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八十六章 부정선택(父情選擇) (5)
삐걱!
뒷문이 열렸다. 그리고 마차 한 대가 느릿느릿 들어섰다.
따각! 따각! 따각!
비루먹은 말은 무거운 마차를 끌기가 힘든지 매우 느리게 한 걸음씩, 한 걸음씩 걸었다.
뒷마당에는 횃불을 든 부인 네 명이 서 있었다.
“멈춰라!”
무인이 말했다.
비루먹은 말을 끌고 오던 마부가 두 손 모아 읍했다.
“너는 돌아가도 좋다.”
마부가 다시 한번 읍하고는 급히 뒤돌아서 뒷문을 빠져나갔다.
“꺼내 봐.”
어둠 속에서 잔잔한 음성이 들렸다.
횃불을 든 무인들은 차분하게 움직였다. 마차 문을 열고 안에서 묵직한 관을 끄집어냈다.
그들이 관을 들고 어둠이 깃든 곳으로 걸어왔다.
횃불이 어둠을 밀어내자,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의 얼굴이 비쳤다.
진개, 임시 성검문주가 진개가 감정 없는 눈길로 목관을 지켜보고 있었다.
“뜯어.”
말이 떨어지자, 무인들이 검을 뽑아서 관 뚜껑을 빠개듯이 열었다.
못질을 단단히 해놓은 관 뚜껑에서 못이 뜯겨나가며, 드디어 한 사람의 얼굴을 비췄다.
초가평! 둘째 사형이다.
소축십검 간에도 분명히 위아래가 존재한다. 하지만 서열을 인정하는 사람은 없다. 첫째였던 독안혈검 전가성부터 막내 이도창까지 모두 자신이 제일 잘났다고 떠드는 사람들뿐이었다.
같은 동문일 뿐이지 사형제는 없다. 사형도 없고, 사제도 없다.
“참 불쌍하게 누워 있네.”
진개가 중얼거렸다.
초가평은 검속 제일이다. 검이 무척 빨랐다. 거기에다가 일사검광을 대폭 상승시켰다.
그 검이 어느 정도 빠른지는 강호를 떠돌아다니며 이미 증명했다.
소림사 방장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이 일사검광에 쓰러졌다. 사부에게 호의적이지 않던 무림 강호들이 일거에 쓰러져 나갔다.
그만한 검을 가지고도 아걸을 베지 못한 것인가.
진개는 의자에서 일어서서 목관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쭈그리고 앉아 사형을 쳐다봤다.
사형의 명치에 커다란 칼자국이 있다. 아니, 칼자국이 아니다. 마치 곤봉이나 철곤(鐵棍)에 가슴이 뻥 뚫린 것 같다. 무지막지한 힘으로 짓이겨놨다.
중요하지 않다. 아걸의 반철도를 알고 있으니 어떻게 생긴 상처인지 짐작한다.
사형의 오른쪽 팔이 으스러져 있다. 검을 뻗은 채 뼈가 굳어진 것을 관에 넣기 위해서 부러뜨린 것이다. 왼쪽 팔은 괜찮다. 오른쪽 무릎도 살짝 으스러져 있다.
진개는 사형의 마지막을 생각해 낼 수 있었다.
역시 초가평은 일사검광을 펼쳤다. 필승의 자신을 가지고 검을 쳐 낸 것이다. 그런데도 되잡혔다.
‘아걸…….’
진개는 피식 웃었다.
소축십검…… 자신을 제외한 아홉 명이 아걸에게 죽었다.
일 대 일 승부를 걸어서 죽었고, 때로는 합공을 취했는데도 오히려 이쪽이 당했다.
아걸은 사부의 손에서도 벌써 네 번이나 빠져나갔다.
이놈은 벨 수 없는 놈인가?
진개는 극심한 무력감을 느꼈다.
초가평의 시신을 보면 솔직히 기뻐질 줄 알았다.
이제 소축십검 중에서 남은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 성검문을 물려받는다면 그 적임자는 자신밖에 없다. 팔 하나를 잃은 후, 주축에서 밀려났다는 소외감이 생겼는데…… 이제는 아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사부가 황궁을 들이치든 말든 성검문은 자신 것이다.
사부가 다시 성검문주로 돌아올까? 그럴 일은 없다. 성검문은 이미 사부의 양에 차지 않는다. 사부의 눈길은 성검문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더 높은 곳을 향했다가 이도 저도 안 되니까 다시 성검문주로 돌아와 만족하면서 여생을 보낸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다. 사부는 이미 활을 떠난 화살이다. 활로 되돌아올 수 없다.
이제는 자신이 무림을 통치할 차례다.
그런데…… 정작 초가평의 시신을 보자 모든 기쁨이 일시에 사라졌다.
그 대신에 매우 극심한 무기력함이 몰아쳤다.
소축십검도 죽고 풍도곡 살귀들도 모두 죽었다.
그동안 사부는 뭘 하고 있었나? 여전히 말도 안 되는 꿈을 좇아서 변방에 나가 있다.
