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九十二章 혈삭참맥(血索斬脈) (1)
팔천검문은 삼재진, 사상진, 육합진의 조화를 이루어내기 위해서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지난 이십 년간, 인력과 자원을 아낌없이 투입했다.
이 세 가지 검진의 조합은 간단하지 않다. 머리 좋은 사람이 생각만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진법 전문가 수십 명이 달라붙어서 머리를 맞댄 결과물이다.
수련하기도 쉽지 않았다.
완성된 삼합연환진(三合連環陣)은 삼재진과 사상진이 겹쳐서 서고, 육합진이 외곽에 선 형태다. 하지만 이 포진을 만들어내는 데만 무려 삼 년이 걸렸다.
세 검진의 가장 적합한 위치를 찾아내는 데도 그만큼 힘이 들었다.
검진을 발동시키자 우습지도 않은 일이 일어났다. 예상은 했지만, 툭하면 다른 검진을 방해하기 일쑤였다. 이런 검진을 쓸 바에는 차라리 단독으로 싸우는 것이 낫다 싶었다.
삼재진은 삼재진만 사용될 때 가장 강력한 효과가 일어난다.
천지인이라는 삼재 속에 표현할 수 있는 모든 무리가 함유되어 있어서다.
다른 검진도 마찬가지다. 사상진이나 육합진은 독자적으로 운용될 때 가장 강해진다. 사상진과 육합진이 어우러지면 한층 강해질 것 같지만 오히려 무력해진다. 강자들이 서로 잘났다고 상대방을 방해하니 약해지기만 한다.
무당파의 오행검진(五行劍陣)은 무림 일절로 꼽힌다.
소림사의 십팔나한진(十八羅漢陣)도 마찬가지다. 승려 열여덟 명이 진형을 형성하고 봉과 칼을 사용한다.
십팔나한진도 무림 일절이다.
십팔나한진과 오행검진은 각기 무림 일절이지만, 두 진은 서로 섞이지 않는다. 무림 어느 누구도 두 진법을 섞어서 사용할 생각은 하지 않는다.
십팔나한진과 오행검진이 한데 섞이면 서로가 서로를 방해한다.
상승효과보다는 상잔 효과가 더 크다. 아마도 최악의 결과가 일어날 것이다.
이런 점을 모르고 조화를 시도한 것이 아니다.
알지만 세 가지 검진이 하나로 조화를 이루기만 한다면 폭발력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실제로 그랬다.
세 가지 검진에 동원된 무인은 열세 명이다. 하지만 이 검진에 갇히면 마치 수백 명과 검을 맞댄 것 같은 착각이 일어난다. 매우 혼란스러워진다. 몇 초가 지나지 않아서 당장 손발이 어지러워지고 몸이 둔해진다.
팔천검문 교두들이 오 초를 받아내지 못했다.
그렇다. 삼합연환진은 평범한 자를 상대하기 위해서 만든 검진이 아니다. 이 검진은 허도기 같은 초강자를 상대하기 위해서 특별히 만든 것이다.
팔천검문 문주는 아걸과의 싸움이 결정되자 당장 삼합연환진을 꺼냈다.
문주는 두 가지를 노렸다.
하나는 삼합연환진의 진가를 실전으로 시험해 보고 싶었다.
삼합연환진의 의심할 나위 없이 최강검진이다. 어지간히 강하다는 무인들은 너끈히 압도한다. 하지만 아걸이나 허도기 같은 초강자와는 싸워보지 못했다. 두 사람 같은 초강자가 무림에 많은 것도 아니지 않나.
궁극적으로 무림에서 일자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허도기 같은 초강자와 싸워야 하는데, 삼합연환진이 그럴 만한 힘을 줄 수 있는지 알아보고 싶었다.
그런 면에서 아걸과의 싸움은 또 다른 기회일 수도 있다.
검진으로 아걸을 잡아낼 수 있다면 그것보다 좋은 일은 또 없을 것이다.
