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九十一章 무인결사(武人決死) (2)
“문수께서는 절혼곡에서 기다리시고.”
활검문주가 말했다.
송가검문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싸움이나 명분이라는 것이 있다. 현재 아걸에게 도전장을 내민 사람은 송가검문주다. 중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든 최종적으로는 송가검문주와 아걸이 싸운다.
송가검문주가 패하면 이 싸움은 패한 게 된다.
보통은 그렇다.
그래서 활검문주가 송가검문주에게 최종 싸움터에서 기다리라는 말을 했고, 송가검문주도 무의식중에 받아들였다. 아무 비판 없이 무조건 수용했다.
한데…… 이 싸움은 비무가 아니다.
송가검문주가 패하더라도 아걸을 죽이면 되는 죽음의 결전이다.
비무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그중 최고는 생사를 걸고 싸우는 생사 비무다.
한데 이 생사 비무에도 두 종류가 있다.
보통 무인이 말하는 생사 비무는 비무 중 상대방이 죽이더라도 어쩔 수 없다는 소극적인 생사 비무가 대부분이다. 생사를 결정 짓기 전에 승부를 결정지을 수 있다면 굳이 결딴을 내지 않는다.
치명적인 비무를 원할 때는 처음부터 둘 중 한 명은 반드시 죽어야 끝난다는 조건을 걸 수도 있다.
아걸과 맺은 비무는 후자다.
그런데도 활검문주는 무의식중에 무인의 비무를 떠올렸다. 그리고 다른 문주들도 활검문주의 말을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무조건 송가검문주는 최종적인 결전 단계까지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얼핏 보면 송가검문주가 혼자서 위험을 전부 덮어쓴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는 오히려 이십사 위문 문주들의 보호를 받는다.
송가검문주가 싸우기 전에 아걸을 죽일 수 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다. 좌우지간 송가검문주는 탕산에 안배한 모든 함정이 무너질 때까지 싸워서는 안 된다.
이십사 위문 문주들은 무인들의 비무와 목숨을 취하는 싸움이 엄연히 다르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모든 싸움이 비무의 일환이었다.
“아걸에 대한 소식은요?”
“탕산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오늘 당장 절혼곡까지 오지는 않을 것 같고…… 중간에서 노숙할 모양입니다.”
광검문주가 말했다.
광검문은 탕산 동남쪽을 맡았다. 아걸이 여장을 푼 객잔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다. 그러니 아걸이 동남쪽으로 입산할 것이라는 점은 익히 짐작하고 있었다.
“방자들을 떼놓고 혼자서 입산하다니. 후후!”
활검문주가 웃었다.
“일홀도가…… 어떻게 보면 긍지 하나는 대단하다고 볼 수도 있고…… 또 어떻게 보면 미련하다고도 할 수 있고.”
광검문주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말했다.
아걸도 바보가 아닌 이상 탕산에 펼쳐진 함정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러니 누가 도와주겠다고 나서면 마다할 처지가 아니다. 본인 스스로 나서서 방자를 구해야 할 형편이다.
그런데 아걸은 도와주겠다고 찾아온 은거 무인들마저 따돌리고 혼자 들어섰다.
“긍지가 있어서도 아니고 미련해서도 아닙니다.”
활검문주가 말했다.
“그러면 혼자 입산한 게 뭐 때문이라고 생각하시는지? 설마 혼자서 우리 전부를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라면 미련해도 보통 미련한 게 아닌데.”
광검문주가 말끝을 흐렸다.
파팟! 팟!
다른 문주들의 눈길에서도 불똥이 튀었다.
아걸이 강하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이십사 위문을 단신으로 상대할 정도로 강하지는 않다. 이 세상에서 그런 광오한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사람, 공부뿐이다.
그 외의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이 겸손해야 한다.
“활검문주께서는 일홀도를 잘 아시는가 봅니다.”
팔천검문주가 비아냥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잘 안다기보다도…… 일홀도가 강한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아니, 강하다는 말로도 설명이 되지 않고…… 무조건 싸운다? 승패는 관계없다, 싸우는 게 좋다? 제 생각에는 아마도 아걸은 천하제일이라는 명예에도 관심이 없을 겁니다. 싸우고, 싸우고, 끝없이 싸워가는 것…… 이게 아걸의 일홀도인 것 같아요.”
“재미있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아걸 자신은 죽어도 상관없다. 탕산에 싸움판이 만들어졌으니 싸우러 왔다. 이런 말처럼 들리는데. 제가 맞게 이해했습니까?”
활검문주는 송가검문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송가검문주가 신음을 흘렸다.
무림에 적을 둔 무인치고 싸움을 마다하는 사람은 없다. 싸움을 하면서 희열을 느끼기도 한다. 싸워서 패배할 것을 생각하고 싸우는 사람은 없다. 이길 것만 생각하고 달려든다. 그래서 싸울 일이 생기면 희열이 샘솟는다.
아걸은 그런 생각에 완전히 침몰된 외곬이다.
