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일홀도-464화 (464/600)

第九十三章 생사존망(生死存亡) (4)

아걸은 계곡을 틀어막은 자들에게 달려들었다.

좌우에 있는 자들을 찾아다니면서 벨 수는 없다. 그들 속으로 뛰어들면 화살을 쏘지 않을지 혹여 모르겠다. 하지만 숲으로 들어서면 또 다른 함정이 기다린다.

눈앞에 있는 무인들을 공격하는 것이 가장 변수가 적다.

차창! 차아앙!

무인들이 활을 놓고 검을 뽑았다.

아걸이 달려들자 그들도 위기를 느꼈다. 그러자 즉시 애병을 뽑았다. 활로 상대할 수 없는 자라고 느꼈다. 아걸이 화살을 상당히 쉽게 피했으니까.

다급한 가운데도 검초가 부드럽고 유연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가벼웠다.

이들은 화화문도다. 꽃송이처럼 부드럽고 화사한 기운이 검초에 녹아 있다. 늘 차분하고, 조용하며, 빠르게 흘리는 운기(運氣)가 검에 섞여 나온다.

깡! 까앙! 깡!

아걸은 흘러들어온 검을 힘으로 찍어눌렀다.

이들이 펼치는 검공은 너무 부드러움에 치중되어 있다. ‘부드러움’이 지니는 의미를 잘못 해석했다. 검초를 마냥 가볍게 흘려서는 강력한 타격을 할 수 없게 된다.

화화문도는 검을 사용하는 한, 강력하게 쳐낼 필요가 없다는 주의다. 빠르게 쓰면 된다. 빠름이 강력함을 대신해 준다. 아니, 빠르게 움직이다 보면 자연스럽게 강해진다.

검사는 검을 빠르게 움직이지만, 검이 스스로 강해진다. 아주 강한 타격을 일으킨다.

아걸은 이런 검리(劍理)를 힘으로 무너트렸다.

까앙! 퍼억!

검과 칼이 마주쳤고, 검이 밀려났다. 그러면 그 후에 반철도가 어떻게 움직일지는 보지 않아도 안다.

“크아악!”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걸은 비명을 듣지 않았다. 비명이 터지는 순간 또 다른 검사의 가슴을 쳤다.

무인의 심장이 단숨에 썰렸다.

도 심장까지 칼이 푹 바뀌었다.

쒜에에에엑! 파파파파팟!

그 사이 사방에서 칠 검이 휘몰아쳤다.

아걸은 반철도를 가슴 앞에 세우고 한 바퀴 빙글 휘돌았다.

츠츠츠츳!

아걸이 반응을 보이기 무섭게 달려들던 검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섰다가는 여지없이 동강 날 것이라는 걸 짐작했다.

“후욱!”

아걸이 큰 숨을 내쉬었다.

상대방도 따라서 큰 숨을 내쉬었다.

호흡을 맞추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 역시 본능적으로 일으킨 공격수단…… 아걸은 즉시 무인들을 향해 뛰어들었다.

“웃!”

저들이 깜짝 놀라서 급히 반응했다.

이 시점에서 아걸이 공격해 올 것이라는 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걸이 호흡도 가다듬지 않은 채, 무호흡 상태로 달려드는 격이나 다름없다.

저들은 급히 검을 내뻗었다.

까앙! 깡!

저들이 내뻗은 검은 미처 펼쳐지기도 전에 부딪혔다.

이것이 반 호흡 차이다. 아걸은 완벽하게 칼을 뻗어냈고, 저들은 뻗다가 부딪쳤다. 초식이 완전히 전개되기 전에 완벽한 칼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정작 호흡을 가다듬지 못한 것은 저들이다. 아걸은 지극히 짧은 시간에 호흡을 이미 갈무리했다. 그리고 저들의 호흡이 미처 정돈되기 전에 공격했다.

이 차이는 어지간한 무인도 감지하지 못한다. 알아채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말을 해 줘도 이해하지 못한다. 오직 몸으로 직접 경험해 본 사람만이 반 호흡의 차이를 알 수 있다.

퍽! 퍼퍽!

둔탁한 소리가 연이어 터졌다.

반철도는 앞에 선 무인들을 가차 없이 무너트렸다.

무인들이 일제히 좌우로 쫙 퍼졌다. 근접전으로 검대 칼로 싸워서는 아걸을 이길 수 없다. 그렇다고 거리를 벌리고 진법으로 싸워도 안 된다.

무공으로는 절대 이기지 못한다.

아걸은 비정상적인 방법으로만 공격할 수 있다. 화약도 좋고, 독도 좋다. 그런 걸 써서 빠름과 강함을 무너트린 후에야 공격이라는 것도 할 수 있다.

검으로 싸우는 것은 검사들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검사들이 물러서는 바람에 잠시 공간이 생겼다. 이들을 뚫고 계곡 밑으로 달려 내려갈 수 있다. 저들 스스로 길을 열어 주었지만, 아직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검사들은 본능적인 공포를 느꼈다.

