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九十章 백살도축(百殺禱祝) (3)
송가검문주가 말한 대로 공고문이 세워졌다.
오월 보름, 탕산에서 송가검문주와 명부판관이 비무를 벌인다는 내용이다.
결전 비무다. 명부판관이든 송가검문주든 둘 중 한 명은 무조건 죽는다.
또한, 이번 비무는 명부판관이 해 오던 징벌과는 전혀 무관하다. 그러한 내용과는 상관없이 송가검문주의 무공을 눌러보고 싶어서 도전해온 바, 응한다는 내용이다.
도전자와 응한 자가 반대로 바뀌었다.
더욱이 비무를 요청한다는 문구에 번청(煩請)이라는 말을 썼다. ‘귀찮게 청했다’라는 뜻이다.
대체로 그런 내용의 공고문이다.
공고문에는 송가검문주와 명부판관만 명시되어있다. 아걸이나 일홀도는 언급하지도 않았다. 저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명부판관이라는 뜻이다.
“뭐야? 명부판관도 명예를 탐하는 거야?”
“송가검문주를 조르고 졸라서 간신이 얻어낸 비무래. 그 짓을 하려고 한 달을 쉰 거야.”
“난 또 명부판관이 정의를 구현하는 협객인 줄 알았네. 송가검문주에게 비무를 요청할 때, 그간의 업적을 줄줄이 늘어놨다며? 자기 이런 사람이라고.”
“애초에 정의고 뭐고 관심도 없었던 거고. 그게 무명을 얻는 방법이었던 거지. 무명 하나는 잘 얻었잖아? 생각해 보면 별로 큰 싸움도 하지 않았잖아?”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이 새끼들이 정말!”
쌍검이 발작하려고 했다. 하지만 아걸에게 팔목이 잡혔다.
“이 사람들에게 화풀이하시려고요?”
“그럼 너는 이런 소리를 듣고도 괜찮냐? 넌 성인이라서 괜찮을지 모르겠는데, 난 소인배라서 부아가 끓는다. 놔! 저 새끼들 아가리를 찢어버릴 테니까.”
“야천입니다.”
“뭐?”
“야천에서 소문을 낸 거라고요. 이 사람들 잡아서 뒤를 캐보면 야천이 나올 겁니다.”
야천이라는 말에 은거 무인들이 퍼뜩 사방을 쏘아봤다.
소문을 내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건장하다. 눈매도 날카롭다. 확실히 야천 파락호들이다. 그들이 일부러 사람들 속에 섞여서 소문을 내고 있다.
명부판관을 힐난한다.
악인을 징벌한 것이 무명을 얻으려는 방편이었다고 꼬드긴다.
이제 어느 정도 무명을 얻었다. 그러니 귀찮은 짓은 하지 않는다. 지금부터는 몇 가지 일을 발판으로 해서 본격적으로 명예와 권력을 탐하는 행보를 할 것이다.
소문은 무척 지저분했다.
아니, 아직은 지저분하지 않다. 이 정도가 끝이 아니다. 이 소문은 시간이 지날수록 다른 쪽으로 변질할 것이다. 처음부터 나쁜 쪽으로 말하면 씨알도 안 먹힌다. 한지에 먹물 스며들듯이 조금씩 스며들게 만들어야 한다.
조금씩 목물을 흡수하다 보면 곧 시커먼 먹지가 된다.
“가요. 신경 쓰지 말고. 이건 몽설이 알아서 처리해 줄 거예요.”
아걸이 걸음을 옮겼다.
* * *
두두두두! 두두두!
몽설과 취운이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관도를 치달렸다.
호황위로 돌아가는 중이다.
호황위라는 자리는 한시도 비울 수 없는데, 근위대장에게 경호를 부탁하고 며칠 시간을 냈다.
“탕산은 벌써 출입 통제가 시작됐습니다.”
취운이 말했다.
몽설은 침묵했다.
그럴 줄 알았다. 거기는 정말로 가면 안 되는 곳이다. 아걸이 누군가? 허도기와 싸운 무인이다. 허도기 손에서 네 번이나 살아남았다. 소축십검을 무너트리기도 했다.
그만한 무인을 불렀는데 준비를 하지 않았겠나.
“통제는 어디서 시작했어요?”
“보는 눈이 있잖아요. 다른 문파는 간섭하지 않고 송가검문 무인들이 나섰어요.”
공고문에는 아걸 쪽에서 여덟 명, 송가검문에서 여덟 명, 도합 열여섯 명만 절곡에 들어가는 것으로 합의했다. 여덟 명이라는 인원은 은거 무인과 흑후를 고려한 숫자인 것 같다.
사실, 이 숫자는 저들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이미 들어갈 사람은 모두 들어갔을 것이다.
“우리 아이들은?”
“모두 물렸습니다. 더 들어갈 수가 없어서.”
“잘했어요.”
몽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탕산으로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은 펼쳐진 절진이 무엇인지 알아내지 못했다는 뜻이다.
일단은 호황위로 돌아가서 차분히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취운이 먼저 말했다.
