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八十五章 별호적력(別號的力) (2)
“멈춰라!”
노정문 수문 무인이 깃발 든 사람을 막아섰다.
깃발을 든 사람은 멈추지 않았다. 계속 걸어서 무인 코앞까지 다가섰다.
“멈추라는 말이 안 들려!”
수문 무인이 소리를 빽 질렀다.
“풋! 웃기는 작자네. 여기가 너희 땅이야? 나라 땅이잖아? 너희는 저 안, 두 발짝 뒤로. 저기서부터 너희 땅 아냐? 왜 길 가는 사람 서라 말라 해?”
그때다. 장원 안쪽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오며 말했다.
“귀하의 말이 맞으나, 관습상 장원 앞은 우리 노정문에서 관리하고 있지.”
저벅! 저벅!
장원에서 걸어 나온 사람은 매우 차분했다.
노정문주에게는 여섯 명의 검수가 있다. 제자는 이천 명에 이르지만, 그중에 노정문주가 직접 검을 준 검수는 여섯 명뿐이다. 여섯 명만 검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사평 사람들은 이 여섯 명에게 수검사(秀劍士)라는 칭호를 주었다.
수검사 여섯 명은 동문이다. 엄밀히 말하면 사형제 간이지만 이천 명 중에 선발된 제자들이니, 사형제라는 말을 쓰기가 어색하다. 그래서 위아래는 기수로 정한다.
대사형이 일기에서 선발된 제자이고, 막내 여섯 번째 수검사는 십이기에서 나왔다.
수검사가 되면 모든 기수를 초월한다.
이것이 노정문의 관례다.
수문 무인을 제치고 앞으로 나선 자가 바로 수검사다. 눈빛이 차고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다. 마음도 차게 굳어 있다. 지금 당장이라도 검을 뽑을 준비가 되어 있다.
그가 직접 대문까지 나온 것은 누군가에게서 명부판관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 명부판관이 노정문을 향해서 오고 있다.
이런 말을 들었는데 수검사가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않나.
수검사가 빠르게 깃발 든 사내를 훑어봤다.
파팟!
눈과 눈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훗! 조무래기가 아니구나.”
수검사가 눈에 이채를 번뜩이며 물었다.
깃발 든 사내, 흑후다.
흑후는 이번 일을 자청했다. 은거 무인보다는 노정문 무인들을 빠르게 알아볼 수 있어서다.
흑후는 기가 막힌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조무래기인지 아닌지 그런 게 눈에 막 보이나? 아! 언짢게 듣지는 말고. 평생 살아오면서 그런 말은 처음 들어서 말이지. 그것도 새카맣게 어린놈에게.”
흑후와 마주 선 수검사는 마흔 중반으로 보인다. 흑후에 비해서 새카맣게 어리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런데도 흑후가 거침없이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은 이미 수검사를 알아봤다는 뜻이다.
수검사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봐. 너 이수(二秀)지? 낙화절검(落花絶劍) 하무구(霞懋俱). 내가 너보다는 나이가 많아. 그러니 어른으로서 하는 말인데, 함부로 조무래기니 뭐니 나불대지 마. 입을 함부로 놀리다가 목 잘린 놈들 한둘 아니거든. 킥킥!”
흑후가 눈빛을 번뜩였다.
이것도 일부러 도발한 것이다.
노정문은 호도문주처럼 순순히 당하지 않을 것이다. 노정문 전체가 단합해서 달려들 수도 있다. 그러니 이쪽도 그럴 테면 그래 보라는 식으로 나갈 필요가 있다.
또, 흑후는 낙화절검 정도가 막아설 사람이 아니다. 그는 비록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은, 그리고 알아도 흑도 무리라며 멸시하는 흑화방을 이끌고 있지만 그래도 정마(正魔)의 다리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그는 거물들만 접해 왔다.
천하제일인 허도기, 야천 구룡, 각 문파의 장문인, 이름난 거마(巨魔)…… 노정문주라면 말 상대를 할 수 있지만, 휘하의 수검사 정도는 눈 아래로 깔아본다.
“용건을 말하지.”
이수 낙화절검 하무구가 차분히 말했다.
“명부판관이 왔다고 하면 뻔한 거지, 뭘 자꾸 캐물어. 나쁜 짓을 한 놈…… 아니지, 천하에 때려죽일 후레자식에게 살첩을 전하러 왔는데. 이만하면 물음에 답이 됐으려나?”
“그게 누구냐?”
“여기서?”
흑후가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되물었다.
낙화절검 하무구는 눈살을 찌푸렸다.
명부판관이 노정문으로 향한다는 말을 듣고 길을 막아섰지만…… 그는 곧 자신의 행동이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많은 사람이 자신을 주목하고 있다.
얼추 이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구석구석에 서서 오가는 대화를 엿듣고 있다.