“아걸이 그렇다면 더욱 구미가 당기는데…… 송가검문주께서는 절혼곡으로 가시고…… 이건 문주님들께 양해를 구하고 싶은데, 아걸을 내가 먼저 상대해 보고 싶습니다.”
팔천검문주가 말했다.
“먼저요?”
“네. 먼저.”
“굳이 그러실 필요까지는…….”
“활검문주께서 말했지만…… 우린 놈이 강하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나 강한지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팔천검문주의 눈가에 살광이 일렁거렸다.
농담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그저 위신이나 세워보고자 하는 말도 아니다. 팔천검문주는 진정으로 아걸과 싸우고 싶어 한다. 온몸에서 투쟁심이 일렁거린다.
“후후후! 놈이 공부님과 싸웠다고는 하지만 모두 패해서 도주한 것이고…… 그 밖에는 아는 게 전무한 상태에서 무조건 강하다고 떠받들어 줄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노정문주께서 당했어요.”
화화문주가 말했다.
“노정문주가 죽긴 했지만 어떻게 죽었는지 모르는 상황이니까 직접 눈으로 보자는 말입니다. 그것도 내가 직접 나서서 놈의 실체를 보여 주겠다는 겁니다.”
파팟!
팔천검문주의 눈가에 다시 살광이 일렁거렸다.
팔천검문은 이십사 위문 중에서 가장 난폭한 검을 지녔다. 아니, 난폭하다고 할 수는 없다. 흉맹한 것과 난폭하다는 말은 엄연히 다르니까.
팔천검문에는 이기고 진다는 개념이 없다. 죽는 자와 사는 자만 존재한다. 그러니 팔천검문을 향해서 검을 들 때는 반드시 끝을 본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이십사 위문 문주들에게 목표가 있다면 당연히 성검문처럼 되는 것이다.
성검문처럼 천하 위에 우뚝 선다.
언젠가 성검문의 지도체계에 균열이 일어나면, 공부가 급사라도 하면, 정쟁에 휘말려 투옥되기라도 하면…… 그 자리를 꿰찰 사람은 자신들이라도 생각한다.
그래서 불철주야 무공을 수련했다.
오로지 성검문에 충성하겠다고 지시만 기다리던 열두 문파는 도태되고, 성검문으로 목표 삼아서 검을 닦은 이십사 위문은 강대 문파도 도약했다.
그렇다고 성검문을 치고 올라서겠다는 생각은 없다. 이십사 위문 문주들은 아직도 공부와의 싸움이 꺼려진다. 여전히 공부를 넘어설 자신이 없다.
그 외에 모든 사람은 눈 아래 두고 있다.
상대가 소축십검이나 아걸이라면 망설일 이유가 없다. 즉시 싸우러 간다. 노정문주가 단신으로 아걸을 찾아간 것도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아걸의 부상이 상당하다는 풍문이 돌기는 했지만, 그런 일이 없더라도 노정문주는 아걸을 찾아갔을 것이다.
노정문주는 강자다.
이것은 이십삼 위문 문주가 모두 인정하는 바다.
아걸과 싸우겠다고 나선 팔천검문주도 강자다. 누가 도전해 와도 사양하지 않고, 검을 맞댔다 하면 반드시 죽인다.
- 검은 흉기다. 사람 몸을 찢기 위해서 만든 도구야. 검초니 뭐니 하는 것에 너무 구애받지 마라. 그런 것들 역시 몸뚱이를 찢는 방법일 뿐이야.
팔천검문주가 떠올리는 살광은 그런 종류다.
“팔천검문주께서 직접 나서신다면 만류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공진(共陣)에 참여한 사람들이 문제인데…….”
활검문주가 난색을 보였다.
이십삼 위문 문주들은 각기 문도를 차출해서 공진에 참여시켰다.
아걸을 잡기 위해서 이십삼 문파가 하나가 되어서 함정을 파 놓은 것이다.
팔천검문도 문도를 참여시켰다. 만약 팔천검문주가 아걸과 싸우기 위해서 문도를 빼내 간다면 공진에 문제가 생긴다. 다른 인력으로 보충할 수는 있지만, 아무래도 건드리지 않은 것만 못한 결과가 나올 수 있다.
팔천검문주가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그놈들은 필요 없습니다. 각기 맡은 일을 시키세요.”
“그럼 문주께서 단독으로?”
“아니. 아걸에게 두 가지를 써 볼까 합니다. 하나는 정공법. 팔천검법 대 일홀도의 대결을 볼 생각이고…….”
팔천검문주가 입가에 살소를 피워냈다.
“만약 정공법이 무너지면 그때는 팔천검문 대 아걸의 싸움으로 전환할 생각입니다.”
“팔천검문 대 아걸. 흠!”
활검문주가 침음했다.
팔천검문주는 싸움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검을 몸을 찢는 도구, 싸움은 상대를 죽이는 행위.
