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일홀도-424화 (424/600)

第八十五章 별호적력(別號的力) (4)

“사실이냐?”

한참 만에 노정문주 강천화가 입을 열었다.

노정문주 강천화는 키가 작은 노인이다. 눈매는 칼날을 보는 듯 사납다. 특히 하관이 역삼각형으로 빠르게 돌아서 매우 날카롭다는 인상을 풍긴다.

몸은 매우 단단하다. 예순이 넘었지만, 한시도 검을 놓지 않아서인지 중년인의 몸을 유지하고 있다.

“사실이 아닙니다.”

강유가 말했다.

강유는 이수와 동배(同輩)다.

마흔이 넘긴 중년으로 노정문의 대정천로비검식을 온전히 전수 받았다. 놀기 좋아하는 성격인데도 검이 날카로운 것을 보면 무력(武力) 하나만큼은 타고났다.

부인은 네 명이다. 하지만 아직 슬하에 자식이 없다.

부인은 네 명이지만, 같이 잔 여인은 오백 명을 넘어섰다는 소문이다. 그러면서도 예쁜 여자가 있다는 소문만 들리면 천 리를 마다하지 않고 달려간다.

그는 이런 일을 숨기지 않았다. 숨기기는커녕 아예 대놓고 즐기는 쪽을 택했다.

그래! 나 술 좋아하고, 여자 좋아한다. 노름도 좋아하고, 사냥도 좋아해. 하지만 탈은 안 내잖아. 술 좋아한다고 술 취해서 누구를 때린 것도 아니고, 여자를 좋아하지만 억지로 눕힌 것은 아니잖아. 서로 마음이 맞아서 같이 자는데 뭐가 문제야!

강유는 ‘주색잡기가 네게 피해를 준 것은 아니잖아!’라고 말한다.

정신 좀 차려라,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 하고 도덕적으로 비난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실질적으로 같이 잔 여자들이 좋다는데 뭐가 문제냐는 거다.

노정문주는 강유의 이런 버릇을 초기에 잡지 못했다.

강씨의 씨가 워낙 귀한 탓이다. 부인을 넷이나 두었는데, 누구도 잉태하지 못하니.

여색을 탐하지만 사고를 치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 이런 짓을 하다가 누군가에게서는 자식이 나오지 않을까 싶어서 보고도 못 본 척 내버려 둔 면도 있다.

강유도 이런 바람을 알고 있기 때문에 마음껏 방탕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에 와서는 잡으려고 해도 잡을 수 없는 악질 행동이 되고 말았지만.

“내일 명부판관이 증거를 가지고 올 것이다. 사실이면 사실대로 말해라.”

“사실이 아닙니다.”

강유가 단호하게 말했다.

“명부판관이라는 자가 어떤 증거를 가져올지 모르지만, 모두 조작된 겁니다.”

“확실하냐?”

“아버님! 제가 설혹 그런 짓을 했다고 해도, 제가 증거를 남기겠습니까? 저 그렇게 어리숙한 놈 아닙니다.”

순간, 노정문주와 강유의 눈길이 허공에서 날카롭게 얽혔다.

설혹 그런 짓을 했다고 해도. 증거. 어리숙.

이런 말들이 갖는 의미는 분명하다. 아니라고 부인하면서도 사실은 걸리는 게 있다. 그냥 모른 척하고 내 말을 믿어달라는 뜻으로도 들린다.

“아니라잖아요. 애가 아니라는데 왜 그래요!”

난화 부인이 목청을 높였다.

강천화는 강유를 쳐다보며 말했다. 달래듯이 부드럽게…… 살인마 강유가 아닌 아들 강유에게 말했다.

“내일 명부판관이 증거를 내밀면 그때는 변명도 하지 못한다. 만약 수를 써야 한다면 오늘 써야지. 그 전에 사실부터 알아야 하지 않겠니. 이게 순서다.”

“아닙니다.”

강유가 다짐하듯 말했다.

“그래. 나도 명부판관이 증거를 조작했다고 믿는다. 내가 자식을 믿어야지.”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강유의 얼굴이 밝아졌다.

나이를 어디로 먹었는지…… 부인이 넷이면 책임도 그만큼 커진 것인데, 하는 행동을 보면 꼭 어린애 같으니.

“네가 철두철미한 성격이라는 건 알지만, 혹시 실수했을 수도 있는 일이니까. 사람인 이상 실수는 항상 하기 마련이고. 만약 명부판관이 증거를 제시한다면 어떤 것을 내밀 수 있을까? 만약, 만약에 그런 일이 있었다면 말이다.”

네가 한 일을 알고 있다. 하지만 네 편이다. 명부판관이 어떤 증거를 제시할지 알아야 한다. 그래야 대책을 세운다. 그러니 짐작 가는 게 있으면 말해라.

노정문주의 속뜻이 읽혔다.

