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八十七章 촌마두인(寸馬豆人) (2)
- 콩알만 한 사람,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
저벅! 저벅! 저벅!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암동이라서 걸어오는 소리가 무척 무겁고 진중하게 울린다.
“상당한 고수군요.”
허굉우가 말했다.
허굉우는 일 년 전만 해도 호위청사였다. 전보영주의 명을 받고 취화원에 기숙하면서 공직을 내려놨고, 지금은 다시 복직해서 전보영주가 되었다.
몽설이 호황위를 맡은 직후에 허굉우가 전보영주로 봉직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황상은 몽설이 아니었다면 허굉우를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
물론 전보영주로 허굉우를 천거한 것은 그와 친분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를 아는 사람 중 한 명으로써, 황상에게 충성할 사람으로 봤기 때문이다.
“상당히 강한 사람이에요.”
몽설이 웃으면서 말했다.
덜컹!
두 사람이 앉아 있는 철문이 열리면서 한 사람이 들어섰다.
근위대장이다. 황궁을 떠난 적이 없는 그가 전보영까지 직접 왔다. 그것도 변복까지 하고.
전보영주, 몽설, 근위대장…… 세 사람이 전보영 지하 밀실에 모여 앉았다.
“우선.”
허굉우가 책자 두 권을 내밀었다.
한 권은 취화원, 또 한 권에는 금군이라는 제목이 적혀 있다.
“많은가 보군. 꽤 두껍잖아.”
근위대장이 인상을 찡그리면서 금군이라고 적힌 책자를 가져갔다.
금군 책자는 취화원 책자보다도 세 배나 두껍다. 한 손에 잡을 수 없을 정도다.
몽설은 취화원이라고 적힌 책자를 가져다가 펼쳤다.
- 황련(黃連).
칠월(七月) 팔 일(八日), 소연(昭淵)에 밀마 남김.
궁녀 오앵(梧鸚)이 취득, 성 밖 유상(油商)에게 전달. 유상, 염상(鹽商)에게 전달, 염상, 오십 리 이동 후 마방(馬房)에 전달, 마방, 어옹(漁翁) 오수(吳帥)에게 전달…….
황련이 남긴 밀마는 무려 이십여 번이나 움직였다. 하지만 글은 미추(謎追)로 끝났다.
끝까지 추격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계속 전달하는 과정만 반복하다가 중간에서 뚝 끊겼다.
“으음!”
몽설은 침음을 흘렸다.
책장을 넘길수록 미간이 일그러졌다.
근위대장도 마찬가지다. 그러잖아도 딱딱한 사람이 더욱 인상을 찡그린다.
“기가 막히군.”
근위대장이 앞에 몇 장을 읽다가 책장을 덮어 버렸다.
취화원과 금군이 최선을 다해서 간자를 밝혀냈지만, 그래도 미진한 부분이 있었다. 서로 간자 명단을 공유했고, 그들을 피해서 명부판관에게 일을 시켰다.
한데, 정보가 새어나갔다.
아걸이 군대로부터 공격을 당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간자를 더욱 확실하게 밝혀내야 한다.
그 일을 전보영이 했다.
취화원이나 야천, 적랑대에는 허도기의 간자가 스며 있다. 그리니 그들이 건네는 정보는 일정 부분 오염되었다고 볼 수 있다. 중간에 간자가 농간을 부리면 속을 수 있다.
전혀 관계가 없는 곳…… 전보영을 시켰다.
전보영이라고 허도기의 간자가 스며 있지 말란 법은 없다. 하지만 전보영은 허도기와 다투면서 많은 간자를 걸러냈다. 허도기가 직접 전보영을 들이치기까지 했다. 그런 혼란이 뜻밖에도 적아를 구분하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
취화원과 금군의 뒤에는 전보영이 있었다.
금군은 안에 틀어박혔고, 취화원은 바깥에 활동했지만 모든 사람의 뒤에 그림자가 따라붙었다.
전보영 무인, 관원들만 움직인 것도 아니다. 전보영 밖에 있는 모든 눈이 일시에 밝혀졌다. 나라 전체를 지켜보는 눈이 몇 사람을 쫓아다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군주, 그쪽은 몇 명인데?”
근위대장이 말했다.
“예순여섯 명. 그중 부곡주가 일곱.”
“휘우!”
근위대장이 놀랐다는 듯 휘파람을 불었다.
그동안 취화원이 찾아낸 간자는 서른일곱 명이었다. 그중 부곡주는 다섯 명이다.
“다 읽어보지는 않았고, 앞에 인원이 적혀 있네. 삼백이십칠 명.”
“웃!”
몽설이 눈을 부릅떴다.
근위대장이 몽설에게 건네준 명단은 아흔네 명이었다. 이백서른세 명이나 찾아내지 못했다.