사부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대장군을 치고자 했지만 치지 못했다. 아걸을 죽이고자 했지만, 아직도 죽이지 못했다. 황상을 밀어내고자 했지만, 밀어내려고 움직이는 모습만 보일 뿐,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고 있다.
정말 답답하다.
솔직히 이런 일은 사부가 마음만 먹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할 수 있다.
대장군을 죽이지 못해서 죽이지 않는 게 아니다.
아걸? 지금이라도 당장 검을 들고 쫓아가면 죽일 수 있다. 네 번은 피했지만 다섯 번도 피할까. 피해도 좋다. 여섯 번은 어떤가? 여섯 번도 피할 수 있나? 좋다. 피해라. 일곱 번은?
사부가 계속, 계속, 계속…… 아걸을 몰아붙이면 결국 죽는다.
왜 사부는 언제나 한숨 늦추나.
진개는 정녕 사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미적거리면서 지내온 세월이 장장 십오 년이다.
진개는 정말 사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잘 가. 그래도 너는 나보다 늦게 갈 줄 알았는데, 네가 먼저 가네. 하긴 내가 먼저 갈 뻔하기도 했지.”
진개는 잘려 나간 팔을 쳐다봤다.
아걸에게 팔 하나를 주고 목숨을 건졌다. 그러니 자신이 먼저 죽을 뻔했던 건 사실이다.
“묻어라.”
“네. 그런데 어디에 묻을까요?”
“아무 데나 묻어. 죽은 놈이 뭘 가려. 가만! 아냐. 소축 앞마당에 묻어. 그곳에서 무공 수련을 했으니 거기에 묻히고 싶을지도 모르겠군. 왜 졌나 복기하고 싶을 거야.”
“네. 알겠습니다.”
무인들이 대답했다.
“오늘은 술이나 마셔야겠군.”
진개는 허전해지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걸었다.
성검문에는 아직도 같이 술을 마실 사람이 있다.
빈객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성검문에 눌러앉은 한심한 족속들이다.
한심? 아니다. 그들을 떠돌이 무인들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상당히 강한 자들이 많다. 그중 몇몇은 단순히 떠돌이 무인이라고 하기에는 전력이 너무 화려하다.
물론 소축십검 눈에는 일초지적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사실, 진개는 이들도 마뜩잖았다.
사부는 이들을 먹이고 재우고 용채까지 주면서 후하게 대접했다. 그러면서도 어떤 일에도 쓰지 않았다. 그저 돼지를 키우듯이 살만 뒤룩뒤룩 찌우고 있다.
상당히 뛰어난 무인들이 많은데, 이들을 잘 구슬려서 전력으로 만들어도 좋은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사부는 조명천검을 수련한 사람만 성검문도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빈객은 조명천검을 수련하지 않았다. 그들은 각기 사문 무공을 수련했다. 성검문에 빈객으로 있지만, 조명천검에는 관심도 두지 않는다.
진개는 그중 한 명, 구관청(裘冠清)을 찾았다.
구관청은 빈객 중에서도 가장 강한 축에 포함된다. 사문은 화산파(華山派)이며, 사문에 있었으면 장문인은 되지 못했어도 능히 장로 자리는 꿰찼을 인물이다.
진개는 구관청과 연배가 비슷해서 종종 술자리를 가졌다.
딱 그 이유밖에 없다. 구관청과 술을 마시면 소축십검과 마실 때처럼 서로를 견제하지 않아도 되어서 좋다. 그저 비슷한 또래의 벗과 술을 마신다는 생각이다.
“오늘은 어떤 바람이 부셨나?”
구관청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술 한잔하려고.”
“좋지. 마침 오늘 탕주방(燙酒房)에서 술을 가져왔는데 향기가 매우 좋아.”
“그래?”
진개가 웃었다.
탕주방은 성검문에 술을 공급한다. 그들은 지금까지 소축십검에게는 술이나 안주를 갖다 준 적이 없다. 가져오라고 하면 그제야 갖다준다. 하지만 빈객들에게는 알아서 갖다준다. 좋은 술도 주고, 좋은 고기도 갖다준다.
사부는 지금 변방에 나가 있지만, 아직도 사부의 입김이 성검문을 지배하고 있다.
소향주(燒香酒)라는 술은 진개도 처음 들어 본 술이다.
성검문에 이런 술이 있었나?
또르르르!
술잔에 초록빛의 맑은 술이 따라졌다.
“무슨 일이 있었어? 기분이 이렇게 울적한 거야?”
구관청이 물었다.
“초가평이 죽었다.”
“아! 말은 들었는데. 워낙 뜬 소문이 많아서 긴가민가했는데, 정말이었네.”
구관청이 술잔을 들어 올렸다.
“건배.”
진개가 술잔을 올린 후 단숨에 들이켰다.
독한 술이 흘러들자, 뱃속에서 불이 확 일어난다.
“상당히 독하군.”
“술은 독해야 제맛이지.”
“이러고 있는 게 좋나?”
“응? 하하하! 좋지. 놀고먹고. 후한 대접받고. 용채도 넉넉하고. 기방에 가고 싶으면 가고, 술 먹고 싶으면 먹고. 이보다 좋은 생활이 어딨나?”
“후후!”
