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九十二章 혈삭참맥(血索斬脈) (4)
팔괘진에서 세 명이 튀어나와 구궁진에 섞이고, 구궁진에 있던 세 명은 팔괘진 속으로 흡수된다.
팔괘진과 구궁진을 형성하는 사람이 따로 있지 않다. 누구든지 자리를 채우면 검진이 만들어진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어떤 검진에도 녹아들 수 있을 정도로 많은 검진을 수련했다.
“아깝군. 당신 같은 사람들을 베어야 한다니.”
아걸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진정으로 한 말이다. 이들이 무공이 아까워서 이런 말을 한 것이 아니다.
검진 하나를 수련하는 것만 해도 몇 년이 걸린다. 하물며 구궁진과 팔괘진을 자유자재로 넘나들 정도라면 아마도 십 년 이상은 수련했을 것이다.
그 오랜 세월의 수련이 아까워서 하는 말이다.
이들은 혈삭참맥이나 화약을 쓰지 않아도 강하다. 검진 자체만으로도 매우 막강하다. 거기에 사마외도의 사악한 수법까지 가미했으니 천신도 잡을 수 있는 금쇄진(金鎖陣)이 된다.
맞다. 이 검진은 금쇄진이다.
스읏!
아걸은 반철도를 들어 올렸다.
혈삭참맥을 봤고, 장창에 매단 화약도 경험했다. 그리고 자신은 이런 공격들을 어떻게 뚫는지 보여주었다.
이런 움직임은 몇 번이고 보여줄 수 있다. 그러니 이들이 가진 수법이 이것이 전부라면 이들은 일다경도 버티지 못한다. 아마도 다음 공격에서는 구궁진부터 피를 쏟을 것이다.
‘혈삭참맥이 제법 매섭군. 빨리 끝내야겠어.’
아걸은 구궁진을 쓸어보았다.
승부를 빨리 결정지을 생각이다. 임기응변으로 혈삭참맥을 피하기는 했지만 모두 피해낸 것은 아니다. 어느새 그의 몸에는 강편 조각들이 수북이 박혀 있다.
몸에서 피가 흐른다.
하의는 이미 피로 얼룩져 있다.
적절한 순간에 신형을 허공에 띄웠지만, 몸을 가루로 만들어 버린 혈삭참맥을 모두 피해낼 수는 없었다. 중상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가볍다고도 할 수 없는 상처들이 스무 군데 정도 생겼다.
거기에 화약까지 폭발했다. 발밑을 광풍으로 휩쓸었다. 혈삭참맥을 뛰어넘는 폭발력이 성난 들소처럼 몸을 들이받았다. 암기로 치면 철편 천여 개가 몸 주위를 훑고 지나간 셈이다.
시간을 끌면 손해다.
아걸은 머릿속을 텅 비웠다.
마음을 차분히 가다듬는다거나 일부러 무심 상태를 유지하려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아걸은 싸움이 급해질수록 자신도 모르게 이런 상태가 된다.
어떠한 초식도 생각나지 않는다. 어떻게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도 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눈이 맑아진다. 사물이 명료하게 보인다. 머리도 상쾌하다.
근육에서는 힘이 넘쳐흐른다.
매우 기분 좋은 상태다. 본인 스스로 몸이 최상의 상태라는 점을 인식하게 된다.
“후우우!”
아걸은 숨을 내쉬었다.
이것 역시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서 숨을 내쉰 것이 아니다. 본인도 모르게 숨을 내쉬었다.
그렇구나. 저들…… 구궁진이 호흡을 가다듬고 있다. 검진을 이룬 자들이 서로 호흡을 맞추고 있다. 그것을 알고 자신의 몸이 알아서 저들의 호흡을 찾고 있다.
“후우우!”
숨을 쉬면서 다시 한번 저들의 호흡을 살폈다.
들숨이 아니다. 날숨이다. 지금 저들이 숨을 거두고 있다. 그렇다면 곧 검진이 발동된다.
타앗!
아걸은 지체하지 않고 뛰쳐나갔다.
