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八十五章 별호적력(別號的力) (1)
이십사 위문 중 하나인 활검문은 치우현 동승을 중심으로 해서 사방 이백여 리를 장악하고 있다. 성검문은 초도성을 다스리는 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정문도 마찬가지다. 위수(偉水) 삼각주(三角洲)인 사평(沙坪)을 중심으로 사방 이백오십 리를 영향권에 두고 있다.
영향권이라고는 하지만 노정문이 위압감을 드러낸다거나 통치하는 것은 아니다. 산적들처럼 세금을 거두지도 않는다.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
노정문은 단지 존재만 한다.
하지만 사평 인근 사람들에게 노정문은 삶이자, 생활이자, 축복이다. 노정문 덕분에 먹고 사는 사람들이 이십만 명을 넘어섰다는 말도 있다.
이백오십 리 안에 있는 사람들…… 아니, 그 훨씬 넘어 삼백 리 떨어진 곳에 있는 사람들도 노정문 덕을 본다. 모든 일상생활이 노정문 중심으로 돌아간다.
노정문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처지라고 할까?
노정문은 기껏해야 일개 무가일 뿐이다. 하지만 천하 명승지 태산을 찾는 사람이 일 년이면 수백만 명을 헤아리듯, 노정문을 찾아오는 사람도 수십만 명에 이른다.
노정문 방문객이 매일 천여 명에 이른다. 일 년이면 삼십육만 명이 방문한다.
노정문 무인을 만나려고 부모가, 일가친척이 찾아온다. 이름난 무가를 구경하러 오는 사람도 있다. 도전자도 있을 수 있다. 온갖 사람들이 찾아온다.
노정문 문양은 풀잎에 맺힌 이슬 모습이다. 노정문 절초인 대정천로비검식을 상징 있게 드러낸다.
길을 걷다가 네모난 풀잎 위에 이슬이 떨어져 있는 문양을 보게 되면 ‘사평에 다 왔구나.’ 하고 생각해도 된다. 그만큼 많은 곳에서 노정문 문양을 사용한다.
객잔, 다루, 주루, 마방…… 노정문과 아무런 연관도 없지만, 이곳이 노정문 땅이다 하는 의미에서 문양을 내걸고 있다. 그리고 노정문은 이런 부분을 용인했다.
- 한낱 문양이 사는 데 도움이 된다면 얼마든지 사용해야지. 우리 문파는 널리 알려 주기도 하고. 하하하!
노정문주는 홍루(紅樓)에서 노정문 문양을 사용해도 웃음으로 홀려 버렸다.
노정색루(露井色樓)라는 간판은 매우 원색적이다. 노정문 뒤에 색루를 붙인 것이나 마찬가지다. 대부분 홍루(紅樓)라는 명칭을 사용하는데, 노골적으로 색루를 썼다.
그래도 내버려 두었다.
노정문주는 무림 이외에 다른 부분은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하! 이거 곤란한데.”
장태전이 미간을 잔뜩 찡그리며 말했다.
“그러게.”
고사도 씁쓸한 고소를 베어 물었다.
사평 땅에서 노정문 험담이라도 할 양이면 맞아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 노정문이 신망을 잃지 않고 있어서 더 그렇다. 아예 노정문을 신처럼 받들어 모신다.
대문파가 있는 곳은 으레 그렇지만…… 이곳은 특히 더하다. 이리 봐도 노정, 저리 봐도 노정이다. 하다못해 골목길까지 ‘노정’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다.
“야천하고는 아주 다르지?”
고사가 주위를 쓸어보며 말했다.
“다르지. 그걸 말이라고.”
장태전도 무겁게 말했다.
노정문도 일정 영역을 장악하고 있고, 야천도 마찬가지다. 야천은 실질적으로 일정 지역을 관장한다. 하지만 방법이나 영향력은 완전히 다르다.
야천은 자신들의 지역에서 힘을 쓰고, 세금을 걷고, 이권에 참여한다. 하지만 외지인이 와서 보면 야천이라는 조직이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야천은 밤에 움직이는 조직이다. 그늘에서 움직인다. 그러니 모르는 사람이 많다.
노정문은 태양, 낮을 장악하고 있다.
밝은 세상을 활보하면서 버젓이 많은 사람 앞에 자신을 노출한다. 그러니 모든 사람이 안다.
노정문은 야천처럼 힘을 쓰지도 않는다.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하지 않는다. 세금을 걷기는커녕 조그마한 점포 하나 운영하지 않는다. 이권이 되는 사업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모든 사람이 노정문을 안다.
낮이라고 해서 태양이 뜨는 낮 시간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낮이건 밤이건 노정문은 밝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고, 야천은 그늘에 숨어서 움직인다.