진개는 웃었다.
구관청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
진짜 편안함에 길들여진 돼지는 살이 찌게 되어 있다. 구관청은 살이 찌지 않았다.
근육은 여전히 탄탄하다. 눈빛은 날카롭다. 뱃살이나 허릿살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기름진 음식과 향긋한 술에 취해서 널브러져 있는 몸이 아니다.
매일매일 갈고 닦고 있는 몸이다.
“화산파에 있었으면 장문인도 바라볼 수 있었을 텐데?”
“오늘 왜 이래?”
“갑자기 궁금해서. 하나 물어볼까? 만약 내가 성검문주가 된다면 날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나?”
“하하하! 농담도 참.”
구관청이 웃었다.
“농담?”
“농담이지. 빈객은 먹고 즐길 때만 빈객이야. 성검문에 무슨 일이 생기면 제일 먼저 도망가. 빈객을 믿지 말라고. 무슨 걱정이라도 있어? 오늘은 영 진개답지 않은데?”
“그러면 명령이라고 해도 좋고, 부탁이라도 해도 좋은데. 무리한 말을 하면 들어줄 텐가?”
“친구의 부탁이라면 고려는 해 보겠지.”
‘친구의 부탁?’
진개는 눈을 가늘게 떴다.
진개와 구관청은 친구가 아니다. 술을 같이 마시면 꼭 벗이 되어야 하나? 진개는 구관청을 단 한 번도 벗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구관청은 자신보다 몇 수 아래다. 이런 자를 친구로 둘 만큼 한가하지 않다.
그런데 지금 말을 들어보니 구관청도 자신을 친구로 생각하지 않은 듯하다.
진기는 퍼뜩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사부께서 목숨을 내놓으라고 하면?”
“하하하!”
구관청이 웃었다. 아니, 웃음 끝에 정색하고 말했다.
“말 나온 김에 농담 한마디 할까? 자넨 아직도 사부를 잘 모르는 거 같아. 어떨 때는 조금 멀리 떨어져서 숲 전체를 봐야 할 때도 있는 법이야. 너무 가까이 붙으면 숲을 보지 못해. 우리는 뭐 좀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
“그래서 뭘 봤는데?”
“말로 설명할 수는 없고. 글쎄? 뭐라고 해야 하나? 일인자가 되기를 기다린다고 해야 하나? 하하하!”
구관청이 묘한 말을 했다.
일인자가 되기를 기다린다. 사부는 이미 일인자다. 자타공인 중원 제일 무인이다. 어느 누구도 사부 앞에서 검을 들지 못한다. 검을 들 수는 있다. 하지만 목숨을 빼앗긴다. 누구에게 물어봐도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런 사부가 다시 일인자가 된다?
“일인자가 되기를 기다린다…… 묘한 말을 하는군.”
진개가 말했다.
“글쎄? 이게 과연 묘한 말일까? 하하하!”
구관청이 기분 나쁘게 웃었다.
진기는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모르는 게 뭐냐?’
모르는 게 분명히 있는 것 같은데, 구관청은 아는 것 같은데. 하지만 물어도 대답은 하지 않을 것이다.
진개는 명확하게 알았다.
빈객, 이 자들 사부의 사람들이다.
자신이 마당 좀 쓸어달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을 자들이다. 하지만 사부가 당장 검을 들고 목숨을 바치라고 하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목숨을 바칠 것이다.
이들은 확실히 공부 사람이다.
자신은 성검문 문주로 있지만, 껍데기일 뿐이다.
소축십검이 다 죽어 나가도 사부가 끄떡도 하지 않는 것은 성검문에 진짜 무인들이 온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성검문에는 아직 많은 부인이 있다. 무인의 수만 삼천 명이다. 빈객도 백여 명이 넘는다. 이들은 소축십검이 죽고 강호에서 풍파가 일어날 때도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일부가 움직인 적은 있지만, 철모르는 몇몇 빈객만 움직였을 뿐이다. 성검문 전체가 들썩인 적은 없다.
‘어쩌면 우리는 소모품이었는지도 모르겠군. 애초부터 소모품으로 길들었는지도 몰라. 후후!’
소축십검이 소모품일 수는 없다. 소축십검은 성검문 최상위 무인들이다. 개개인이 능히 일개 문파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초절정 고수였다. 이십사 위문 문주도 발아래 굽어볼 수 있을 정도로 강한 무공을 구사했다.
이런 사람들이 소모품일 수는 없다.
그런데도 소모품으로 썼다는 것은…… 힘에 대한 사부의 생각이 자신들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뜻한다.
소축십검도 힘이지만 조직력도 힘일 수 있다. 돈, 권력…… 사부가 절대적으로 얻고자 하는 인망도 힘일 수 있다. 사부가 쳐다보는 힘이 무공이 아니라면 소축십검을 소모품으로 썼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부는 어떤 힘을 추구하는 것인가?
“오늘은 정말 취해야겠군.”
진개가 술잔을 내밀었다.
“실컷 마시지 뭐. 어차피 내 술도 아니야. 가져다주는 술이니까 아까울 것도 없어. 하하!”
구관청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