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九十二章 혈삭참맥(血索斬脈) (5)
“저놈들 저거…… 저러고도 성검문 이십사 위문이라고 말할 수 있나? 아무리 보는 사람이 없는 곳이라고 해도 이건 너무 하잖아. 하! 세상 말세네.”
흑후가 중얼거렸다.
주위에는 아걸의 싸움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많다. 이십사 위문 문주들은 물론이고, 제자나 몇몇 주요 인물들도 은밀히 숨어서 지켜본다.
그중 위문의 적은 없다. 지켜보는 사람은 많지만, 모두가 아걸을 죽인다는 목적으로 뭉친 사람들이다. 누군지 알 수 없는 사람이 지켜보고 있어도 신경 쓰지 않는다. 탕산은 이십사 위문과 연관된 사람이 아니면 입산이 차단된다.
흑후는 누구에게 발각될 염려 없이 편안하게 지켜봤다.
은신해 있는 사람 중에서 누군가가 그를 발견했어도 이십사 위문 사람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파파팍! 파파팟! 파팟!
화진 안에서 터진 파편들이 성난 소낙비처럼 퍼부어댔다.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편안하게 숨을 고르는 아걸의 모습이 보였다. 혈삭참맥이라는 악독한 수법을 저렇게 편안히 받아낼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화진 안에서 검진을 펼친 자 중 적어도 십여 명 이상이 생죽음을 당했다.
차라리 아걸과 싸우다가 죽었으면 원이라도 없을 것이다. 지금, 이 상황은 아무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자신 스스로 혈삭참맥을 시전한 것과 뭐가 다른가.
무인들의 애꿎은 죽음은 아걸이 만들어 낸 것이다.
저들이 바보라서 이런 상황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저들은 검진을 누구보다도 잘 활용한다. 특히 하나뿐인 목숨을 던질 때는 더욱 신중하다.
아걸이 저들에게서 자진할 시간을 빼앗았다.
사실, 이런 결과는 매우 당연하다. 저들이 뛰어나다지만, 아걸은 당대 제일 무인으로 성장하고 있다. 싸움 경험도 무척 많다. 그것도 강한 자들과 싸워왔다.
강호 무인 중 아걸처럼 생사고비를 숱하게 넘나든 사람이 또 누가 있을까?
그러니만치 아걸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번 결과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이런 정도의 함정으로는 아걸을 어쩌지 못한다. 아걸이 어떻게 싸울지는 전혀 모르지만, 무조건 이길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이십사 위문이다.
흑후는 이들이 어떻게 싸울 생각인지 명확하게 알았다.
아걸은 나무 뒤에 편안한 모습으로 앉아서 몸에 박힌 철판들을 뽑아내고 있다.
주위에는 아걸을 노리는 자들뿐이다. 그런데도 공격하지 못하고 있다. 아걸이 절대 얕지 않은 상처를 입었는데도 달려드는 무인이 없다.
아걸도 서둘지 않는다. 경혈을 눌러서 지압하는 모습이 매우 여유롭다. 그리고 금창약도 아낌없이 뿌린다. 뒤를 생각하지 않고 지금 모두 사용한다.
‘쯧! 좀 아껴두지.’
흑후가 오히려 아걸을 걱정할 판이다.
이들은 본격적으로 싸움을 걸지 않았다. 지금은 겨우 맛만 본 전초전이다. 그런데도 벌써 하의가 붉은 피로 물들 정도로 많은 상처를 입었다.
하기는…… 저런 함정을 이 정도의 상처만 입고 빠져나온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다.
누가 봐도 금쇄진은 죽음의 진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일홀문 삼십육 문주 중 그 누구도 저 진을 뚫을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당금 무림에 적을 둔 거의 모든 무인이 저 진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는 소리다.
슷!
아걸이 몸을 일으켰다.
‘앉은 김에 좀 쉬어가지. 뭐가 급하다고 벌써 일어서. 싸움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는데.’
