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八十六章 부정선택(父情選擇) (3)
난화부인은 시신으로 돌아온 노정문주를 보고 아랫입술을 잘끈 깨물었다.
남편이 명부판관에게 도전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노정문주는 노정문을 떠나면서 서신을 남겼다.
강유를 데리고 사람 없는 곳으로 가서 한평생 숨어 지내라는 당부의 말이다.
노정문주는 자신이 패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명부판관이 부상당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그것도 매우 심각한 부상이라고 한다. 숨을 쉬는 것조차 기적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을 보면 상당히 중한 부상인 것 같다.
그런 사람조차 이기지 못한다면 검을 놓아야 한다.
오늘, 명부판관은 죽는다.
자식을 쫓는 자가 있으니 아비로서 내버려 둘 수 없다. 최소한 자식의 목숨만은 보전해 주고 싶다. 자식이 죽는 모습은 차마 보지 못하겠다.
자식을 위해서 검을 드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식의 죄를 덮어 주는 것은 아니다. 명부판관이 말한 일을 했다면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한다. 그 전에 본인 스스로 반드시 뉘우쳐야 한다.
부자간의 인연을 끊는다.
이번에는 자식을 위해서 검을 들지만…… 강유도 노정문에서 떠나라. 이제는 홀로 살아라. 강유가 저지른 죄는 오직 목숨으로만 해결할 수 있다. 그러니 숨어서 살아라.
노정문주가 해 줄 수 있는 최후의 배려였다.
명부판관을 죽이더라도 이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자신이 돌아오기 전에 노정문을 떠나라.
자식이 죄가 있으니 명부판관에게 왜 자식을 죽이려 하느냐고 따져 물을 수 없다. 그런 이유로 명부판관과 싸운다는 것은 평생 지켜온 신념을 무너트리는 일이 된다.
어차피 혈연 때문에 신념이 무너지기는 했지만…… 그 이상은 할 수 없다.
그래서 명부판관과는 일홀도의 싸움을 벌인다.
검 대 칼의 싸움이다.
이 싸움에서는 노정문이나 강유에 대한 말이 일절 언급되지 않는다. 오직 무인 대 무인의 싸움이니 결과가 어떻게 되든 누구도 간여해서는 안 된다.
노정문주는 난화부인과 강유에게 각각 서신 한 통씩을 남겼다.
강유에게는 떠나라고 말했고, 난화부인에게는 선택권을 주었다. 자식과 함께 가도 좋고, 남아도 좋다고 말했다. 만약 자식을 택한다면, 재물을 넉넉하게 가져가라는 말도 남겼다.
난화부인은 서신을 북북 찢어 버렸다.
누구 마음대로 나가라 말라 하는 거야! 평생 숨어서 살라고? 그럴 수 없어!
난화부인은 노정문주를 기다렸다.
그녀도 노정문주가 명부판관에게 질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명부판관이 다쳤지 않나. 칼을 들지도 못한다고 들었는데…… 그러면 주위에 있는 무인들이 문제인데, 그들 정도는 너끈히 베어 넘기겠지?
노정문주가 명부판관을 베고 돌아오면, 그때 다시 설득하면서 버틸 생각이다.
처자식이 떠나지 않겠다는데 어쩌겠나. 설마 죽이기라고 하겠나.
그런데…… 그런데 시신이 되어서 돌아왔다.
“명부판관에게 당한 건 아니지? 합공, 맞지?”
난화부인이 물었다.
“문주님께서 호선극살(弧線極殺)을 펼치신 것 같습니다. 호선극살을 펼칠 때, 아주 미미한 약점이 생깁니다. 대부분 눈치조차 채지 못하는데, 팔 밑으로 파고드는 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그 수법에 당하셨습니다.”
수검사 맏이, 대수가 말했다.
알면서도 당한다. 이게 무인이다. 어떤 초식에 어떤 허점이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접전을 벌이는 와중에는 잠깐 그 사실을 잊어버릴 때가 있다.
“협공당한 게 아니고?”
난화부인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문주님의 상처를 봤을 때…… 제 판단으로는 명부판관에게 당한 겁니다. 옆구리 상처 외에 다른 상처가 없습니다. 그리고 검을 봐도 칼 외에 다른 병기와 부딪친 흔적이 없습니다. 합공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게 말이 돼? 명부판관은 다쳤어!”
“…….”
대수는 침묵했다.
명부판관이 다친 것은 안다. 하지만 어느 정도로 다쳤는지는 알지 못한다. 심하게 다쳤다고 하는데, 싸우지 못할 정도인지 아니면 단순히 검에 찔린 상처인지 세세한 부분까지는 모른다.
어쨌든 문주는 명부판관 한 사람에게 당했다.
