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八十八章 함입곤경(陷入困境) (1)
허도기가 공부로 불리기 전에는 이십사 위문 문주 회합이 매해 열렸다.
불편한 점, 부족한 점을 상당히 보살펴 주었다.
이십사 위문 문주에게 성검문은 온몸을 기댈 수 있는 든든한 언덕이었다.
허도기가 진공부로 들어간 후에도 회합은 계속 열렸다.
하지만 허도기가 회합을 주관할 때처럼 앓는 소리를 할 수 없었다. 소축십검은 배분으로 볼 때 문주보다 아래였고, 소축십검에게 한 말이 허도기에게 잘 전달되지도 않았다.
어쩌면 허도기의 관심이 이미 무림으로부터 멀어진 터라서 신경 쓰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회합을 소집해도 술이나 먹고 덕담이나 늘어놓다가 헤어지는 일이 잦아졌다.
그러자 불참자가 생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 명에서 두 명 정도 오지 않았고, 불참하는 사람이 대여섯 명으로 늘어나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회합은 흐지부지해졌다.
몇 년 전부터는 성검문에서도 회합을 연다는 통보조차 보내지 않았다. 완전히 중단된 것이다.
이십사 위문은 여전히 위문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성검문에서 벗어나 각자도생한다고 생각했다. 충분히 그럴만한 세력도 있었고, 무공도 강했다.
이런 관계는 이십사 위문도 바라던 터였다.
언제까지나 성검문의 그늘에서 지낼 수는 없지 않은가. 성검문에서 벗어나 독립된 문파를 갖춰야 하지 않겠나.
“오랜만입니다.”
“소식은 전해 듣고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청도에 제칠 분타를 만드셨다고요.”
“저희 무공을 아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더 있으면 좋겠다는 욕심에서 분타만 넓힙니다. 하하!”
형식적인 인사가 오고 갔다.
이십사 위문 문주가 한자리에 모이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다. 거의 칠팔 년은 된 것 같다.
하지만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마음이 무겁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명부판관에 관한 이야기로 들어갔으면 한다. 서로 속사정을 잘 알고 있는데 빙빙 겉만 맴돌아서 뭐 하겠나.
대청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모두 농담이나 잡담을 주고받을 기분이 아니다. 특히 스물네 개의 자리 중 텅 비어 있는 자리 한 개가 더욱 신경 쓰인다. 노정문주의 자리다.
저벅! 저벅!
회랑을 걸어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도 소축십검이 허도기를 대신해서 회합을 주재한다.
소축십검 중 살아남은 사람은 한 명이다. 그도 아걸에게 팔이 잘려서 외팔이다.
진개가 회합을 주도하는 것은 상관없다. 이십삼 명의 문주가 궁금해하는 것은 진개가 허도기로부터 어떤 명령이나 지시를 들었냐 하는 점이다.
그래서 소집된 회합이라면 이 모임은 상당히 유익할 것이다. 하지만 진개가 독단적으로 얼굴이나 보자는 식으로 소집한 회합이라면 철없는 녀석이라고 욕이 튀어나올 거다.
진개가 모습을 보였다.
평소에는 의수룰 붙이고 다닌다는데, 문주 앞에 설 때는 팔이 없어서 옷만 펄럭거렸다.
진개가 문주를 쳐다보지도 않고 상석으로 걸어갔다.
“거두절미, 본론을 말하겠습니다.”
진개가 차분히 말했다.
진개의 음성에는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운이 쭉 빠져있다. 평소대로라면 잔인한 눈을 번뜩이면서 말했을 것이다.
오늘은 상당히 힘이 없어 보인다.
“명부판관, 상당히 고민스러우실 텐데.”
진개가 당장 명부판관 이야기부터 꺼냈다. 자연히 문주들의 눈길이 진개에게 쏠렸다.
“성검문은 명부판관에게서 손을 뗍니다.”
“응?”
“뭐, 뭣?”