너무도 확연한 차이가 여기서 드러난다.
야천을 욕하면 어두운 골목길로 끌려가 흠씬 몰매를 맞는다. 그래도 야천을 욕할 수는 있다.
노정문 욕은 전혀 할 수 없다. 분위기가 그렇다. 노정문 영향권에서 노정문 욕을 하려면 수많은 사람과 언쟁을 벌일 각오를 해야 한다. 몰매를 맞거나.
그 차이가 매우 크다.
야천은 자신들의 이권부터 챙긴다. 그 이권을 챙기는 과정에서 여러 사람이 먹고살기도 한다.
노정문은 이권을 챙기지 않는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이 노정문 덕분에 먹고 산다.
이 차이 또한 크다.
야천은 없어지는 것이 낫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지만, 노정문은 반드시 존재해야만 하는 문파인 것이다.
장태전과 고사는 어두운 얼굴로 사평을 돌아다녔다.
사평 인근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노정문을 칭송한다.
답답할 노릇이다.
“내일 살첩을 전하겠지?”
“그럴 거야.”
“그 몸으로 어떻게 전한대? 이번에는 다른 사람을 시키려나? 우리가 대신 전할 수도 있고.”
“아니. 아직도 아걸을 몰라? 일어서지도 못하는 몸이지만, 살첩…… 분명히 아걸이 전할 거야.”
“그 몸으로?”
“그렇다니까. 우리 내기할까?”
“안 해. 내기한다면 나도 아걸이 직접 전한다는 쪽에 걸 거야. 말이 안 되지만, 그럴 것 같거든. 후후!”
“그렇지? 하하하!”
장태전과 고사는 웃음을 흘렸다.
* * *
저벅! 저벅! 저벅!
사람들이 걸어온다. 세 사람이 걸어온다. 하지만 그들은 전혀 위협적이지 않다.
몸에 병기를 휴대하지 않았다.
맨 앞에 오는 사람은 깃발을 들었다.
다른 두 사람은 깃발 든 사람 뒤에서 다소 기형적인 승교를 들고 걸어왔다.
그들은 줄을 맞춰서 일렬로 걸었다.
사람들을 위협하지는 않지만, 어떤 특정 목적을 가지고 걷는 것은 분명했다.
기괴하다. 괴이하다. 사파 무리처럼 보인다.
세 사람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걸음을 멈춰 세웠다. 너무 괴이한 모습에 궁금증이 일어났다.
그러면서도 혹시 옷깃이라도 스칠까 봐 즉시 길 양쪽으로 갈라섰다.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왠지 옷깃조차 닿아서는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꼭 신기 들린 무당이 눈이 벌게서 걸어오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사람들은 세 사람이 걷는 길을 방해하지 않았다.
저벅! 저벅! 저벅!
세 사람이 걸어갔다.
“저 깃발 심상치 않은데, 뭐라고 쓴 거지?”
글을 모르는 사람이 물었다.
“며, 명부판관.”
글을 읽을 줄 아는 자가 몹시 놀란 듯 더듬거리며 말했다.
“뭐! 며, 명부판관?”
명부판관이라는 말이 나오자 기괴한 모습에 무작정 물러섰던 사람도 깜짝 놀라서 다시 세 사람을 쳐다봤다.
“저 깃발에 분명 명부판관이라고 적혀 있어? 맞아?”
“맞아. 명부판관이라고 적혀 있어.”
“가만! 가만있어 봐. 생각 좀 해 보게. 그러니까 함안 성주가 죽고…… 오늘이 나흘째! 나흘째 맞지?”
“나흘? 아! 그럼 오늘이 살첩을 전한다는…… 그런데 우리 사평에는 무슨 일로?”
사람들의 눈가에 짙은 그늘이 패였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 명부판관이 사평 땅을 밟았다는 사실부터가 불길하다.
사람들은 암울한 눈으로 세 사람이 걸어가는 모습을 쳐다봤다.
저들이 어디로 가고 있을까?
사평에는 상당히 많은 사람이 모여 산다. 그중에 명부판관이 노릴 만한 악인은 얼마든지 있다. 숨어서 못된 짓을 한 사람이 어디 한두 명이겠나. 명부판관이 나섰다는 소리를 들으면 당장 사평 사람 중 십 분지 일은 모습을 감출 것이다.
아니,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지금까지 명부판관이 걸어온 길을 보면, 그는 조무래기들을 상대하지 않는다. 그가 노린 자들은 한결같이 거물이다.
사평 땅에서 그만한 거물을 딱 한 곳!
‘설마 노정문에? 아냐. 말도 안 돼.’
