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八十三章 쾌검낙성(快劍落星) (4)
아걸은 신도를 믿는다.
‘몸뚱이 하나, 칼 한 자루!’
무심히 생각해 낸 말이 신도를 대표하는 말로 자리 잡았다.
몸뚱이, 그리고 신외지물(身外之物).
신외지물은 차후에 얻어도 된다. 삼십육 문주의 일홀도를 비롯해서 자신이 얻었다고 생각했던 모든 일홀도가 신외지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몸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서 신외지물부터 얻으려고 발버둥 친 격이다.
중원이 인정하는 천하제일고수 허도기와 맞상대한 사람이 아직 몸을 만들지 못했다? 그래서 도법을 수련할 단계가 아니다? 먼저 몸부터 만들어야겠다?
남이 들으면 이 무슨 개뼈다귀 같은 소리냐고 할 것이다. 잘난 놈이 제 자랑은 오지게 한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실제로 그러니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일홀도에 대해서 누구에게 말할 생각도 없으니 이런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되나?
무가에서 말하는 ‘몸을 만든다’라는 의미는 무공을 배울 수 있는 기초적인 몸을 의미한다.
아걸이 생각하는 몸과는 다르다.
아걸은 몸은 곧 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몸을 칼처럼 날카롭게 벼려 놔야 한다. 몸이 칼이 된 후, 도법을 수련하겠다는 것이다. 신도로 전개할 도법이 무엇일지는 모르겠지만.
아걸은 도법까지는 생각하지도 않는다.
아직 몸조차도 칼이 되지 못한 상태에서 그 이상의 것을 생각해 봤자 그림의 떡일 뿐이다.
사실 아걸의 마음속에는 몸을 믿는다는 마음 자체도 들어 있지 않다. 지금, 이 순간에는 일홀도도 생각하지 않는다. 오직 눈앞의 적, 초가평만 본다.
그는 몸을 완전히 축 풀었다.
느슨하게 풀어진 이완 속에서 활시위 하나만 팽팽하게 당긴다. 언제든지 시위만 놓으면 즉시 튕겨 나갈 수 있다.
바로 칼이다.
반철도를 말하는 게 아니다. 삼십육 문주의 도법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몸에서 일어나는 반응을 말한다. 이 반응은 언제 어느 때든 자극을 느끼면 즉시 퉁겨진다.
스읏! 스읏!
아걸은 초가평을 향해서 지친 걸음으로 걸어갔다. 칼을 겨누고 다가서는 게 아니라 단지 앞으로 걸어갈 뿐이다. 몸이 망가져서 빨리 움직일 수 없을 것 같다.
츠으읏!
초가평은 석상이 되었다.
아걸의 모습이 어떻게 보이든 일절 동요하지 않았다. 아무 검초라도 쳐 내기만 하면 죽일 수 있을 것 같은데도 좀처럼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무심하게 착 가라앉은 눈이 아걸을 지켜본다.
타탁! 타타탁!
아걸이 슬슬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매우 느리게, 하지만 점점 빠르게 움직였다. 하지만 아직도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움직인다는 느낌이 강했다.
초가평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돌처럼 눈썹조차 꿈틀거리지 않았다.
타탁! 타타탁! 타타타탁!
아걸의 움직임이 점점 빨라졌다. 아직도 몸이 가벼워 보이지는 않지만, 조금씩 뛰기 시작했다.
서리가헌의 일탄십검과 흡사한 모습이다.
타탁! 타타타탁!
점점 더 빨리…… 점점 더 빨리…… 달린다!
타타타타탁!
드디어 아걸의 움직임이 신법을 펼친 것처럼 빨라졌다.
그제야 초가평의 미간이 꿈틀 움직였다.
“기껏 한다는 것이 서리가헌의 일탄십검인가. 그 정도로는 내 검을 막을 수 없는데?”
초가평이 냉정하게 말했다.
과거, 소축십검은 풍도곡 사형들에게 꼼짝도 하지 못했다. 일단 칼에서 밀렸다. 일탄십검이나 화염도는 소축십검을 단번에 쓸어 버릴 수 있는 칼이었다.
이제는 상대가 안 된다고 공언한다.
쒜에엑!
초가평이 검을 쭉 뻗어냈다.
아걸이 달려들고, 초가평은 검을 내뻗는다. 서로가 서로를 향해서 뛰어든다.
츄아아아악!
역시 가장 빠른 움직임은 초가평의 검에서 일어났다.
검이 아걸을 향해 쏘아져 왔다. 초가평이 달려오는 게 아니라 검이 쏘아져 온다. 초가평은 검에 이끌려서 질질 끌려오는 모습이다. 초가평보다 검이 더 빠르다.
이것이 초가평의 검신일체다.
초가평은 능히 검신일체를 이루는 고수다. 몸과 검이 하나가 되어서 움직인다.
검신일체라고 하면 몸뚱이와 검을 생각하는데, 사실은 생각과 몸과 검이다. 여기에서 몸뚱이가 생각을 흡수해 버린다. 검초에 너무 능숙해지다 보면 굳이 생각을 일으키지 않아도 몸이 먼저 반응하는 순간이 온다.
