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일홀도-441화 (441/600)

第八十九章 만심절도(滿心絶刀) (1)

“이놈아! 너, 나 아니었으면 어떡할 뻔했냐! 내가 네 생명의 은인이다. 너 인마! 나중에 나한테 잘해. 늙었다고 구박하면 넌 벌 받아, 인마!”

아삼이 연신 투덜거리며 녹색 즙을 발랐다.

녹선마황은 효과가 매우 뛰어나다. 바른 지 이틀밖에 안 되었는데, 의원들이 열흘 치료한 것보다도 낫다. 벌써 새살이 돋고 단단하게 여물기 시작했다.

“가족 간에 생색은.”

아걸이 툭 쏘아붙였다.

“이놈아! 가족일수록 셈은 정확해야 하는 법이야! 네놈 목숨을 내가 어디 한두 번 구해 줬냐? 너는! 너는 내 목숨을 몇 번이나 구해 줬는데?”

“구할 틈이 있어야 구하지.”

“그러니까 처신 잘해, 이놈아!”

“할배는 목숨이 위태롭다 싶으면 도망부터 가잖아. 그러니 구할 틈이 어디 있어.”

“그러면 도망가야지! 이놈아! 얌전히 앉아서 칼 맞아 뒈지냐! 어디서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자빠졌어!”

“어휴! 내가 말을 말아야지.”

“누가 너보고 말하라고 그랬냐, 이놈아!”

“거 말끝마다 이놈, 저놈. 놈 소리 좀 안 하면 어디가 덧나오?”

“네놈이 안 하게 만들어야 안 하지, 이놈아!”

“내가 미친다. 어휴!”

아걸이 연신 이 앓는 소리를 냈다.

이렇게 보면 두 사람은 영락없이 조손(祖孫)이다. 한 사람은 전임 적랑대주고, 한 사람은 명부판관이다. 혈도비자라는 잔혹한 무명도 지녔다.

지금 이들 모습에서는 날카로운 칼바람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오늘도 푹 누워 있어. 움직일 생각하지 말고.”

“움직여도 될 것 같은데.”

“움직이지 말라면 움직이지 마! 내일은 조금씩 움직여도 돼. 특별히 봐준다.”

“아이고. 감사해라.”

“너 그거 비꼬는 거지?”

“아닌데? 정말 감사해서 한 말인데?”

“비꼬는 거였는데…….”

“심성이 삐딱하니까 모든 말이 삐딱하게 들리는 거야. 나이 들면 소갈머리가 좁아지니까 스스로 알아서 자중하라는 말도 있는데, 못 들었나?”

“뭐? 소갈머리? 에이끼! 이놈아! 그게 할배한테 할 말이냐!”

꽝!

아삼이 아걸의 머리를 힘껏 쥐어박았다.

“나 환자! 환자라니까!”

“이렇게 주둥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환자도 봤냐! 너 환자 아니야, 인마! 엄살쟁이지.”

아삼이 툴툴거리면서 일어섰다.

‘훗! 할배.’

할배가 옆에 있으면 편안하다. 아무리 부상이 심해도 고통이 씻은 듯이 가신다. 어떤 말도 할 수 있고, 어떤 행동을 해도 흠이 되지 않는다.

아걸은 편안한 마음으로 눈을 감았다.

이번 노정문주와의 싸움은 아마도 일생에서 가장 기억나는 싸움이 될 것이다.

거동조차 불가능한 상태에서 싸웠기 때문은 아니다. 도저히 이기기 힘든 상대를 이겨서도 아니다. 그 정도의 불가능이라면 이미 허도기에게 많이 겪었다.

분명한 것은 노정문주와의 싸움이 칼의 길에서 일대 전환점이 될 것이라는 거다.

그 싸움을 다시 복기해 본다.

아걸은 노정문주와의 싸움에서 기막힌 깨달음을 얻었다.

그동안 자신이 터득했던 모든 칼은 한낱 지식이었다. 지식이라고 해도 되고, 법(法)이라고 해도 좋다. 실상(實像)이라고 해도 좋다. 어떤 말을 끌어다가 붙여도 좋다.

수련을 통해서 얻은 모든 무공이 법(法)이다.

생각하고, 방법을 찾아내고, 일정한 형태로 만들어서 펼쳐내는 모든 무공이 실상에 해당한다. 이 모든 것을 통틀어서 말할 수 있는 단어라면 어떤 단어를 붙여도 상관없다.

자신이 지금껏 펼쳤던 무공은 그런 것이었다.

몰안, 도신일체, 진파, 자연검…… 일홀문 삼십육문주의 도법 전부, 은거 무인들의 무공, 조명천검, 조명천해, 소림사 칠십이종절예 등등 모든 무공이 여기에 해당한다.

조명십해 중 잠기일력타가 있다.