명부판관은 실수를 저지른 적이 없다.
그가 죽인 자들은 모두 악인이다. 악인이라는 증거가 너무도 뚜렷하게 나왔다. 본인이 시인하고 죽은 사람도 있고, 시인하지 않고 칼 맞아 죽은 사람도 있다.
어느 경우나 증거가 너무 명백했다.
그 칼이 노정문을 겨눈다 한들 할 말이 없다.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것은 과연 명부판관이 누구에게 살첩을 전할까 하는 것이다.
낙화절검 하무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점을 물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들을 은밀한 곳, 장원 안 등등 사람들이 들을 수 없는 곳으로 불러들인다면 오히려 노정문이 치부를 감추려는 듯한 행동으로 읽힐 수 있다.
많은 사람이 듣는 곳에서 물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킥킥!”
흑후가 얄밉게 웃었다.
“명부판관이 나쁜 놈을 죽이겠다는데 막아서면 안 되지. 솔직히 명부판관이 사평성에 들어선 것만 해도 수치가 아닌가? 소위 이십사위문이라는 노정문이 천하의 나쁜 놈을 끌어안고 있었다면…… 나 같으면 창피해서 얼굴도 못 들겠다.”
“말을 삼가지.”
“그러니까! 이렇게 막을 게 아니라 ‘지금이라도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말해야 한다는 거야. 내 말은.”
흑후가 눈에 신광을 번뜩이며 말했다.
낙화절검 하무구는 짧은 순간에 많은 생각을 했다. 그 결과, 이들을 이 자리에서 더 들여보내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들을 노정문에 들이는 것은 수치다.
그리고 명부판관이 노정문 문도 중 누군가에게 살첩을 전한다면 당장 소문이 퍼진다. 노정문에서 입단속을 시켜도 내일이면 모든 사람이 알게 된다.
겨우 한두 시진을 숨기자고 이들을 노정문 안으로 들여보낼 수는 없다.
“말해라. 누구에게 살첩을 전할 것인지.”
하무구가 차게 말했다.
그때, 지금까지 승교를 들고 묵묵히 서 있던 사내 두 명이 조용히 앞으로 나섰다.
흑후도 정중히 허리를 숙인 후, 뒷걸음질로 물러섰다.
누가 봐도 승교 안에 타고 있는 사람이 깃발을 든 사람보다 상관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것 역시 의도된 행동이다.
“명부판관이 살첩을 전한다.”
이인교 안에서 잔잔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순간, 모든 사람이 일제히 명부판관에게 이목을 집중시켰다.
승교 안에 명부판관이 타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진작부터 하고 있었다.
“명부판관이 맞아. 바로 저 음성이야!”
누군가가 말했다.
함안성에서 명부판관을 본 사람이 있다. 아걸의 음성을 확인할 정도라면 함안 성주를 공격할 때 상당히 가까운 곳에서 음성을 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말 명부판관이 맞아?”
“맞아. 틀림없어! 함안성에서는 두 발로 그냥 걸어와서 살첩을 전했거든. 그런데 여기는 승교를 타고 왔네.”
“그래?”
사람들은 궁금함을 꾹 눌러 참고 침묵했다.
이제 곧 명부판관이 살첩 대상자를 말한다. 이수가 많은 사람이 듣는 곳에서 말하도록 강요했다. 이러면 살첩 대상자는 회개하고 스스로 죄를 처리할 시간이 없다. 모든 죄과가 만천하에 알려진 상태에서 죽을 수밖에 없다.
슈욱!
승교 안에서 반철도가 내밀어졌다. 반철도에는 서신 한 장이 올려져 있었다.
“안 받아?”
흑후가 이수 낙화절검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수가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입술을 달싹거렸다. 하지만 곧 어떤 생각이 치밀었는지 이인교 앞으로 다가섰다.
“명부판관은 얼굴도 비치지 않나?”
그가 반철도 위에 올려진 서신을 집어 들며 말했다.
“내일 볼 텐데, 뭘 벌써.”
낙화절검이 서신 봉투를 북 찢어서 서신을 꺼냈다. 그리고 활짝 펼쳐서 내용을 읽었다.
“웃!”
서신을 읽은 낙화절검의 표정이 흙빛이 되었다.
“내일 다시 오겠다. 서신을 전했으니 당사자에게 전하는 것은 당신 몫이야. 서신에 적힌 자를 굳이 말하지 않은 것은 그에게 회개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다. 내 규칙이야.”
“증거는 있나!”
“항상. 항상 있지. 증거는. 그 증거, 내일 제시한다.”
탁탁!
명부판관이 승교를 탁탁 쳤다.
그러자 이인교를 들고 있던 장한들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가려는 것이다. 명부판관 깃발을 든 흑후가 재빨리 움직여서 승교 앞에 섰다.
저벅! 저벅!