상대방이 공격해 오면 반사적으로 반응하는 경우다.
그러다가 마침내 칼이 몸뚱이를 먹어 버리는 단계에 이른다. 생각이 일어나지 않고, 몸이 움직이지 않는데, 칼이 스스로 알아서 튀어 나가는 것처럼 여겨진다.
초가평이 지금 시현하는 검공이 딱 그런 경우다.
초가평은 검을 쥐고 있다. 몸이 검초를 전개한다. 하지만 앞장서서 달려오는 것은 검이다.
주객전도가 일어났다.
몸뚱이가 검에 질질 끌려온다. 검이 주인이고, 몸뚱이가 하인처럼 보인다.
타타타탁! 깡! 깡! 깡!
더욱 빠르게 치달리는 몸, 그리고 팽팽하게 당겨진 시위가 탁! 끊어지면서 퉁겨나간 반철도!
검과 칼이 얽히면서 요란한 소리를 울렸다.
아걸은 삼도를 떨쳐 냈다. 검첨을 치고, 검신을 쳤다. 그리고 손잡이까지 두들겼다.
순식간에 삼연타가 이루어졌다.
여기서 초가평이 네 번째 검을 일으켰다.
쒜에에엑!
검이 반철도를 휘감아 돌더니, 아걸의 목을 베어왔다.
아걸도 네 번째 검을 쳐 내는 중이다. 고개를 젖혀서 검을 피하며, 몸을 쳤다.
쒜엑! 쒜에엑!
검과 칼이
사연타 초가평이 몸을 쓸어간다.
그 순간 초가평이 신형을 뒤틀었다. 그러자 반철도가 어이없을 만큼 멀찍이 벗어났다.
쉐에엑!
지금 방금 서로 네 번째 검이 엇갈렸는데, 벌써 검광이 쏟아졌다.
초가평은 몸이 돌려진 상태에서 등 뒤로 검을 찔러냈다. 몸을 스쳐 가는 아걸의 등을 노린 수다.
아걸은 급히 상반신을 숙였다.
츄아악!
차디찬 검날이 등을 훑으며 지나갔다.
아걸은 반철도로 초가평의 다리를 쓸어갔다. 촌각 전만 해도 다리를 공격할 생각은 없었다. 상반신을 숙이자, 다리가 보였다. 그래서 공격했다.
이것이 끝이다. 뭐가 더 있어야 하나?
반철도는 반사적으로 튕겨 나갔다. 자연검에서 얻은 구심력과 원심력의 응용이다. 몸이 구심력이 되고 반철도가 원심력이 된다. 몸이 굳건하게 받쳐 주니 칼이 저절로 튀어 나간다.
작은 북 양쪽에 두 팔처럼 끈과 추가 연결된 보랑구(拨浪鼓)처럼 몸이 회전을 일으키면 몸에 달린 두 팔은 자연스럽게 밖으로 뻗어 나간다.
쒜엑! 퍼억!
초가평이 왼 다리를 굽히더니 반철도를 걷어찼다.
이 순간, 반철도는 또 변화를 일으켰다. 다리를 쓸어가던 칼이 직각으로 꺾이며 위로 튀어 올랐다.
터엉!
초가평이 땅에서 솟구치는 칼을 발로 쳐 냈다.
아걸이 쳐 낸 반철도는 거의 절정이었으나, 초가평은 너무 쉽게 막았다.
쒜엑! 쒜에에엑!
두 사람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거의 동시에 뒤로 물러섰다.
휘이이이잉!
산정에 찬바람이 휘몰아쳤다.
두 사람은 눈 깜짝할 순간에 십여 초를 주고받았다.
서로 상대방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인식하고도 남을 시간이다.
“대단하군. 그런 몸으로.”
초가평이 말했다.
“후욱!”
아걸은 상당히 지친 듯 거친 숨을 쏟아냈다.
체면을 따질 때가 아니다. 조금이라도 틈이 생기면 최대한 체력을 보충해야 한다.
아걸은 묵묵히 뒤돌아섰다.
“방금 그 칼, 일탄십검이 아닌데, 뭐지?”
“후욱! 일탄…… 십검이 뭔지는 알고 묻는 건가?”
아걸이 힘들게 대답했다.
겨우 묻는 말에 대답만 해 주는 것인데도 숨이 턱에까지 차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방금 일전은 아걸의 체력을 깔끔히 빼앗아갔다. 그러면 초가평은 말을 나눌 것이 아니라 즉시 공격해 와야 하는 거 아닌가? 설마 아걸의 상태를 모르는 것은 아니겠지?
안다. 알면서도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실, 초가평도 갈등한다. 지금 공격할까? 바로 들이치면 눕힐 수 있을 것 같은데. 하지만 공격을 시작하면 아걸은 즉시 돌변한다. 언제 힘들었냐는 듯이 즉시 달려든다.
일전이 시작되기 전에도 아걸은 힘들어했다.
싸우겠다고 찾아온 자가 적을 앞에 두고 털썩 주저앉기까지 했다면 말 다 한 것이다.
지금이나 조금 전이나 똑같다.
초가평이 말했다.
