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八十四章 오차척살(五次刺殺) (5)
“다음은 어디야?”
금령이 떠나자마자 비석 장태전이 궁금한 듯 물었다.
네 번째로 척살된 사람이 함안 성주였다. 그렇다면 다섯 번째 척살 대상자도 분명히 범상치 않은 인물일 것이다. 최소한 함안 성주만큼은 이름이 난 사람이지 않을까?
“노정문(露井門) 소문주(小門主) 강유(姜瑜).”
아걸이 무심히 말했다.
순간, 은거 무인들은 깜짝 놀라서 입을 쩍 벌렸다.
“노, 노정문?”
“강유? 하!”
은거 무인들은 서로를 쳐다보면서 기가 막혀서 할 말이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노정문은 성검문 휘하 이십사 위문(衛門) 중 일문이다.
위문은 달리 위문(委門)으로 불리기도 한다. 성검문의 권한을 위임받아서 강호사를 해결하는 문파라는 뜻이다.
성검문이 절대적으로 믿는 강호문파 이십사 개.
노정문은 몽설과 아걸을 만나게 해 준 활검문과 마찬가지로 성검문 예하 문파가 마찬가지다.
활검문은 소축십검을 본떠서 휘하에 제자 열 명을 두었다.
노정문도 성검문을 본떴다. 노정문은 기구조직을 흉내 낸 것이 아니다. 무공을 본떴다.
성검문이 조명천검을 공개하자, 노정문은 대정십육식(大正十六式)을 공개했다.
성검문은 조명천검을 수련한 자 중에서 자질이 있는 자에게는 조명십해를 전수한다고 공언했다. 노정문도 대정십육식을 수련한 자 중에서 괜찮다 싶은 무인들은 노정 문도로 선발할 것이며, 대정천로비검식(大正天露秘劍式)을 전수한다고 공언했다.
조명십해를 깨달은 사람들은 소축십검을 비롯한 몇 명뿐이다.
대정천로비검식 역시 깨달은 사람이 몇 명 되지 않는다. 노정문이 공약한 대로라면 노정문 문도 모두가 대정천로비검식을 구사할 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누구도 전수받지 못했다. 자질이 안 된다는 게 가장 큰 이유다.
대정천로비검식은 오직 문주 일가만 수련하고 있다.
노정문은 인근은 널리 알려진 명문정파다.
성검문이 중원 전체를 떨쳐 울린다면, 노정문은 호남성(湖南省) 제일 문파로 추앙받는다.
노정문 휘하에 인면수심 악인이 숨어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하물며 그 대상자가 소문주 강유?
노정 문주 강천화(姜仟華)는 사대 독자다. 씨가 귀한 집이다. 강유가 오대 독자인 셈이다. 자식을 많이 두려고 첩을 셋이나 얻었는데도 자식은 오직 강유 한 명뿐이었다.
그 강유가 다섯 번째 척살 대상자다. 그렇다면 노정문의 반발은 말도 못 할 정도로 거셀 것이다. 자칫하면 노정문 전체와 싸워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아걸의 몸이 정상이라고 해도 벅찬 승부다. 하물며 지금은 일어서지도 못한다.
이번 일은 누가 봐도 무리다.
“노정문에 망나니가 있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소문주가 망나니는 망나니지. 진작부터 주색잡기에 푹 파묻혀 산다고 말이 많았어. 하지만 술 퍼먹고, 계집질하고, 투전에 미쳤다고 해서 악인이라고 할 수는 없잖아?”
한항이 말했다.
“으음!”
장태전이 침음했다.
강유가 지은 죄는 겨우 주색잡기 정도가 아니다. 취화원이 강유를 점찍었다는 것은 분명히 살인을 능가하는 큰 죄가 있다는 뜻이다. 또 죄를 증명할 증거도 마련해 놨을 것이다.
하지만 그 증거라는 것…… 무전유죄(無錢宥罪), 유전무죄(有錢無罪)다. 아무리 증거가 차고 넘쳐도 힘을 지닌 자가 아니라고 하면 아닌 것이다.
함안 성주도 자신은 저수지에서 찾아낸 인골들을 전혀 알지 못한다고 딱 잡아뗄 수 있었다. 어떤 자가 저수지 식인어를 이용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물론 사람들은 함안 성주를 의심하겠지만, 증거가 없다. 함안 성주가 직접 이 일을 벌였다는 증거가 전혀 없다. 증인이 나오면 매수했다고 말할 것이다.
함안 성주가 버티지 못하고 자진한 것은 죄가 발각되었다는 절망감 때문이다.
성검문주의 조력을 얻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이유다.
만약, 누군가의 조력을 얻었다면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끝까지 버텼을 것이다.
허도기는 함안 성주를 구하지 않았다.
성주를 구하기보다는 명부판관을 잡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일을 진행했다. 만약 주산에 진을 설치할 시간에 함안 성주에게 서신 한 통만 보냈어도 그처럼 쉽게 일이 끝나지는 못했을 것이다.
