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九十三章 생사존망(生死存亡) (1)
탕산의 공기는 덥다.
날씨가 더워서 더운 게 아니다. 탕산이 주는 분위기가 덥다.
탕산의 공기가 차가울 때도 있다. 공기는 상황과 환경에 따라서 시시각각으로 변한다. 지금은 무척 덥다. 일반인에게는 서늘한 날씨일 망정 무인인 아걸에게는 더운 날씨다.
“덥네.”
아걸은 앞섶을 살짝 열며 중얼거렸다.
방금 한바탕 칼부림을 하고 난 후라서 몸이 더워진 것일까? 아니면 산 공기 자체가 더운 것일까? 어쨌든 산길을 걷다 보니 무척 후덥지근하다는 느낌이 든다.
무인으로서 열기와 피를 감지하고 있다.
동물이 사냥감의 냄새를 맡을 때처럼 아걸도 싸움의 냄새를 맡고 있다.
저벅! 저벅!
아걸은 숲길을 걸어 들어갔다.
스스슷! 스스스슷!
아걸이 움직일 때마다 많은 사람이 함께 움직였다.
이십사 위문 검수들이다. 하지만 아걸을 막아서는 사람은 없었다. 막으려는 의도조차도 없는 듯했다. 굳이 말하자면 구경꾼? 딱 구경꾼 모습이다.
하지만 저들은 단지 구경만 하는 게 아니다. 아걸이 걸어온 길을 철저히 차단한다.
촤촤촥! 촤촥!
숲을 지나치면 숲을 차단한다. 개울을 건너면 개울이 흐르지 못하게 막는다.
아걸이 돌아서지 못하게 족쇄를 채운다.
들어가는 것은 자유다. 하지만 나오지 못한다. 굳이 나오려면 지금 채워지고 있는 족쇄들을 모조리 부셔야 한다. 지금 감지하는 있는 기척들을 모두 지워야 한다.
저들이 아걸을 공격하는 시기는 절혼곡 중심처에 도착한 후이다.
깊이깊이 끌어들인 후 나가지 못하게 만든다.
“많이도 왔네.”
아걸이 숲을 걸으면서 중얼거렸다.
숲 곳곳에 무인들이 보인다. 지금 저들은 일부러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자신들이 이만큼 많이 왔다고 엄포를 놓고 있다. 아걸에게는 통하지 않는 수법이지만. 물론 아걸이 탕산을 빠져나가고자 뒤돌아서면 즉시 모습을 감춘다.
이 싸움은 무공 대 무공의 싸움이 아니다.
남만족 칠백여 명과 싸울 때도 이처럼 지저분하지는 않았다. 그때는 무공 대 무공으로 싸웠다. 서로 힘과 힘으로 부딪쳤기 때문에 덥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통쾌하고 시원했다.
탕산 싸움은 무공을 상관하지 않는다. 오직 상대방을 죽이려는 목적 하나뿐이다.
그러니 오히려 역으로 지금 아걸이 저들을 공격해 들어간다고 해도 뭐라고 말하지 못한다.
“어쨌든 나갈 때 공격한다는 거네. 그러면 들어갈 때는 안전하잖아. 굳이 힘 뺄 필요가 있나.”
아걸은 편한 마음으로 걸었다.
스스슷! 스스스슷!
일단의 무리가 빠르게 움직였다.
그들은 흑의를 입었다. 검을 등에 메고 있으며, 허리에는 두툼한 요대를 찼다. 언뜻 수리검, 표창 등 온갖 암기들이 보인다. 암기의 종류는 사람마다 다르다.
또 그들은 복면을 썼다.
서로 신분을 숨길 필요가 없는데 왜 굳이 복면을 썼나? 숲이라서 보는 사람도 없는데. 복면을 쓰면 덥지 않나? 땀이 흐르면 곤란할 텐데.
얼굴을 가릴 목적이 아니다. 빛의 반사를 막기 위해서다.
얼굴에 낀 기름기는 달빛에 반사가 된다. 거울에 비치듯 반짝이지는 않지만, 모습을 뚜렷하게 보여 준다.
그래서 은자들은 얼굴에 고약을 바른다.
얼굴 전체에 바르기도 하고, 눈 밑이라거나 코, 턱 등 특정 부위에만 바르기도 한다.
고약을 바르면 달빛 반사가 한결 감소된다.
일단의 무리는 얼굴 전체를 감싸 버렸다. 티끌만 한 허점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습을 보였다가 즉시 사라졌다.
“저들이 동영 인자인가?”
“유음류라고 하던데?”
“쉿! 유음류는 입에 담아서는 안 돼. 그 말을 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목이 날아간다고.”
“우리도? 우린 같은 편이잖아?”
“악귀가 내편 네편 따지는 거 봤어? 조용히 해.”
