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일홀도-426화 (426/600)

第八十六章 부정선택(父情選擇) (1)

스읏!

아걸이 칼을 잡았다.

이 순간, 아걸의 몸은 암석처럼 단단해졌다. 언제 아팠냐는 듯 쉽게 두 눈에 활기가 돌고 근육에는 힘이 넘쳤다. 뭉툭한 쇠뭉치, 반철도에 살기가 맴돈다.

“오늘 아주 치사한 모습을 보였으니, 필사(必死). 살검을 쓴 지 이삼십 년은 된 것 같은데.”

노정문주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걸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는 것이다. 이런 싸움은 노정문주도 하기 싫은 것이다.

“문주께서 진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까?”

“내가? 하하하!”

노정문주가 웃었다.

노정문주 자신도 지금의 아걸에게는 절대 패하지 않는다고 자신하고 있다.

“문주께서 패한다면 노정문은 무척 혼란스러워질 겁니다. 명부판관이 지나간 후에 문파를 수습할 사람이 있습니까?”

“이 싸움에서 진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 죽은 사람이 뒤에 남은 세상을 걱정할 필요가 있나?”

“상당히 강한 이기주의.”

“하하하! 자식의 죽음을 두 눈 뜨고 보지 못하는 아비의 심정쯤으로 이해해 주게. 좋아! 덕분에 부담이 없어졌어. 솔직히 내키지 않는 싸움이었지만, 이제는 편히 할 수 있겠어.”

스읏!

노정문주가 검을 들어 올렸다.

“아! 이건 도저히 못 보겠네.”

황열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 치사한 놈, 내가 대신 상대하면 안 되나?”

쌍겸이 앞으로 나서려고 했다.

“일홀도 싸움이라잖아. 이 싸움에 끼어드는 사람은 모두 일홀도의 적이 되는 거야.”

장태전이 쌍겸의 옷자락을 잡아끌면서 말했다.

“끄응! 그걸 모르는 건 아닌데…… 워낙 승부가 빤히 보여서. 아! 저놈의 똥고집.”

쌍겸이 탄식하면서 물러섰다.

아걸의 일홀도에 대한 집념은 종교적이라고 할 만큼 강하다.

몽설도 그런 신념을 알고 있어서 일부러 간격을 벌리고 만나지 않는다.

이 싸움은 누가 끼어들 수 없다.

하지만 은거 무인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아걸이 위험하다 싶으면 즉시 달려들어서 싸움을 가로챌 생각이다. 아걸을 이런 자에게 죽게 할 수는 없다.

스읏! 슷!

은거 무인들이 암암리에 진기를 일으켰다.

물론 이런 사실은 아걸도 알고 노정문주도 안다. 이미 주변에 이상한 기류가 흐른다는 사실을 감지해냈다. 하지만 일절 동요하지 않는다.

두 사람은 싸움이 찰나에 끝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아걸은 칼을 여러 번 쓸 처지가 아니다. 그러니 단판 승부를 노릴 것이다.

칼을 쓰는 방법도 읽힌다.

아걸은 상대를 가까이 끌어들이지 않으면 칼을 쓰지 못한다. 의자에서 일어서지도 못하는 몸이니 아주 가까이 근접할 때까지 기다릴 것이다.

더군다나 그가 들고 있는 칼은 반철도다.

노정문주가 뽑아 든 검보다 훨씬 짧다. 검초의 위협을 무조건 참고 견뎌야만 칼을 쓸 수 있다.

그러니 자칫하면 목숨을 잃는 지극히 위험한 수를 쓸 것이다.

노정문주는 저런 수에 휘말려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치사한 방법이지만 일정한 거리를 두고 공격한다. 절대로 반철도의 도권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검권 안에서 처리하면…… 위험부담도 없어.’

너무 욕심을 부릴 필요가 없다. 가볍게, 가볍게…… 툭툭 지나치면서 상처를 많이 낸다. 아픈 몸이 원망스러울 지경까지 몰아붙인다. 이래서 무인은 항상 몸을 건강하게 관리해야 한다.

어떻게 싸울 것인지 셈이 끝났다.

스스슷!

두 사람이 서로를 노려봤다.

천하의 노정문주를 의자에 앉아서 상대하는 아걸, 또 그 싸움을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들.

말도 안 되는 일들이 한 사람의 고집 때문에 이루어졌다. 한 사람의 고집이라기보다는 일홀도의 고집이다.

노정문주는 일홀도의 고집이 매우 강력하다는 점에 감사해야 한다.

누가 봐도 말이 안 되는 싸움.

맞다. 말도 안 되는 싸움이다.

아걸이라고 특별한 대책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상태에서 노정문주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것도 아니다. 다만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이기 때문에 받아들인 것뿐이다.