문주들이 잠시 잘못 들었나 싶어서 진개를 쳐다봤다. 하지만 곧 잘못 듣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게 말이 되나!”
팔천검문(八穿劍門) 문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말 안 될 건 뭔데!”
진개가 즉시 되받았다.
이 순간, 진개는 다시 들개가 되었다. 두 눈에서 진득한 살광이 줄기줄기 뻗어 나왔다.
진개는 마공 분뢰절맥을 수련했다. 심성을 사악하게 변화시켜서 부처도 악마로 만든다는 마공이다.
지금은 분뢰절맥을 안으로 숨긴 상태다. 하지만 도발적인 말을 듣는 순간,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서 쳐내고 싶다는 야수성이 당장 툭! 튀어나왔다.
파팟! 팟!
두 사람의 눈길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지금은 형편없이 무너졌지만, 그래도 소축십검은 여전히 무림 최강 무인이다. 지금도 혈무대 비무는 운영되고 있고, 아걸 이외에 그 누구도 혈무대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이십사 문주도 혈무대 비무에 도전할 수 있다. 그러면 진개와 부딪친다.
누가 이길까?
세상 사람들에게 이 문제를 던지면, 한결같이 진개라고 말할 것이다.
“자자, 이러지 말고. 우리끼리 다퉈봤자 아무 소용도 없어. 지금은 자중하자고.”
활검문주가 팔천검문 문주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팔천검문 문주가 못 이기는 척하고 자리에 앉았다.
진개가 살광을 거뒀다. 그리고 다시 무기력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이 자리, 회합 자체가 관심 없다는 투다.
“예우해 줄 때 그냥 받지. 이 회합, 내가 소집한 게 아니라는 것쯤은 짐작하잖아. 방금 내가 한 말도 내 의사가 아니라는 것도 알 거고. 왜들 이래?”
진개가 가식적으로 말하던 존대까지 싹 빼버렸다.
“사부가 한 말, 마저 전해. 명부판관이 날뛰고 있지만 바른 일 하겠다는 사람이니 도와줘야지. 우리는 명문들이니 명부판관의 표적이 될 리도 없고. 다들 발 벗고 도와라. 끝.”
진개가 일어섰다.
“다른 말씀은…… 없으셨나?”
낙일문 문주가 말했다.
“이십사 위문이 힘을 상당히 강하게 키웠다고. 나보고 조심하라고. 검으로 싸우면 질 수도 있으니. 이런 말은 내게 한 거라서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데, 듣고 싶어 하니까. 아! 문주들께 좋은 술을 대접하라는 말씀도 있었는데.”
진개가 대청을 휘둘러 본 후, 걸어 나갔다.
회합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성검문은 털어도 먼지가 않는다는 건가? 깨끗하다는 건가?
솔직히 그런 면도 있다. 성검문이 깨끗해서가 아니다. 허도기의 명성은 명부판관의 명성보다도 높다. 명부판관과 허도기가 각기 다른 소리를 하면 허도기의 말을 먼저 믿는다.
지금은 명부판관이 매우 정확하다는 인상을 주고 있으니 상황이 달라졌으려나?
‘이런 여우 같은!’
이십사 위문 문주의 눈가에 분노가 어렸다.
성검문은 떳떳함을 가장하면서 은근슬쩍 자리에서 빠졌다. 그러면서 좋은 술을 대접한단다. 술을 마시면 밤을 지새우게 되어 있다. 밤새도록 머리를 맞대고 방법을 찾으라는 거다.
성검문은 이십사문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게끔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그러면 이것으로 되지 않았냐는 거다.
결국, 이번 명부판관 사건은 이십사 위문이 처리하라는 명령이나 다름없다.
저벅! 저벅!
스물세 명의 문주는 멀어져 가는 발걸음 소리를 들으면서 인상만 찡그렸다.
