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일홀도-433화 (433/600)

第八十七章 촌마두인(寸馬豆人) (3)

- 콩알만 한 사람,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

몽설은 구곡주를 불렀다.

구곡주가 앉을 자리에는 봉투에 담긴 서신이 올려져 있었다.

“이게 뭐야?”

일 곡주 월영이 서신을 집어서 펼치려고 했다.

“아직 펼치지 마세요.”

몽설이 낮게 말했다.

서신을 열던 일 곡주의 손길이 우뚝 멈췄다.

몽설의 음성이 비정상적으로는 낮다. 뭔가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좋지 않은 일이야?”

일 곡주가 서신을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언니들이 모두 오면…… 함께 열어 봐요.”

“그래.”

일 곡주는 다른 구곡주가 모두 도착할 때까지 기다렸다.

몽설은 일 곡주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고래를 푹 숙인 채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했다.

“이게 뭐지?”

육 곡주 화요가 자리에 놓인 서신을 집으려고 했다.

“만지지 마. 다 같이 열어 볼 거야.”

일 곡주가 몽설 대신 말했다.

육 곡주는 일 곡주를 쳐다보다가 몽설을 봤다. 그리고 그냥 자리에 앉았다.

육 곡주가 딱딱하게 굳어 있는 몽설을 봤다.

오늘 상당히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아니, 좋지 않은 일을 벌인다.

구곡주가 모두 들어와 좌정했다.

“언니들, 미안. 내 입에서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해해 줘.”

구곡주는 침묵했다.

무슨 말인가를 하기에는 몽설의 표정이 너무 딱딱했다.

몽설이 말을 이었다.

“여기까지는 몽설이 말한 거고, 이제부터는 원주로서 말할게. 앞에 놓은 서신에 암살 대상이 들어 있어. 시간은 오늘 정오까지. 정오를 넘기지 마.”

‘내부다!’

구곡주의 안색이 일그러졌다.

취화원이 호황위 역할을 하는 동안 청부살인은 중단된 상태다. 살인에 관한 부분을 완전히 접고, 취화원 모든 전력이 명부판관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아걸에게 살첩 대상자를 선정해 주고, 증거를 전달하는 간단한 일이지만,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취화원 전부가 밤을 새워가면서 움직여야만 했다.

증거를 취합하기도 어렵고, 증인들을 찾아내기도 어렵다. 증인을 포섭해서 현장에 세우기는 더 어렵다.

함안 성주를 척살할 때는 증인만 무려 이천여 명이 움직였다.

그들이 자발적으로 움직인 게 아니다. 취화원이 그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설득했다. 취화원 전체가 너나 할 것 없이 한 몸이 되어서 코피가 나도록 바쁘게 움직였다.

그런데 다시 본업으로 돌아왔다.

그것도 내부자…… 자신들의 수하를 처리해야 한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같이 웃고, 같이 밥 먹던 수하들을 자신의 손으로 처리해야 하는 순간이다.

아직 몽설이 자세한 말을 꺼내지 않았지만, 암살 대상자는 취화원 살수가 분명하다.

지금 시간이 사시(巳時:오전 10시)다. 정오까지라면 한 시진밖에 남지 않았다. 어디로 이동할 시간이 없다. 더욱이 암살이라면 준비도 해야 한다.

한 시진 만에 암살 준비를 마치고 결행한다.

내부자…… 황궁 안에 있는 사람을 암살하는 것만 가능하다. 궁성 밖으로 나갈 시간이 안 된다.

아니다. 아니다. 그렇게 마음 편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 더 잔인하게 생각하자.

암살하려면 상대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모르는 상대를 암살하는 것은 위험 부담이 무척 크다. 그런 면에서 암살은 친한 순서에서부터 친하지 않은 순서로 어려워진다. 벗을 죽이기가 가장 쉽고, 낯선 자를 죽이기가 가장 어렵다.

한 시진 만에 암살을 수행하려면…… 취화원 살수가 대상이다.

‘기어이!’

구곡주도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취화원에서 일어나는 일이 속속 외부로 빠져나가고 있으니 언젠가는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만, 간자가 누군지 알지 못하니 가슴이 두근거린다. 너무 잘 아는 아이면 어떻게 하지? 너무 믿었던 아이라면.

갑자기 서신을 열기가 두려워진다.

몽설이 말했다.

“서신을 펼쳐 보세요.”

그제야 구곡주가 앞에 놓인 서신을 집어서 펼쳤다.

“엇!”

“아!”

놀람, 탄성, 한탄…… 복잡한 심경이 어우러져 나왔다.

“원주님, 이 애들이……?”

“원주님, 죄송합니다만 이거 잘못되었을 가능성은 없는 건가요? 죄송합니다.”

모두 놀란 눈으로 몽설을 쳐다봤다.

“아! 말도 안 돼.”