나중에…… 먼 훗날…… 만약

지금 이 싸움을 회피하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먼 훗날…… 일홀도를 완전히 만들었다고 자부할 때, 그리고 더는 추구할 것이 없다고 생각될 즈음에…… ‘아! 그때 내가 싸움을 피한 적이 있었지’ 하는 회한이 일어날까 봐 두렵다.

그런 회한을 남겨 두느니 모든 것을 깨끗이 털어 버리고 간다.

언제 어느 순간을 되돌아봐도 나는 최선을 다해서 살아왔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생각의 대가로 목숨을 잃는다면, 그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츠으으읏!

진기를 일으켰다.

검을 잡기도 힘들 것 같았는데 막상 반철도를 움켜쥐자 다시 힘이 생긴다.

역시 오른손으로는 칼을 잡을 수가 없다. 오른손은 퉁퉁 부어올라서 아예 칼이 잡히지 않는다. 그래서 왼손으로 반철도를 잡았다. 초가평과 싸울 때처럼.

순간! 아걸의 머릿속을 텅! 하고 치는 생각이 있었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갑자기 자성의 울림이 일어났다. 그리고 곧이어서 두 번째 울림 텅! 일어났다.

강한 상대!

첫 번째 울림에서 내가 보였다면, 두 번째 울림에서는 노정문주가 보였다.

노정문주가 진기를 조절한다.

검이 자신을 겨눴다. 화상과 부상으로 운신조차 할 수 없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해서 검을 겨눈다. 아픈 사람이라고 경시하지 않는다. 허도기와 싸워도 지금처럼 싸울 것이다.

노정문주는 손짓만으로도 쓰러트릴 수 있는 상대를 앞에 놓고 최선을 다한다.

노정문주의 머리에서 하얀 김이 솟구친다.

진기가 극성으로 치닫고 있다. 몸에서 일어나는 열기와 공기 온도가 맞지 않아서 김이 서린다.

단단한 쇠기둥이 우뚝 선 듯한 느낌이다.

노정문주가 들고 있는 검은 강검이다. 그런데 강검에 진기를 몰아넣자 마치 낭창낭창한 연검(軟劍)을 꼿꼿이 세운 것처럼 강한 탄성이 느껴진다.

대정천로비검식!

세 번째 울림이 일어났다.

자신과 노정문주 사이에 대정천로비검식이라는 검초가 존재한다. 그러면 대정천로비검식에 맞서서 자신도 비장의 도초를 끄집어내야 한다.

그런데 자신은 사용할 만한 도초가 없다.

그렇다!

지금 존재하는 것은 ‘무엇을 하고 있는 나!’ 그리고 노정문주와 대정천로비검식, 이 세 가지다.

대정천로비검식은 보이는데 자신의 도법은 보이지 않는다.

자신은 수많은 도법을 알고 있다. 삼십육 문주의 일홀도만 해도 너무 강하다. 평생을 수련해도 터득하지 못할 만큼 강한 도법으로 구성되었다.

초절정 도법 서른여섯 개다.

거기에 자신이 또 나름대로 일홀도를 터득하겠다고 창안한 무공들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어떤 도법도 펼쳐 내지 못한다.

내가 보이고, 노정문주가 보이고, 대정천로비검식이 보이는데 내가 펼칠 수 있는 도법이 보이지 않는 것은 실제로 펼칠 도법이 없기 때문이다.

많은 도법을 알고 있어도 힘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지금 가진 힘, 간신히 반철도 한 자루만 들고 있는 힘으로 펼칠 수 있는 도법이 필요하다.

이 순간, 아걸은 미친 생각을 했다.

승부를 완전히 망각하고, 죽어도 좋다는 생각을 한 사람이 아니면 결코 떠올릴 수 없는 생각이다. 그것도 접전이 코앞에 들이닥친 순간에.

‘내가 도법을 펼칠 수 없다면, 노정문주의 검초도 지워 버리면 되지.’

아걸은 노정문주의 검을 보지 않았다. 검을 보지 않으니 검기도 보이지 않는다.

일부러 검을 쳐다보지 않은 것이다.

나를 보고 노정문주를 본다. 딱 둘만 본다. 이렇게 되면 두 사람이 사이에 존재하는 검초가 사라진다.

남은 것은 두 사람의 움직임이다.

노정문주는 분명히 대정천로비검식을 펼칠 테지만, 아걸은 어떤 검초가 날아올지 생각하지 않는다. 몸의 움직임만을 따라간다. 그러면 대정천로비검식은 사라지고 검의 움직임만 드러난다.

결국은 똑같은 말이다. 하지만 아걸에게는 매우 다른 말이 된다.

예측하지 않는 것!

대정천로비검식이 펼쳐질 것으로 예측하지 않는다. 검기가 얼마나 강한지 예측하지 않는다. 검 끝의 움직임을 보고 검이 어느 방향에서 흘러들 것인지 예측하지 않는다.

이것이 검의 움직임만 본다는 뜻이다.