흑후가 미간을 찡그렸다.
아걸은 화진 주위를 수색했다. 반철도에 맞아서 화진 밖으로 나가떨어진 무인을 찾고 있다.
‘반철도를 회수할 생각인가?’
흑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걸의 무공은 노정문주와 싸울 때와는 사뭇 다르다. 그때는 오로지 반철도에 의지했는데, 지금은 아예 반철도를 처음부터 던져 버렸다. 무인이 목숨이나 다름없는 애병을 던져 버렸다. 그리고 검을 빼앗아 썼다. 검이 없을 때는 손도 쓰고 발도 썼다. 몸뚱이를 던져서 부딪치기도 했다.
도법을 전개한 것이 아니라 막싸움을 했다.
그런데도 묘한 것이…… 파락호들처럼 막싸움을 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아걸이 싸우는 모습을 보면 정교한 도법을 구사한다는 느낌이 든다.
손으로 치고, 발로 찼지만, 그 순간까지도 칼을 쓰는 것 같다.
그 사이, 아걸의 무공에 큰 변화가 일어난 것 같다. 물론 좋은 변화다. 아걸의 일홀도는 하루가 다르게 발전한다. 자고 일어나면 다른 칼이 되어 있다.
‘모두 도착했으려나?’
흑후는 산 정상을 쳐다봤다.
한항은 변장술의 달인이다. 단지 변복만 잘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원하는 모든 대상으로 변장할 수 있다. 상인, 농민, 어부…… 그리고 지금의 경우에는 이십사 위문 무인으로.
그가 어느 문파의 문도로 변장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가 탕산 절혼곡으로 들어서고 있다는 사실만은 안다.
송가검문주와 싸울 곳에 그도 있다.
아걸은 반드시 송가검문주와 싸울 것이다. 그러니 아걸이 반드시 나타날 곳에 그가 먼저 가서 기다린다. 그런 쪽에서 생각해 보면 한항은 아마도 송가검문 문도로 변장해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추측일 뿐이다.
비석 장태전도 한항과 함께 절혼곡으로 갔다.
그는 송가검문주 곁에 있지 않는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은밀히 숨어 있을 것이다.
절혼곡에는 그가 무기로 사용할만한 비석이 많을 것이다.
곡(谷)이 있으면 돌이 있다. 돌이 있으면 남만의 비석탄을 사용할 수 있다.
장태전은 비석탄을 마음껏 쓸 요량이다.
현재, 이 두 사람은 절혼곡에 도착해 있거나 아니면 이동하는 중일 것이다. 두 사람은 탕산에서 벌어지는 싸움에 일절 신경 쓰지 않는다. 오로지 침투하는 데만 집중한다.
아걸이 절혼곡에 도착하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니 서둘 필요는 없다.
지당검 고사와 쾌검의 달인 나통은 곡구에 잠입했다.
곡구는 절혼곡을 벗어날 수 있는 출구다. 어느 산이든 골짜기를 타고 내려오면 산을 벗어날 수 있다. 당연히 곡구에는 이십사 위문 무인들이 단단히 막아섰다.
두 사람은 그곳으로 잠입했다.
두 사람은 본격적인 싸움을 벌일 예정이다. 이십사 위문 무인들이 아걸을 쫓을 경우, 두 사람이 나선다.
지당검과 나통은 정통 무인이다.
암기를 다룰 줄은 알지만 사용해 본 적은 없다. 검을 사용하지 않는 싸움은 생각해 본 적도 없다. 두 사람은 암습이라는 말조차 매우 역겨워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암습을 가할 생각이다. 암습이 아니면 개죽음만 기다린다.
죽어도 암습 같은 짓은 하고 싶지 않지만, 딱 이번 한 번만 아걸을 위해서 한다.
쌍겸과 황열은 절혼곡 양쪽 봉우리 위에 자리 잡는다.