몸으로 몸을 부딪쳐간다. 상대방을 어깨로 밀어붙이면서 빠져나갈 것처럼 보인다.
무모한 행동이다. 상대가 가만히 서 있는 것도 아니고, 검까지 든 상태다. 반철도를 사용하지 않고 몸으로 부딪쳐간다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
자살? 아걸이 자살할 리 있나.
쒜에엑! 쒜엑!
어느새 반철도가 번뜩였다.
딱 한 번의 움직임만으로 상대를 벨 수 있는 거리까지 들어섰다. 물론 그런 거리에서는 상대방도 공격할 수 있다. 쌍방이 검과 칼을 동시에 썼다.
퍽! 퍼억!
구궁진을 형성한 자 중 두 명이 비틀거리면서 쓰러졌다. 미처 방비할 틈도 없는 급습에 허를 찔린 것이다.
구궁진을 형성한 자들은 무공으로 싸울 생각이 없었다. 혈삭참맥을 펼칠 생각이다. 그런데 칼날이 너무도 빨리 들이닥치자 미처 혈마참맥을 전개할 시간이 없었다.
쓰러지는 자들이 검을 쓴 것은 본능적인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다.
쒜에에엑! 쒜에엑! 타타타타탁!
하늘에서 또다시 장창이 쏟아졌다.
장창이 아걸 주위에 꽂혔다. 이번에도 아걸에게 상처를 입히지는 못했다. 문제는 장창에 매달린 화약…… 화약? 화약이 아니다! 장창 주위로 뿌연 먼지 같은 것이 번지고 있다.
‘이건!’
아걸은 급히 호흡을 멈췄다.
이번에 장창이 가져온 선물은 화약이 아니다. 독분(毒粉)이다.
아걸은 장창이 날아오는 것을 감지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장창은 자신을 해치지 못한다. 장창에 매달린 화약이 터질 때쯤에는 이미 구궁진 밖으로 벗어나 있을 것이다.
한데 독분!
아걸은 잠시 방심하는 동안 독분을 두어 모금 들이마셨다. 뿌연 먼지가 심상치 않다고 여겨서 급히 호흡을 멈췄지만, 이미 독분이 폐부 깊숙이 빨려 들어왔다.
피잉! 현기증이 일어났다.
몸에 힘이 빠지면서 사지가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의지와는 다르게 움직인다.
‘당했나!’
아걸은 비틀거리는 몸을 굳건히 세우려고 애썼다.
‘격통(激痛)!’
독분을 흡입했다고 해서 몸이 아픈 것은 아니다. 지금 당장은 아픈 느낌은 없다. 다만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을 뿐이다. 그런데도 머릿속에서는 ‘격통’이라는 말을 끄집어냈다.
무인이 통증을 이기는 방법…… 통증으로 통증을 이긴다.
이 말을 할 때, 통증을 이기기 위해서 사용되는 통증은 경혈 통증이다. 진기로 경혈을 비틀어서 가상의 통증을 만들어 낸다. 그러면 잠시나마 진짜 통증을 이길 수 있다.
타악! 탁!
진기를 끌어내어서 두 발바닥 밑에 있는 용천혈(湧泉穴) 그리고 발목에 있는 삼음교(三陰交)를 들이쳤다. 살을 비틀어서 꼬집듯이 혈을 비틀었다.
“큭!”
아걸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쏟아냈다.
용천혈에 바늘이 꽂히는 느낌이다. 날카로운 도끼가 삼음교에 틀어박힌다. 발목이 떨어져 나간다.
아걸은 가상 통증에 힘입어서 몸의 중심을 잡았다.
“독, 암기, 화약…… 쓸 거는 다 쓰네. 여기에 불까지 동원하면 그야말로 염라대왕도 벗어나지 못하겠어.”:
아걸이 중얼거렸다.
“네 말이 맞아. 여기에다가 화마까지 동원하면 완벽하지. 그래서 불도 쓰려고.”
스읏! 슷!
팔괘진을 형성한 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일제히 부싯돌을 켜서 발밑으로 던졌다. 순간,
화르르륵! 화르륵!