굳이 탕산 싸움을 일으키지 않아도 된다.
공부 허도기는 탕산 싸움만이 아걸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의외로 초반에 잡아낼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성검문이 누리고 있는 위상 중 절반 이상은 넘겨받을 수 있다.
성검문 소축십검도 아걸에게 무너졌다.
그런 자를 팔천검문이 잡아냈다면 무림 판도가 당장 뒤바뀐다. 적어도 성검문 다음으로 팔천검문을 거론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동등한 위치에서 거론되거나.
삼합연환진과 허도기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당장 무림인들 사이에서 이런 말이 오고 갈 것이다. 아걸만 잡아낸다면 이런 소문쯤은 당장에라도 만들 수 있다. 그러면 성검문과 동등해진다.
솔직히 아걸을 잡는 것은 의심하지 않았다. 틀림없이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무너졌다.
“삼합연환진이 무너졌다.”
“네.”
문주 앞에 늘어선 검수들이 일제히 부복하며 대답했다.
“복수해야지?”
“알겠습니다.”
“너희마저 무너지면…… 팔천검문은 차라리 봉문하는 게 나을 거야. 지난 이십 년을 헛되게 보낸 셈이니까.”
“반드시 아걸을 잡아 오겠습니다.”
“잡아야 할 거야. 잡지 못하면 죽을 테니까. 가라. 가서 살고 싶으면 놈을 잡아.”
“넷!”
무인들이 힘차게 대답했다.
아걸 앞에 열세 명이 늘어섰다.
아걸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순간적이지만 ‘또?’라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상대도 안 되는 검진을 고집하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이다.
열세 명이 저항조차 해 보지 못한 채 목숨을 잃었다. 그렇다면 같은 검진으로 나서면 안 된다. 똑같은 일을 되풀이하는 것은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다.
이들이 늘어선 모습을 보면 먼저 조금 전에 가로막았던 자들과 흡사하다.
앞에 네 명이 서 있고 뒤에 아홉 명이 둥글게 포진해 있다.
앞뒤의 인원이 다르니 검진 형태도 다를 것이다. 하지만 마찬가지다. 이런 식의 검진 공격으로는 반철도를 꺾지 못한다. 이미 사실로 보여줬지 않나.
‘앞에 네 명, 뒤에 아홉 명. 네 명은 사상진? 아냐. 네 명이긴 하지만 사상진은 아냐.’
아걸의 눈가에 이체가 번뜩였다.
지금 앞을 가로막아선 네 명은 먼저 자신과 검을 섞었던 네 명과는 상당히 다르다.
먼저, 남쪽과 동쪽에 있는 두 명이 똑같이 생겼다. 쌍둥이다. 얼굴 모습, 체형, 입고 있는 옷, 사용하는 병기…… 모든 것이 판에 박아놓은 듯이 같다.
반면에 북쪽과 서쪽에 있는 자는 정반대다.
북쪽에 있는 자는 매우 강해 보이는 반면, 서쪽에 있는 자는 상당히 약해 보인다.
매우 이질적인 조합이다.
쌍둥이 두 명, 그리고 강과 약.
‘후후! 그렇군. 강약은 음양진(陰陽陣), 쌍둥이는 이원진(二元陣). 이건 또 색다른데?’
팔천검문은 검진에 대해서 상당히 연구한 것으로 보인다. 위력은 모르겠지만, 먼저 상대한 검진과 상당히 다르다는 점은 확실히 알겠다.
뒤에 늘어서 있는 아홉 명도 특이하다.
언뜻 보면 원형으로 늘어서 있는 것 같은데, 자세히 보면 부드러운 사각형 모습이다. 원형에서 사각형으로 또 그 반대로 변환이 자유롭다.
한 가지 곤혹스러운 부분이 있다.