그들은 시야가 탁 트인 곳에서 상황을 주시하며 신호를 보낼 예정이다.
탕산에는 고수가 천여 명이 넘게 들어와 있다.
늑대 천여 마리가 득실거린다. 이리라고 해도 좋고 승냥이라고 해도 좋은데, 매우 사나운 맹수들이다.
그들 속으로 최상위 포식자인 호랑이가 뛰어들었다.
이럴 경우, 늑대들은 도주한다. 절대로 호랑이와 싸우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숫자가 천여 마리에 이르면 달라질까? 어쩌면 호랑이에게 겁먹지 않을지도 모른다.
호랑이가 늑대 무리는 먹잇감에 불과하다. 늑대가 아무리 많아도 태연히 달려들어서 가장 만만한 놈을 잡아먹는다. 그러는 동안 다른 늑대들은 도주하기 바쁘다.
호랑이에게는 늑대를 능가하는 근육과 이빨과 발톱이 있다.
하지만 호랑이가 아무리 맹수라고 해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늑대가 열 마리만 되어도 함께 뭉쳐서 호랑이와 싸울 수는 없는 것일까? 먹잇감을 사냥할 때는 서로 손발을 맞춰서 협동 사냥을 그토록 잘하면서 정작 자신들이 위태로울 때는 왜 뿔뿔이 흩어지나. 왜 도주하기 바쁜가.
호랑이에게 겁을 먹었기 때문이다.
늑대의 뿌리 속에는 호랑이의 상대가 안 된다고 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호랑이가 달려들면 무조건 도주한다. 맞서 싸울 생각을 하지 않는다.
지금 이십사 위문과 아걸의 관계가 딱 그렇다.
평소 같으면 이십사 위문 무인들은 절대로 아걸에게 달려들지 않는다. 허도기와 싸우고 소축십검을 갈대처럼 베어버린 고수에게 누가 달려들 수 있나.
아걸은 호랑이가 되어서 늑대 무리 속에 뛰어들었다.
처음에는 호랑이가 이길 것이다. 이리저리 물어뜯고 닥치는 대로 할퀴어 버릴 것이다.
동물의 세계에서는 이대로 승부가 끝난다.
하지만 이십사 위문은 호랑이에게 겁먹지 않고 계속 달려든다. 죽여도 죽여도 계속 달라붙는다. 결국은 호랑이도 지치게 되어 있다. 상처를 입고 밀린다.
탕산 싸움은 그런 싸움이 된다.
호랑이가 물어 죽이고 발톱으로 찢어 죽여도 계속 달려들어서 꼬리를 물고 다리를 물고 옆구리를 물어뜯는다. 늑대 무리가 몰살당할 때까지 계속 싸운다.
아걸이 어디까지 싸울 수 있을까?
쌍겸과 황열은 그런 싸움을 자세히 살핀다.
흑후는 아걸을 은밀히 뒤쫓다가 ‘이제는 정말 마지막이다’ 싶은 순간이 오면 아걸을 구할 생각이다.
흑후가 이십사 위문의 합공 속에서 아걸을 구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흑후에게는 아걸을 구할 능력이 없다. 그만큼 무공이 높지 않다.
이십사 위문은 결코 만만한 문파가 아니다. 그들에게 둘러싸이면 죽을 수밖에 없다. 아걸 같은 사람이나 이십사 위문을 종이호랑이로 여기지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여기지 못한다.
흑후는 목숨을 내놓았다.
아걸이 절체절명의 위험한 순간에 처했을 때 딱 한 번 그를 위해서 목숨을 던진다. 그리고 아걸에게 지당검과 나통이 기다리고 있는 길을 알려줄 것이다.
은거 무인들은 탕산에서 살아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물론 흑후가 목숨을 던질 때쯤이면 쌍겸과 황열도 산을 치달려 내려오도록 했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치달려 내려오면서 이십사 위문 무인들을 공격한다. 사방에서 먼저를 피워내면 아걸에게 집중된 힘이 조금이라도 분산되지 않을까 한다.