좋은 도움을 받겠다고 한달음에 달려왔는데, 오히려 덤터기만 썼다. 분명한 것은 명부판관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이십사문이 똘똘 뭉쳐야 한다는 거다.
“후후! 덤터기 썼군.”
팔천검문 문주가 피식 웃었다.
“그동안 뒤를 봐줬으니 이번에 손해를 보라는 거지. 이건 부탁이 아니라 명령인데. 후후!”
광검문 광검이사가 말했다.
“이렇게 된 거…… 좋아. 솔직히 말해 봅시다. 여러분도 이미 아시겠지만 우리는 어떤 자식이 던져 놓고 간 서신을 받았는데, 일을 잘 매듭짓지 못했어요. 개자식은 놓치고, 사람들은 우릴 보기만 하면 욕하고. 지금 말도 못 하게 곤란한 상황이에요.”
광검일사가 말했다.
명부판관이 어떤 꼬투리를 잡고 광검문을 노린다면 어쩔 수 없이 싸울 수밖에 없지 않겠냐는 말이다.
다른 문주들은 침묵했다.
그들 역시 같은 입장이지만 광검문처럼 드러내 놓고 말하지는 않는다. 어차피 다른 문파도 같은 입장이라는 것을 아니까. 문제는 이 난관을 어떻게 풀어나가느냐 하는 점이다.
낙일검문 문주가 검을 풀어서 탁자 위에 올려놨다.
오늘은 긴 밤이 될 것 같다. 술도 거나하게 취해야 할 것 같다. 시간을 넉넉하게 잡고, 마음 편히 지금 상황을 즐겨야 한다. 어차피 같은 운명들이니까.
잠시 후, 대청에 술상이 차려졌다.
회합이 열릴 때마다 늘 진수성찬이 펼쳐지곤 했었다. 하지만 오늘은 매우 약소했다. 술상이라고는 하지만 정작 술은 빠졌다. 성의를 다한 상차림이기는 하지만 약소했다.
문주들이 서로를 쳐다봤다.
뭔가가 있다. 예전과는 아주 다르다.
그때, 성검문 총관과 무인 두 명이 대청으로 들어섰다.
무인은 곧바로 진개가 앉았던 상석으로 가서 의자와 탁자를 치웠다. 그리고 상석이 있던 곳에 제법 널찍한 자리를 만들었다. 두어 명 정도는 몸을 날릴 수 있는 공간이다.
총관이 상석에 서서 문주들을 보며 포권지례를 취했다.
“영광입니다. 이 자리는 감히 제가 낄 자리는 아니지만, 저 역시 문주님의 지시를 받은 터라. 그럼 지금부터 아걸의 일홀도를 분석해 드리겠습니다.”
“뭐, 뭣!”
문주들이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먼저 아걸이 풍도곡에서 소축십검님과 싸웠을 때입니다. 조명십해 중에 잠기일력타가 있다는 것은 아실 테니. 그 싸움에서 잠기일력타가 터졌습니다. 그 검은 정확하게 아걸의 심장이 틀어박혔죠. 하지만 아걸은 죽지 않았습니다. 보십시오.”
총관이 말했다.
그러자 두 무인이 검과 칼을 뽑았다. 한 명은 장검을 들었고, 다른 한 명은 반철도를 들었다. 아걸의 반철도를 흉내 냈는데, 제법 비슷하다.
스으으읏!
검을 든 무인이 매우 느리게 움직였다.
무인은 잠기일력타를 펼칠 수 없다. 그러니 검에 진기를 싣지도 못한다. 그가 펼치는 것은 그저 검을 뻗어내는 것뿐…… 검에 잠기일력타가 실렸다고 상상해야 한다.
스물세 명의 문주는 두 눈을 부릅뜨고 무인의 검을 쳐다봤다.
문주들은 잠기일력타를 안다. 문주 중 몇 명은 이 검에 당하기도 했다. 비록 심장이 꿰뚫리지는 않았지만, 검의 강력함은 충분히 맛봤다.
