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일홀도-443화 (443/600)

第八十九章 만심절도(滿心絶刀) (3)

동굴에 벌레가 기어간다.

사부의 손에 이끌려서 낯선 산으로 갔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서 곧 외딴 동굴에 갇혔다.

그곳에서 벌레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며 무공을 수련했다.

그때는 그게 최선인 줄 알았다. 사마귀가 벌레를 잡아먹는 모습은 숱한 사람이 연구했던 것인데, 마치 자신이 처음 발견한 것처럼 기뻐했었다.

동굴에 기어 다니는 벌레를 보고 있자니 문득 그때 기억이 난다.

‘새끼 지네인가? 지네는 아닌 것 같고…… 돈벌레도 아닌데.’

이름도 알지 못하는 벌레가 기어간다. 다리가 스무 개는 훨씬 넘는 것 같다.

벌레가 기어가는 모습에도 법이 작용한다.

사람은 무심히 ‘벌레가 기어가는구나’ 하고 생각하겠지만, 이 순간 사람은 벌레가 어느 정도의 속도로, 어느 방향으로 기어가는지 예측해 낸다.

벌레는 당연히 기어가는 방향으로 기어간다. 그러다가 옆으로 방향을 트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는 또다시 다른 방향을 예측하고 주시한다.

예측 범위가 한 뼘에서 두 뼘 정도, 매우 짧을 경우에는 거의 틀리지 않는다.

이것이 법이다.

아걸은 예측하지 않고 벌레는 지켜본다.

벌레가 발을 내딛는 딱 한순간, 그 한순간만 지켜봤다. 돈벌레처럼 생긴 벌레는 부지런히 기어간다. 한 걸음만 구분해서 볼 수 없다. 하지만 아걸은 구분해서 본다.

전혀 예측하지 않고 현재의 움직임만 살핀다.

이것 또한 매우 어려운 공부다.

촛불의 일렁거림만큼이나 급하게 예측이 일어난다. 그것을 의식하지 말아야 한다.

땅! 땅이 된다.

땅은 의식이 없다. 그러니 벌레가 기어올 것을 예측하지 못한다.

땅처럼 완전히 의식을 죽인 상태에서 현재 벌어지는 일만 또렷하게 본다.

아걸은 머릿속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지우는 수련을 한다. 무엇을 얻고자 하는 공부가 아니라 모든 것을 버리는 공부다. 이 공부는 함안 성주를 만나기 전에 했던 수련과도 일치한다.

모든 수련에는 순서가 있다.

천하제일의 기재도 곧바로 최고 절초를 수련할 수는 없다. 바로 최절정 초식을 알려 주는 사부도 없다. 허도기라고 해도 이제 막 입문한 문도에게 조명십해를 알려 주지는 않는다.

무공을 배우려면 배울 수 있는 몸을 먼저 만들어야 한다.

아걸에게 그 몸, 기본적인 상태는 몰안과 도신일체였다. 물론 몰안을 만들기 위해서는 부단한 수련이 필요하지만, 여기서는 몰안을 가장 기본으로 삼자.

몰안과 도신일체는 극도의 정신 집중을 요구한다.

칼과 몸이 하나가 되어서 움직인다는 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평생 그런 경지를 목표로 수련하는 무인이 태반이다. 그러니 이것을 기본으로 삼는다는 것은 상당히 건방진 말이다.

몰안과 도신일체를 펼치면 미세한 움직임을 볼 수 있다. 검이 흐르는 것을 본다.

여기서 진파가 나왔다.

미세한 움직임을 볼 수 있으니 옆으로 틀어버렸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진파는 다시 물안과 도신일체를 강화시킨다.

도신일체에서 진파로, 진파에서 도신일체로 상호 순환한다.

이러한 상승 작용의 결과로 자연검이 탄생했다. 자연검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사물의 미세한 움직임을 볼 수 있으니 내 몸의 움직임, 원심력과 구심력, 칼의 무게에 따른 움직임, 호선에 따른 움직임 등등을 지켜볼 수 있었다.