은거 무인들이 약속한 곳에 자리를 잡았는지 아는 방법은 없다.
이십사 위문은 티끌만 한 변수도 모조리 차단한다. 그러니 그들이 알지 못하는 신호는 보내지 못한다. 화탄이나 연은 물론이고 새소리조차도 삼가야 한다.
아걸이 본격적으로 싸움을 벌이면 그때부터 화탄 신호를 보내기 시작한다.
싸움이 벌어지는 중에는 모든 시선이 아걸에게 집중된다.
그때는 이십사 위문 쪽에서도 온갖 신호를 보내게 된다. 탕산에 들어선 무인이 많으니 온갖 신호와 소리와 난무할 것이다. 각 문파마다 신호체계도 다르다.
그때가 되면 황열과 쌍겸이 보내는 신호도 신경 쓰지 않는다.
제대로 잠입했는지는 그때에서야 알 수 있다. 그전에는 오직 믿을 수밖에 없다.
스읏!
흑후는 산정을 쳐다봤다.
‘도착했을까?’
황열은 걱정하지 않는다. 아! 잠입 여부를 걱정하는 것은 아니다. 은거 무인들이라면 틀림없이 예정된 시간에 약속 장소로 스며들 것이다.
흑후가 걱정하는 것은 돌발 행동이다.
황열은 진중한 사람이니 걱정하지 않는다. 쌍겸이 불안하다.
쌍겸은 치사한 꼴을 보지 못한다. 마도 쪽 인물이어서인지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정심한 계략이나 틀에 박힌 공격은 마뜩잖아 한다.
그도 아걸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이번만큼은 성질을 죽이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래도 불안하다. 산을 타다가 아걸 모습을 봤다면 당장 달려올 수도 있다.
원래 쌍겸은 지금과 같은 계획도 반대했다. 그는 아걸 곁에 서서 같이 싸우자는 쪽이었다. 탄탄하게 뭉쳐진 힘으로 뚫고 나가자고 주장했다.
그러면 어떻게 되었을지…… 보라.
은거 무인들이 아걸 곁에 있었다면 저 화진을 뚫고 나오지 못했다. 아마도 혈삭참맥에 당했을 가능성이 크다. 여섯 명 중 적어도 두세 명은 쓰러졌다.
팔천검문 무인들이 펼친 금쇄진은 절대 가볍지 않다.
스읏!
흑후는 쌍겸이 맡은 오른쪽 봉우리를 쳐다봤다.
‘우리가 숨어든 걸 눈치채게 해선 안 돼. 불의의 기습이야말로 가장 좋은 돌파구야. 철저하게 잠입 사실을 숨기고…… 그래야 기습 효과가 커. 훗!’
흑후는 생각을 잇다 말고 피식 웃었다.
괜한 기우인가? 아마도 은거 무인 중에서 암살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쌍겸이 아닐까 싶다. 당연히 어떻게 하면 이목을 분산시킬지도 잘 알 것이고.
모두 제 몫을 다해주기만 바랄 뿐, 더는 할 것이 없다.
스슷! 스스스슷!
주위에서 기척이 일어났다.
아걸을 지켜보던 무인들이 조용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흑후가 잠시 생각을 더듬는 사이, 아걸이 반철도를 회수해서 허리에 찔러넣었다. 그리고 이동한다. 주위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이미 종사(宗師)가 됐어.’
흑후는 아걸 모습에서 허도기의 모습을 봤다.
아걸은 넘을 수 없는 산처럼 보인다. 아주 단단한 절벽처럼, 또는 폭풍이 일어나기 직전의 고요처럼 보인다. 어떤 힘에도 부서지지 않을 것 같다.
‘나도 슬슬 따라가 볼까?’
흑후는 이십사 위문 무인들을 느끼면서 슬며시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