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九十一章 무인결사(武人決死) (1)
“자, 이 정도면 될까? 촌구석이라서 영 재료를 구할 수 있어야지. 그래도 최대한 장만한다고는 했는데.”
흑후가 겸연쩍은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표정은 ‘자, 어때! 훌륭하지?’ 하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그럴 만도 하다. 객잔 안 마당은 온갖 고기와 요리로 가득했다.
“뭐야? 뭘 이렇게 많이 차렸어?”
“와! 진수성찬이네. 하하!”
황열과 장태전이 입을 쩍 벌리면서 감탄했다.
저녁은 매우 푸짐했다. 닭고기, 오리고기, 소고기, 돼지고기, 양고기…… 온갖 고기가 가득히 펼쳐졌다. 삼사십 명 정도는 둘러앉아서 먹어도 충분할 양이다.
“우리 내일 죽는 날이야? 이건 뭐 마지막으로 한 상 거하게 차려 주는 느낌인데?”
쌍겸이 음식들을 쓱 둘러보며 말했다.
“내일 죽는 건 맞지. 그건 그거고…… 먹어! 먹어!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아. 기왕이면 때깔 좋게 꾸며서 염라대왕인지 뭔지 하는 놈을 만나야 할 거 아냐. 실컷 먹자고.”
한항이 닭 다리를 쭉 찢어서 우걱우걱 씹어 먹었다.
“그런데…… 다 좋은데, 뭐가 빠진 것 같지 않아? 이거 고기만 뜯고 있자니 퍽퍽해서.”
“키킥! 내가 술을 빼먹었을까 봐? 이봐! 가져와!”
흑후가 말하자 객잔 주인이 술독 열 개를 날라왔다.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항아리 술이다.
“이거 값싼 화주일 리는 없고…… 그렇다고 좋은 술이라기에는 용기가 너무 하찮고…….”
한항이 공기 중에 피지는 술 냄새를 맡으며 중얼거렸다.
“이 객잔 주인이 술을 담그더라고. 좋은 술을 사 오려고 했는데, 이 술이 만만치 않아. 마셔 봐. 향도 좋고, 목 넘김도 좋고, 뱃속에 불도 아주 잘 질러.”
흑후가 술 단지는 은거 무인들 앞에 놓으며 말했다.
흑후의 말에 모두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술독을 열었다.
“와!”
한항이 제일 먼저 감탄을 흘렸다.
술독을 개봉하자마자 향긋한 주향이 싸하게 번져 나왔다.
“이게 꽤 독해. 술깨나 마신다는 사람들도 작은 잔에 홀짝홀짝 마시는 술이라니까 알아서들 마셔.”
흑후가 아걸 앞에도 술독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남만족과 싸울 때 기억나지? 하하! 난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오금이 저려.”
“정말 죽는 줄 알았는데…… 용케 살아남았어. 하하!”
은거 무인들이 술과 고기를 즐기면서 옛일을 회상했다.
내일부터 벌어질 싸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입에 올리기에는 너무 진한 싸움이다. 살기를 바랄 수 없는 지옥 불길 속에서 싸워야 한다.
이십사 위문 문주가 탕산에 모여 있다.
이십사 위문이 어떤 문파인가. 당금 중원 무림을 쥐락펴락하는 절대 문파다.
그들이 모여 있다는 것은 중원의 모든 힘이 모여 있다는 말과도 같다. 당금 중원 무림을 지배하는 최강 문파들이 오직 한 사람만을 죽이기 위해서 힘을 합쳤다.
이것은 절대 가벼운 일이 아니다.
술을 마시면서 입에 담을 말이 아니다. 아니, 독주를 마시고 있는데도 정신이 또렷해진다.
내일 일은 말하기 거북하니 과거에 있었던 일만 들먹인다.
주흥은 초저녁에 끝났다.
유시초에 시작해서 유시정에 끝났으니까…… 반 시진밖에 걸리지 않았다.
술독에 들어있는 술은 거의 남았다. 많이 마신 사람이 서너 잔 정도 마셨다. 지당검이나 나통 같은 경우에는 술 한 잔도 입에 대보지 못했다.
하지만 은거 무인 여섯 명은 누가 업혀 가도 모를 정도로 잠에 곯아떨어졌다.
멀쩡한 사람은 아걸과 흑후뿐이다.
“후우! 정말 꼭 이렇게 해야 하나?”
흑후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일홀도에 걸어온 싸움이니 나 혼자 가는 게 맞고. 어차피 난잡한 싸움이 될 거라면…… 혼자 움직이는 게 편하니까. 같이 가도 흩어질 게 뻔하고.”
“승산 없다는 말을 참 재미있게 말하네.”
“승산…… 후후!”
“왜 웃어?”