이십사 위문 무인들이 수군거렸다.
복면인들은 이십사 위문 무인들을 보고도 경계하지 않았다. 전혀 경계하지 않았다. 공격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이 자들 어디로 간 거야? 갑자기 사라졌네?”
“사라진 게 아니라 숨은 거지. 우리 주변에 있어. 우리가 찾아내지 못하는 거지.”
“아!”
주위에 사람이 있다. 찾아내지 못하는 것일 뿐. 그러니 입을 조심해야 한다. 자칫하면 목이 날아간다.
무인들은 저들이 주위에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어디에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들도 만만치 않은 무공을 수련한 무인들인데, 자신들의 이목에 전혀 걸려들지 않았다. 완벽하게 숨었다.
저들은 몇 명이나 왔을까? 모른다.
동영 인술 유음류라는 것만 알지 어떤 식으로 싸우는지도 알지 못한다. 다만 인술이라는 것으로 추측해 보면 중원 살수 문파 정도로 움직이지 않을까 짐작된다.
분명한 것은 저들은 절대로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저들이 언제 움직일까? 언제든 가능하다. 기회를 포착하면 망설임 없이 튀어 나갈 것이다.
이십사 위문 무인들은 유음류를 잘 알지 못한다. 그저 동영에서 꽤 유명한 인술이라고만 안다. 하지만 그런 그들도 분명하게 아는 게 있다.
저들은 무인이 아니다. 살인 병기다.
이십사 위문 무인들이 무리 지어서 아걸을 죽이려고 하는 것처럼 저들도 오직 죽이는 데만 초점을 맞춘다.
지금처럼 아걸이 최상의 상태라면 공격하지 않는다.
정정당당하게? 인술의 승리는 죽음을 쟁취했을 때만 나온다. 무공과 싸울 필요가 없다. 적만 죽이면 된다.
“후후후! 후후!”
송가검문주가 웃었다.
‘이 사람들 정말 웃기는군.’
송가검문주는 자신이 이용당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원래 약속은 이것이 아니었다. 이십사 위문은 아걸이 절혼곡까지 들어오는 동안 최선을 다해서 공격하기로 약조되어 있었다. 건의 전 문도가 공격에 참여하기로 했다.
아걸은 지치고 힘들어진다. 피투성이가 된다. 무려 천 명 이상을 베어야만 자신 앞에 도착할 수 있다. 그러면 송가검문이 마지막 숨통을 끊기로 했다.
모든 공격 계획이 그렇게 짜여 있다.
그런데 아걸을 공격하는 문파가 없다. 모든 문파가 길을 열어 주고 있다.
완전히 열어 준 것은 아니다. 아걸이 통과하면 뒤를 봉쇄한다.
착착! 착착착!
탕산에 자물쇠가 채워지고 있다.
팔천검문주는 미련한 편이다. 그는 절진으로 아걸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디서 나온 자신감인지 모르겠지만, 정말로 그렇게 믿었다.
그 말은 바꿔서 말하면 절진으로 공부 허도기도 잡을 수 있다는 말이 된다.
팔천검문주는 그렇게 믿고 공격했다.
팔천검문주는 아걸 한 명 잡는데 이십사 위문이 함께 합공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굳이 이렇게까지 싸울 필요가 없다!
이십사 위문이 합심해서 아걸을 죽이면 그 누구에게도 공로가 돌아가지 않는다. 단지 공부의 명령을 충실히 따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싸우는 와중에 누가 어떻게 죽었더라도.
팔천검문이 단독으로 아걸을 잡으면 그 공로는 오로지 팔천검문에게 돌아간다.
공로에 취하면 목숨을 잃는다.
팔천검문 문주는 지금쯤 땅을 치고 후회할 것이다.
솔직히 그만한 검진을 만들기는 쉽지 않다. 그런 고수들을 또 어디 가서 구할 것인가.
팔천검문주는 큰 자산을 잃었다.
하지만 그는 여한이 없을 것 같기도 하다. 절진으로 허도기마저 무너트릴 수 있다고 믿었다면 아걸을 상대하는 것은 당연했다. 자신이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송가검문주는 입장이 다르다.
그는 이십사 위문을 위해서 나섰다. 그들을 대표해서 검자루를 잡았다.
모두가 합의된 사항이다.
그런데 모두 뒤로 빠졌다. 이제는 자신 혼자서 아걸과 부딪히게 생겼다.
물러설 수 없는 외통수다.
‘좋아. 어디 공부와 싸웠다는 칼 한 번 보지.’
송가검문주는 노정문주가 일 초 만에 쓰러졌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파앗!
오랜만에 피가 끓었다.
칼과 칼의 부딪침, 생사 결전을 벌이기 직전에 찾아오는 긴장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떨림을 오랜만에 느꼈다.