칠 곡주 적화는 너무 놀라서 서신만 읽고 또 읽었다.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서신에 적힌 사람들은 허도기 간자다. 취화원이 귀문에 자리 잡을 때부터 침투한 사람도 있고, 정동 무인들과 크게 싸운 후에 들어온 사람도 있다.

그들이 언제 무슨 일을 했는지는 적혀 있지 않다. 단지 이름만 적어놨다. 하지만 서신에 적힌 사람들이 허도기의 간자라는 것은 직감적으로 느낀다.

몽설이 말했다.

“거기 적힌 사람들…… 아주 오랫동안 우리 곁에 있었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살수 문파답게, 살법으로 죽음을 안겨 주는 거예요. ‘너 무슨 짓을 했니?’ 하고 묻지 마세요. 한날한시에 본인이 죽는다는 사실도 모르게…… 많이 생각했는데, 이것만이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배려라고 생각해요.”

몽설은 단호했다.

구곡주는 이 명단이 전보영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짐작한다.

몽설은 서신에 적힌 사람들이 어떤 일을 했는지까지 안다. 명부판관이 살첩 대상자들에게 증거를 내밀듯이 자신들에게도 이들의 증거를 제시할 수가 있다.

하지만 하지 않는다.

몽설은 원주이고, 구곡주는 수하다.

원주가 수하에게 명령을 내리면서 이유까지 설명할 필요는 없다. 조건 없는 복종…… 구곡주는 서신에 적힌 수하들을 암살하면 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또 다른 배려가 숨어있다.

종이에 적힌 사람들이 한 일은 아걸을 죽이는 데 쓰였다. 아걸이 야천을 손댈 때부터 방해하는 역할을 했다. 원주를 보면 웃으면서도, 속으로는 아걸을 죽이고자 했다.

몽설의 배신감은 상당할 것이다.

구곡주도 그런 배신감을 느낀다. 단지 서신에 적힌 이름만 보고도 이들과 같이 지낸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그 모든 웃음, 기쁨, 눈물이 가짜였다니.

구곡주마저 이들이 한 일을 알게 되면 손속이 매워질 것이다. 안쓰러움을 안고 죽이는 대신 배신자를 척결한다는 심정으로 검을 쓸 것이다.

그래서 몽설은 이름만 적어놨다. 구곡주에게 수하의 배신을 모른 체 무조건 베라고 한다.

“원주, 이 애들만 베면 되나요?”

오 곡주 취운이 물었다.

배신자가 또 있냐는 물음이다.

‘또 있어요.’

구 곡 중 삼 곡과 구 곡에만 부곡주가 배신하지 않았다. 다른 칠곡에는 부곡주가 한 명씩 섞여 있다. 곡주 바로 옆에서 곡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몽설은 삼 곡과 구 곡 부곡주 중에도 간자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말도 하지 않았다. 심중에 의심이 있으면 행동이 달라진다. 부하를 쳐다보는 눈길에 의심이 깃들면 부하가 눈치챈다.

최고의 비밀은 말하지 않는 것이다.

몽설은 취운을 보며 웃었다.

“솔직히 몰라요. 하지만 없어야죠. 더는 가족을 죽이는 일이 있으면 안 되잖아요.”

‘가족!’

몽설은 취화원 살수들을 가족이라고 불렀다.

그렇다. 분명히 취화원에는 남은 간자가 있다. 허도기에게 어떻게 회유됐는지 모른다. 어쩌면 가족이 인질로 잡혀 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애초부터 살수를 증오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도 가족이다.

그들이 간자 짓을 하지 않는다면, 아걸을 죽음으로 몰아넣지 않는다면…… 간자 짓을 하지 않는데 간자라고 할 수 있나. 그때는 다시 가족이 된다.

“보고는 따로 할 필요 없어요. 오늘 정오가 지나면 모두 정리된 것으로 알게요. 미안해요, 언니들.”

몽설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웃었다.

“처리했습니다.”

“시행했습니다. 원주님 말씀대로 죽는지도 모르게 보냈습니다. 가장 편안한 죽음일 겁니다.”

보고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는데…… 한 명씩 보고를 해 왔다.

암살당하는 사람 중에는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안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죽는 순간이 매우 짧았다. 사생락은 죽음처럼 고요히 일어나서 순식간에 생명을 거둔다.

똑깍! 한순간에 숨이 끊어진다.

그녀들이 어떤 심정에서 허도기의 말을 들었는지 모르지만, 가장 편안한 죽음을 내렸다.

그래야 한다. 내 자매들이다.

‘언니들, 미안! 내가 진작 알았어야 했는데. 너무 늦게 아는 바람에 마음 고통이 심할 거야.’

몽설이 속으로 말했다.

취화원은 한 시진 안에 모든 간자를 정리했다.

금군도 마찬가지다. 시간을 정해 놓지는 않았지만, 날짜는 정해 놨다. 오늘, 금군 중 삼백이십칠 명이 죽는다. 이미 소리 없이 척살이 진행 중이다.

취화원이 자매를 죽이듯이, 그들 역시 형제를 죽이고 있다.