세 사람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누굽니까!”
“누가 척살 대상자입니까! 노정문주님입니까!”
“수검사 중에 척살 대상자가 있는 거죠?”
주위에 늘어선 사람들이 명부판관에게, 또 서신을 읽은 낙화절검에게 질문을 쏟아냈다.
낙화절검은 물러가는 명부판관을 잡지 못했다. 그렇다고 서신에 있는 내용을 말하지도 못했다. 그저 멍하니 서서 돌아가는 승교를 지켜볼 뿐이다.
“누구인지 말해 주면 안 됩니까? 어차피 내일이면 알게 되잖아요? 높은 분입니까?”
사람들이 끈질기게 물어왔다.
사람들의 눈에는 분노가 어렸다. 지금껏 철석같이 믿었는데…… 낙화절검이 아무 말도 못 하는 것을 보면 정말 노정문 안에 사악한 인간이 숨어 있는 모양이다.
사람들은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기분이었다.
‘괜히 나왔어. 내가 나와서는 안 되는 거였어.’
낙화절검은 손에 든 서신을 쳐다봤다.
정말 믿을 수 없는 사실이 적혀 있는데…… 왜 그럴까? 서신에 적힌 말이 사실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후유! 천만다행이네. 거봐. 이렇게 하니까 통하잖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도 살첩을 전할 방법이 있다니까 그러네. 솔직히 나 안 믿었지?”
흑후가 말했다.
오늘 노정문의 살첩을 전하는 모든 계획, 지금까지 사평성에서 벌인 모든 행동은 흑후의 머릿속에서 나왔다.
일단 명부판관 깃발을 든다.
지금까지 깃발을 들고 걸었던 적은 없었다. 많은 사람의 이목을 끌어당기는 행동을 일부러 한 적이 없다. 오히려 정반대로 조용히 움직였다.
하지만 오늘은 많은 사람에게 명부판관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그들에게 명부판관이 노정문을 향해서 가고 있다는 사실도 은연중에 알려 준다.
그러면 수검사 중의 한 명이 반드시 마중 나올 것이다.
물론 사람들이 명부판관을 쫓아온다. 명부판관이 가는 곳은 어디나 인산인해다. 사람들도 들끓는다. 그들은 승교를 쫓아서 노정문까지 쫓아올 것이다.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앞에서 수검사와 흑후가 말을 나누게 된다.
명복 판관이 해야 할 말은 많지 않다. 그저 ‘명부판관이다.’ 이 한마디만 하면 된다. 그리고 살첩을 전한다.
살첩에 적힌 이름을 만인 앞에 말하는 것은 수검사 몫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분위기를 만들어질 것이다.
물론 수검사는 서신의 내용을 발설하지 못한다. 안에 적힌 내용이 너무 충격적이라서 즉시 안으로 들어가서 노정문주와 상의를 할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벌써 명부판관의 말을 믿기 시작한다.
수검사가 서신에 대해 부정하지 못한 채 안으로 달려 들어간 것이 역으로 명부판관을 도와주는 행동이 된다.
솔직히 아걸은 흑후의 계획을 반신반의했다. 깃발을 들고 나서서 만인의 주목을 받는다는 대목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남의 눈길을 끌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자리에 누워서 꼼짝도 하지 못하는 몸으로는 살첩을 전할 방도가 없었다.
오직 이인교에 실려서 가는 수밖에 없다. 걸어서 가지 못하니 이인교를 타고 가야 한다. 한데 자신이 다쳤다는 사실을 숨긴 채 살첩을 전한다면 그것도 괜찮은 방법이지 않나 싶었다.
그래서 일단 흑후의 제안대로 움직였는데,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빚이 자꾸 늘어나네.”
“빚을 쌓아 두면 나야 좋지. 언젠가는 톡톡히 받아낼 거니까. 그런데 오늘은 이렇게 넘겼는데 내일은 어떻게 하려고? 내일은 승교를 타고 가서 어쩌고저쩌고하지는 못할 텐데.”
아걸은 대답하지 않았다.
“내일은 정말 싸워야 한다니까! 저놈들 눈이 뒤집힐 거거든. 어떻게 하려고? 뭔가 대책이 있어야 할 거 아냐?”
“강유라는 자, 성격이 함안 성주보다는 호도문주 쪽인 것 같은데?”
“그렇지? 그럴 거야.”
“그러면 칼을 맞대야겠네.”
“그러니 무슨 방도를…….”
“싸우는데 무슨 방도. 싸울 때는 싸우는 거지. 하하! 욱! 아! 아직도 상처가…….”
“후유! 옜다, 난 모르겠다. 이 정도만 해도 난 할 거 다 했어. 정말 만류하고 싶지만 어떻게 못 하겠네. 항복! 마음대로 해.”
흑후가 항복한다는 듯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