팔천검문에 어중간한 승패는 없다. 죽이거나 죽는 일만 남는다. 그리고 반드시 끝장을 내야 하는 결착 싸움에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암수? 가능하다.
불의의 기습?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런 행위는 사파인이나 사용하는 비열한 수법이라고 힐문해도 상관없다. 무공이 무엇인가? 다른 사람을 효과적으로 죽이는 기술이다. 심신 수양이니 어쩌니 해도 정작 싸움이 일어나면 상대를 굴복시키는 수단이 된다.
적과 싸워서 이기지 못하는 무공은 필요 없다.
심신 수양이 목적이라면 아침에 일어나서 굳어진 몸을 풀어주는 행위로 충분하다.
부인이 내준 독주를 마시고 죽은 무인이 있다. 그러면 부인은 사파인이 되는 것인가? 독주를 마시고 죽은 무인은 정당한가? 삶과 죽음만 남는 관계에서, 부인은 승자고 무인은 패자다. 어떤 변명의 여지도 없다.
현 무림에서 가장 강력한 비무는 성검문이 내세운 혈무대 비무다.
혈무대에 서면 생사 불문이다. 상대를 죽이더라도 죄를 묻지 않는다. 원한도 갖지 못한다.
삶과 죽음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비무다.
싸우다 보면 암수를 쓸 때도 있다. 허용된다. 쓰고 싶은 암수를 마음껏 써라. 사파인처럼 독분을 쓰거나 암기를 날릴 때도 있다. 물론 허용된다. 해라.
혈무대 비무는 일단 혈무대에 올라선 이상 자신이 펼칠 수 있는 모든 공격을 취할 수 있다.
하지만 혈무대 비무라는 것…… 자세히 들여다보면 일종의 제약이 있다.
무공 대 무공으로 겨뤄야 한다는 점이 바로 제약이다.
팔천검문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들의 싸움은 무공의 고하를 가리는 것이 아니다. 오직 상대방을 죽이는 데 초점을 맞춘다. 그러니 화약, 암기, 진법 등등 모든 것이 총동원된다.
팔천검문주는 아걸과 이런 싸움을 하고자 한다.
분명히 팔천검문의 무도관은 정도와 사도의 경계선에 있다. 한 발만 헛디디면 사도로 빠진다. 이러니 이십사 위문 문주 중에는 일부로 팔천검문과 사이를 벌린 문파도 여럿 있다.
“음!”
활검문주가 침음했다.
팔천검문주의 속셈을 알면서도 해 줄 말이 없다.
사실, 활검문주뿐만이 아니라 모든 문주가 할 말이 없다. 지금 탕산에 펼쳐진 함정은 평소 팔천검문주가 읊조리고 다니던 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탕산 전체에 아주 거대한 죽음의 절진을 펼쳐 놓았다.
아걸이 당했던 수많은 격전을 고려해서 날개를 달았어도 빠져나가지 못한다.
팔천검문 대 아걸이 아니라 이십사 위문 대 아걸의 생사 결전이다.
아걸은 자신이 죽거나 이십사 위문을 모조리 죽여야 탕산을 벗어날 수 있다.
자신들이 그런 일을 벌이고 있으면서 팔천검문주에게 뭐라고 할 수는 없다. 아니, 오히려 누군가가 나서서 아걸을 떠봐준다면 이것처럼 고마운 일도 없다.
“문주께서 그렇게 해 주시면 우리는 고맙기는 한데, 놈이 소축십검을 거의 박살 낸 놈이라는 건…….”
활검문주가 말을 이을 때, 팔천검문주가 불쑥 일어섰다.
“그럼 그렇게 알고. 놈도 오늘을 쉴 것 같으니까…… 내일 봅시다. 푹들 쉬시고.”
팔천검문주가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일어섰다.
“가능할까요?”
활검문주가 말했다.
“노정문주가 죽을 때, 아걸은 운신도 못 했다고 합니다. 반철도를 들고 있기도 힘들었다고. 그런 상황을 고려하면 팔천검문주는 지옥으로 들어간 겁니다.”
“팔천검문주도 직접 싸우지는 않을 겁니다. 문도를 보내놓고 상황을 지켜보겠죠. 그래도 팔천검문이 나섰다면…… 흠! 정공법이든 투전(鬪戰)이든 볼만할 겁니다.”
문주들이 조용조용 이야기를 나눴다.
객관적인 전력 분석을 해보면 아걸이 절대적으로 우세하다. 삼척동자에게 물어봐도 같은 대답이 나올 것이다. 아걸은 남만족 칠백 명을 몰살시켰다.
무공으로 아걸을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공부뿐이다.
팔천검문주가 한 번은 정공법으로, 한 번은 사법으로 승부를 걸어보겠다고 했지만…… 문주들은 이미 패배를 예감하고 있다. 희생이 크지 않기만을 바랄 뿐.
“어쨌든 아걸이 어느 정도나 강한지 직접 눈으로 볼 기회이니까…… 나쁘지는 않군요.”
활검문주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