전혀 예측하지 않은 상태에서 검을 쳐다본다. 불쑥불쑥 일어나는 움직임을 활기 있게 맞이한다.

검초는 없다. 움직임은 있다.

처음 움직임에서부터 마지막 움직임까지 연이어 펼치면 초식이 된다. 이렇게 시작될 것이다. 이렇게 진행되고, 마지막은 이런 식을 끝맺을 것이다.

이것이 초식을 보는 방식이다.

그런데 웃긴 것이…… 아걸은 대정천로비검식을 알지 못한다. 그러니 시작도 진행 방식도 마지막도 모른다. 그런데도 안다고 인식해서 초식을 경계한다.

아걸이 보지 않은 것은 이것이다.

예측하지 않는다. 초식이라는 형태를 모두 지워 버리고, 지금 당장 검이 그려내는 움직임만 본다. 심장을 찔러오나? 그러면 오직 이 부분만 집중한다. 찌르는 검이 어떻게 변화할지, 어디를 노릴지 예측하지 않는다.

아걸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마음이 편했다.

검초를 보지 않고 칼을 보지 않고 나를 보고 상대방을 보자 머릿속이 텅 비워졌다. 아픈 몸이 끌어내는 고통과 또 고통에서 파생되는 불안, 공포 등등 모든 감정이 말끔히 사라졌다.

스슷! 슷!

노정문주가 거리를 좁혀왔다.

그는 정말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 단숨에 신형을 쏘아내도 되는데, 그러지 않는다. 최선을 다해서 기회를 본다. 물론 그는 접전을 벌일 생각도 없다.

아걸이 아픈 곳은 개인 사정이다.

어떨 때는 두 다리를 잃은 무인과 싸울 때도 있다. 그렇다고 상대방의 사정에 맞춰서 나도 두 다리를 꽁꽁 묶은 상태로 싸울 필요는 없다.

상대방은 두 다리를 잃었다면 그런 상태에서 최선을 다해야한다. 자신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면 된다. 솔직히 두 다리를 잃어서 움직이지 못하는 자에게 화살을 날려서 죽인다고 해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은 없다.

단지 아걸을 죽일 요량이라면 노정문주도 기꺼이 그런 방법을 사용했을 것이다.

지금은 대정천로비검식과 일홀도를 견주는 자리다.

스읏! 스스슷!

노정문주가 조금씩, 조금씩 거리를 좁혀 왔다. 그리고 아걸이 멀쩡하다는 전제하에서 검초를 풀어 냈다.

쒜에엑!

검이 움직이다.

문주는 움직이는데 검은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매우 고요하고 평온한 검이다. 검 위에 잠자리가 앉아 있었어도 날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스읏!

문주가 또 움직였다.

이번에도 검은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무변(無變)이 만변(萬變)을 제압한다. 몸은 움직이되, 검은 자리를 지킨다. 신동검좌(身動劍座).’

아걸이 노정문주의 검초를 봤다면 무변 다음에 몰아칠 폭풍을 예감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문주만 본다. 문주가 검을 움직이지 않고 있다. 그러니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

아걸은 ‘대정천로’라는 말을 이해했다.

노정문의 검초에는 가식이 없다. 오직 진공으로 부딪힌다. 그러니 대정이다. 노정문의 검은 움직임이 없다. 검을 들고 온종일 서 있을 수도 있다. 밤새도록 검을 들고 서 있으면 검에 이슬이 맺혀서 흘러내린다.

그만큼 고요한 검, 천로를 만들 정도로 고요한 검이다.

스읏!

드디어 노정문주가 검권을 만들어 냈다.

한 발을 내디디며 검을 쳐내면 타격할 수 있는 거리다. 더욱이 아걸은 의자에 앉아 있다. 뒤로 물러서지도 못하고, 옆으로 피하지도 못한다. 오직 반철도를 들어서 막는 수밖에 없다.

검권은 형성되었지만, 도권(刀圈)은 아니다. 반철도의 거리는 반보가 더 남았다. 반철도로 치려면 신형을 날리거나, 크게 한 걸음하고 반걸음을 더 나와야 한다.

‘찌르고 빠지면 위험해!’

은거 무인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노정문주가 지극히 빠른 검초로 아걸의 가슴을 찌르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은거 무인 중에는 쾌검의 달인이 있다. 나통이다.

나통은 지금 자신이 노정문주였으면 펼쳤을 검초를 떠올렸다. 변초를 사용할 필요도 없다. 쾌속으로 직자(直刺), 가슴을 찔러 버린다. 그럴 수 있는 거리다.

“음!”

나통이 신음을 흘리며 검을 꾹 움켜잡았다.

당장이라도 이 싸움을 만료하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다. 이 싸움은 아걸 것이다.

쒜에엑!

노정문의 검이 날카로운 쇳소리를 흘리며 공기를 찢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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