이들이 펼친 검진에 비하면 먼저 상대했던 검진이 더 강해 보인다. 이들이 펼친 검진은 매우 친숙하다. 강호를 돌아다니다 보면 한두 번쯤은 경험했음 직한 검진이다.
‘이원진이 동남을 막고, 음양진이 북서를 막는다. 활동 영역을 제한시킨 후에 구궁진이 공격한다. 이건 너무 뻔한 수인데…… 이들이 반철도를 막을 수 있나?’
아걸은 내측에 들어선 네 명을 쳐다봤다.
아무래도 상대가 안 된다. 너무 쉽지 않나. 이들이 펼친 것은 그렇게 위력적이지 않다. 솔직히 말하면 사상진 하나를 펼쳐놓은 것보다도 못해 보인다.
이들이 왜 이런 형태로 검진을 전개했는지는 이해된다.
뒤에 늘어선 아홉 명이 일시에 내진을 뚫고 들어서려면 충분한 공간이 필요하다. 사상진보다는 보다 자유롭게 진퇴가 가능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살펴보면 이원진과 음양진, 둘로 나눠놓은 것이 훨씬 적합하다.
“검진이 무너져서 무공으로는 상대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검진에 꽤 자신 있나 보군.”
아걸이 말했다.
아걸은 벌써 이 검진을 파훼할 방도를 찾아냈다.
이원진과 음양진은 반철도를 막아내지 못한다. 쓱!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벌써 허점을 읽어냈다.
어른의 눈에 비친 어린아이 모습 같다.
저들은 매우 사납게 으르렁거리지만 아걸의 눈에는 굉장히 조잡해 보인다. 이들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즉시즉동(卽時卽動), 즉시즉살(卽時卽殺)이 타격점을 찾아내서다. 상대가 움직이면 나도 바로 움직인다. 서로 일어나고 한쪽이 무너진다.
즉시즉동, 즉시즉살은 아걸을 죽일 수도 있다.
양쪽에서 동시에 칼이 일어났는데, 저쪽 칼이 강하다면 아걸이 죽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타격점이 눈에 보인다는 것은 이미 저들이 쓰러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남은 것은 실제로 칼을 움직여서 즉시즉동, 즉시즉살을 증명하는 것뿐이다.
허도기와 싸웠을 때가 생각난다.
자신이 검을 들었을 때 허도기가 빙긋 웃었다. 첫 번째 싸움에서도, 두 번째 싸움에서도.
허도기는 자신에게서 딱 이런 모습을 봤을 것이다.
허점이 보인다. 네가 아무리 빠르더라도 나보다는 느리다는 자신감이 든다. 네가 가진 어떤 무공도 내 칼을 받아낼 수 없다는 확신이 일어난다.
싸움은 끝났다.
상대가 앞에 선 모습만으로도 이미 승패를 결정지었다.
언젠가부터 허도기는 웃지 않았다. 반철도를 들고 마주 서면 이번에는 기필코 죽이겠다는 살심을 떠올렸다. 여유가 사라지고 각오가 자리 잡았다.
그만큼 자신이 성장했다.
자신도 누군가를 만났을 때, 허점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을 것이다. 빠름이 가늠되지 않고, 무공이 보이지 않고, 구사하려는 초식을 전혀 예측하지 못한다.
그런 상대를 만났다고 해서 졌다는 것은 아니다. 비로소 싸울만한 상대와 만난 것이다.
“물러가라.”
아걸이 말했다.
“후후후! 물러가라? 좋은 말이군. 여유가 넘쳐. 강자가 되면 그런 말을 해도 되고 말이야. 우리는 언제쯤이나 그런 말을 멋들어지게 할 수 있을까?”
검진을 형상한 자들은 웃기만 할 뿐 물러나지 않았다.
“물러가라. 베인다.”
아걸이 진중하게 말했다. 그리고 반철도를 들어 올려서 쌍둥이로 보이는 자들의 배와 가슴을 가리켰다. 배는 가로로 그었고, 가슴은 곧게 찔렀다.