이런 ‘본능적인 공포’는 무림에 몸을 담은 무인이라면 누구나 느낀다. 느끼지 않는 사람이 없다. 다만 수련으로, 혹은 경륜으로 덮어서 표면에 드러나지 않게 누를 뿐이다.

검사들은 깊은 절망감을 느낀 것 같다. 그런 절망감이 억눌렀던 공포를 드러냈다.

아걸에게는 함정을 빠져나갈 수 있는 아주 큰 기회다.

다른 때 같았으면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이 당장 달려내러 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움직이지 않았다.

송가검문주와 싸웠을 때만 해도 이 싸움만 끝나면 빠져나가야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한순간에 바뀌었다. 어떤 계기도 없이.

휘릭!

반철도를 고쳐잡았다. 그리고 물러서는 부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촤와아아악!

반철도가 떨어진다.

아걸의 공격은 화살처럼 빠르다. 그야말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유성이다.

퍽! 까앙! 퍼어어억!

검을 들어서 막은 자나, 미처 막지 못한 자나 결과는 똑같다. 죽음이다.

반철도는 막아서는 검을 두 동강 내버리고 상대를 친다.

반철도의 강력한 힘이 검을 부러뜨린 것일까? 아니다. 화화문이 속도에 치중하듯이 반철도도 속도에 치중했다. 빠르면 강해진다는 화화문의 검리를 아걸이 직접 보여 주었다.

이렇게 빠르면 이만큼 강하다.

이번 싸움은 소축십검과 싸우러 가던 대산방과의 싸움과는 다르다. 그 싸움에서도 혈도비자라는 별호를 얻을 만큼 많은 무인을 죽였다. 남만족과 싸웠던 싸움과도 다르다.

혼자 몸으로 수많은 사람과 싸워야 한다는 점에서는 똑같다. 하지만 그때는 하기 싫은 싸움이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을 죽여야 하나 하는 회의감도 들었다.

이번에는 생각을 바꿨다.

이들은 검사다. 검이 무엇인지 안다. 죽음도 충분히 보고 느껴 왔다. 이들 역시 타인을 죽이면서 누군가의 시신을 딛고 이 자리에 올라선 자들이다. 그 누구보다도 이 자리에 선 이유를 잘 알고 있고, 그 대가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번에는 철저히 싸울 생각이다.

이십사 위문 무인…… 천여 명이 훌쩍 넘는 대군과 단신으로 부딪힐 생각이다.

도주하지 않는다.

아걸은 이번 싸움이 자신의 일홀도에 하나의 전환점이 될 것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이번 싸움을 피하면 어제의 아걸과 하등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이 싸움을 겪고 나면 완전히 달라진 일홀도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런 느낌이 든다.

그 일홀도가 무엇인지는 알 턱이 없다.

지금은 그저 막연한 느낌뿐이다. 강렬한 충동이 이 싸움을 피하면 안 된다고 유도한다.

솔직히 말하면 일홀도를 얻게 될지 아니면 무모한 희생만 늘릴지 전혀 알 길이 없다. 혈도비자보다도 더 잔인한 무명을 얻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이번 싸움은 끝까지 간다.

본능이 말한다. 칼을 들고 부딪쳐라. 피하지 마라.

“물러설 것이 아니면 공격해라. 무인답게 검을 쓰고 죽어라.”

아걸이 화화문 무인들에게 말했다.

차착! 스스스스슷!

화화문 검사들은 정신이 번뜩 든 듯 일제히 검을 고쳐 잡았다.

아걸 주위에는 스무 명 정도가 늘어서 있다. 물론 검진을 형성하고 있지 않다. 모두 일대일의 싸움을 하듯이 최선을 다해서 검을 잡은 모습이다.

‘그래! 이거야.’

아걸은 씩 웃었다.

이제야 만족스럽다. 이렇게 무공 대 무공으로 겨루는 싸움은 언제나 즐겁다.

물론 이들은 이 싸움을 지속하지 않는다. 계속해서 화약을 날릴 것이고, 암기를 던질 것이고, 독을 사용할 것이다. 온갖 사악한 방법이 총동원될 것이다.

어떤 공격이든 상관없다. 이들이 펼치는 모든 공격을 온전히 받아들인다.

하늘을 무너뜨릴 수 있다면 그것도 감당하겠다.

‘어디 해 보자!’

아걸은 반철도를 움켜잡았다. 그리고,

타타타타탁!

칼을 잡음과 동시에 신형을 날렸다.

그가 움직이자 화화문 검사들도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역시 이들의 검은 너무 부드럽다. 부드러움이 극에 이르러서 아예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빠르기는 무척 빠르다.

이렇게 빨리 검을 휘두르면 자신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간다. 어느 순간에는 손에 힘을 꽉 쥐고, 진기를 가득 밀집시킨 채 전력을 다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보통은 그렇다.

이들은 굉장히 빠르게 움직이는데도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그만큼 부단한 수련을 했다는 것이다.