너무 많은 자를 찾지 못했다.
“이 사람들이 전부예요?”
“아니죠. 이들이 전부일 리 있습니까. 이들 외에도 여전히 숨죽이고 있는 자가 있을 겁니다. 이들을 솎아낸다고 해도 대략 팔 할 정도? 그 정도 솎아냈다고 보면 될 거예요.”
허굉우가 답답한 표정으로 말했다.
“여기 쫓은 자들이 많은데, 고문도 안 되나?”
근위대장이 물었다.
“그러잖아도 몇몇 잡아서 족쳐 봤는데, 물탱이들입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요.”
허굉우가 고개를 저었다.
허도기의 간자들은 점(點)이다. 윗선, 아랫선이 없다. 오직 자신이 할 일만 안다.
그들이 남긴 밀마를 전하는 자들이 있다. 하지만 이들도 누구의 명령으로, 누구에게 무엇을 전달하는지 알지 못한다. 지정된 곳에서 은밀하게 놓인 밀마를 가져다가 약속된 자에게 넘겨주면 할 일이 끝난다. 물론 돈을 받고 움직인다.
이런 자들을 물탱이라고 한다.
건드려봤자 나오는 것이 전혀 없다.
“여기 보면 전달만 일곱 곳이네요?”
“네. 기가 막힐 노릇이죠. 그것도 물탱이들만 일곱 곳인데, 그나마도 놓쳤다는 거죠.”
모든 추격이 완벽할 수는 없다.
무조건 뒤를 쫓아갔는데, 느닷없이 배를 타고 떠나 버리면 쫓아갈 길이 없어진다. 또는 말을 타고 달리는 수도 있고, 갑자기 사막을 건널 때도 있다.
전달은 대체로 허도기와 간자, 양쪽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이 동원된다. 그저 이쪽에서 정보를 받아서 저쪽 사람에게 건네주는 역할만 한다.
이러니 충성심이 있을 필요도 없다.
정보가 새어 나갈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된다. 밀마는 간자와 허도기만 아는 은어로 적혀 있다. 중간에서 몇 사람이 열어봐도 뜻을 알지 못한다.
물탱이들은 그저 시키는 대로 움직이고 돈만 받으면 된다.
도대체 허도기의 뿌리는 얼마나 깊은 것인가. 이런 조직이라니.
허도기의 치밀함에 혀가 내둘러진다.
“우리가 잠시 삼량산에 머무른 적이 있어요. 취화원과 이대 살맥으로 불리던 귀문을 공격해서 뻐꾸기처럼 남의 둥지를 꿰차고 앉았는데…… 황련은 그때부터 우리와 함께했어요. 그러니 허도기가 그때부터 우릴 주시했다는 거네요.”
몽설은 기가 막혀서 탄식했다.
“허도기는 문파의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늘 일정한 사람들을 투입시킵니다. 버릇인 것 같아요. 당연히 취화원에도 초반부터 개입시킨 듯합니다.”
귀문은 서리형개가 만든 암살 집단이다.
몽설은 그곳을 장악하고 본 터로 삼았다. 취화원을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아홉 명의 곡주, 구곡주라는 명칭도 구절곡을 본떠서 생긴 것이지 않나.
그때부터 간자가 같이 움직이고 있었다니.
그 당시 취화원은 정말 별 볼 일 없는 풋내기 집단이었는데.
“어떻게 할 거죠?”
몽설이 근위대장을 보며 물었다.
“솎아내야지. 백 명이 나오면 백 명을 치고, 천 명이 나오면 천 명을 치고. 경호를 맡은 시위군, 경비를 맡은 내군…… 금군 삼천 명이 모두 간자라면 전쟁을 벌여야지.”
근위대장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하세요.”
“군주는 어떻게 할 생각인데?”
“솎아 내야죠.”
“전에 역간자로 두 명을 쓴다고 한 것 같은데? 생각이 바뀐 건가? 아니면 이번에 아걸이 당한 게 영향을 미쳤나? 군주. 사감을 호황위에 얹으면 안 돼.”
“맞아요. 사감을 얹었어요. 기가 막히잖아요. 그토록 통제했는데도 정보가 빠져나가서 암습을 당하게 만들고. 아걸의 움직임은 곧 허도기의 움직임과 연결되니까…… 이번에는 좀 봐주죠?”
“하하! 군주가 봐달라는데 봐줘야지.”
“언제 정리할 거예요?”
“내일 정오. 왜 시간 맞추게?”
“기왕 할 바에는 놀리게 만들어야죠. 그래야 남은 자들도 경거망동하지 못하죠. 두 번 움직일 것 한 번밖에 못 움직인다면…… 그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그러다 보면 전하지 못하는 정보도 있을 것이다. 간자 숙청은 일단 다른 간자들의 행동을 묶어 두는 효과가 있다.