“절진 형태는 아직 알아내지 못했어요. 지금 광안조가 부지런히 머리를 싸매고 있는데, 탕산이 워낙 넓어서…… 이십사 문주와 문도 천이백 명이 들어간다고 해도, 탕산이 천이백 정도는 흔적 없이 감춰버릴 거라는 판단입니다.”
“그럴 거예요.”
“이거 장난이 아니에요. 휴우!”
취운이 한숨을 내쉬었다.
천이백 명이 몰려들어 가는데, 싸우러 가는 게 아니다. 아걸을 잡기 위해서 함정을 판다. 그들 모두가 흩어져서 탕산 오십 리 넓은 땅을 지옥으로 만든다.
몽설은 미간을 찡그렸다.
정녕 해줄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나.
“그리고 또 하나, 긴히 아셔야 할 게 있습니다.”
두두두두! 두두두!
몽설은 말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관도에 먼지가 뿌옇게 피어나는 것을 개의치 않고 부지런히 달렸다.
“요 며칠 사이로 전염청(錢艷清) 태부(太傅), 손광춘(孫光春) 종령(宗令), 맹국조(孟國潮) 도어사(都御史). 세 분이 돌아가셨습니다. 잠자듯이 조용히.”
“갑자기?”
“네.”
“잠자듯이 조용히 죽었다니 자흔(刺痕)은 발견되지 않을 것 같고. 지병은 어때요?”
“나이가 있으니 지병 한두 개씩은 가지고 있죠. 하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세 사람 모두 대장군님 사람이죠?”
“네. 근위대장이 확인해 주었습니다.”
“언니는 암살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분명히 암살입니다. 태부와 종령은 정일품, 도어사는 정이품 고위관원입니다. 이 세 명이 거의 동시에 죽었다는 게…….”
“짐작되는 흉수는요?”
“어느 쪽인지 솜씨가 기가 막혀서…… 저희도 알아볼 수 없는 솜씨입니다. 영락없이 자연사에요. 잠자다가 조용히 죽었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습니다.”
“죽긴 죽었는데 자연사네요?”
“자연사로 세 명이 한꺼번에 죽을 리는 없잖아요. 분명히 누군가 자연사로 위장해서 죽인 거예요.”
“외압을 가한 흔적이 없고, 독 같은 것에 당하지도 않았고…… 굉장히 은밀한 살법. 흠! 언니, 도착하는 즉시 동영(東瀛) 인술(仁術)에 밝은 사람을 물색해 봐주세요.”
“동영 인술이라고 하셨어요?”
“허도기가 세외 팔국을 돌고 있어요. 그중의 하나가 동영이잖아요. 동영에는 인술이 발달했으니까 혹시 모르죠. 지금 사람이 들어와 있는지도.”
“휴우! 이거 갈수록 태산이네요.”
‘갈수록 태산…….’
몽설은 답답함을 느꼈다.
말을 타고 달릴 때까지만 해도 신경은 온통 탕산에 가 있었다. 어떻게 해야 아걸을 탕산에서 빼낼지 그 부분만 염두에 두었다. 그런데 고관 세 사람이 죽었다는 말을 듣자…… 답답해진다.
중원은 온통 탕산에 신경을 집중시키고 있다.
그 사이에 고관 세 명이 암살되었다. 동영 인자의 솜씨로 추측된다. 지금은 단지 느낌뿐이지만 확실할 것이다. 그곳 인자들만이 자연사를 아름답게 만들어 낸다.
성동격서(聲東擊西)!
탕산으로 주의를 분산시키고, 정작 관원을 친다.
“끼럇!”
몽설을 힘차게 말을 재촉했다.
이 죽음들…… 허도기가 일으킨 죽음이 분명하다. 빨리 가서 호황위를 지켜야 한다.
‘오빠…… 어쩌면 나…… 정말 오빠에게 미안해질 것 같아. 어쩌면 좋지?’
마음이 불길하다. 어쩌면 탕산에 신경을 못 쓸지도 모르겠다.
* * *
“안녕하셨습니까?”
적랑대주 임지정이 아삼에게 포권을 취했다.
“대주가 웬일? 오늘 서쪽에서 해가 떴나?”
아삼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적랑대주가 직접 자신을 만나러 왔다. 늘 자중을 강조하던 신중파 대주가 백주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무엇을 말하나? 아주 큰 일이 벌어졌다는 거다.
“차 한잔 드시고 가시겠습니까?”
임지정이 나무 그늘 밑을 가리켰다.
그늘 밑에는 돗자리가 깔려 있고, 작은 화로에 주전자가 올려져 있었다.
주전자 물이 벌써 팔팔 끓고 있다.
임지정은 아삼이 이 길로 올 줄 알고 있었다.
“그러지.”
아삼이 나무 그늘로 가서 털썩 주저앉았다.
“안 좋은 소문이 번지고 있습니다.”
임지정이 찻잔에 차를 또로록 따르며 말했다.