몰안과 도신일체를 바탕으로 진파가 나고, 또 이 세 가지가 병합되어서 자연검을 끌어냈다.

자연검을 터득하자 즉각적인 대응이 가능해졌다.

즉각적인 대응에도 두 가지가 있다.

어두운 골목길을 걸어갈 때, 암습을 예상할 수 있다. 이때 몸은 초긴장 상태가 된다. 그리고 암습이 일어난다. 몸은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초긴장 상태에서 일어난 대응이다.

무방비 상태로 아무것도 모른 채 골목길을 간다. 그때 암습이 일어난다. 본능적으로 대응한다. 피할 수도 있고, 반격할 수도 있지만 모두 본능에 따른 행동이다.

무방비 상태에서 일어난 대응이다.

무방비 대응은 또 두 가지로 갈린다.

오직 본능만 동원한 대응이 있다. 보통 부인들이 거의 본능적으로 대응한다.

아걸도 본능적으로 대응한다. 하지만 대응하는 과정에서도 내가 무엇을 하는지, 어떤 움직임을 그려내는지 정확히 꿰뚫어 봤다. 내 움직임을 보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움직임도 봐야 한다. 양쪽을 모두 주시한 채 대응했다.

노정문주와의 싸움은 자연검을 터득한 결과물이다.

타타닥! 타닥!

촛불이 타들어 간다.

아걸은 노정문주와의 싸움에서 얻은 깨달음이 얼마나 큰 것인지 새삼 느꼈다.

싸움은 결코 괴롭지 않다.

싸움은 힘들지 않다.

미친놈 같은 말이지만 빨리 싸우고 싶다. 싸우고 싶어서 미치겠다.

“후우웁!”

아걸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몽설의 예상이 맞았다.

아걸은 한 달 만에 훌훌 털고 일어섰다. 정확히는 이십여 일 만에 일어나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고, 한 달이 될 무렵에는 언제 아팠냐 하는 듯이 멀쩡해졌다.

그런데도 아걸은 동굴에서 나오지 않았다. 계속 촛불을 지켜보면서 수련했다.

아걸이 동굴에서 나온 것은 한 달이 다 되어갈 무렵이다.

“비무 좀 해 주세요.”

아걸은 나오자마자 쌍겸을 도발했다.

“비무? 또 날 얼마나 무참하게 깨부수려고 비무를 하자고 그래. 안 해. 다른 사람에게 말해.”

쌍검이 고개를 내둘렀다.

“이번에 동굴에서 수련한 것을 시험해 볼까 하는데. 정말 안 할 거예요?”

동굴 수련!

아걸의 말에 은거 무인들이 눈빛을 반짝 빛냈다.

아걸이 근 한 달 동안 촛불에 미쳐 있었다는 사실은 모르는 사람이 없다. 촛불 수련은 은거 무인도 모두 알지만, 지금 경지에서는 크게 얻을 게 없다.

아걸은 도대체 왜 저기에 저토록 몰입해 있는 것일까?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특별한 안공이라도 수련하나?

아걸은 법이 아닌 마음을 수련한다고 했다.

이게 무슨 개떡 같은 소리인지. 무공에 법은 무엇이고, 마음은 무엇인지.

마음은 알겠다. 마음으로 검을 쓰라는 말은 흔히들 한다. 한눈팔지 말고 온 정성을 다해서 검을 펼치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 앞에 법이라는 글자가 들어가니까 헷갈린다.

법이 배제된 마음만으로 펼치는 도법, 그게 어떤 칼인지 모르겠다.

“해 봐. 보고 싶은데.”

“왜 나보고 하래! 그렇게 하고 싶으면 네가 해!”

“거참. 아걸이 쌍겸에게 직접 부탁했잖아. 한 번 해 봐. 궁금하지 않아? 어떤 칼인지?”

