다.
아걸은 그가 개울에 떨어지지 않게 두 발로 양쪽 어깨를 걷어찼다. 그리고 몸을 회전시켜서 비룡번신(飛龍翻身)을 펼쳤다. 몸을 뒤집어서 개울로 내려섰다.
이미 한 명이 개울에 떨어져서 피를 쏟아내고 있다. 또다시 개울을 피로 물들이면 목욕을 하지 못한다. 초가평과 싸우기 전에 몸은 씻어야 하지 않나.
스읏!
개울물로 반철도를 닦았다.
칼에는 머리뼈가 묻어 있다. 누런 뇌수도 묻어 나왔다.
아걸은 다시 반철도를 바위 위에 올려놨다. 그리고 흐르는 물에 머리를 담갔다.
쒜엑! 쒜에엑! 쒜에엑!
저들이 암기를 쏘아냈다. 이번에는 꽤 정확하게 몸뚱이를 격타하겠다는 심정으로 쳐냈다.
스읏!
몸을 살짝 비틀어서 바위 뒤로 숨었다.
탕! 타타탕! 타앙!
암기가 바위에 튕겨 날아갔다.
“벌거벗은 놈을 치다니 너무하지 않아? 몸이나 씻고, 옷이나 입자고. 그것참 급하기는.”
아걸은 암기를 피하면서도 계속 머리를 감았다.
아걸은 언제든 적을 맞받아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다. 머리는 개울물에 담가져 있다. 긴 머리는 흘러가는 물살에 휘감긴다. 그런데도 빈틈이 보이지 않는다.
아니, 공격하려고 하면 얼마든지 공격할 수 있다. 개울물에 머리를 담그고 머리를 감는데, 어떻게 공격할 틈이 없겠나. 틀림없이 빈틈은 존재한다.
공격할 자신이 없는 것이다.
촤아악!
아걸은 물보라를 일으키면서 시원하게 머리를 감았다.
머리에 묻은 물이 몸을 따라서 촤르륵 흘러내렸다. 아걸은 수건으로 머리에 묻은 물기를 털어냈다. 그리고 여유 있게 몸에 묻은 물기도 닦았다.
적들 앞에서 목욕도 하고, 머리도 감았다.
일부러 자신을 과신하려고 취한 행동은 아니다. 그저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일상일 뿐이다.
공격해 오는 자는 받아친다. 공격하지 않으면 내버려 둔다. 무인은 언제 어느 때든 싸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머리를 감을 때나, 밥을 먹을 때나 다르지 않다.
아걸을 머리를 다듬고, 흑건으로 질끈 동여맸다.
스읏!
옷을 입기 위해서 바위에 널린 옷을 집었다. 순간,
쒜엑! 쒜에엑! 쒜에엑!
삼 방에서 세 명이 달려들었다. 더 여유를 부렸다가는 공격할 기회를 영영 놓친다고 판단한 것 같다.
아걸은 공격을 무시하고 옷을 입었다.
쉐에에엑!
검이 귀밑을 스치며 지나갔다. 허리띠를 맸다.
쎄엑!
검이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하지만 요대를 살짝 스치면서 지나갔다.
마지막 검이 폐를 찔러왔다. 순간, 아걸의 손에서 반철도가 번쩍 쳐들렸다.
이들은 너무 느리다. 중원 무림 누구에게든 통할 수 있는 무공인 것만은 틀림없다. 다만 자신을 상대하기에는 부족하다. 이렇게 느린 검으로는 자신을 잡지 못한다.
빠름은 이런 것이다.
탁! 타탁! 탁탁탁탁! 타타타탁!
반철도가 몸 주위에서 빙빙 맴돌았다. 몸에서 삼촌 이상 떨어지지 않았다.
일 촌은 한 뼘이 채 못 된다. 삼촌이라면 칼이 거의 몸에 붙어 다닌다고 봐도 무방하다.
타타타타탁!
모두 이십일 초로 구성된 도법, 단도격타가 순식간에 일순환했다.
“컥!”
“크억!”
비명이 연이어 터졌다.
이들은 최고의 고련을 거친 검사들이지만, 아걸의 눈에는 너무 느려 보였다.
반철도가 한 사람의 가슴을 그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등 뒤로 돌려졌다가 다시 튀어나온 칼이 또 다른 자의 가슴을 그었다. 두 명이 거의 한순간에 피를 뿜었다.
아걸은 몸을 납작 숙였다. 그리고 반철도를 암기처럼 집어 던졌다.
쒜에에엑! 타악!
반철도가 제일 처음 귀밑을 그으며 지나간 검사의 등을 꿰뚫었다.
“커억!”
답답한 비명을 토해낸 검사가 이 장이나 날아가 떨어졌다.
반철도는 등을 뚫고 들어가서 가슴 앞으로 삐져나왔다. 뭉툭한 칼이 단번에 몸을 꿰뚫었다. 거대한 쇠뭉치가 몸을 관통하는 듯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세 명 모두 즉사다.
아걸은 도전을 겁내게 만든다. 분명히 틈이 보이는데도 치고 들어가기가 겁난다.
스읏!
아걸은 쓰러진 자가 떨군 검을 집어 들었다.
스읏!
검을 바위에 올려놨다. 그리고 다시 옷매무시를 마무리 지었다.
‘몽설, 네가 바쁘겠구나.’
아걸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허도기는 이렇게까지 하면서도 직접 오지 않았다. 불안한 자를 보내고, 뒷받침하기 위해서 많은 자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그러면서도 본인은 오지 않았다.
물론 허도기가 어련히 자신에 맞춰서 사람을 보냈을까마는…….
허도기는 아걸의 무공을 안다.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은 허도기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본인이 나서지 않는다면, 그는 중원에 있지 않은 것이다. 멀리 세외에서 본격적으로 일을 꾸미고 있다.
이 부분은 몽설 몫이다.
솔직히 허도기는 아걸이 지금 나타날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만한 상처를 입었으니 적어도 반년 이상은 요양해야 하지 않을까? 반년이 지난 후에도 제대로 무공을 펼칠 수 있을지 모를 정도로 아주 심한 상처를 입었다.
그런 상처를 훌훌 털어버리고 명부판관이 되어서 다시 나타났다.
허도기에게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일 것이다.
아걸은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검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