“증거 같은 건 없습니다. 만약 제가 누군가를 죽인다면 모든 증거를 지울 겁니다.”

강유가 자신 있게 말했다.

“됐다. 후후! 반철도이든 누구든 노정문을 희롱하면 안 되지. 안 그러냐?”

“맞습니다. 그런 놈은 단단히 본때를 보여 줘야죠.”

“푹 쉬어라. 네 처들, 걱정하고 있을 테니 잘 다독여 주고.”

강천화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공(美公), 정말 아무 일 없었어요?”

난화 부인이 물었다.

난화 부인은 자식을 미공이라고 불렀다. 아름다운 공자라는 뜻이다. 또 첫 부인을 맞이하는 순간부터 존대했다. 어미가 의지할 수 있는 자식이 되었다는 뜻이다.

“어머니.”

강유가 난화 부인을 쳐다봤다.

“미공. 어미한테는 솔직히 말해 줘야 합니다. 솔직히 말하세요. 정말 아무 일 없었습니까?”

난화 부인이 물었다.

강유는 대답하지 못했다. 인상만 잔뜩 일그러트린 채 뭔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아주 오래된 일이라서…… 을묘년이라면 십오 년 전 일이잖아. 나도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고. 십오 년 전 일을 누가 기억해! 이건 죽은 귀신이 튀어나온 것도 아니고.”

강유가 억울한 듯 투덜거렸다.

“후유! 괜찮아요, 미공. 천한 것 몇 명 죽였다고 해서 큰일 나지는 않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 어미가 깨끗하게 해결할 테니. 미공은 모른 척하고 푹 쉬세요.”

“그런데…….”

강유가 쭈뼛거렸다.

“뭐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어요? 있으면 말해요. 아무 걱정하지 말고.”

“아무래도 그때 오옥검(五玉劍)을 잃어버린 것 같아서.”

“……!”

오옥검이라는 말에 난화 부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오옥검은 아주 작은 소검이다. 검 길이가 자루까지 모두 합해도 겨우 한 뼘밖에 되지 않는다. 여인들이 지니고 다니는 은장도와 비슷한 크기다.

오옥검에는 보옥(寶玉) 다섯 개를 심어 놨다.

성질이 따뜻한 온옥(溫玉), 성질이 찬 한옥(寒玉), 독을 물리쳐 주는 피독주(避毒珠), 피를 잘 돌게 해주는 보혈주(補血珠), 어둠을 밝혀 주는 야광주(夜光珠).

오옥검은 난화 부인의 신물이다.

강유가 태어났을 때, 직접 품에서 꺼내 강유의 품 안에 찔러 넣어 준 보검이다.

그러면 내일 명부판관이 제시할 증거가 오옥검인가.

오옥검이 강유의 분신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은 노정문 무인이라면 모두 알고 있다. 근래 입문한 자들은 모르지만 십여 년 전 문도라면 모를 수 없다.

- 오옥검이 있는 곳에 내가 있다.

난화 부인이 입버릇처럼 한 말이다.

강유가 오옥검을 만지작거리면서 무슨 말을 하면 그 말을 바로 난화 부인의 명령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아무리 무리한 말을 하더라도 따라야 한다.

중년에 이른 노정문 문도치고 오옥검의 명령을 받아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중요한 명령도 아니었다.

- 저 계집애, 치마 벗겨.

- 저년 집이 어딘지 알아 와.

- 나 잠깐 볼일 좀 볼 거야. 그동안 망 좀 봐.

명령이라는 것이 하나같이 인상을 찌푸리게 했다. 그러니 잊지도 못한다.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던 난화 부인이 아랫입술을 잘끈 깨물며 말했다.

“미공, 잘 들어요. 그 오옥검 이미 오래전에 잃어버린 거예요. 배수(扒手)에게 소매치기당한 거예요. 알았죠? 오옥검을 드러내지 않은 게 십오 년이니, 세 사람을 죽이고 집에 불사른 자가 바로 오옥검을 훔쳐 간 거예요.”

“아! 그러면 되겠네. 휴우!”

강유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 외 다른 건 없어요?”

“그 외에는 정말 아무것도…….”

“있어도 상관없어요. 무조건 모른다고 해요. 나머지는 이 어미가 깨끗하게 처리할 테니까. 자, 그럼 말해봐요. 처음부터. 그것들을 어떻게 만났고, 어떻게 죽였는지.”

난화 부인이 대수롭지 않은 일인 듯 담담하게 물어왔다.

여자를 겁탈하고 죽였다.

여자의 부모는 서신에 적힌 대로 죽였다.

남자에게는 낙수만공(落水輓空)을 펼쳤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검이 요혈 일곱 곳을 격타한다. 머리, 어깨, 가슴, 명치, 단전, 낭심, 허벅지를 점 찍듯이 두들긴다.

여자에게는 오검연환수(五劍連環手)를 사용했다.

