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일홀도-447화 (447/600)

第九十章 백살도축(百殺禱祝) (2)

아걸이 환하게 웃었다.

아걸같이 늘 목숨을 던지는 사내도 이렇게 웃을 수 있구나. 웃음이 남아 있구나.

아걸은 한달음에 달려와 그녀의 두 손을 잡았다.

“어떻게? 여긴 어떻게?”

아걸이 말한 첫 마디다.

“오랜만에 만난 부인한테 그런 말이 어디 있어?”

몽설이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나지 않아서.”

“좋다는 뜻이야, 가라는 뜻이야?”

“좋, 좋다는 뜻. 무척 좋지. 하하! 정말 보고 싶었는데.”

아걸의 얼굴을 보면 그가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여실히 느껴진다. 온갖 감정이 한꺼번에 들끓어 올라서 말조차 제대로 잇지 못하고 있다.

“정말 보고 싶었는데 연락 한 통 안 해?”

“나, 난…….”

아걸이 말을 더듬거렸다.

백 마디 말을 하고 싶을 것이다. 가슴 속 말을 모두 토해내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말도 할 수 없다. 일홀도에 목숨을 건 사내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아걸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보자마자 내가 너무 다그쳤나 보다. 벌써 말문이 막히기 시작했네. 어떡해? 우리 오빠.”

“휴우!”

아걸이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하지 마. 오늘은 바가지 긁으려고 온 거 아냐. 바보 같은 오빠지만 그래도 다 나았으니까, 몸보신 좀 시켜주려고 왔어. 닭 고아 줄 테니까 먹어.”

“닭?”

몽설이 갑자기 아걸의 가슴을 확 풀어헤쳤다. 그리고 맨살을 들여다봤다.

“화상 자국은 별로 없네?”

“응. 생각보다는.”

“나는 얼룩소처럼 온몸이 얼룩덜룩 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얼룩소? 그건 좀 심한데?”

“안 심해. 절대. 또다시 불에 그을리기만 해봐. 그때는 정말 그냥 안 둬!”

몽설이 쌍심지를 돋우며 말했다.

“이것아! 낭군을 보니까 이 할애비는 눈에 보이지도 않냐!”

아삼이 두 사람 사이에 툭 끼어들었다.

“할아버지는! 우리 지금 얼마 만에 만난 건 줄 알아요! 이럴 땐 좀 봐주지!”

“엥? 그래, 그래! 알았다. 눈꼴시어도 봐줘야지 어떡해. 죽었던 서방이 살아 돌아왔다는데. 큭큭!”

“호호호!”

몽설이 따라 웃었다.

오랜만에 아무런 걱정이 없는 밝은 웃음이 퍼져나갔다.

몽설은 정말로 밥을 했다.

화로 위에 솥을 올리고 장작을 때서 밥을 지었다. 다른 한쪽에는 큰 솥을 걸어 놓고 고기와 채소를 튀겼다.

몽설은 열 명분의 식사를 뚝딱 만들어 냈다.

“야! 이거 이 밥 먹고 탈 안 나려나?”

흑후가 말했다.

“왜?”

쌍겸이 무슨 뜻이냐는 듯 물었다.

“이거 취화원 원주님이 해 주신 밥이잖아. 혹시 이거 먹으면 취화원 살수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거 아니야? 원주를 밥 짓는 데 부려 먹었다고.”

“엇! 어떻게 하지? 나는 벌써 한술 먹었는데.”

쌍겸이 급히 수저를 내려놓았다.

“호호호! 봐 드릴 테니까 드세요. 대신 남기시는 분은…… 알죠? 가만! 이럴 때는 누굴 보내지? 소호 언니는 밧줄을 잘 사용하니까 분명히 목 졸라 죽일 거고, 규화 언니는 도리깨를 잘 쓰니까 때려죽일 거고. 어떻게 죽고 싶으세요?”

“엥?”

“밥 남기시는 분은 죽는 방법도 미리 말해 놓기. 알았죠?”

“에에엥?”

은거 무인들을 서로를 쳐다봤다. 아니, 그들의 눈길은 곧 흑후에게 향했다.

“거참 괜히 이상한 말을 해서는.”

“그러게. 얌전히 주는 밥이나 먹지. 왜 흰소리를 해서는 분위기 싸하게 만들어!”

“아! 이거 정말 못 먹겠다. 말 한마디 했다고 이렇게 눈총들을 줘서야 어디.”

흑후가 수저를 내려놓으려고 했다.

몽설이 흑후를 지긋이 쳐다보며 말했다.

“말했죠. 밥 남기면 뭐도 같이 남겨 놓기?”

“죽는 방법. 킥킥!”

쌍겸이 흑후를 놀리는 듯 몽설의 말을 이었다.

“먹는다! 먹어! 먹어! 안 남기면 될 거 아니야!”

우걱! 우걱!