“그러고 보니 승산이라는 말을 생각하지 않고 살아온 것 같아서. 내가 하는 싸움은 늘 승산 없는 싸움뿐이었으니까. 이번에도 그런 싸움 중 하나일 뿐이고.”
“아니지. 이번 싸움은 어떤 싸움보다도 승산이 없지. 저 산에 들어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솔직히 죽을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크잖아?”
“아니.”
아걸이 고개를 저었다.
“난 이번 싸움이…… 허도기와 싸울 때보다는 쉽다고 생각하는데? 허도기하고는…… 어휴!”
아걸이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쩝! 하긴 그렇지.”
“자! 그럼!”
아걸이 반철도를 들고 일어섰다.
“이 사람들, 앞으로 십여 일은 깨어나지 못할 텐데. 오늘 밤만이라도 푹 쉬고 내일 가는 게…….”
“밤공기가 좋으니까. 새소리를 들으면서 쉬엄쉬엄 가는 것도 좋아. 아니, 이게 내게 맞아.”
아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흑후는 음식이 천일몽(千日夢)을 뿌렸다.
아주 강력한 미약(迷藥)이다. 복용하면 천 일 동안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다는 수면제다. 다만 천일이라는 말은 과장된 것이고…… 대략 십여 일 정도는 혼수상태로 놔둘 수 있다.
은거 무인들은 전보영에서도 미약에 중독된 적이 있다. 그리고 뇌옥에 갇혀서 싸움에 가담하지 못했다.
이번에도 같은 상황이다.
뇌옥 대신 객잔에 눕혀졌다는 것이 다를 뿐, 싸움에 전혀 간여하지 못한다.
아걸은 쓰러져 있는 은거 무인들을 일일이 쳐다본 후, 마지막으로 흑후를 보며 씩 웃었다.
흑후는 아걸이 사라질 때까지 멀거니 뒷모습을 지켜봤다.
아걸이 어둠 속에 완전히 묻혔다. 달빛이 밝지만, 아걸의 모습을 오랫동안 잡아주지는 못했다.
“나와라.”
흑후가 조용히 말했다.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객잔 안에 있던 흑화방 수하들이 재빨리 달려 나와서 은거 무인들의 입에 단약을 밀어 넣었다.
그래도 은거 무인들은 꼼짝하지 못했다.
해약을 복용시키기는 했지만, 천일몽이 워낙 강력해서 쉽게 해독되지 않았다.
“해약을 복용시키기는 했습니다만, 두 시진 정도는 움직이시지 못할 겁니다. 몸은 이상 없습니다.”
흑화방 수하 중에는 의원도 있다.
의원이 은거 무인들을 진맥한 후 보고했다.
흑후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은거 무인들은 내공이 심후하니 한 시진 정도면 정신을 차릴 것이다. 하지만 급히 서둘러서는 안 된다. 의원이 말한 대로 두 시진 정도는 푹 쉬어야 한다.
자칫하면 싸우는 도중에 천일몽이 영향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 싸우는 도중에 잠에 빠지지는 않겠지만, 내공을 흩트려 놓는 산공산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어휴! 머리야. 아걸은? 갔어?”
장태전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물었다.
정신이 들기는 했지만, 아직은 비몽사몽 상태다. 정신이 온전한 듯하면서도 온전하지 않다.
“갔지.”
흑후가 어둠을 쳐다보며 말했다.
“훗! 어떻게 한 번 쓴 수법을 똑같이 써. 전보영에서 당해 줬으면 됐지, 또 당할 줄 알았나.”
장태전이 툴툴 웃었다.
“흐음!”
흑후는 가는 신음을 토해냈다.
사실, 흑후는 고민이 많았다. 아걸이 천일몽을 써야겠다고 말할 때, 그 생각도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산에 들어가는 사람은 모두 죽는다.
은거 무인들의 무공이 상당하지만, 산에 들어가면 목숨을 장담하지 못한다.
원래 성검문은 소문파 서른여섯 개를 거느리고 있었다.
상당히 많은 소문파가 성검문 분타 역할을 했다. 눈과 귀의 역할만 한 것이 아니다. 손발이 되어서 강호 무림을 질타했다. 실질적으로 성검문의 지시를 받았다.
하지만 공부 허도기가 황궁에 눈독을 들이면서 삼십육 문파의 입지가 모호해졌다.
소축십검 중 절반이 허도기를 따라서 군부를 떠돌았다. 성검문은 더는 일을 벌이지 않았다. 무림도 조용했다. 감히 성검문에 도전하는 문파도 없었다.
갑자기 삼십육 문파의 소용 가치가 사라졌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겉보기일 뿐…… 삼십육 문파는 암중으로 부침을 계속했다.
지난 십 년 동안, 그중 열두 개 문파가 도태되었다.