공격할 곳이다. 자신의 눈에 보이는 허점이다.
이들은 분명히 두 명이 한 몸이 되어서 움직이는 이원진을 펼칠 것인데, 지금 저들이 서 있는 위치에서 이원진을 펼치면 당장 배와 가슴에 허점이 드러난다.
어떤 도법도 펼칠 생각이 없다. 다만 칼만 쓴다. 드러난 허점을 치면 된다. 어렵지 않다.
아걸은 빙글 칼을 돌려서 음양진을 형성하고 있는 두 명을 가리켰다.
양은 머리, 음은 쇄골이다.
머리를 먼저 친다. 위에서 아래로 툭 찍듯이 친다. 그리고 빙글 돌아서 쇄골을 내려찍는다.
아걸의 눈에는 이들이 펼칠 검진과 자신의 움직임이 환히 보였다.
아걸이 반철도로 허점을 가리키자 네 명이 움찔거렸다.
사실 그들에게 아걸의 가리킴은 예고나 다름없다. 허점이 있어서 그곳을 가리킨 것이라고 보긴 어렵다. 여기를 칠 테니 주의하라는 예고다.
하지만 반철도가 자신들을 겨누자 정말로 그곳이 배인 듯한 착각이 들었다.
배가 갈라지고 가슴이 쪼개진다.
머리를 맞아서 뇌수가 터지고, 쇄골로 들어온 칼이 폐까지 깊숙이 파고든다.
“음!”
네 명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침음했다.
“이런 싸움은 무의미해. 앞선 싸움에서 봤잖아. 그러니 너희들의 싸움을 해라. 무인도 아니면서 무인인 척하지 말라는 말이지. 비겁해도 좋다는 뜻이고.”
아걸이 말했다.
“누가 무인이라고 하더냐?”
쌍둥이 중 한 명이 말했다.
“후후! 그런가?”
“그래. 우린 너하고 공명정대한 싸움을 할 생각이 전혀 없어. 그러니 내 배를 치겠다면 치도록 해.”
말을 한 자가 자신의 배를 내밀었다.
“일곱 명. 저들이 뭘 할 수 있는지 궁금하군.”
아걸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알고 있을 줄 알았다. 우리가 파악한 바에 의하면 네놈 감각은 천하제일이야. 네놈 앞에서는 누구도 숨지 못하지. 그래서 숨을 생각도 하지 않았어.”
쌍둥이 중 앞에 선 자가 말했다.
이원진, 음양진, 그리고 구궁진…… 이들 열세 명 외에 다른 자들이 또 있다. 구궁진 밖에 외곽에 일곱 명이 더 있는데, 그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검진이라든가 어떠한 진형을 형성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몸을 숨기기 좋은 곳에 숨어 있을 뿐이다.
암습을 가할 생각이다.
저들 일곱 명이 펼치는 암습은 예사롭지 않다. 충분히 수련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앞선 검진이 와해되면 그다음으로 싸우는 것이 이들이다. 앞선 검진을 깨트린 자에게 복수하기 위한 검이다. 그러니 절대 평범하지 않다.
암살을 수련했다.
“무인이 아니라면 베도 좋겠지. 시작할까?”
아걸의 눈에서 살기가 번뜩이었다. 순간,
쉐에엑! 타악!
숲에서 어둠을 뚫고 화살이 날아왔다.
아걸은 살짝 머리를 움직여서 날아오는 화살을 피했다.
화살은 정직하게 미간을 노렸다. 굳이 맞출 생각이 없다. 이런 식으로 공격하겠다는 엄포다.
보통의 경우, 암습이 벌어질 것이라는 예고만으로도 행동에는 많은 제약이 따른다. 마음 놓고 몸을 움직이기가 어려워진다. 초식을 펼치는 와중에도 항상 암습을 경계해야 한다.
저들은 이런 점을 알고 화살 한 대를 날린 것이다.
“후후!”
아걸이 반철도를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