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일홀도-419화 (419/600)

第八十四章 오차척살(五次刺殺) (4)

“서종에서 보자는데?”

앞장서서 길을 열던 황열이 되돌아와서 말했다.

일행에 앞서서 안서로 달려간 나통이 밀마를 남겼다. 아마도 안서로 가는 길에 남긴 밀마로 추측하는데, 서종이라는 도읍에서 만나자는 전갈이다.

“서종? 어떻게 안 거야? 나통이 서종에서 만나자고 할걸?”

한항이 놀란 얼굴로 흑후를 쳐다보며 물었다.

흑후는 장정들에게 쉬게 하면서 ‘서종까지만 가면 될 거다’라는 말을 했다.

나통이 남긴 밀마를 보기 전이다.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흑후가 별것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나통은 청성파 문하였잖아. 물론 오래전에.”

한항의 눈가에 잔물결이 일었다.

한항이 웃는다. 눈으로 웃는다.

한항이 새로운 적을 만났을 때, 아니면 놀라운 일을 경험했을 때 띄는 독특한 버릇이다.

흑화방은 은거 무인들의 속사정을 환히 꿰뚫고 있다. 지금 흑후는 나통의 신분 내력을 말했을 뿐인데, 그 한마디로 모든 사실을 유추해 낼 수 있다.

아마도 흑화방은 은거 무인들이 세상에 드러내기 싫은 비밀까지도 파악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흑후가 말했다.

“그러니까 가장 빨리 달릴 수 있는 신법이라면 비류보(飛流步)를 쓸 거라 이거지. 비류보로 안서까지 얼마나 걸릴까? 취화원에서 당신들을 모르는 사람은 없으니 얼굴을 보이자마자 따라올 것이고…… 우리 쪽은 아걸 사정을 보아가면서 움직여야 하니…… 서종쯤에서 만나는 것이 딱 맞지.”

나통이 비류보를 쓸 것이라는 사실 외에도 나통의 본신 무공까지 파악했다.

흑후의 계산은 무공의 정도를 정확히 파악한 상태에서만 가능하다.

“왜들 그렇게 떫은 감 씹은 표정이야? 너무 염려들 하지 마. 우린 돈 안 되는 정보는 캐지 않아. 당신들에 대한 정보는 딱 이 정도면 충분해. 돈이 안 돼.”

흑후는 은거 무인들이 염려하는 바를 안다.

“자, 이제 반 시진만 더 달리면 서종이야. 달려. 그리고 푹 쉬어라. 오늘 일은 여기서 끝.”

흑후가 가마를 메고 있는 장정들에게 말했다.

가마는 서종으로 들어서는 입구에서 멈췄다.

동문 앞에 논이 펼쳐져 있고, 작은 물웅덩이 세 개가 삼각 형태로 자리 잡았다.

나통을 만나기로 한 장소다.

나통은 아직 오지 않았다. 하지만 곧 올 것이다. 장정들을 푹 쉬게 한 후에 움직이는 쪽이 결과적으로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그래서 계산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것이다.

장정들은 약속장소에 도착하자마자 흑후에게 인사를 하고는 서종으로 걸어갔다.

“안에 들어가서 할 일이 있나?”

쌍겸이 물었다.

“할 일은 무슨…… 하루 종일 부려먹었으니까 푹 쉬라는 거지. 저놈들 오늘 떡이 되도록 술 퍼마실 거야. 걱정하진 마. 내일 날이 밝은 즉시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날 테니까.”

흑후가 씩 웃었다.

“일부러 자극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아걸이 아픔을 참으면서 힘들게 말했다.

말을 할 때마다 고통을 꾹꾹 눌러 참는 인내가 느껴졌다.

“후후! 알았나 보네.”

“모두 다 알지. 일부러 자극했다는 거. 대충 흘려버릴 수도 있는 문제였거든.”

“이 사람들 입장에서는 내가 아주 못난 시라소니란 말이야. 흑화방 자체가 어둡고 음습한 느낌이 있어서 만나기도 꺼려지고. 무엇보다 박쥐처럼 이리 붙었다가 저리 붙었다 하니까 믿을 수가 없는 사람일 것이고.”

“아네. 그래서 겁박?”

“킥킥! 겁박까지야. 저 사람들, 겁박할 것도 없어. 전부 본인들 문제지.”

“그런가?”

“자세한 건 물을 생각도 하지 마. 비밀이니까. 사람이 지키고 싶어 하는 건 지켜줘야지. 그리고 전에 말했듯이 돈이 안 돼. 내가 뭔가 알고 있다는 뜻을 살짝 비춘 것은 날 무시하지 말라는 거지.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으니까. 이게 다 같이 섞이고자 하는 몸부림이니까 모른 척하고 지켜보기만 해.”

“후후! 윽!”