“일홀도에 대해서는 너만큼이나 우리도 파악하고 있다. 일홀문 삼십육 문주의 칼이 어떤 것이라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지. 성검문이 설마 그 정도도 파악하지 못했을까.”
“내 칼은 그 중 어느 칼에도 속해 있지 않아.”
“그럼 뭐야? 이건 네가 창안한 너만의 일홀도인가?”
아걸은 초가평이 묻는 이유를 알았다.
사부 허도기에게 이 칼을 사용했냐는 물음이다. 그 말을 직접 묻지 않고 빙빙 돌려서 물었다.
“창안? 글쎄? 창안인가? 아니, 창안이 아니지. 뭘 얻거나 새로 배운 게 아니니까. 가진 게 너무 많아서 버리다 보니까 뭔가가 툭 튀어나온 것인데…… 이게 뭔지는 나도 몰라.”
“맞네. 일홀도.”
“일홀도라고 한다면…… 일홀도겠지?”
“후후! 사부가 왜 네놈한테 쩔쩔매는지 이해를 하겠군. 네놈 칼은 종잡을 수 없어.”
“그 말도 잘못됐어. 허도기는 나한테 쩔쩔맨 적이 없잖아. 항상 내가 쩔쩔맸지. 허도기에게 운이 따라 주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 날 죽일 기회가 네 번이나 있었는데, 네 번을 다 놓쳤거든. 세상에 이런 불운도 없지.”
“그러게. 오음산에서 네놈이 빠져나간 것을 안 순간, 세상에 정말 이런 일도 벌어지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사부 손에서 네 놈이 또 빠져나갈 줄은 생각하지 못했거든. 만약, 오늘, 이 싸움에서 네가 이긴다면 사부를 찾아갈 셈이냐?”
“내 실력으로? 후후! 어림도 없어.”
아걸의 말에 초가평이 눈을 부릅떴다.
“사부를 안 찾아간다고?”
“말했잖아. 내 실력으로는 어림없다고. 허도기를 찾아가는 것은 죽으러 간다는 말인데…… 나도 목숨이 아까워. 지금까지만 해도 평생 쓸 운을 다 썼거든. 이젠 조심해야지.”
“그 말, 받아들일 수 없다.”
초가평이 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사납게 말했다.
“너는 일사검광을 막아냈다. 그런 무공이라면 사부와 팽팽한 호적수가 되어야지. 그래야 나도 사부와 싸울 수 있는 거야. 네놈이 꽁무니를 빼는 건, 나도 어림없다는 말이잖아.”
“그렇게 생각한다면, 넌 네 사부를 잘못 봤어. 후후! 정말 세상에 이런 일도 다 있네. 평생 같이 살아온 사부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는 제자가 있다니.”
“으음!”
초가평이 침음했다.
“몇 번을 다시 말해도 똑같은 말인데…… 허도기의 무공은 결코 네가 생각한 수준이 아니야. 내 몸이 온전하다고 해도 힘들어. 하나만 묻지. 조명천하, 봤나?”
“나는 사부가 조명천하를 수련했다고 보지 않는다. 수련했다면…….”
초가평이 입을 다물었다.
조명십해의 꽃은 조명천하다.
삼륜축첩공, 선풍만검, 은장재계이살…… 우열을 가릴 수 없는 공부가 열 가지나 있지만, 조명천하는 단연 압권이다.
허도기는 형을 암살하려다가 실패한 경험이 있다.
일홀문주가 때맞춰서 달려와 주었기 때문인데…… 어쨌든 허도기는 그때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형이 살려 주었다. 그 후, 평생 소축을 떠나지 않았다. 형이 죽을 때까지.
허도기가 소축에 은거한 이유가 단지 일홀문주 때문일까? 다른 이유는 없나?
당시, 조명천검을 십 성으로 수련한 무인은 두 명이었다.
성검문주 허도강과 아우 허도기다. 조명천검을 십 성으로 수련했다는 말은 조명십해도 십 성 수련을 마쳤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진실은 알려진 바와 조금 다르다.
허도기는 조명천검을 십 성 수련하지 못했다. 문주 허도강도 마찬가지다. 두 사람 모두 조명십해 마지막 부분인 조명천하를 십 성으로 수련하지 못했다.
만약, 십 성 수련을 마친 상태라면 일홀문주와도 좋은 대결을 벌였을 것이다. 굳이 서리가헌과 서리형개에게 독을 쓰라고 유인하지 않았어도 된다는 말이다.
두 사람은 조명천하를 겨우 삼성에서 사성 정도만 수련한 상태였다.
암살 당시만 해도 허도기가 검을 들 정도로 두 사람의 무공은 팽팽했다. 하지만 암살 사건 이후, 허도강과 허도기의 무공 격차는 현격히 벌어졌다.
조명천하 수련에서 허도강이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이것이 진실이다. 허도기가 소축에 은거한 채 얌전히 반평생을 살아온 이유다.
허도강이 병사할 즈음에도 허도기의 조명천하는 큰 발전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조명천하를 봤냐고? 그 사이에 사부가 대성이라도 이뤘다는 건가?
꿀꺽!
초가평은 당황해서 마른침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