그들 등 뒤에서 불길이 확 일어나며 삽시에 사방으로 번졌다.
불길은 원을 그리면서 금방 검진을 에워쌌다. 팔괘진은 물론이고 그 안에 있는 구궁진까지도 포위했다.
“용케도 이런 걸 만들었군.”
아걸이 피식 웃었다.
사상진과 구궁진이 아걸을 막아서는 사이 팔괘진을 형성한 자들은 급히 땅을 팠다. 장창을 날리기는 했지만, 눈길을 유도하는 행동이었다. 실제로는 땅을 팠다.
검진은 상황에 따라서 급조된다. 언제 어디서 검진을 펼칠지 모른다. 미리 땅을 파놓고, 기름을 부어놓은 곳으로 적을 유인하기는 어렵다.
사상진이 희생을 자초하고, 구궁진이 시간을 버는 사이에 이들은 원형으로 땅을 팠다. 그리고 불이 잘 붙도록 기름을 쏟아부었다.
아니, 안에 있는 사람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인화 물질을 들이부었다. 아마도 저 불길은…… 살짝 스치기만 해도 몸에 달라붙을 것이다. 인화성이 매우 강해서.
이제 화망 안에 갇힌 사람들은 날개가 달리지 않은 이상 빠져나가지 못한다.
구궁진, 팔괘진…… 살 생각이 없다. 어차피 혈삭참맥을 쓸 생각이다. 자신들의 죽음은 이미 생각 밖이다. 이들은 오직 아걸을 죽이고자 한다.
스스스!
살아남은 무인 열다섯 명이 검진을 펼쳤다.
팔괘진은 원형을 유지했고, 구궁진은 죽은 두 명의 자리를 비워두었다.
그들이 일제히 겉옷을 벗었다.
그러자 그들의 몸에 강철 복갑이 드러났다. 복갑 좌우로는 화약도 매달려있었다. 병기는 또 있다. 무인들의 손에는 작은 옥병이 들려 있었다.
“그건 뭔가?”
아걸이 물었다.
“산. 염산. 일단, 이 염산부터 막아봐. 후후!”
무인 열다섯 명이 손에 약병을 들고 포위망을 좁혀왔다.
“너희…… 정말 무인이 아니구나. 이건 정말 막가자는 건데.”
“너 같은 놈을 잡을 수 있다면 막가도 좋지. 이보다 더한 짓도 할 수 있어.”
“그럼 해 봐. 하겠다는데 말릴 도리가 있나.”
아걸은 빙글 휘돌았다. 그리고 어느새 반철도가 번쩍 터져나갔다.
쒜엑! 퍼억!
반철도가 벼락같이 날아가서 다가서는 무인의 몸을 꿰뚫었다.
“커억!”
칼에 맞은 자가 뒤로 훌훌 날아가 화마 너머로 떨어졌다.
무인은 육신마저 보존하지 못했다. 화마 위를 지나갈 때 불길이 옮아붙어서 큰 불덩이가 되어버렸다.
아걸은 반철도를 던지기 무섭게 죽은 자의 검을 집었다. 그리고 또다시 빙글 휘돌면서 검을 던졌다.
퍼억!
검이 또 한 명의 몸을 꿰뚫었다.
그 역시 날아오는 검력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훌쩍 날아가 떨어졌다. 검을 들어서 비검을 막아보려고 했지만, 속도 차이가 워낙 벌어졌다. 검이 몸을 꿰뚫은 후에 방어를 시작한 듯 보였다.
쿵!
이번에 당한 무인은 화망을 벗어나지도 못했다. 원형 불덩이 위에 떨어졌다.
곧 거친 불길이 육신을 집어삼켰다. 순간,
촤촤촤촥! 촥촥촥!
무인들이 염산을 일제히 뿌렸다.
아걸은 땅을 박차고 허공으로 솟구쳤다.
‘채착각배(踩著腳背)!’
허공에서 자신의 발등을 밟고 다시 한번 도약했다.
아걸의 채착각배는 떨어지는 나뭇잎만 밟아도 재도약할 힘을 준다.