명부판관 주위에는 고수들이 즐비하다. 적어도 수검사를 능가하는 고수가 여섯 명은 있다.
노정문주가 가장 걱정해야 할 자들이다.
그런데 결과를 보면 그들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오직 명부판관만 움직였고, 문주가 졌다.
무엇보다도 검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검에는 한 가지 병가와 부딪친 자국만 남아 있다. 다른 병기와 부딪치지 않았다.
대수가 침묵하자, 난화부인이 야멸차게 말했다.
“지금 노정문은 적을 맞이한 비상사태야. 지금부터 이번 사태가 끝날 때까지 노정문은 내가 이끈다. 대수, 불만 있어?”
“없습니다.”
수검사가 머리를 숙였다.
“문주는…… 명부판관에게 암살당한 거야. 명부판관과 그의 무리가 일제히 달려들어서 암살한 것으로…… 아니, 문주를 밖으로 유인한 후에 암살한 것으로 입을 맞춰.”
“네.”
대수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어차피 문주의 죽음을 숨길 수는 없다. 수문 무인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이 이미 목격했다. 수문 무인은 관을 열어보고 ‘문주님’ 하고 소리치기까지 했다.
사평성에는 벌써 문주의 죽음이 파다하게 퍼져나가고 있을 것이다.
“내일 명부판관이 올 거야. 문주까지 암살당한 마당에 죽이지 않을 수 없지. 모습을 보이는 즉시 공격해서 끝내. 노정문이 망하든 명부판관이 죽든 어느 한쪽은 끝장날 거야.”
난화부인이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때 지금까지 침착하게 대답하던 수검사, 대수가 물었다.
“소문은 사실입니까?”
“뭐?”
“명부판관은 내일 증거를 내밀 겁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놈을 노정문 안에 들이겠다는 거야?”
“합당한 증거를 제시할 경우, 저희는 검을 뽑지 못합니다. 대답, 부탁드립니다. 소문주께서 여인을 간살한 후에 시신을 불살랐다는 소문, 사실인지 여쭙니다.”
“그게 사실일 리가 있어! 설혹 사실이라고 하면! 문주께서 목숨을 잃었는데, 제자란 것들이 모른 척하겠다는 거야? 문주가 칼 맞아 죽은 게 안 보여!”
그런데 대수가 뜻밖의 말을 했다.
“저희는 사부님의 복수를 하지 못합니다.”
“뭐라고!”
난화부인은 미간을 상큼 추켜올렸다.
“사부님은 협살당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번 일과 무관하게…… 대정천로비검식과 일홀도를 견줘 보신다는 말씀, 남기셨습니다. 무인 대 무인의 비무. 복수는 안 됩니다.”
대수가 결연히 말했다.
난화부인은 눈을 가늘게 좁혔다.
이제야 비로소 노정문주가 자신과 강유에게만 서신을 남긴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떠나면서 수검사들에게도 서신을 남겼다.
수검사도 노정문주가 명부판관과 싸우러 간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한 명도 따라가지 않았다. 대체로 비무가 열리면 참관자 자격으로 한두 명이 따라붙는데, 한 명도 곁에 있지 않았다. 노정문주가 명령했을 것이다.
대수가 말했다.
“그렇다고 저희가 이대로 물러서지는 않습니다. 저희는 명부판관과 싸울 겁니다. 하지만 방식은 다릅니다. 저희는 대정천로비검식이 일홀도보다 약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싸울 겁니다. 그러니…… 명부판관 살첩에 관한 부분은…….”
“살첩에 관한 부분은 모른 척하겠다 이거냐?”
“사평성 사람 모두가 이 소문을 들었습니다. 진위를 가려야 합니다. 내일 명부판관이 어떤 증거를 제시할지 모르겠지만, 염려하시는 대로 모함이라면, 티끌만큼이라도 의심이 든다면 사모님 말씀대로 목숨 걸고 소문주님을 지키겠습니다.”
“호호호! 그래야지. 당연한 말.”
“하지만 증거가 합당하면…… 소문주께서는 저희 검도 상대해야 할 겁니다.”
“뭐라고!”
“이것은 수검사 모두의 의견입니다. 또 노정문 전체 문도의 의견이기도 합니다.”
수검사 대수가 단호하게 말했다.
‘이놈, 우릴 원망하고 있어.’
난화부인은 사태가 심상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번 사태는 소문주 때문에 일어났다.
소문주가 만인이 공노할 죄악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명부판관을 맞이할 일도 없었다. 노정문주가 차디찬 시신이 되어서 드러누워 있을 일도 없다.
노정문은 천하를 향해 낯을 들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일을…… 단지 명부판관만 척살한다고 해서 해결할 수 있을까? 이미 천하인이 인상을 찡그리면서 흘겨보고 있는데, 얼굴에 철판 몇 겹 깐다고 해결될까?