화화문 검리에 춰서 가볍게 쓰는 수련을 이골이 날 때까지 했다.

쒜에에엑! 까앙!

칼과 검이 부딪쳤다. 검들이 사정없이 산산이 조각났다. 마치 강철도와 유리검이 부딪친 것 같다. 정말 말이 한 될 정도로 형편없이 부서져 나갔다.

아걸이 패도(覇刀)를 쓰고 있는 건 아니다. 반철도의 강도가 유난히 강한 것도 아니다. 반철도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쇠로 만든 칼이다.

아걸은 화화문의 검리처럼 오직 빠르게만 던졌다. 다만 검의 중심점을 두들겼다. 또 검날을 친 것도 아니다. 검신, 검의 넓적한 옆면을 타격했다.

검의 특성상 가장 취약한 부분에 칼이 정확하게 들어가니 부서져 나가는 것은 당연하다.

파파파파! 퍼퍼퍼퍽!

반철도가 휘둘러지고 피가 튀었다.

검이 부서진 자들은 즉시 물러서려고 했다. 하지만 반철도를 피하지 못했다.

화화문 검사들이 무더기로 쓰러졌다.

두웅!

북이 울렸다.

그러자 화화문도가 일제히 메뚜기처럼 사방으로 튀어 나갔다.

아걸과 싸움을 피해서 숲으로 도주했다.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을 환히 열어 주었다. 그래도 상관없다. 내려가지 않을 테니까. 저들도 상관하지 않는다. 계곡에도 함정을 마련했으니까.

‘후후! 그렇군.’

아걸은 물러서는 자들을 쫓아서 숲으로 들어갔다.

저들도 애꿎은 희생은 피하려고 한다. 최대한 무인들을 아껴가면서 공격한다.

무작정 전력을 쏟아붓는 것이 아니다.

이 탕산에서 하루건 이틀이건 사흘이건 언제까지고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

스스스스슷!

숲으로 들어간 자리에 일제히 모습을 감췄다.

숲에는 많은 준비가 되어 있다. 화화문도 역시 몸을 숨길 은신처를 미리 준비해 놨다.

땅을 파서 참호를 만들었다. 제 자리를 지키고 암기를 던져낼 생각이다.

그 속에 숨었는데,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확실히 숨은 게 맞나? 아니다. 호흡만은 감추지 못했다. 감춘다고 감췄지만, 아걸의 귀에는 천둥소리보다 크게 들린다.

스읏!

숲을 쓸어 보았다.

여기저기 많은 자가 숨어 있다. 화화문도 외에도 다른 자들이 상당히 많다.

그들과 화화문도는 호흡이 다르다. 화화문도의 호흡은 뜨거운데, 다른 자들은 정제되어 있다. 피가 뜨겁지 않다. 검을 쓴 자와 쓰지 않는 자는 이만큼 다르다.

스읏!

슬쩍 흘려보기만 해도 인기척이 감지된다.

‘서른 명은 넘겠어.’

물론 이들은 가장 가까이 있는 자들이다. 더 멀리 있는 자들까지 따지면 이곳에만 족히 백 명 넘게 숨어 있다.

아걸은 나뭇잎을 따서 입에 물었다.

싸우다 보면 입안이 마르게 된다. 나뭇잎을 가끔 씹어주면 약간 쓴맛이 혀를 자극한다. 그 쓴맛이 침을 고이게 하고, 입이 마르는 것을 방지해 준다.

저벅! 저벅! 저벅!

서둘지 않고 저들에게 걸어갔다.

화화문도만 노릴 필요는 없다. 이곳에 있는 자들은 모두 적이다. 반철도와 싸울 자들이다. 순간!

쒜에에엑! 쒜에엑! 쒜에엑!

이번에는 철시(鐵矢)가 쏟아졌다.

‘알고 있었다. 이런 공격이 나올 줄.’

아걸은 즉시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이곳은 숲이다. 석궁으로 쏘는 철시나 화살이 잘 먹혀들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은 사방에서 철시를 쏘아댄다. 나무 뒤로 몸을 숨겼어도 또다시 즉시 피해야 한다.

원을 그린채 둘러서서 철시를 쏘면 오히려 반대쪽에 있는 자를 격상시킬 수 있다.

거기에 대한 대비책도 세워뒀다.

이들은 철시를 쏘자마자 바로 몸을 숨긴다. 즉, 철시를 한번 쏘고는 목표를 놓아 버린다.

이런 공격은 정말 피하기 어려울 것처럼 보이지만 미리 알고 있으면 그렇게 어렵지도 않다.

쒜에엑! 쒝!

몸을 낮춰서 웅크리기도 하고 튀어 오르기도 하면서 천시를 피했다.

저들이라고 이런 움직임을 모를까?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아걸은 또 다른 공격을 생각했다.

둘 중에 하나, 독이나 화약이 터질 것이다. 나무 밑이나 바위 틈새에 지독한 것을 숨겨놨을 것이다.

쒜에에엑!

아걸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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