근위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위대장과 몽설의 첫 대면은 매우 거칠었다. 그 모습을 금군 모두가 봤다. 하지만 전보영 지하 암실에서 만난 두 사람은 매우 호의적이다.
두 사람에게는 한 가지 공통된 목적이 있다.
황상을 지킨다!
신분이 다르고, 방법이 다르지만, 목적만은 같다. 그러다 보니 하는 일도 같아진다.
“군주는 남은 일이 있는 것 같은데, 그건 내 소관이 아니고. 난 이거면 충분하니까. 사실, 이놈들 정리하기도 쉽지 않아서. 그럼 나부터 일어서지.”
근위대장이 일어섰다.
근위대장이 나가자, 전보영주는 다시 두툼한 책자를 내놨다.
이번에 내놓은 책자에는 갑(甲), 을(乙)이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두 권의 책은 두께가 상당히 차이 났다. 을 권이 갑 권보다 서너 배는 더 두툼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서.”
“이렇게나 많아요?”
“말씀드렸다시피 아직 보이지 않는 자들이 많아서, 이들이 전부라고도 할 수 없죠.”
허굉우가 쓴웃음을 지었다.
갑 권과 을 권에는 많은 사람의 이름과 직책, 그리고 거주지가 적혀 있었다.
봉록을 받는 관원뿐만이 아니라 강호인까지 허도기 사람은 총망라되어 있다.
“갑은 골수, 을은 발만 담근 사람. 한데 이런 구분 자체가 의미 없다는 게 저희 판단입니다. 허도기가 이들을 이용하려고 할 때는 빼도박도 못할 상황을 만들 테니까요.”
“아!”
몽설은 탄식했다.
사람이 너무 많다. 사실, 허도기의 인맥을 추릴 때만 해도 이들 모두 솎아 낼 생각이었다. 골수는 목숨을 취하고, 발만 담근 자들은 쫓아내려고 했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없다. 일시에 이 많은 사람을 처리하면 나라에 대혼란이 일어난다. 당장, 관원들 중 삼 할 내지 사 할은 옷을 벗어야 한다.
군권을 쥔 자는 더욱 어렵다.
허도기 측근을 숙청하면 장군들 중 상당수가 목이 떨어질 것이다. 하면 그들이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달게 받겠나. 검을 뽑아서 썩은 무라도 베려고 하지 않을까.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네요.”
몽설이 기가 질린 듯 두툼한 책자만 쳐다봤다.
“저희도 놀랐습니다. 너무 많아서. 이들을 모두 죽이면 나라의 근간이 흔들릴 겁니다. 무림도 마찬가지죠. 고수가 상당수 포함되어 있으니. 아마 무림이 피폐해질 겁니다. 아마도 이삼십 년은 암흑기를 보내야 할 겁니다.”
“음!”
몽설은 침음했다.
근위대장이 이런 일을 몰라서 먼저 일어선 것이 아니다. 알아도 어쩔 수 없으니 일어선 것이다. 손대지 못할 일을 건드리고 있으니 먼저 일어선 것이다.
또 지금 당장은 이들을 건드릴 명분도 없다.
사실, 허도기는 아무런 일도 벌이지 않았다. 이대로 무림에 주저앉으면 여전히 성검문주다. 이들이 단지 허도기와 친하다는 이유만으로 내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무림만 해도 그렇다.
책자에 분류된 대로라면 각 문파에 적어도 대여섯 명씩은 허도기 측근이 있다.
이들을 모두 제거하면 무림은 초토화된다.
이들이 대부분 무공이 강한 무인이라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이미 알고 있는 자들, 아걸이 싸우고 있는 자들, 당금 무림 최강자로 분류되는 이십사 위문 문주는 모두 허도기 측근이다. 그들은 굳이 조사해 볼 필요도 없다. 허도기와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동지다. 그들을 모두 죽여야 하나? 어떻게?
을 권에 적힌 자들…… 잠깐 발을 담근 것에 불과하다는 자들도 유의해야 한다.
허도기가 본격적으로 이들을 써먹고자 한다면 이들 역시 선택의 여지가 사라질 것이다. 허도기가 마각을 드러내는 순간, 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전격적으로 끌려들어 간다.
결국, 갑 권과 을 권에 적힌 모든 사람을 다 죽여야 한다.
“휴우!”
몽설은 한숨을 토해냈다.
이들을 모두 처리할 수 없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허도기가 변방에서 돌아오기 전에 어떤 수단을 찾아내지 않으면 매우 곤란해진다.
이들을 어떻게 솎아내나.
몽설은 머리가 지끈거려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