수검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노정문주의 서신에는 난화부인에게는 말하지 못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명부판관이 강유가 아니라 수검사 중 한 명을 지목했다면 진위 파악부터 먼저 했을 것이다.
명부판관이 지목한 자를 추궁해서 사실 여부를 알아냈을 것이다.
또 날이 밝기를 기다려서 명부판관이 어떤 증거를 제시하는지 지켜봤을 터이다.
수검사는 제자이지만 혈육은 아니다.
모두 똑같이 친자식이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현실에서 부딪치니 역시 팔이 안으로 굽는다. 오대 독자 자식 앞에서는 신념이고, 정의도, 도의고 모두 무너진다.
수검사가 살첩 대상자라면 모든 관심은 명부판관이 어떤 증거를 제시할 것인가에 집중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식이 살첩 대상자가 되는 순간, 증거는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어떻게 이번 일을 수습할지가 중요했다.
노정문주는 이런 심경을 서신에 담았다.
만일…… 정말 만일…… 자신이 돌아오지 못하면 이번 일에서 손을 떼라.
대정천로비검식과 일홀도의 우위를 가리기 위해 명부판관과 싸우는 것은 허락한다. 하지만 명부판관 살첩 때문에 싸우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
소문주의 악행이 세상에 드러나면 노정문은 멸시와 조롱의 대상이 될 것이다.
봉문(封門)하라.
십 년이고 이십 년이고 봉문해서 세상의 용서를 빌어라.
내가 할 일이나 너희에게 맡긴다.
내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내 몸에는 일홀도가 새겨져 있을 것…… 상처를 보고 일홀도를 분석하라. 봉문을 일홀도를 능가하는 무공을 수련하는 계기로 삼아라.
어떤 면에서 이번 일은 너희에게 한층 더 도약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대수는 사부의 서신을 난화부인에게 말하지 않았다.
난화부인은 어떤 경우에도 봉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계속 세상을 호령할 것이다. 사람들이 어떻게 보든 상관하지 않고 힘으로 짓누를 것이다.
수검사 여섯 명은 사부와 같은 생각이다.
“그러면 너희는…… 내가 명부판관을 한 발짝도 들이지 말라고 하면…… 안 듣겠네?”
“증거가 조작되었다면…….”
“알았어! 물러가!”
난화부인이 중간에서 거칠게 말을 끊었다.
대수가 읍을 취한 후, 물러갔다.
“저것들! 똑똑히 봐둬요. 아드님, 뒤통수를 친 놈들입니다. 내일 명부판관을 처리하고 나면 저것들부터 처리하세요.”
난화부인이 강유에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 저 새끼들, 평소 저를 눈꼴시게 보아온 거 알고 있거든. 그런데…… 명부판관 그 새끼, 다친 거 사실이야? 난 아직도 아버지가 당했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
“암수를 썼을 거예요. 정상적인 상태라면 절대로 질 수 없어요. 내일, 주변 떨거지들은 이 어미가 치워 버릴 테니까, 아드님은 명부판관이나 요리하세요. 방심하지 마시고.”
“후후! 걱정하지 마시라니까. 내가 설마 침상에 누워서 일어서지도 못하는 인간 하나 상대하지 못할까. 킥킥!”
강유가 눈에 독기를 피워내며 웃었다.
아버지의 시신이 목관에 누워 있지만 슬픈 기색은 전혀 엿보이지 않았다.
꼬끼오!
수탉이 목청을 돋워서 새날이 밝은 사실을 알려 주었다.
사평 사람들은 부지런히 준비했다. 노정문에 가서 일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봐야 한다.
사평 사람 중 간밤에 편히 잠을 청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중 일부는 이미 노정문주가 죽은 사실까지도 알고 있다. 다만 노정문을 생각해서 입을 다물었다. 절대 함묵하라면 협조를 가장한 명령까지 받은 상태다.
좌우지간 오늘 명부판관이나 노정문 어느 한쪽은 큰일을 치른다.
사시정(巳時正:오전 9시), 드디어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벅! 저벅!
사람들이 걸어왔다.
어제는 세 명이 왔는데, 오늘은 다섯 명이다.
세 명은 어제와 마찬가지다. 흑후가 명부판관이라고 적힌 깃발을 들고 앞장섰다. 그 뒤를 이인교를 맨 두 사내가 뒤따른다. 그리고 그 뒤로 또 이인교를 맨 두 명이 뒤따르고 있다.
이인교가 두 개로 불어났다.
사람들의 눈길은 일제히 승교로 향했다.
앞쪽 승교에는 명부판관이 타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 뒤따르는 승교에는 누가 타고 있을까?
저벅! 저벅!
다섯 명은 곧장 노정문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