“제길! 나서봤자 개망신당할 게 뻔한데. 그래, 좋다! 그럼 한번 알아볼까? 도대체 뭘 터득했는지.”

쌍검이 일어섰다.

아걸은 반철도 대신 목도를 잡았다.

목도도 아니다. 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투박하다. 손잡이 부분만 다듬은 판자다.

“그걸로? 내 쌍겸이 그 정도로 만만하다 이거지? 하 참! 다른 놈도 아니고 저놈이 저걸 드니 뭐라고 할 수도 없고. 비참하네. 내가 이래서 안 한다고 했잖아.”

쌍겸이 투덜거렸다.

“하하하!”

모두 웃었다.

누군가가 쌍겸을 상대하면서 판자를 들면 당장 미친놈이라고 욕할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걸에게는 통한다. 아걸이 판자를 들었지만, 그래도 쌍겸이 이긴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이 싸움은 쌍겸이 질 것이다.

“간다!”

“네.”

쒜에엑!

쌍겸이 낫 두 자루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쌍겸의 보법은 매우 변칙적이다. 있는 그대로 지켜보면 불의의 일격을 당하기에 십상이다. 모든 무인이 쌍겸의 이런 변칙적인 공격에 당황해한다.

이번에도 그랬다. 쌍검은 달려드는 듯하다가 옆으로 빠지면서 쌍검을 내던졌다.

쒜엑! 쒜에엑!

쌍겸의 자루에는 쇠사슬이 달려 있다. 이 쇠사슬을 이용하면 낫이 던지는 병기로 둔갑한다. 승표의 이점과 단도의 이점을 모두 겸비한 병기다.

아걸은 무심히 낫을 쳐다봤다.

“위험…….”

누군가가 중얼거릴 정도로 낫이 가깝게 다가들었다. 그때, 아걸이 판자를 들어 올렸다.

타탁!

낫은 너무도 싱겁게 퉁겨나갔다.

“어디!”

쌍겸이 휘리릭! 낫을 거둬서 다시 내쳤다.

천지분광(天地分光)이다. 낫이 순식간에 하늘과 땅으로 갈라섰다. 낫 한 자루는 위에서 뚝 떨어져 내리고 또 한 자루는 아래서 위로 쭈욱! 솟구친다.

낯을 다루는 쌍겸의 손놀림이 매우 현란하다.

탁탁!

아걸은 가볍게 쳐냈다.

쌍겸이 아무리 현란해도 역시 낫일 뿐이다. 몸을 찍어오는 날이 있고, 힘의 중심점이 있다. 낫 두 자루의 중심점만 쳐 내면 어떻게 공격해 오든 모두 막아낸다.

쉐레렉! 촤르르륵!

낫이 다시 변화했다.

쌍겸은 낫 두 자루를 회수해서 등 뒤로 크게 휘둘렀다. 그러다가 태공이 낚싯대를 던지듯이 머리 위로 힘껏 내던졌다.

쉐에에엑!

낫이 아걸을 찍어 왔다.

하늘에서 낫 두 자루가 뚝 떨어진다. 하나는 왼쪽 어깨를, 다른 하나는 오른쪽 어깨를 노린다. 아니, 노리는 점이 일정하지 않다. 어깨가 될 수도 있고, 머리가 될 수도 있다. 때에 따라서는 다리를 칠 수도 있을 것 같다.

쌍겸의 이번 공격에는 많은 변화가 담겼다.

아걸은 매서운 공격을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훌쩍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 순간, 낫들이 가슴을 스치면서 사선으로 비껴갔다.

쇠사슬을 이용한 원거리 공격은 통하지 않는다. 너무도 가볍게 피하거나 막는다.

쌍검은 날아오는 낫을 두 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쾌속하게 달려들어서 아걸의 전신 요혈을 직접 타격하기 시작했다.

페엑! 파파팍! 파팟! 팍!

쌍겸이 자랑하는 박투술, 혈투박(血鬪拍)이다.

쌍겸은 두 손을 천수여래처럼 빠르게, 현란하게 움직였다.