아걸이 웃다가 비명을 질렀다.

너무 웃는 바람에 복근이 움직였고, 상처를 자극했다.

“아무래도 안 돼. 이런 몸으로 어떻게 명부판관 노릇을. 저쪽에서 얌전히 칼 맞아 줄 리도 없고.”

흑후가 인상을 찡그렸다.

“후회는 하지 않고. 허도기 쪽에 있었으면 중용되지는 못해도 모진 벼락은 피할 수 있었을 텐데. 이번에 흑화방 손실이 꽤 컸다고 들었는데.”

“옆에 있었어도 떨어질 벼락이었으니까. 나 같은 사람은 내 운명을 잘 알거든. 허도기 옆에 있었어도 그 벼락이 분명히 떨어졌어. 그러니까 염려하지 말고.”

“날 도와줘도 해 줄 게 없는데.”

“나중에. 해 줄 거는 나중에 따지자고. 내가 설마 미쳤다고 공짜로 이런 일 하겠냐고. 뭔가 노리는 게 있으니까 이만큼 투자를 하지. 넌 나중에 모른 척만 하지 마.”

“그 말이 더 무서운데?”

“그렇다고 뭘 해달라는 건 아니고. 우리 알잖아? 이쪽저쪽에서 만나기 어려운 사람들 만나게 해 주고, 서로 하기 힘든 일들 해결해 주고 그러면서 중간에 돈 좀 빼먹으며 사는 거지. 우린 딱 그 정도면 되니까.”

“하하하!”

아걸이 웃었다. 이번에는 웃음이 터질 때부터 상처가 건드려지지 않도록 조심했다.

“사실 이런 일은 허도기가 잘하거든. 끼어들 때 끼어들고, 빠질 때 빠져주고. 그런데 그 사람…… 이용만 해 먹는 건 좋은데 아예 우리 전부를 꿀꺽 삼키려고 해. 사람이 왜 그런지 몰라. 그래서 말을 갈아탔잖아. 킥킥!”

“그런 말을 당사자 앞에서 해도 되나?”

“뭐가 어때서?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인데. 사람이 태도가 변할 때는 재빨리 변하는 것도 좋다니까.”

흑후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히 말했다.

아걸은 흑후를 쳐다봤다. 그리고 피식 웃었다.

낮에 흑후가 허도기에 대한 말을 해 줬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지만, 아걸에게 들으라고 한 말이다. 또 듣고서 몽설에게 알려주라는 말이기도 하다.

이것이 첫 번째 도움이다.

아걸을 치료하느라고 많은 돈을 쓰고 약재를 투입한 것은 도움 측에 속하지 않는다. 아니, 도움이 분명하다. 다만 개인과 개인의 사적인 도움이다.

허도기의 행방을 알려 준 것은 공적인 도움이다.

흑화방이 호황위에게 주는 도움인 것이다.

아걸은 이 도움을 받아도 줄 것이 없다고 말했다.

이 정도 의도를 눈치채지 못할 흑후가 아니다. 그래서 즉시 받을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자신이 챙길 것은 자신 스스로 챙기겠다고, 허도기처럼 흑화방 전체를 몰살시키려는 행동만 하지 말라고 오히려 부탁해왔다.

서로가 서로에게 한 말을 알아들었다.

“그런데 흑후는 아직도 내가 허도기를 이길 수 있다고 보나 보네.”

“솔직히 말하면 삼 할 승부? 하지만 지금 무림에서 허도기에게 삼 할 승부를 걸만한 무인은 없으니까. 뭐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다고 해야 하나? 킥킥!”

흑후가 웃었다.

나통이 취화원 살수를 데리고 왔다.

서종 동문 앞, 논두렁에 표식으로 작은 깃발을 꽂아놔서 매우 쉽게 찾아왔다.

취화원 살수, 여인이 이인교 앞으로 다가섰다.

“이 곡주 소호님 휘하에 있는 금령(金鈴)이라고 합니다. 묵언양기(默言養氣) 수련 중이시라고 들었습니다.”

여인이 차분하게 말했다.

성정이 굉장히 찬 여인이다. 첫인상부터가 다가가기 어려운 여자로 보인다. 예쁘고 도도해서 웬만한 사내와는 말도 섞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묵언양기? 풋!’

아걸은 피식 실소를 흘렸다.

나통이 아걸의 마음을 헤아리고 나름대로는 현 상황을 감춘다고 핑계를 댄 모양이다.

한데 영 어설펐다.

무인들이 묵언양기 수련을 종종 하기는 한다. 일정 기간 말을 하지 않고, 정사를 삼가고, 오로지 운공에만 전념한다. 기운을 충실하게 가다듬는다.

정작 중요한 점은 아걸이 그런 수련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몽설이 이 말을 들으면 당장 무슨 탈이 났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말은 하지 않지만 마음속으로는 애간장깨나 끓일 것이다. 또 다쳤구나 하고.