검이 가슴 전면을 두들겼다. 오행의 방위를 쫓아서 양쪽 가슴, 양쪽 옆구리, 그리고 하복부를 찔렀다.

제대로 검초를 펼쳤다면 즉사다.

두 부부에게는 사정을 남겼다. 즉사시키지 않고 피를 흘리면서 신음을 쏟아내게 만들었다.

네 부모를 치료해 줄 사람은 나밖에 없어.

여인은 부모 앞에서 옷을 벗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무엇을 요구하든 들어줄 수밖에 없다.

욕심을 채운 후에는 두 손을 등 뒤로 묶었다. 그리고 서서히 목 졸라 죽였다. 왜? 죽는 순간, 여인은 파르르 경련을 일으킨다. 몸이 떨린다.

그런 모습이 성욕을 왕성하게 일으킨다.

변태 살인마!

여인이 죽은 후에는 어미처럼 가슴에 오검연환수를 쳐 냈다. 그리고 발로 차서 초옥 안으로 던져 버렸다.

개들이 달려들었다.

사냥개도 여인이 이미 강유에게 버려졌다는 사실을 안다. 강유가 발로 찬 것이 일종의 신호다. 이제는 자기들이 뜯어먹어도 된다. 부모를 뜯어먹었듯이 여인도 뜯어먹는다.

강유는 사냥개 열 마리를 데리고 사냥을 나간다. 그 사냥개는 식인견이다. 사람을 먹는다. 주인이 발로 찬 인간은 곧바로 먹잇감으로 인식해 버린다.

사냥개들이 충분히 포식한 후, 물러났다.

강유는 마지막으로 집에 불을 질렀다. 이미 사람이라고 할 수도 없는 시신들 위에 불을 던졌다.

난화 부인은 밖으로 나와서 하늘을 쳐다봤다.

그녀의 얼굴에는 깊은 고뇌가 가득했다.

서신 내용이 사실일 것이라고는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자식이 살인을 즐긴다는 사실도 대충 눈치챘다. 하지만 빈도가 높지 않다. 기껏해야 일 년에 한 번에서 두 번이다. 일 년이면 사냥을 십여 번이나 나가지만 늘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건 아니다.

사냥을 나갈 때마다 여인을 취하기는 한다. 하지만 죽인 적은 없는 것으로 안다.

간살? 그것도 잔인한 변태 살인?

솔직히 난화 부인도 충격을 받았다.

강유가 사냥개에게 시신을 먹이는 것은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서다.

다시 말해서…… 강유는 이런 일을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한 번뿐이라면 사냥개가 그런 행동을 할 리 없다. 그런 식으로 길들일 필요도 없다.

드러난 일은 한 건이지만, 강유가 저지른 살인은 훨씬 많을 것이다.

강유는 사냥개가 시신을 먹은 것으로도 부족해서 불까지 질렀다. 완전히 시신을 태워 버렸다.

증거가 있을 수 없다.

난화 부인이 생각해도 증거가 나올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시신 처리를 했다. 설혹 현장에 무엇인가를 떨어트려 놨어도 치솟는 불길에 모두 타 버렸을 것이다.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강유가 증거가 없다고 강력하게 발뺌할 수 있는 것이다.

명부판관이 제시할 증거는 오옥검밖에 없다.

“명부판관…… 그런 놈에게 내 자식을 내줄 순 없어. 어떤 일이 있어도.”

난화 부인이 중얼거렸다.

‘흐음!’

노정문주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강유는 아비에게는 말하지 못하는 것도 어미에게는 아주 쉽게 털어 놓는다. 어떤 일이 있어도 어미가 자신을 보호해 줄 것이라는 걸 안다. 그리고 그 점을 악용한다. 그런 점을 알고 있어서 일부로 자리를 피해 주었다.

이후 여하를 불문하고 진실은 알아야 한다.

문주도 명부판관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공명정대한 자다. 솔직히 명부판관이 괜히 살첩을 전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냉정하게 판단하면 명부판관의 말에 신빙성이 있다.

강유는 자신의 자식이지만…… 워낙 개망나니라서 명부판관 말처럼 여인을 간살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제 사실이 드러났다.

부인이 하늘을 보면서 저런 탄식을 했다면…… 명부판관 말이 사실인 것이다.

‘유아. 유아야.’

강천화는 가슴이 먹먹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식이 명부판관의 표적이 되었다. 또 그만한 잘못을 저질렀다.

여기서 자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평소처럼 악을 원수처럼 미워해서 자식을 죽음 앞에 내놓을 것인가. 아니면 자식 편에 서서 명부판관을 상대해야 하나.

“한 걸음도 들여 놓게 하지 마!”

난화 부인이 노정문 무인들을 다그쳤다.

모두 병기를 단단히 움켜잡고 경계에 돌입했다. 명부판관을 한 걸음도 들여 놓지 않겠다는 듯 결의를 단단히 드러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강천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휴우!”

한숨만 깊어진다. 어찌해야 할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