파르르 손끝이 떨린다.
두려워서 떨리는 게 아니다. 긴장해서 떨리는 것이다.
송가검문주는 손을 들어 허공에 대고 탁탁 털었다. 긴장될 때마다 하던 습관이다.
“아걸이 섬암(蟾巖)을 지나쳤습니다.”
조카 송전휘(宋全輝)가 말했다.
“전휘야.”
송가검문주가 차분하게 조카를 불렀다.
“네.”
송전휘가 바싹 긴장한 얼굴로 송가검문주를 쳐다봤다.
송전휘도 이제는 아걸과 부딪칠 때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단단히 준비하고 있다.
“내가 쓰러지면 너는 철수해라.”
‘네? 그게 무슨 말씀……?”
”아무 소리 하지 말고 무조건 철수해. 은밀히. 아주 은밀히 철수해. 이 일은 네가 책임지고 맡아라. 우리 송가검문 문도…… 안전하게 집에까지 데려가.”
”문주님!”
”뒤는 생각하지 마라. 내가 죽으면 송가검문은 사라진다. 목숨을 보전해도 재기 불능이 될 거야. 일으키려고 하지 마라. 너희 목숨을 구하라는 거다.”
“문주님! 안 됩니다. 저희는 여기서 문주님 곁을 지키겠습니다.”
“주위를 둘러봐라. 뭐가 보이는지.”
송전휘가 주위를 둘러봤다. 보이는 것은 없다. 완벽하게 포진한 송가검문 문도만 보인다.
“내가 죽으면 그다음은 너희가 부딪친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 너희 모두가 죽을 때까지. 내가 한순간 잘못 판단해서 우리가 최전선에 나서게 된 거야.”
“문주님, 압니다. 그래도 하겠습니다. 피하지 못할 싸움이라면 즐기면서 싸워야죠.”
“미련한! 나는 여한이 없다. 이기면 좋고 지더라도 여한이 없어. 아걸은 공부와 필적한다. 일홀문주 아니더냐. 이 세상에 일홀문주와 싸워서 졌다고 억울해하는 사람은 없어. 일홀문주는 절대다. 아걸은 이미 절대 칼을 얻었어. 그 칼이 무엇인지 구경하고 죽는다면 여한이 없다.”
송전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명심해. 명령이야. 문도를 빼내. 목숨을 구해. 송가검문을 해산하고, 편히 민초로 돌아가서 살아. 너희가 발버둥 친다고 해서 버틸 수 있는 게 아니야. 이십사 위문은 오늘을 기해서 쇠락이 길을 걷기 시작할 테니까.”
허도기가 이십사 위문을 버렸다.
이십사 위문이 어떠한 타격을 받더라도 오직 아걸을 묶어두는 데 목적을 두었다.
사실, 승산은 이십사 위문에게 있다.
지금 이대로 싸우면 승산은 반반이다. 승기를 누가 잡느냐에 따라서 판세가 변한다. 하지만 이십사 위문에는 유음류가 달라붙었다. 살인귀들이.
공부는 승산이 최소한 팔 할은 되어야만 움직인다.
이 싸움은 팔 할 승산이 있다. 유음류가 대번에 승산 삼 할을 올려놓았다.
아걸은 죽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싸움에 관여한 모든 문파가 힘을 잃는다. 아걸을 죽이는 데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공부가 일으킨 돌풍을 피해. 이 돌풍에 휘말리면 모두 죽어. 이 자리에 모인 무인들처럼. 꼭…… 피해라. 네가 책임지고.”
“문주님!”
“위치로!”
문주는 송전휘를 쫓아냈다.
“아걸이 용소(龍沼)를 지나쳤습니다.”
또 보고가 들어왔다.
두꺼비 바위를 지나고 용소를 넘었다. 이제 대략 일다경 정도면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목숨을 놓으니 모든 게 보인다.
명예를 쥐고 있을 때는, 아걸을 죽일 수 있다는 아집에 쌓여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환히 보인다. 공부가 일으킨 돌풍도, 그 돌풍에 휩쓸린 이십사 위문의 종말도 보인다.
송가검문주는 이제야 비로소 진정한 문주가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후후! 문주로 지낸 지 몇 년인데 이제야…….”
지금의 송가검문주와 조금 전에 송가검문주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위치로!”
송가검문주는 강하게 말했다.
“문주님!”
“잊지 마라. 올바르게 판단하고, 목숨을 건져. 명예에 휩쓸리지 마라. 여긴 아수라야. 나도 준비해야겠다. 가!”
“문주님!”
송전휘가 두 손 모아 읍했다.
아걸이 오고 있다.
어찌 되었든 아걸과 송가검문주가 싸울 자리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제삼자는 자리에서 비켜주는 게 예의다.
쉬이잇!
송전휘가 신형을 날려 숲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