츠츠츠츳!
검이 가까이 다가간다. 그리고 드디어 검이 심장에 닿았다.
“꿰뚫렸단 말인가!”
광검일사가 소리쳤다.
반철도를 든 자는 검이 심장에 닿은 후에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매우 천천히…… 반철도를 움직여서 칼을 심장에 댔다.
이 싸움대로라면 두 사람은 동귀어진이다. 모두 죽는다. 두 사람 모두 살 수가 없다. 그런데 아걸은 살아 있다. 왜? 정말 이대로 싸운 것인가?
“이봐! 이게 확실한가?”
“확실합니다.”
총관이 자신 있게 말했다.
“이 칼에 첫 번째로 희생되신 분이 십검 이도창님이십니다. 그때는 무슨 칼인지도 몰랐죠.”
“으음!”
문주들이 침음했다.
풍도곡 싸움은 그들도 잘 알고 있다. 그 싸움뿐만이 아니라 다른 싸움에 대해서는 귀따갑게 들었다.
총관이 말했다.
“이 칼을 맨 먼저 보여드리는 것은…… 이 싸움의 요체는 진파라고 하는 것인데, 검이 다가오는 순간 진기로 이 검을 이렇게 살짝 밀어냅니다.”
총관이 손끝으로 검을 슬쩍 밀어냈다. 그러자 심장을 찌르던 검이 복부에 꽂혔다.
“잠기일력타를 사용했는데, 이렇게 엉뚱한 곳에 검을 꽂은 분이 두 분이죠. 초가평 이검님과 진개 사검님. 대신 아걸이 흘린 이 수법에는 죽습니다.”
총관이 반철도를 가리켰다.
“물론 이 수법은 풍도곡에서는 나오지 않았어요. 다음 싸움에서 나옵니다.”
총관과 무인은 온갖 무공을 선보였다. 그동안 아걸이 펼쳤던 도법들이다.
그중에는 아주 인상적인 도법도 있다.
묵직한 반철도를 엄지와 검지 양 손끝으로만 잡고 칼을 움직인다.
“음!”
문주 중 누군가가 신음을 흘렸다.
이 칼을 알아본 것이다.
엄지와 검지, 양 손끝으로만 반철도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손가락 악력인가? 아니다. 아무리 악력이 강해도 손가락 힘만으로는 칼을 움직이지 못한다.
이런 칼을 쓰려면 탄성을 이용한 움직임에 능숙해야 한다.
이런 칼을 실전에서 사용했다면 아걸은 이미 칼의 무게, 공기의 흐름, 땅이 끌어내리는 힘, 회전력 등등 인간과 물체가 이끄는 모든 힘의 조합을 알고 있다는 말이 된다.
아걸은 도신이다.
“이게 은거 무인들과 같이 지내면서 터득한 겁니다.”
아걸의 칼이 하나씩 분석되었다.
총관과 두 무인은 근 반 시진에 걸쳐서 여러 가지 무공을 선보였다.
“지금 선보인 거 외에도 아걸이 사용한 무공은 아주 많습니다. 그 무공들이 여기에 기재되어 있습니다.”
총관이 수북이 쌓아 올린 책자를 가리켰다.
무공의 요체가 기재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아걸이 싸운 모습이 그려져 있다. 하지만 이십사 문주는 그런 그림만 봐도 아걸이 어떠한 칼을 쓰는지 알 수가 있다.
총관이 말했다.
“여러분의 숙소는 뒤쪽 후원에 마련해 놨습니다. 앞으로 사나흘 정도는 머무실 수 있습니다. 물론 원하신다면. 그동안 문주님이 다른 말씀을 주신다고 하신 것 같은데.”
총관이 문주들을 보며 말했다.
문주들은 자신들이 확실하게 덤터기 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기서는 빠져나갈 수 없다. 이제는 허도기가 시키는 대로 싸워야 한다. 명부판관과. 그것이 허도기가 원하는 것일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