어깨, 가슴, 배, 머리 찍고 다시 다리, 배, 가슴, 머리로…… 위아래를 오르내리며 사방을 거침없이 찍었다.

낫은 단도와 다르다. 박투술에서 단도는 베고 찌르는 수법을 사용하지만, 낫은 휘감고, 베고, 찍고, 쳐내는 수법을 사용한다. 훨씬 변화가 상대하기 까다롭다.

아걸은 쌍검의 손놀림에 맞춰서 판자를 휘둘렀다.

타탁! 탁탁탁! 타탁!

쌍검의 낯은 판자에 모두 가로막혔다.

쌍검의 움직임과 아걸의 움직임이 똑같다. 쌍검은 온 힘을 다해서 후려치고 있고 아걸은 가볍게, 가볍게 틀어막는다. 누가 봐도 아걸이 한 수 위다.

한쪽은 젖 먹던 힘을 쥐어 짜내는 것이 보인다. 다른 한쪽은 뒷짐 지고 상대하는 듯 가볍다.

“후욱!”

쌍겸이 거칠게 숨을 토해냈다. 그리고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낫을 내렸다.

보통 접전 같으면 지금 같은 경우, 뒤로 한 걸음이나 두 걸음쯤 물러선다. 그래야 무의식중에 휘두르는 판자에 맞지 않는다.

쌍검은 물러서지 않았다. 접전을 벌이던 곳에서, 서로의 숨결이 확연히 느껴지는 가까운 거리에서 갑자기 두 손을 확 내려 버렸다. 아걸이 공격할 마음이 있다면, 또는 지금까지 벌인 빠른 접전을 이어가서 무심히 손을 뻗어냈다면…… 쌍겸은 크게 다친다.

그런데 쌍겸이 손을 내리자, 아걸도 손을 내렸다.

“역시!”

쌍검이 찬탄을 토해냈다.

“너 내 움직임을 환히 보고 있구나?”

“네.”

“이거 나는 이제 상대가 안 된다는 말이잖아?”

“그건 아니고…….”

“아니긴 뭐가 아냐! 내 움직임을 환히 보고 있으면서.”

아걸이 말을 하지 못했다.

“제길! 이거 뭐 이제 앞으로는 찍소리도 못하겠네. 도대체 동굴에서 뭘 수련한 거야? 촛불 수련?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뭐야? 궁금해서 미치겠네.”

쌍겸이 낫을 거두며 말했다.

쌍검이 공격을 멈췄을 때, 아걸은 티끌만치도 반격하지 않았다. 쌍겸이 손을 거두자 아걸도 약속이라도 한 듯이 거의 동시에 손을 내렸다.

아걸의 반응 속도가 상상을 초월한다.

“정말 궁금한데? 도대체 한 달 동안 촛불을 보면서 뭘 수련한 거지? 말해 줄 수 없는 건가?”

장태전도 탄성을 토해내며 물었다.

아걸의 움직임은 하수처럼 보인다. 상수처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매우 효과적이다.

“말했는데요. 법을 버렸다고.”

“법을 버렸다는 말이, 초식을 버렸다는 말인가?”

“아직 무리가 정확히 정리되지 않아서…… 뭐라고 말씀드릴 수가 없는데, 초식을 버리는 정도가 아니라 무공을 버렸다? 제가 사용하고 있는 게…… 이거 무공 맞죠?”

“뭐야? 그럼 그게 무공이 아니면 뭐야?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있어!”

쌍겸이 툭 쏘아붙였다.

“나는 무공을 버리고 싸웠다고 생각했는데, 이것도 무공이다. 이러니 아직 설명을 못 하겠어요. 조금 정리되고 나면 그때 말씀드릴게요. 지금은 정리가 안 돼서.”

아걸이 민망한 듯 말했다.

말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정말로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뭔가 새로운 게 나타나긴 나타난 것 같은데. 야 이건 너무 세다. 무서워.”

황열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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