흑후가 급히 밥을 먹기 시작했다.

몽설은 꽃을 쓰다듬으면서 걸었다. 그러다가 나비를 발견하고는 살금살금 다가갔다.

삿!

그녀가 꽃 위에 앉아 있는 나비를 살짝 잡아챘다.

“얘는 멀리서 보면 예쁜데 가까이에서 보면 좀 무서워.”

“그걸 왜 잡아?”

“그냥.”

“놔줘. 불쌍해.”

“놔줄 거야! 내가 언제 죽이기라도 한데? 오빠는 참!”

아걸은 급히 입을 다물었다.

“어! 얘 좀 봐. 얘는 피지도 못하고 시드네.”

몽설이 나비를 놓아주고, 이번에는 큰 꽃 밑에 깔린 작은 꽃을 어루만졌다.

“오빠, 이 꽃 이름이 뭔지 알아?”

“모르겠는데.”

“홀아비바람꽃. 바람이 불 때 하늘하늘 흔들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야.”

“그런 것도 알아?”

“그럼 내가 모르는 게 있는 줄 알아? 오빠는 부인 하나는 잘 얻은 줄 알아.”

“그런 말을 그렇게 본인 입으로 직접 한다고?”

“오빠가 알아주지 않으니까 직접 해야지?”

몽설이 밝게 웃었다.

두 사람은 폭포로 갔다.

어느 계곡에서나 볼 수 있는 작은 폭포다. 폭포 밑에 물이 고여있는데, 상당히 넓고 시원해 보인다.

“오빠. 고기 잡아줘.”

“고기? 갑자기?”

“응. 저 밑에 보이잖아.”

“저거 잡으려면 물속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싫어?”

“아니. 잡아줄게.”

아걸이 옷을 벗고 물속으로 첨벙 뛰어들었다.

그 사이에 몽설은 작은 나뭇가지를 모아서 불을 지폈다.

아걸이 물살을 헤치며 머리를 내밀었다. 그리고 오른손을 위로 번쩍 쳐들었다.

아걸의 손에는 매우 큼지막한 숭어가 들려 있었다.

“정말 잡았네?”

“그럼! 내가 누군데. 너 남편 하나는 잘 얻은 줄 알아. 나 같은 남편이 어디 있냐? 평생 굶어 죽을 일은 없을 거야. 뭐라도 잡아서 먹여 줄게.”

“숭어 한 마리 잡았다고 너무 생색내는 거 아냐?”

“부인이 알아주지 않으니 내 입으로 말해야지, 어떡해?”

“그거 내 말이야. 써먹지 마.”

“하하하!”

아걸은 기분 좋게 웃었다.

몽설은 아걸이 잡은 숭어를 나뭇가지에 끼어서 모닥불에 구웠다.

“그런데 오늘 왜 이래?”

“뭐가?”

“나비도 보고, 꽃도 보고. 고기도 잡아달라고 하고.”

“이런 거 한번 해 보고 싶었어.”

“그래?”

“그럼. 나도 여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우리 이렇게 놀면서 지낸 적이 한 번도 없더라고.”

“한 번도 없었나?”

“없었어. 정말 마음 편하게 꽃도 보고, 폭포도 보고, 물장난도 치고. 어떻게 지금까지 이런 일이 한 번도 없었지? 너무 바빴나? 뭐 하느라고 바빴을까?”

“음!”

“심각해지라고 한 말, 아냐. 자! 먹어봐. 다 익었어.”

몽설이 숭어를 내밀었다.

아걸은 살을 떼어서 몽설에게 건네주었다.

몽설이 손으로 받지 않고 입을 벌렸다. 아걸은 몽설이 입에 살을 넣어주었다.

몽설이 환하게 웃었다.

몽설은 아걸이 누워있던 동굴로 들어와서 침상에 몸을 눕혔다.

“오빠.”

“응.”

“오늘 우리 아기 만들자.”

“뭐!”

아걸이 놀라서 몽설을 빤히 쳐다봤다.

“아기 가질래.”

“그렇게 불안해?”

“아니.”

“그런데 왜?”

“오빠 죽지 말라고.”

아걸은 입을 꾹 다물고 몽설을 쳐다봤다. 그러다가 머리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불안해하지 않아도 돼. 나 누구한테도 안 져.”

몽설도 아걸을 꼭 껴안았다.

“그래서 아기 가지려고. 내가 아기 가지면 오빠는 죽고 싶어도 못 죽잖아. 오빠는 그런 남자잖아. 나와 우리 아기가 눈에 밟혀서 죽기나 하겠어? 지옥에서도 살아올 거잖아. 그러니까 아기 갖자.”

아걸은 몽설을 힘주어 안았다.

몽설의 몸에서 향긋한 내음이 풍겼다.

그녀의 살 내음.

아걸은 고개를 숙여서 몽설의 입술을 탐했다.