남은 스물네 개의 문파는 소문파에서 대문파로 변모했다. 소문파 서른여섯 개에서 대문파 스물네 개로 재편된 것이다.
도태된 열두 문파는 아직도 존재한다. 상당히 위세가 쪼그라들어서 무공을 배우겠다고 찾아오는 사람도 없는…… 문파라고 할 수도 없는 상태로 간신히 명맥만 이어나가는 형편이다.
스물네 개의 문파는 한 지역의 패주가 되었다.
야천처럼 어둠을 지배하는 패주가 아니다. 명실공히 밤낮을 모두 지배하는 패주다.
그들이 한자리에 모였다는 것은 중원 무림이 한자리에 모인 것이나 진배없다.
아걸을 죽이려는 자들의 실체가 이렇다.
이러니…… 은거 무인들을 떼어 놓고 홀로 싸우겠다는 아걸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 많은 힘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농사짓는 농부의 도움조차도 간절히 필요하다.
“두세 시진쯤 푹 쉬는 게 좋아. 천일몽이 꽤 독하거든.”
흑후가 그들의 머리를 눕히며 말했다.
“천일몽 말고 다른 걸 사용할 수는 없었나? 음! 이건 정말 독하네. 머리가 띵해.”
“다른 걸 사용하면 저놈을 속일 수 있을 것 같아? 저놈이 보통 여우여야 말이지.”
“하기는…….”
흑후가 아걸의 요구대로 천일몽을 쓰지 않았다면 아걸은 다른 방도를 취했을 것이다.
어떤 방법을 취하든 오늘 아걸은 밤길을 혼자 걷는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아걸이 원하는 대로 해준다. 아걸이 혼자 떠나게 해 준다. 그래야 곧바로 뒤쫓을 수 있다. 물론 눈치채지 못하게 멀리 떨어져서 따라가야 하겠지만.
급하게 서둘 필요는 없다.
아걸은 느린 걸음으로 산으로 들어섰다. 대략 두세 시진 정도 거리를 벌려놔도 실제로 쫓기 시작하면 한 시진 거리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더욱이 아걸은 산속 어딘가에서 걸음을 멈출 것이다.
아걸은 밤을 새워서 산을 질주한다거나 돌파할 생각이 없다. 약속대로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서 송가검문주와 만나서 공명정대한 대결을 벌일 생각이다.
약속대로만 이루어진다면 이런 걱정을 할 필요도 없다. 저쪽은 분명히 약속을 깬다.
하지만 이것은 엄연히 저쪽 사정이고…… 아걸은 당당하게 싸울 생각이니 서둘지 않는다. 대결시간까지는 시간이 충분하니 천천히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물론 아걸도 저쪽이 어떤 식으로 나올지 예상한다. 그가 흑후에게 천일몽을 요구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은거 무인들은 잠시 옭아둘 생각이 아니다. 아예 이 싸움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개입시키지 않을 생각이다.
“이거 되게 어지러운데. 원래 이래?”
“원래 그런다고 했잖아.”
“좀 빨리 깨는 방법 없나?”
한항이 말했다.
“없지. 이것도 최대한으로 빨리 깨우는 거야. 견디기 어려우면 차라리 한숨 자.”
“정말 자리 편 김에 잠이나 잘까? 큭큭!”
“아예 푹 자는 것도 괜찮아. 한숨 잔다고 해봤자 반 시진이면 일어날 거야.”
흑후가 술을 마시며 말했다.
“아걸이 어디로 갈지 동선 파악은 해놨지?”
“그런 건 염려 말고.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으니까.”
흑후가 웃으면서 말했다.
아걸을 따라잡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다. 문제는 따라잡아서 어떻게 하느냐 하는 점이다. 같이 싸울까? 그것이 최선인가? 그렇게 하면 함정을 빠져나올 수 있을까?
‘음!’
흑후는 남몰래 고민했다.
탕산에 들어간 수하들이 돌아오지 않고 있다. 어떤 함정을 파 놓았는지 살펴보라고 했는데…… 비상 연락조차 취해오지 않는다. 아마도 죽지 않았을까?
이 정도로 치밀한 경계망이라면…… 저들은 정말로 단단히 준비하고 있다.
은거 무인 여섯 명이면 아걸 두세 명 몫은 해낸다.
아걸 서너 명이 힘을 합쳐서 싸우는 격이 된다. 저들에게는 충분히 위협이 된다.
아니다. 저들이 파 놓은 함정은 아걸을 상대하기 위한 것이다.
이걸 한 명이 들어가나 두 명이 들어가나 똑같다. 무공으로 싸워오는 것이 아니니 무공이 강하냐 하는 물음을 아무런 필요도 없다는 뜻이다.
“기왕 쉬는 것, 푹 쉬어둬. 산에 들어가면 잠잘 시간도 없을 거야.”
흑후가 빈 술잔에 술을 따르며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