노정문은 함안 성주와는 다르다. 노정문은 허도기의 기본 뿌리라고 할 수 있다.
허도기도 노정문만큼은 버리지 못한다.
이런 점들을 감안했을 때…… 취화원이 찾아낸 모든 증거는 부인당할 것이다. 노정문 전체가 소문주를 보호하겠다고 똘똘 뭉칠 경우, 전면전을 치러야 한다.
강유가 저지른 죄는 주색잡기다.
노정문도 주색잡기는 인정한다. 하지만 그 외에 어떤 죄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증거가 뚜렷해도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서 부인할 것이다.
한항이 말한 것은 바로 그 점이다.
강유가 어떤 일을 저질렀든 노정문은 오직 주색잡기만 인정할 것이라는 점.
“내일…… 통보할 건가?”
한항이 물었다.
“네.”
아걸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그렇겠지. 말해 뭐해. 쯧! 그냥 한 번만 쉬어가면 안 될까? 뭐 반드시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미리 통첩을 넣어놨다면 모를까,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잖아. 기껏해야 명부판관 오 일 징벌이 깨진다는 것뿐인데…… 그것도 지금 겨우 네 번째이니까 조금 쉬었다가 할 수도 있는 문제고.”
한항이 답답한 듯 말했다.
“흑후, 의원 좀 불러줘. 이틀 안에 일어설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방법이 없을까?”
“없지. 그런 방법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없어.”
흑후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간살(姦殺).
강유가 저지른 죄다.
취화원 정보에 의하면 강유가 죽인 여자는 최소한 이십여 명 이상일 것으로 추산한다. 하지만 증거는 하나밖에 없다. 다른 간살에 대해서는 어떤 증거도 수집하지 못했다.
명부판관이 말할 수 있는 징벌 이유도 여인 한 명을 간살한 죄다.
“세상이 어떻게 된 게…… 노정문주는 내가 알지. 참 강직한 사람이야. 불의를 보고는 참지 못하는. 한데 자기 자식이 간살을 했으니…… 어떻게 호랑이 아비에게서 견자가 나왔나.”
“그러게. 호부 밑에 견자 없다는데…….”
장태전과 고사가 말을 주고받았다.
모레 있을 싸움도 지금까지 해 온 싸움만큼이나 힘들 것으로 추측된다. 명부판관이 바르다고 해도 자기 자식을 죽이겠다고 찾아왔는데 순순히 내줄 리 없다.
노정문주의 검을 맞이해야 한다. 절정에 이른 대정천로비검식을 상대해야 한다. 두 번째는 노정문 전체 문도의 조직적인 반격을 감당해야 한다.
생각만 해도 눈앞이 캄캄하다.
“이러고 있으면 뭐 해? 탄식한다고 쌀이 쏟아지는 것도 아니고…… 가자. 가서 노정문이 어떤 문파인지 살펴보기나 하자고. 하다못해 퇴로라도 찾아놔야 하잖아.”
“퇴로를 찾으면 저놈이 순순히 물러서고?”
“끄응!”
“가 보나 마나지 뭐. 노정문 그놈들…… 썩어도 준치라고, 그래도 성검문 이십사 위문 중에 하나잖아. 성검문이 저 지경이 된 걸 모를 리 없잖아. 다음은 자기들 차례라는 것을 아는데, 가만히 있겠어? 단단히 준비하고 있겠지, 뭐.”
장태전이 말했다.
다음 차례란 무림을 차지할 기회, 허도기처럼 무림 태두가 되는 기회를 말한다.
성검문이 무너지고 있다. 소축십검이 무너졌다. 그토록 강하던 소축십검이 아홉 명이나 죽었다. 아니, 아니다. 소축십검 전부가 죽어도 상관이 없다. 성검문주 허도기만 살아 있으면 아직도 성검문은 건재한 것이다.
문제는 허도기와 아걸의 결전이다.
이십사 위문 문주들은 허도기와 아걸이 매번 처절하게 부딪히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처음에는 허도기가 이기는 듯했지만, 점점 시간이 흐르면서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아걸을 매번 놓치고 있지 않나.
이렇게 되면 이제 반드시 허도기가 승리한다고 장담할 수도 없게 된다.
만약…… 정말로 만약에 허도기가 봉변을 당한다면 어떻게 될까? 문제가 커진다.
허도기가 죽는 순간, 천하는 순식간에 갈가리 찢긴다.
이십사 위문, 구파일방, 오대 세가…… 중원 무림에 대문파만 무려 마흔 개다. 어느 문파, 어느 가문이 패권을 차지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대혼란이 일어날 것이고, 격전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이십사 위문 문주들은 이런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나름대로 검을 갈고 있다.
문파의 손실을 최대한 줄이면서 자신의 영역을 차분히 살피고 있다. 구파일방도 마찬가지다. 무림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오대 세가 역시 옛 영화를 다시 떨칠 기회라고 생각하고 무공을 가다듬는다.
허도기가 죽는다면 정말 그렇게 된다.
허도기를 쓰러트리는 자가 거대 세력이라면 중원 패권은 단숨에 넘어간다.
