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九十二章 혈삭참맥(血索斬脈) (2)
지금의 일홀도에 이름을 붙이지 못했다.
우선 임시방편으로 즉살이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사실은 즉살과도 거리가 멀다.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가 없는 도법, 아니 도법이 아니라 싸움 방식이다.
한마디로 머리를 떼어 놓고 몸만 싸운다.
그렇다면 본능인가? 직감인가? 몸에 익은 행동들이 저절로 나오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다. 얼핏 비슷한 듯 보이지만 완전히 다르다. 직감이나 본능, 손에 익을 대로 익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저절로 튀어나오는 도법 같은 것이 아니다.
순간순간의 반응?
이렇게 말하면 그게 본능이지 무엇이냐고 되물을 수 있다.
본능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싸움 속에 의지가 내포되어 있다. 강력한 의지는 아니지만 몰입하려는 의식이 느껴진다. 그렇다고 몰안에 이를 정도로 깊이 들어가지도 않는다.
아걸은 은거 무인들에게서 자연검을 터득했다.
초식에 구애받지 않고 오직 육신과 병기의 조합만으로 싸우는 방식이다.
그런 것처럼 이번에는 육신과 감각과 병기를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지금까지 수련한 모든 도법이 녹아서 감각적인 본능으로 튀어나온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만 본다. 어떤 일이 일어나면 그때 대응한다. 사건이 발생함과 동시에 육신이 반응한다. 양쪽 사이에 시간 차이는 거의 없다.
그러니 화살을 날린다 한들 아무 상관이 없다.
화살이 날아오면 화살을 대하고, 검이 날아오면 검을 대한다. 그때그때 일어나는 모든 위험과 싸운다.
‘미안하다. 너희들이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어.’
살 수 있는 방법!
아걸은 이들에게서 죽음을 봤다.
계속 검을 들고 앞을 가로막는다면. 계속 무공으로 싸우려고 한다면 쓰러질 수밖에 없다. 탕산을 승부를 논하는 곳이 아니다. 생사만 논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들은 죽기 위해서 나선 것이 아니다. 아걸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아걸을 죽이기 위해서 나섰다. 또 그만한 자신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공격 방법을 바꾼다.
허도기 같은 절대 무인은 무공으로 죽이지 못한다.
이것이 무림의 정설이다. 많은 무인이 이 정설을 믿고 있다. 그래서 아예 성검문에 도전할 생각도 하지 않는다. 성검문에 도전하는 사람도 허도기에게 도전장을 내밀지는 않는다. 그들은 소축십검과 싸울 뿐이다.
만약에 성검문 비무자로 허도기가 나온다면 창피하더라고 비무를 철회할 것이다.
죽기 싫으면 그래야 한다.
그러면 절대 초강자가 존재하는 문파와는 싸울 수 없는 것인가? 그럴 리가 있나. 찾아보면 절대 초강자라도 무너트릴 방법이 산처럼 많이 쌓여 있다. 다만 무공으로 죽이기 힘들다는 것뿐이지 죽이지 못한다는 소리는 아니다.
더욱이 이곳은 탕산, 서로 체면이나 자존심이 땅속에 묻어 놓고 오직 죽고 죽이는 싸움만 벌이는 곳이다. 온갖 치사한 방법을 총동원해도 할 말이 없다.
그러니 온갖 사마외도의 수법이 총동원된다. 무공으로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치사하고 더러운 암수를 검진 속에 녹여 넣는다.
허도기라면 검진을 이런 식으로 펼쳐도 이해할 것이다. 오죽하면 이렇게까지 할까 하고 웃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지금 이들이 펼치는 검진이다.
이 검진은 아걸에게 쓰려고 만든 것이 아니다. 허도기 상대하기 위한 검진이다.
언제 어느 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곳이 무림이지 않나.
지금은 허도기의 명을 받고 있지만, 그의 가슴에 검을 겨누지 말란 법은 없다.
그때를 대비해서 만든 검진이다.
스으읏! 스읏!
네 명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빙빙 돌았다. 밖에 있는 구궁진은 정반대 방향,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돈다.
서로 회전하는 방향이 다르다.
이들은 아걸에게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원래 무공을 싸울 생각이 없다. 이번 검진은 무공이 주(主)가 아니라 암습이 주다. 날카로운 검풍을 조심할 게 아니라 소리 없는 살수를 주의해야 한다.
아걸은 움직이지 않았다. 바위처럼 고요히 선 채로 빙빙 휘도는 두 무리의 사람들을 지켜봤다. 음양진, 이원진 쪽이나 구궁진 쪽이나…… 빙글빙글 돌아가는 모습에서 허점이 보인다. 칼만 쓰면 단박에 뚫고 나갈 수 있다.
공격할 틈이 없다!
그들은 당황했다. 아니,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마른침만 연신 삼켰다.
아걸이 칼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은 사천왕(四天王) 중 칼을 들고 서 있는 증장천왕(增長天王)을 떠올리게 만든다. 아걸의 모습이 거대한 천왕 모습으로 비친다.