취화원이 폐쇄적인 조직이듯이 금군도 자신들끼리만 똘똘 뭉친 집단이다.

관원들, 장군들, 무림인은 어떻게 할까?

몽설은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황상이 안전해진 것도 아니다. 아직도 찾지 못한 간자가 있다. 단 한 명이라도 금군에 간자가 있는 한, 황상은 편히 잠자지 못한다. 침상을 지키는 호위가 간자라면 어쩔 것인가.

고민이 깊어가는 밤이다.

몽설은 황상을 찾았다.

“호황위에서 물러날까 합니다.”

“한 것도 없이? 질부,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으면 망친 국이라도 먹여 주고 물러나야지?”

황상이 웃으면서 말했다.

황상은 이종 질부에서 이종이라는 말을 완전히 떼어냈다. 몽설을 부를 때는 그저 질부라고만 말한다. 말투도 황상과 신하의 말이 아니다. 질부를 대하듯이 편안하게 말한다.

“저희 취화원에 간자가 일곱 명이나 있었습니다. 이미 저희가 호황이라는 게 허도기 귀에 들어갔을 겁니다. 허도기가 두려워했던 건 호황위인데, 호황위가 취화원이라는 걸 알았으니 더는 두려워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겠지? 호황위…… 제법 야무지게 써먹었는데. 삼국지에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쫓아냈다고 하지 않나. 딱 그랬어. 없는 호황위가 천하제일 무인 허도기를 겁먹게 했어. 하하하!”

황상이 기분 좋게 웃었다.

“여기서는 제가 할 일이 없습니다. 황상께서도 격변을 대비하셔야 하고요.”

“질부.”

황상이 고개를 숙이고 몽설을 쳐다봤다.

“네.”

“질부가 호황위를 맡았잖아.”

“네.”

“그러면 일을 해야지?”

“…….”

“공부를 막아달라고, 그 일을 하라고 지금 호황위를 맡긴 거 아닌가? 하하! 그러면 호황위가 언제까지 비밀스럽게 존재할 줄 알았나? 호황위가 나타나는 순간, 그가 누군지는 당장 들어가게 되어 있어. 질부가 호황위를 맡은 바로 그날, 이 소식이 공부의 귀에 들어갔을 것으로 짐작하는데.”

“아! 네.”

“내가 세상에 비밀은 없다고 말하지 않았나? 그건 그렇고…… 혈검 수련은 어느 정도나?”

“아직 그림자도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빨리 수련해야 할 거야. 공부하고 부딪히게 되면…… 흠! 내 생각에는 일홀도도 공부 상대는 안 될 것 같고…… 공부를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질부뿐이라고 생각해.”

“황상께서 일홀도를 보시면 생각이 달라지실 거예요. 일홀도는 정말 강합니다.”

“쯧! 팔불출.”

“네?”

“아무리 서방이 좋다고 해도 그렇지, 제 신랑을 입에 침이 닳도록 칭찬하는 부인이 어디 있나.”

“아! 그런 뜻이 아니라…….”

몽설이 얼굴을 붉혔다.

황상이 농담을 한다. 하지만 농담을 농담으로 받지 못하는 게 신하다.

“혈검을 수련해. 그리고 공부 그 사람…… 지금 움직이지 않아. 취화원이 호황위라는 걸 알았으니 한숨 돌렸겠지. 안심이 될 거야. 그렇다고 당장 움직이지는 않아.”

황상이 확신하듯 말했다.

“무슨 말이라도 들으셨어요?”

“꼭 말을 들어야 아나? 이 세상에는 왕이 두 명 있어. 나와 공부. 왕은 왕을 알아보지. 나는 공부가 무엇을 기다리는지 알 것 같아. 하하! 내가 생각한 게 맞는다면 공부는 절대로 움직이지 않아. 지금은. 아직 때가 안 됐거든.”

“공부가 무엇을 기다리는지 아세요?”

“짐작만 하지. 공부가 날 노린다는 데도 편안하게 잠을 자는 이유가 뭔 줄 아나?”

금군도 허도기를 막지 못한다. 금군 속에도 허도기의 칼이 있다. 그러니 정말로 이런 점들을 생각한다면 잠이 오지 않을 것이다. 두 발 뻗고 침상에 들 수가 없다.

아침, 점심, 저녁으로 내오는 밥도 먹을 수가 없게 된다. 독이라도 섞여 있으면 어떡하나. 자신을 호위하던 군인이 느닷없이 뒤돌아서서 검을 찌른다면 어떻게 막겠나.

그러고 보니 황상은 진정으로 그런 점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

“모르겠습니다.”

몽설이 말했다.

“공부라는 사람을 알 것 같거든. 내 말 믿어. 황상 자리에서 버티려면 눈치를 아주 잘 살펴야 하거든. 내 눈치가 보통이 아니야. 믿어. 지금은 움직이지 않아. 조만간 움직이겠지만. 하하하!”

황상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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