이십사 위문이 상대하기에는 너무 거대한 적이 나타난 셈이다.
그때는 다시 숙고해야 한다. 허도기를 쓰러트린 세력과 힘을 겨룰 것인지, 아니면 허도기에게처럼 머리를 숙일 것인지. 싸워서 중원을 장악할지, 머리를 숙이고 한 지역의 패권을 차지하는 것으로 만족할지.
한데 허도기를 쓰러뜨리는 자는 아걸이다. 일홀도다. 일홀도는 세력을 만들지 않는다. 일인 문파다. 그들은 세상을 떠돌면서 무공을 수련한다.
그런 자들은 수십 명이 있어도 패권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가시를 잔뜩 세운 고슴도치이니 적당한 선에서 대우를 해주며 우호 관계를 유지하면 된다.
어떤 경우든 칼은 갈아놔야 한다. 이빨을 매일매일 날카롭게 갈고, 발톱도 야무지게 다듬고, 근육에는 힘이 넘치고, 눈빛에는 살광이 번뜩인다.
현재 이십사 위문이 그런 상태다.
아걸이 그런 문파 중 하나를 공격하겠다는 거다.
“가자고! 그래도 가야지. 이러고 있어 봤자 정말 아무것도 안 나오잖아. 기가 질릴망정 구경은 해야지.”
고사가 일어섰다.
“그럴까? 그럼 구경하는 셈 치고 다녀올까?”
장태전이 따라서 일어섰다.
“일어설 수 있겠습니까?”
“일어서기는요.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지금 살점을 도려낸 것만 한 근이 넘습니다. 절대 움직이지 못합니다.”
의원이 단호하게 말했다.
죽은 살을 도려내고 염증이 생기지 말라고 약초를 듬뿍 붙여놨다.
그 고통 때문에 잠조차 편히 자지 못하고 있다. 이마는 늘 고열로 들끓는다. 팔팔 끓는다. 식은땀은 줄줄 흘러내리고, 입안은 바싹 타들어 간다.
아직 극한의 고통에서조차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데 그런 몸으로 일어서겠다니 의원이 질색할 만도 하다.
“늦어도 모레에는 일어나야 합니다.”
“아이! 어림도 없다니까요. 제가 천신도 아니고…… 저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방법이 없습니다.”
“억지로 일어서면 어떻겠습니까?”
“아이고! 일어서지를 못하신다니까요. 일어서실 수 있으시면 일어서 보세요.”
의원이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느냐는 듯이 눈을 흘겼다.
맞는 말이다. 당장이라도 일어서고 싶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꼼짝도 하지 않는다. 정말 이런 몸으로 어떻게 초가평과 싸웠는지 모르겠다.
아걸의 몸이 지금 그런 상태다.
“뭐 좋은 약 같은 거 없습니까? 고통을 참을 수 있는.”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없어요.”
“고통을 참을 수 있는 약이라면 뭐든 상관없습니다. 마약도 괜찮고, 독도 괜찮고.”
“아이고! 저는 그런 거 취급 안 합니다.”
의원이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사실 의원한테는 큰 기대도 하지 않았다.
의원에게는 고통을 죽이는 미약(迷藥)이 있다. 하지만 약한 고통을 눌러줄 뿐, 완전히 잊게 만들지는 못한다. 특히 아걸처럼 전신을 난도질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태가 되면 백약이 무효다. 어떤 약도 듣지 않는다.
마약에 취하게 할 수는 있다. 취해서 정신을 못 차리게 할 수는 있는데, 그건 아걸이 바라는 바가 아니다. 아걸은 정신은 멀쩡한 상태에서 고통만 있게 해달란다. 그게 되나.
의원은 ‘안 됩니다!’라는 소리만 연신 늘어놓다가 돌아갔다.
“흑후!”
“나 부를 줄 알았다니까. 없어. 없어. 그런 거 없어.”
“약을 달라는 게 아니고…….”
“약 달라는 게 아냐? 약만 아니면 다른 건 구해다 줄 수 있지. 뭐? 뭐가 필요한데.”
“부목 좀 부탁해.”
“엥? 뭐, 뭐? 부목? 뭐 하시게? 몸을 칭칭 묶고 억지로 뭐…… 목발이라도 짚고 일어나시게?”
“그래야지.”
“엥?”
흑후는 자신이 잘못됐지 않았나 싶어서 아걸을 쳐다봤다.
아걸의 눈은 침착하다. 결코, 농담이 아니다.
“엥? 저, 정말 목발을 짚고서라도…….”
아걸은 눈을 감았다.
흑후가 부목을 구해다 줄 걸 믿는다는 투다.
“이거 미치겠네. 아니, 목발 짚고 대정천로비검식 앞에 나서는 사람도 있나? 뭐, 이런 미친!”
흑후가 연신 투덜거렸다. 하지만 아걸의 고집은 꺾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아걸이 고집을 꺾을 사람은 아니다. 절대로.
“이놈들아! 빨리 부목이라도 좀 구해 봐!”
흑후가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