“생각난 것이 있어서…… 일부러 사람을 피하려고 가마에 있는 것이니 이해해주길 바랍니다.”

“네.”

“서신은?”

“여기 있습니다.”

여인이 서신을 꺼내 가마로 다가왔다.

파팟!

그녀는 가마를 재빠르게 읽었다.

이인교인데 네 명이 달라붙도록 어깨받이가 네 개나 있다. 이인교는 좌식이다. 한데 누워서 갈 수 있도록 길게 변형시켰다. 아걸이 누워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틀렸군. 후후!’

아걸은 미소를 머금었다.

가능하면 속여보려고 했는데, 역시 취화원 살수들의 눈길은 피하지 못한다.

“가마 안으로 서신을 넣겠습니다.”

금령이 눈치 빠르게 말했다.

아걸은 일어날 수가 없다. 누워 있는 자세에서 꼼짝도 하지 못한다. 어깨만 꿈질대도 사지가 토막 나는 듯한 통증이 일어나서 견디기 힘들다.

사실, 아걸은 자신의 상처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의원들이 바짝 붙어 다니면서 치료를 해 주기 때문에 직접 치료할 필요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몸을 움직이지 못하니 상처를 살필 수도 없었다.

“그래 주시겠습니까?”

“네. 절 믿으신다면 서신을 개봉해서 드릴까 합니다. 그래도 괜찮겠는지.”

“후후! 그래 주세요.”

아걸이 웃으면서 말했다.

취화원 정보망은 뚫렸다.

아걸은 함안성주를 징벌한 후에 곧바로 습격당했다. 무인 몇 명이 나타나서 공격한 것이 아니다. 상당히 많은 적이 나타나서 조직적으로 공격했다.

아걸이 함안성으로 간다는 사실을 사전에 알지 못했다면 벌일 수 없는 일이다.

육백 명에 이르는 무인들이 움직였다. 주산을 완전히 태워 버릴 정도의 기름이 동원되었다. 불길이 주산을 벗어나지 않도록 산불을 조절했다. 철질려 이만 개가 뿌려졌다.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동안 그 누구도 아무런 낌새를 눈치채지 못했다.

몽설과 아주 가까운 곳에 적이 있다.

이런 사실을 몽설도 알아야 한다. 자신이 다쳤다는 것을 알면 걱정이 많겠지만, 계속 명부판관을 진행하고 있으니 큰 염려는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정보망이 뚫렸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누군지 모를 그자는 이런 서신이 찍힌 인장 정도로는 찾아낼 수 없다.

금령이 봉투를 찢어서 서신을 꺼냈다. 그리고 읽기 쉽게 펼쳐서 가마 안으로 밀어 넣었다.

아걸이 가마 안에서 나오지 못하는 것을 보고 부상이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눈치챈 것이다. 그것도 아걸에게 서신을 펼칠 만한 힘도 없다고 봤다. 그래서 오해를 살 우려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서신을 펼쳐서 준 것이다.

“음!”

아걸이 신음을 흘렸다.

“이게 확실한 겁니까?”

취화원 정보는 확실하다. 하지만 취화원을 완전히 믿는 아걸조차도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내용인지 보지 않아서…… 하지만 본원에서 파악한 일이라면 감히 말씀드립니다. 확실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아걸이 차분하게 말했다.

취화원이 말한 것이라면 어떤 말이든 믿는다. 내일 태산이 무너진다고 해도 믿는다. 서신에 적힌 내용이 너무 기가 막혀서 잠시 말문을 잃었을 뿐이다.

아걸이 말했다.

“내일 통문을 보내고 모레 처리합니다.”

“그럼 전 이만.”

금령이 일어서서 허리를 숙였다.

그녀는 돌아가서 몽설에게 아걸의 모습이나 상황에 관해서 이야기해야 한다. 그녀가 직접 본 것이 없으니 보고 느낀 것을 가지고 말해야 한다.

하지만 그녀가 어떤 상상을 하더라도 아걸 상태를 직접 눈으로 본 것보다는 약할 것이다. 아걸이 많이 다친 것은 알지만 설마 운신하지 못할 정도라고까지는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이 정도면 된 거다.

“먼 길, 조심해 가세요. 고생했습니다.”

“상부님.”

“네.”

“존경합니다.”

“예? 아! 예…… 고맙습니다.”

“정말 존경해요.”

“아, 예.”

“부디 건강하세요. 또 뵙겠습니다.”

쉬이익!

금령이 신형을 날려 사라졌다.

“하! 이거 몽설이 원주인 게 천만다행이지…… 전에 왔던 애도 추파를 던지고 가고, 재도 그렇고. 몽설이 원주가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냐?”

쌍겸이 히죽 웃으면서 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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