그들은 이륜소멸진(二輪消滅陣)을 형성한 열세 명처럼 직접 병기를 맞닥트릴 위험이 없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은밀히 암기를 던져내면 된다.
공격이 실패하더라도 즉시 반격당하지 않는다.
암기는 몇 번이고 던져낼 수 있다. 그러니 전혀 부담을 가질 필요가 없다. 던지고, 던지고, 또 던지고…… 그러다가 어느 것 하나에라도 맞으면 되는 거다.
그런데도 암기를 던질 수 없다. 아걸이 이륜소멸진을 뚫고 와락 달려들 것 같다. 아걸의 반격이 시작되면 피하고 자시고 할 틈도 없이 목숨을 잃는다.
“음!”
그들은 침음했다.
한 명이 이런 느낌을 받았다면 괜히 겁에 질렸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팔괘진(八卦陣)을 펼치고 있는 여덟 명 전원이 같은 느낌을 받았다.
‘기회는 딱 한 번.’
이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절박해졌다.
원래 암중에 숨어 있는 팔괘진은 서둘지 않으려고 했다. 시간을 충분히 써가면서 천천히 요리할 생각이었다.
아걸을 직접 상대하고 있는 열세 명도 팔괘진의 생각을 안다. 그래서 급하게 휘돌지 않는다. 체력을 아껴가면서 몇 시진이고 싸울 태세다.
그런데 기회가 많지 않다. 팔괘진에서 암습을 거는 순간, 아걸이 이륜소멸진을 뚫고 나와서 팔괘진부터 친다. 암습부터 없애버린 후에 검진을 친다.
이것은 막연한 느낌이지만 아마도 맞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일격에 자신들이 지닌 최대 역량을 발휘해야 한다.
“꾸욱!”
한 명이 멧새 소리를 냈다.
“꾸우욱!”
다른 자가 멧새 소리를 받았다.
“꾸우욱!”
“꾸욱!”
멧새 소리는 넓게 번져나갔다.
초반에 끝장낸다. 시간을 오래 끌지 않고 단숨에 결착을 시도한다. 자신들이 잘못되는 한이 있어도.
“꾸우우욱!”
조금 강하고, 날카롭고, 묵직한 소리가 울렸다.
이륜소멸진의 마지막 수, 최종 검진을 하달할 수 있는 명령권자, 팔천검문 문주가 화마암멸(火魔巖滅)을 승낙했다.
이곳에서 죽어도 좋다!
문주 역시 평범한 방식으로는 아걸을 상대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꾸우우욱!”
팔괘진을 이끄는 자, 이륜소멸진을 현장에서 지휘하는 자가 화마암멸을 명령했다. 기왕이면 탐색도 하고, 슬쩍 찔러보기도 하면서 아걸을 더듬어보고 싶은데…… 그러기에는 아걸이 너무 강하다. 자칫 화마암멸을 펼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기회가 있을 때 가장 강한 소멸진을 펼친다.
제일 먼저 내원을 구성하고 있는 네 명의 행동이 급변했다. 다소 느슨하던 모습에서 신랄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공격하는 모습도 매우 조급했다.
음양진을 이루고 있는 두 사람이 검초를 펼쳤다.
쒜엑! 쒜에엑!
검풍이 공기를 찢어 놓는다.
두 사람의 검공은 누가 봐도 마지막 수단으로 보인다. 막바지 곤궁에 처한 사람이 이판사판으로 공격하는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수비는 일절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공격 일변도다.
‘만화난폭(萬化亂暴)!’
네 명 중 한 사람이 유독 눈에 띄게 난폭한 검을 펼쳤다.
일명 만화난폭이라고 한다. 특정한 초식 명칭을 일컫는 말은 아니다. 난폭한 검이 천변만화한다는 일종의 속어다. 장님이 마구잡이로 검을 휘두르는 모습으로 설명될 때도 있다.
쒜에엑! 쒜에엑!
음양진 중 양검을 맡은 사람, 그는 득달같이 앞으로 달려 나오며 강렬한 초식을 전개했다.
검이 사방팔방으로 마구 그어진다. 좌에서 우로, 위에서 아래로…… 목표도 없다.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을 베겠다는 듯이 보인다. 물론 검초는 아걸에게 집중되어 있지만.
또 한 사람은 검초를 전혀 쓰지 않고 뒤따랐다.
음양진의 음검을 맡은 자가 양검 뒤를 바짝 쫓는다. 살기를 완전히 감춘 채…… 마치 싸움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이 유유자적하게 뒤따르고 있다.
아니다. 그는 이미 암수를 펼치고 있다.
너무 화려하고 난폭해서 눈길을 확 잡아끄는 공격 뒤에 지극히 은밀한 살수가 숨겨져 있다.
스읏! 슷!
이원진을 형성한 두 명도 즉시 움직였다.
쌍둥이 두 명 중 한 명이 역시 화려한 공격을 앞세우며 달려들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급공, 오직 찌르는 검으로 쏜살같이 쏘아져 왔다.
‘제일 먼저 도착! 한 명은?’
아걸은 쌍둥이 두 명 중 한 명이 사라진 점에 주목했다.