“명부판관이 무명을 얻기 위해서 악인을 벌했다는 것? 그것 같으면 나도 오면서 들었어. 한심한 놈들 같으니.”
“아니요.”
임지정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뭔데?”
“황상이 적통이 아니다. 사생아다.”
“뭐, 뭣! 뭐라고! 어, 어떤 놈이! 그런 소문까지 나돌고 있다는 거야? 지금?”
아삼은 찻물을 뱉어낼 정도로 놀랐다.
“어떤 놈이 그런 소문을…….”
황상을 건드릴 사람은 허도기밖에 없다. 이제 본격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귀비가 사가에서 외간 남자의 씨를 잉태한 후, 황상께 보내졌다는 게 소문의 내용입니다. 즉, 황상은 황제의 피를 이어받지 않았다는 거죠.”
“그런 소문이 나돈다고?”
“네.”
“어떤 새끼들이야!”
임지정이 씩 웃었다.
“짐작하시잖아요. 야천.”
“음! 그럼 야천은 아직……?”
“네. 야천은 자립하지 못했습니다. 아걸이 그렇게 떠나는 게 아니었어요. 확실하게 야천을 다잡아놓고 가야 했는데…… 괜히 어설프게 벌집만 건드렸어요.”
“야천을 장악한 놈들은 역시 마유인가?”
“네. 지금 야천은 마유에게 완전히 장악된 상태입니다.”
“아!”
아삼은 탄식했다.
아삼이 왜 마유 마인들을 모르겠다. 그들의 무공은 인간의 것이 아니다. 나병과 수포가 전신에 번지는 극한의 고통과 절망을 이겨내면서 휘두른 검이다.
“소문을 막을 방법은 없겠지?”
“네. 야천이 본격적으로 움직인 이상, 소문을 막을 방법은 없습니다. 그들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성검문과 이십사 위문인데, 아시다시피 탕산에 몰려가 있으니.”
“으음!”
“이런 느낌 안 드세요? 무린 전체가 적으로 돌아선 느낌. 문득 뒤돌아보니 온 세상이 적인 느낌.”
“으으음!”
아삼은 신음을 흘리며 뒷목을 잡았다.
이럴 때 구파일방이 나서줘야 한다. 야천이 시끄러우면 정도문파의 깃발로 지그시 눌러줄 필요가 있다. 항상 그래왔다. 그래서 야천이 어느 한계 이상은 나서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구파일방이 조용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이미 구파일방의 주축이 되는 사람들, 허도기에게 대항해서 일어설만한 사람들은 모두 암살되었다.
옛날부터 사이가 좋지 않아서, 단지 눈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제거한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초가평을 시켜서 그들을 죽인 것은 지금을 위해서였다.
그들의 죽음이 지금을 있게 만든 디딤돌이었다.
허도기의 계획은 오래전부터 치밀하고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왜 저 짓을 하나?’ 이해하지 못해도 나중에 보면 지금처럼 디딤돌이 되어 있다.
수가 매우 깊다.
“무림에서 우리와 호흡을 맞출 수 있는 사람은 없나?”
임지정이 고개를 내둘렀다.
“대주…… 대주는 왜 왔는데?”
아삼의 말투가 대주를 대하는 말투에서 옛날 대주와 수하의 말투로 바뀌었다.
“결단을 내려야겠는데 혼자 결정할 수가 없어서요.”
임지정이 차분하게 말했다.
적랑대는 지금 같은 경우, 잠적을 택해왔다.
소리 없이 사라졌다가 세상이 조용해지면 다시 고개를 내민다. 세상이 온통 적으로 보일 때는 두말하지 않고 숨는다. 그것이 전력을 보존하는 최선책이다.
“훗!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나서고 싶은 모양인 게군.”
“언제까지 숨어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나서면 적랑대는 몰살당해. 야천에 나섰던 대원들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눈으로 봤으면서.”
“그렇다고 마냥 숨어만 있는 것도 능사는 아니죠.”
“여보시게. 마음대로 하시게. 어차피 적랑대는 이제 대주의 것이 아닌가.”
“대주님. 대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나라면 숨었지. 그러니 마음대로 하라는 것이야. 나는 숨었지만 대주는 다른 사람 아닌가.”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임지정이 웃었다.
“고약한 사람 알면서 왜 물어봐?”
“글쎄요? 약 올리러? 대주님이 못 하신 걸 저는 한다. 뭐 이런 정도 아닐까요?”
“약 잘못 올리다가 골로 가는 수 있어. 조심해.”
“네. 충분히 조심하겠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나설 결정은 왜 한 건데?”
“아걸이 탕산으로 뛰어들었잖아요. 저렇게도 달려드는데, 거기 비하면 우린 진퇴의 폭도 넓고. 하하하!”
임지정이 웃었다.
임지정은 아걸을 보고 용기를 얻은 것이다.
그럴 줄 알았다. 몇몇 사람이 아걸을 보고 아주 큰 자극을 받을 것인데…… 적랑대주도 그런 사람이었다. 늘 조용하고 차분한 사람이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