잠기일력타가 뭐냐고 말하면 설명할 수 있다. 그것을 펼칠 수 있느냐 없느냐는 별개의 문제고, 어떤 무공이며 어떻게 하면 수련할 수 있는지 말할 수 있다. 수련하면 어떤 식으로 펼쳐지는지도 설명할 수 있다.

잠기일력타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공부다.

무공이라는 것은 하나의 행동, 순간적인 움직임이지만 눈에 보이는 밥그릇처럼 실체가 있다.

똑같은 사람이 잠기일력타를 펼치면 언제나 같은 무공이 펼쳐진다.

힘과 진기의 차이, 그때그때의 몸의 변화에 따라서 위력이 약간 차이 날 수는 있지만 거의 같은 무공이다.

무공에도 형체가 있다는 거다.

그런데 노정문주와 싸우면서는 처음으로 실체가 없는 움직임을 사용했다.

그때 자신이 사용했던 무공은 아걸 자신조차도 모르는 것이었다. 그런 움직임이 왜 튀어 나갔는지 모른다. 노정문주의 움직임에 맞춰서 본능적으로 행동이 이끌어졌다.

본능인가?

그 움직임이 본능이라고 하면 일생일대의 전환점이라고까지 말하지 않는다.

모든 무인이 본능적으로 검초를 사용한다.

일홀문 구문주의 십이살환도는 모두 십이식으로 이루어진 도법이다. 열두 가지의 각기 다른 도법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도와 이도는 연결해서 펼칠 수도 있고, 구분해서 펼치기도 한다.

십이살환도 중 일도만 수련했다고 해서 싸우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평생 일도 하나만 수련해서 모든 싸움에 적용시키는 것도 한 방법이다.

실제로 마유 마인들의 직하검, 수평검이 그런 경우다.

그들의 검을 백인검이라고 부르는 것은 한 가지 움직임에 모든 열정을 쏟아부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다른 움직임을 쓰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싸움에 임하면 모든 움직임이 일어난다. 이른바, 본능에 따른 움직임이 저절로 써진다.

십이살환도의 십이도법을 모두 수련해도 마찬가지다.

일도에서부터 십이도까지 순차적으로 펼쳐지는 것이 아니다. 일도를 처음부터 끝까지 풀어내는 것도 아니다. 싸움에 들어서면 모든 초식이 섞여서 무엇인지 모를 도법이 전개된다.

그래서 일홀문에서는 대체로 몇 식 몇 초를 따지지 않는 편이다.

서리가헌의 무공은 일탄십검이다. 서리형개의 칼은 화염도다. 그뿐이다. 그 칼 속에도 분명히 수많은 변화가 들어 있고, 수련을 통해서 터득한다. 하지만 싸울 때는 오직 하나, 일탄십검이나 화염도를 쓸 뿐이다.

이것이 모든 무인이 가지고 있는 상식이다. 그러니 이것을 법이라고 해도 좋고, 실상이라고 해도 좋은 것이다. 또 자신은 노정문주와의 싸움에서 이 법이 아닌 무공을 사용했다. 본능에서 일어난 무공이 분명히 아니었다.

그래서 일생일대의 전환점이라고 말한다.

노정문주와의 싸움은 허도기와 싸웠던 네 번의 싸움보다도 더 큰 깨달음을 전해주었다.

내가 있고 노정문주가 있었다.

노정문주가 펼치는 검초, 대정천로비검식을 상대할 만한 도법이 없었다. 도법은 있었지만, 엉망이 된 몸으로는 펼쳐내기가 불가능했다. 서 있기도 힘들었으니까.

어떤 식으로 싸워야 할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검에서 눈길을 돌려 버렸다. 검을 보지 않았다.

법으로, 실상으로 싸웠다면 노정문주의 검을 몰안으로 지켜봤어야 한다. 도신일체를 이룬 후, 검의 세세한 움직임을 따라갔어야 한다. 어디로 공격해오는지 예측했어야 한다. 그래야 받아낼 수 있고, 피하기도 쉽다.

모든 무인이 이처럼 싸운다.

그런 면에서 당시 자신이 취한 행동은 전혀 무인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사슴! 사냥당하는 사슴처럼 움직였다.

사슴이 아무것도 모른 채 무방비 상태로 걸어간다. 그때 옆에서 호랑이가 잔뜩 벼르고 있다가 와락 달려든다. 이때 호랑이가 달려드는 모습은, 공격은 실상이다.

눈에 보이는 것이다.

호랑이는 납작 엎드려있다가 공격하면 사슴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무인이 이럴 때 이런 초식을 전개하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아는 것과 같다.

하지만 사슴이 사슴은 다르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부지불식간 무언가가 툭 튀어나왔다. 이때 작용하는 것은 본능적인 행동밖에 없다.

뭐가 튀어나왔다. 그러니 무조건 도주한다. 탁!

바로 이와 비슷한 행동을 아걸이 했다.