정말 저 세 사람은 노정문을 향해서 걸어가는 것인가? 노정문에 살첩을 전할 사람, 숨을 쉬고 살아서는 안 되는 천하 악인이 살고 있다는 말인가.
‘설마…… 아니겠지.’
사람들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불길한 마음을 지우지 못했다.
노정문은 지금까지 명부판관이 죽인 호도문주나 함안 성주와는 차원이 다른 무가 중 무가다.
함안 성주는 무인이 아니었다. 하지만 인근에 덕망이 자자했던 명관이었다.
명부판관은 그런 함안 성주의 치부를 완전히 드러냈다. 성주는 스스로 자진했다.
호도문주는 이름은 널리 알려진 사람이지만 문파를 크게 융성시키지 못했다. 노정문과는 비교할 수 없는 중소 문파다. 호도문주가 워낙 정의로운 사람으로 알려져서 파급력이 상당했을 뿐, 명부판관이 처리하기는 쉬웠을 것이다.
그만한 일이 있기 때문에 모두 아무 소리 하지 않고 지켜본다.
‘설마 노정문주님이? 아냐. 그럴 리 없어. 아니지. 지금까지 명부판관이 노린 자들은 하나같이 광명정대하기로 유명한 사람들이었잖아. 그러면 혹시……?’
설마 하면서도 ‘혹시?’라는 의심을 지우지 못한다.
그러지 않았다면 벌써 누군가의 입에서 ‘저 새끼들이 여기는 왜 왔냐’는 욕지거리가 쏟아져 나왔을 것이다.
정말…… 정말…… 저 세 사람이 노정문을 향해서 걸어가는 것인가?
“안 되겠어. 난 따라가 봐야겠어.”
누군가 중얼거리며 세 사람의 뒤를 쫓았다.
모두 같은 심정이다. 가는 길이 급하고, 생업이 바쁘지만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은 직접 두 눈으로 지켜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궁금하다.
우르르르!
사람들은 세 사람의 뒤를 쫓았다.
“저, 저 사람들!”
“설마 했는데 정말 노정문이야? 맙소사!”
사람들이 몹시 놀라서 수군거렸다.
세 사람은 사평성으로 들어서자, 곧장 큰길로 걸었다.
노정문으로 향하는 길이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설마 했다. 큰길은 노정문으로 향하지만 다른 곳으로도 얼마든지 갈 수 있다. 중간에 걸음을 멈출 곳도 많다.
정말 노정문으로 갈까? 아닐 것이다.
사실 이쯤에서 사람들은 저 세 사람이 노정문을 향해서 걷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했다. 그래도 마지막 순간까지 ‘아니다. 아니다!’ 하고 부정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노정문만큼은 명부판관의 척살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노정문에 천하의 악인, 속된 말로 씹어먹어도 시원치 않을 정말 못된 놈이 숨어 있다면 그다음은 어떻게 되나? 노정문 덕분에 먹고 사는 사람이 이십만 명인데.
명부판관이 하고자 하는 일은 사람들의 생계와 직결되는 아주 중대한 문제였다.
그런데 세 사람이 곧바로 노정문을 향해서 걸어간다.
설마? 아니야. 빨리 방향을 틀어!
그래도 세 사람은 노정문을 향해 걸었다. 노정문을 십여 장 정도 남겨두고도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계속 걸어간다. 곁눈질도 하지 않고 곧바로 걷는다.
이제는 확실히 알 수 있다. 더는 부정하지 못한다.
명부판관의 다섯 번째 척살 대상은 노정문 사람이다.
“그래도 문주님은 아니겠지?”
“에끼! 어디 들먹일 사람이 없어서 문주님을 입에 담아! 할 일이 그렇게 없어!”
“호도문주, 함안 성주. 모두 그럴 사람은 아니었지.”
“이 사람이 정말!”
“누가 문주님이라고 했어! 나도 문주님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니까 하는 말이잖아!”
“으음!”
노정문주를 입에 담은 자나 대꾸하는 자나 자신 없기는 마찬가지다.
명부판관의 목표가 노정문에 있으니, 이제는 노정문 무인 중 누구를 거론하더라도 놀랍지 않을 것 같다. 혹여 노정문주가 악인이라고 해도 믿어야 할 것 같다.
명부판관은 실수한 적이 없다.
명부판관은 칼을 들기 전에 반드시 증거를 제시한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완벽한 증거다.
이번에도 누군가를 지목한다면 그에 합당한 증거를 제시할 것이다.
“그래도 문주님은 아닐 거야.”
“문주님이 아니라고 해도…… 노정문에 악인이 숨어 있었다는 것만 해도 타격이 크지. 문주님 상심이 크실 거야.”
마지막 순간까지도 노정문주만큼은 명부판관의 척살 대상자가 아닐 것이라고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