두 번의 도약은 저들의 예상을 벗어난다. 확실히 이런 수법은 생각하지 못했다.
저들이 신형을 따라붙지 못하고 잠시 움찔거렸다.
그 순간, 아걸은 쏘아 올라갈 때보다 더 빠르게 떨어졌다.
쒜엑!
각척공중(腳踢空中)이다. 채착각배가 위로 솟구치는 동작이라면, 각척공중은 허공을 발로 차서 밑으로 떨어지는 신법이다. 순간적으로 두 무릎을 굽혔다가 쭉 펴면서 떨어지는 힘에 가속을 붙인다. 커다란 쇳덩이가 떨어지는 것보다 훨씬 빠르다.
꽝!
몸과 몸이 부딪쳤다.
허공에서 떨어진 몸뚱이가 검진을 형성하고 있던 무인의 몸을 찍어눌렀다.
보통 이런 경우 두 명 모두 중상이다. 하지만 아걸은 마지막 순간에 몸을 잔뜩 움츠렸다. 머리로 부딪치지 않고 등으로 떨어졌다. 등뼈가 어깨를 찍어 눌렸다.
무인은 어깨뼈가 부서지면서 풀썩 무너졌다. 어깨뼈에 이어서 갈비뼈까지 와르르 무너져버렸다.
아걸은 벌써 그가 들고 있던 검을 빼앗아 들었다. 그리고 옆에 있던 자의 다리를 잘라냈다.
“크윽!”
“아악!”
두 명이 비명을 지르며 무너졌다.
아걸은 이에 그치지 않고 즉시 검을 던졌다. 상대가 누군지 알 필요가 없다. 사람이 있으니 던진다. 이곳에는 자신 외에 모든 사람이 적이다.
슉! 팍!
한 사람이 쓰러졌다.
아걸은 반철도를 고집하지 않았다. 그는 검을 쓰는 순간에도, 몸뚱이를 던지는 순간에도 모든 행동이 일홀도를 향한다고 생각했다. 몸으로 몸을 치는 것도 도법이다.
슈우우웃!
아걸은 구궁진에 이어서 팔괘진마저 뚫었다.
저들은 너무도 급작스러운 공격에 혈삭참맥을 시전하지 못했다. 엉겁결에 따라붙다가 아걸을 놓쳐버렸다. 아걸이 취한 행동은 숨 한두 모금 쉴 사이에 행해진 것이다.
슈웃!
아걸이 화진을 타고 넘어갔다.
불길의 폭은 무려 일 장에 달한다. 불꽃 한 자락만 닿아도 불이 옮겨붙는다.
아걸은 일 장 넓이의 불길을 단숨에 건너뛰었다.
아걸은 이미 이런 화마와 싸워본 경험이 있다. 그때는 철질려가 자동으로 튀어나왔다. 그에 비하면 인간의 의지로 죽음을 선택해야 하는 혈삭참맥은 한 수 뒤처진다.
이런 경험들이 미리 준비라는 것을 하게 만들었다.
예전 같으면 무작정 불길을 타고 넘었을 테지만, 지금은 자신과 부딪혀서 죽은 자의 시신을 화진 한가운데 던졌다. 그리고 그의 신형이 떨어지기 전에 그의 몸을 밟고 튕겨 올랐다.
불길을 철저히 피한다. 단 한 자락의 불꽃도 건드리지 않는다. 화상 때문에 그만큼 고생했으면 됐다.
파파팍! 파파파팟!
뒤늦게 혈삭참맥이 터졌다.
아걸이 빠져나가려고 하자 저들이 급하게 전신 진기를 꽈리처럼 비틀어서 터트렸다. 더는 망설일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무인들이 최선을 다했을 때는 이미 화진 밖으로 벗어난 후였다.
저들이 일으킨 폭사는 화진 안쪽을 초토화시켰다. 아니, 화진 밖까지 강한 피 보라가 몰아쳤다.
꽈꽈꽈꽉! 꽈꽈꽉! 꽈앙!
주변에 있던 나무며 뿌리며 온갖 것들이 부서진 강편 조각, 살점, 뼛조각에 부서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