여기서 사슴은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아걸도 본능적으로 움직였다면 사슴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한데 사슴은 무방비 상태로 싸운 것일 뿐이다. 전혀 획기적이지 않다.

아걸이 사슴과 달랐던 점은…… 본능적인 움직임을 일으키면서도 자신을 봤다는 것이다.

사슴은 자신을 보지 못했다.

호랑이를 피해서 툭! 튀어 오르는 순간,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무조건 도주하는 행동만 취했다.

아걸은 무방비 상태에서 본능을 일으킨 것이 아니다. 예측하지 않았을 뿐이다.

노정문주가 일으키는 움직임을 분명히 봤다. 전혀 예측하지 않은 상태에서 봤다. 본능적으로 칼을 쓴 것이 아니다. 노정문주의 움직임에 맞춰서 움직였다.

아걸의 움직임은 노정문주의 움직임보다 빨랐다.

허도기의 검을 쫓아가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척 빨라졌던 것 같다.

노정문주는 법대로 검초를 펼쳤고, 자신은 법을 깨고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도법을 전개했다.

그 순간, 움직이는 나와 움직여 오는 적을 인식했다. 대정천로비검식을 봤고, 그 움직임에 대응하는 움직임을 펼쳤다. 거기서 자신도 모르는 움직임이 튀어나왔다.

그러니 이것은 본능적인 움직임과는 별개로 구분해서 말해야 한다.

‘조금 더 연구해 봐야겠어.’

아걸은 계속 그 생각에 몰입했다.

세상의 모든 움직임은 법이라는 말로 묶어 둘 수가 있다.

하지만 자신이 전개한 도법만은 법이라는 말로 묶어 두지 못한다. ‘본능적인 움직임’이라는 말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그것들과는 전혀 다른 움직임이다.

아걸은 노정문주와 싸움을 계속해서 복기했다.

화르르르륵!

아삼이 소로(小爐)에 불을 피웠다.

덜컹!

아삼은 반철도를 소로 곁에 내던졌다.

“세상에! 칼을 만들어 줬더니 이따위로 굴려 먹고. 남의 정성을 개떡처럼 말아먹는다니까.”

아삼이 반철도를 보며 툴툴거렸다.

“저기 그거 손대지 않는 게 좋을 거 같은데.”

황열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뭐야! 인마!”

아삼이 당장 눈을 흘겼다.

“아, 인마라니. 나도 나이가 있는데.”

“그래서 인마! 뭐 인마! 너 같으면 인마! 이 칼로 사람을 벨 수 있냐! 벨 수 있어!”

“아니, 그건 그렇지만…….”

“옆에 있는 것들이 도대체가 하나같이 쓸 만한 인간들이 없다니까. 이건 뭐 도움이 되어야지. 아니! 저놈이 이런 칼을 들고 다니면 진작 좀 다듬어 줄 생각은 못 하나? 하여간! 좌우지간!”

은거 무인들은 서로를 쳐다봤다.

반철도를 다듬어 줄 생각을 왜 안 했겠나. 아걸이 싫어할 거 같으니까 하지 않았지 않나.

“거참 말이라고. 아니, 우리도 그거 다듬어 줄 생각은 했소. 하지만 아걸이 그걸 고집…….”

“생각만 하면 뭐 해! 생각했으면 다듬었어야지!”

아삼은 소로가 활활 타오르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반철도를 푹 찔러 넣었다.

반철도는 금방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게 뭐 그렇게 힘들다고. 그저 망치질 몇 번 하면 끝나는데, 그걸 안 해!”

탕탕! 탕!

아삼은 반철도를 꺼내서 신경질적으로 쇠망치를 두들겨댔다.

“하! 이거 꼼짝없이 당하네. 말만 들으면 우린 천하의 못된 놈들이네. 게으르고, 무식하고.”

“아네. 알면 됐다, 이놈들아!”

탕탕! 탕!

아삼은 반철도의 날을 두들겨댔다.

‘저건!’

은거 무인들은 눈을 부릅떴다.

아삼이 반철도에 날을 세우고 있다. 망치로 날 부분을 연신 내리친다. 날을 얇게 편다.

“지금 날을 세우는 겁니까?”

“그래도 괜찮을까요? 아걸은 워낙 거칠게 반철도를 써서 금방 날이 상할 텐데.”

아삼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타앙! 탕탕! 타아아앙!

망치질하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칼을 만들어 주면 뭐 해! 이따위로 굴려 먹고. 한 번만 더 망가뜨려 봐라! 내 손모가지를 뎅겅 분질러 버릴 테니까. 제 놈도 나이를 그만큼 처먹었으면 철이 들어야지. 언제까지 이렇게 남의 손만 빌릴 거야! 저는 손이 없어, 발이 없어!’

아삼은 아직도 누워 있는 아걸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일부러 들으라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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