* * *

“호호호호!”

몽설은 이른 아침부터 은거 무인들과 재미난 얘기를 하면서 웃고 있었다.

아걸이 나가자 몽설이 손을 들어 반겼다.

“오빠! 어서 와. 마침 딱 맞춰 왔네. 앉아. 밥이 다 됐어.”

몽설은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서 밥을 지었다. 어제 말한 대로, 어디서 구해왔는지 닭도 열 마리나 삶아놨다. 채소도 푸짐하고…… 그야말로 진수성찬이다.

야외에서 이만한 음식을 먹는다는 게 기적처럼 보인다.

몽설은 취화원 식구들을 동원하지 않았다. 그녀 혼자서 이 많은 걸 만들었다.

“정말 잘 삶았네. 아주 딱 좋게 익었어.”

쌍겸이 닭고기를 뜯어 먹으며 말했다.

“그냥 물 넣고 삶은 것뿐인데요?”

“아냐. 똑같이 만들어도 손맛이라는 게 있어. 원주 손맛이 아주 좋아. 채소도 그렇고, 아! 정말 맛있어.”

쌍검이 찬탄을 늘어놓으며 말했다.

할배가 반철도를 들고 왔다.

“날 좀 갈아놨다. 제발 잘 써.”

아삼은 반철도를 암기 던지듯이 홱 던졌다.

파라라랑!

반철도가 아걸을 찍어버릴 듯이 날아갔다.

“할배는 마음이 이렇게 고약하니까 좋은 일 하고도 욕먹는 거라니까. 줄 바에는 얌전히 주지. 아휴!”

아걸은 날아오는 반철도를 가볍게 잡았다. 정확하게 반철도의 칼등을 손으로 잡아챘다.

아삼은 진기를 사용해서 칼을 던졌다. 물론 아삼의 무공은 아걸보다 한참 못 미친다. 하지만 반철도의 날카로움이 있다. 어린애가 던져도 위협적인 게 칼이다.

아삼이 전력을 다해서 던지면 그 위력은 배가 된다.

그런 칼을 장난처럼 잡았다.

아삼이 몽설을 보며 히죽 웃었다.

아걸의 무공을 봤냐는 뜻이다. 하지만 몽설은 이런 모습을 보고도 웃지 않았다. 담담한 표정이었다.

“날이 시퍼러네. 이건 뭐 스치기만 해도 살이 쩍쩍 갈라지겠는데?”

“또 이만 빼먹었단 봐라! 너 죽는다!”

“할배가 이렇게 잘 만들어 주는데, 막 쓰지. 이빨 빼먹으면 또 다듬어 줄 거잖아. 후후! 마음껏 쓸게.”

“저놈 저거 말하는 거 봐. 저놈이 저래. 저러니 기분 좋게 줄 수 있겠어!”

아삼이 투덜거렸다.

몽설은 아걸의 옷을 입혀 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잘 다녀와.”

“어디 있을 거야?”

“나야 호황위에 있지. 거기서 열심히 일하고 있을 테니까 편하게 다녀와.”

몽설이 아걸의 귀에 입을 갖다 대며 속삭였다.

“우리 정말 아이 생겼으면 좋겠다.”

아걸은 민망해서 히죽 웃었다.

몽설이 눈웃음을 애교 있게 흘겼다.

“갔다 올게.”

“다녀와. 멀리 안 나가. 난 그냥 여기서 배웅할게.”

“그래. 걱정하지 말고 편히 있어.”

아걸이 몽설의 손을 꽉 쥔 후, 밖으로 나갔다.

아걸이 멀어져 간다. 점점 멀어져 간다.

은거 무인들과 함께 움직이는데 점점…… 점점…… 까마득한 점이 되어간다.

몽설은 한없이 지켜보다가 털썩 주저앉았다.

아삼이 놀라서 급히 다가와 몽설을 부축했다.

“할아버지.”

아삼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몽설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이겨 낼 거야. 아까 저놈 무공 봤지? 저놈 이제 정말 강해졌어. 마음 놓고 보내줘도 돼.”

“안 돼요. 가면 안 돼요. 으흑!”

몽설은 기어이 참았던 울음을 터트렸다.

“휴우!”

아삼은 한숨만 쉬었다.

아삼은 탕산 비무의 의미를 알고 있다. 은거 무인도 안다. 탕산 비무가 어떤 것인지 모르는 사람은 오직 한 명, 아걸뿐이다.

아걸도 예전 같았으면은 짐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동굴 수련을 마치고 난 후, 아걸은 멍청이가 된 듯하다. 아예 세상사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일부러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본인이 그러니 옆에서 말해주기도 민망하다.

“허도기가…… 끝까지 사람을 괴롭히는구나. 정말 허도기하고는 같은 하늘에서 살 수 없는…… 악연이야. 악연.”

아삼이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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