방금까지 네 명이 내원을 그리면서 휘돌았는데, 갑자기 한 명이 사라졌다.
스으읏! 스읏!
아걸은 미미한 바람 소리를 들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너무 나직해서 잘못 듣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미미한 소리가 울렸다.
사라진 자, 그는 앞선 자의 등 뒤에 바짝 붙어 있다.
음양진 음검과 마찬가지로 사라진 자도 이원진 뒤에 숨어서 암수를 전개한다.
앞에서 공격하는 두 명은 미끼다. 하지만 아걸은 음검을 주시한다. 진실한 공격은 음검에게서 펼쳐지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대로 진행된다.
마지막 한 수, 모두가 깜짝 놀랄 공격은 사라진 자가 펼친다.
아걸은 저들이 공격할 때까지 기다려줄 마음이 없었다. 이미 이들이 암수에 의존한다는 것을 알아버렸으니 더 시간을 끌 이유도 없었다.
파르르릉!
반철도를 가볍게 빙글빙글 돌리다가 만자탈(卍字奪) 던지듯이 크게 움직여서 내던졌다.
쉐엑!
반철도가 앞서서 달려들던 양검의 머리를 두들겼다.
아걸의 움직임은 빤히 보였다. 그가 반철도를 던질 것이라는 의사가 사전에 읽혔다. 그런데도 양검은 반철도를 막지 못했다. 급히 검을 들어 올렸지만, 어떤 소리가 울린다 싶은 순간에 검이 부러지고 정신이 뚝 떨어졌다.
꽈앙! 퍼억!
반철도가 검을 부수면서 양검의 머리를 찍었다.
알면서도, 빤히 두 눈 뜨고 지켜보면서도, 검을 들어서 날아오는 병기를 막기까지 했으면서도 머리뼈가 갈라지면서 쓰러져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아걸이 날린 반철도에는 만근 거력이 담겨 있다.
아니, 이 정도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양검은 반철도를 막으면서 신형까지 뒤틀었다. 단지 강함 힘만 깃든 패도(覇刀)였다면 즉시 퉁겨냈다.
반철도가 손쓸 사이도 주지 않고 날아들었다?
이 말도 맞지 않는다. 아걸이 반철도를 날리는 모습은 낱낱이 읽혔다. 반철도 역시 빠르게 날아오지 않았다. 굳이 속도를 말하자면 보통 속도 정도다.
충분히 막을 수 있었는데, 막지 못했다.
‘사술!’
퍼뜩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다.
반철도와 장검이 부딪치는 찰나에 어떤 현상이 일어났다. 검격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어느 싸움이나 다를 바 없었는데, 그 이후에 전혀 다른 일이 벌어졌다.
양검은 이 세상에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을 당했다. 그러니 죽은 것이다.
‘이놈이 무슨 칼을!’
아걸이 공부 허도기와 버금갈 정도로 강자라는 사실은 안다. 그러니 그가 펼치는 도법 또한 평범하지 않을 것이다. 도저히 막지 못하는 비초(秘招)일 것이다.
하지만 남은 세 명은 양검의 죽음에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모두 죽을 생각이다. 이 한 번의 싸움에 자신들의 모든 것을 담았다.
쒜에에엑!
양검 뒤를 바짝 쫓던 음검이 날카롭게 검을 찔러왔다.
전신의 모든 힘, 모든 진기가 반철도 한 자루에 담겼다.
절대 평범한 칼이 아니다. 가죽이 두꺼운 불곰도 관통시킬 수 있는 역도(力刀)다. 그러니 병기로 막아선다는 것은 진기 대 진기의 싸움을 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아걸의 전력과 상대방의 전력이 부딪쳤고, 한쪽이 깨졌다.
특이한 비초는 사용하지 않았다. 매우 일반적인 초식이다. 다만, 반철도에 전신 진력은 얹는 방법이 훨씬 정교했다.
일으킨 내력을 모두 칼에 싣는다고 해서 십(十)의 진력이 고스란히 얹히는 것은 아니다. 진력이 몸에서 칼로 전달되는 순간, 이 내지 삼 정도의 진력 손실이 일어난다.
보통 무인은 오 할의 진력밖에 싣지 못하고, 상승 무인이라는 사람들이 이 할에서 삼 할 정도 손실을 본다. 십의 힘을 실었어도 칠팔 정도밖에 얹히지 못한다.
아걸은 그 정도도 더 강했다.
아걸은 반철도에 진력을 쏟아부으면서 손실을 일으키지 않는다. 십의 힘이 고스란히 얹힌다.
이 차이는 매우 크다.
같은 내공은 가진 사람이 진력 대결을 펼치면 아걸이 십 중 십을 이긴다. 내공이 한 수 아래인 하수와 싸우는 것과 같은 결과가 만들어진다.
검진을 형성한 무인들도 이런 이치는 알고 있지만, 지금은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병기에 진력을 손실 없이 얹을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은 무인에게는 죽은 순간까지 풀어야 하는 화두다. 처음 병기를 잡는 순간에 듣는 말이며, 항상 뼛속에 각인시켜 놓는 말이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잊히는 말이기도 하다. 너무 당연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