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九十四章 상불출래(想不出来) (1)
퍼엉! 펑펑! 펑!
숲 여기저기서 시커먼 연무(煙霧)가 터졌다.
그렇지 않아도 골이 깊어서 햇볕이 잘 들지 않는 골짜기인데 더욱 짙은 어둠이 깔렸다. 달빛도 별빛도 없는 시커먼 어둠 속에 들어선 느낌이다.
‘이렇게 되면 쌍방 모두 시야가 가리는데…….’
얼핏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연무를 피워 내면 이제부터는 오직 감각 대 감각의 싸움이 된다.
저들은 이런 싸움이라면 자신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도주할 목적이라면 이해하겠는데, 공격할 목적으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을 만든다?
물론 고수라고 해서 반드시 감각이 예민한 것은 아니다. 대체로 예민한 편이지만 둔한 사람도 있다.
하지만 고수는 칼의 기운을 아주 예민하게 읽는다. 사람이 움직이면서 일으키는 발걸음 소리, 옷자락 펄럭이는 소리, 검이 허공을 찢는 파공음까지 모든 소리를 예민하게 듣는다.
또 반사신경도 무척 날카롭다.
위험이 느껴지는 순간, 이미 몸이 반응을 보인다. 벌써 행동에 나선다.
그러니 앞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싸운다면 고수가 훨씬 유리하다.
정반대로 하수도 감각이 예민할 수 있다. 어둠 속에서 싸우면 고수가 유리할 것 같지만, 이런 상식을 깨고 상황을 역전시키는 일이 벌어진다.
하수가 연무 속에서 싸우는 수련을 받았을 때다.
그러면 이런 곳에서 싸우는 것이 반드시 고수에게 유리하라는 법은 없다.
타악!
아걸은 반철도로 옆에 있는 나무를 쳤다.
소리를 내어서 자신의 위치를 알려 준다? 천만에! 반철도로 나무를 쳐서 진파를 만들어 낸다.
진파는 진기가 일으키는 파동이다. 지금까지는 치명적인 일격을 피하는 데 사용했다. 그래서 동귀어진 수법을 펼쳐도 약간의 이득을 봤다.
상대방의 병기를 받아들일 때 몸이, 진기가 일으키는 작은 울림.
검으로 나무를 치면 나무가 운다. 파동이 일어난다. 그 파동이 번져 나가면서 주위를 읽어 준다. 나무에 누군가가 붙어 있다면 당장 알게 해 준다.
또 자신의 위치를 알려 줘도 상관이 없다.
진파가 울릴 때 공격을 감행하면, 진파에 감지된다. 연무 속에서 수련한 자라고 해도 쉽게 탐지된다.
진파가 연무 살법을 수련한 자들까지 찾아낼 수 있을까? 찾아낼 것이다. 저들은 일절 소리를 죽인 채 움직이겠지만, 그래도 탐지해 낼 것이다.
탕! 탕!
어떤 나무는 크게 흔들리고 어떤 나무는 작은 소리만 울린다. 나무에 따라서 울리는 소리도 각기 다르다. 그때!
‘온다!’
아걸은 신경을 바짝 곤두세웠다.
쒜에에엑!
뭔가가 급하게 달려들고 있다. 하지만 느낌만 들었을 뿐, 어디서 공격해 오는지 방향 탐지가 안 된다.
‘어디냐!’
아걸은 온 신경을 바짝 곤두세웠다. 순간이다.
슈욱!
무엇인가가 관자놀이를 노리고 와락! 달려들었다.
아걸은 급히 고개를 숙였다. 동시에 무릎을 굽혀서 상체까지 낮췄다.
쒜에에에엑!
머리 위로 비표가 날아갔다.
‘또 동영 인자!’
그런가? 이 연무는 동영 인자를 위한 연무인가. 이제 본격적으로 동영 인자들이 나설 차례인가?
츠읏!
아걸은 몰안을 일으켰다.
마음을 명경지수처럼 맑게 만들고 주위를 둘러봤다. 또다시 독 묻은 병기에 당하지는 않는다.
이십사 위문은 정도 문파다. 여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당연히 이십사 위문은 협행(俠行)을 근본으로 한다. 오직 바른 일만 하며, 악행은 반드시 징치한다.
하지만 야욕과 정도는 같이 가지 못한다. 늘 어느 부분에선가는 삐걱거린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암암리에 협행과는 배치된 행동을 할 수밖에 없다.
천호문주(穿昊門主)도 그런 쪽이다.
밝은 면만 유지해서는 험한 무림을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부류다.
천호문에는 천호이십사검이라는 절기가 있다.
중중초(重重招)라는 새로운 방식의 검학을 선보였는데, 가히 산악을 뭉개 버릴 수 있는 패검(覇劍)이다.
일검보다는 이검, 이검보다는 삼검…… 위로 올라갈수록 초식이 무거워진다. 하지만 무거운 초식을 가볍게 쓰는 데 묘리가 있다. 이검은 일검보다 배는 무겁다. 진기 집중도가 완전히 다르다. 하지만 일검과 똑같은 속도로 구사한다.
당연히 위력은 일검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하다.
천호문에서는 천호이십사검을 몇 검까지 수련했느냐에 따라서 검호의 순서가 정해진다.
천호문주는 이런 절정검식을 갖추고도 암암리에 수하를 차출해서 흑우한살검(黑雨恨殺劍)을 수련시켰다.
십대마검 중 하나로 거론되는 절정 마검이다.
흑우한살검을 수련한 자들은 비밀 살해 무인으로 활동한다. 천호이십사검으로 처리하기 힘든 일들을 도맡아서 쥐도 새도 모르게 묻어 버린다.
사실 이들은 천호문주의 수족이나 마찬가지다.
천호이십사검을 십오 검 이상 수련한 검호보다도 비밀 수족을 더 신뢰한다.
천호문이 위치한 감녕(監寗) 땅에 분란이 거의 없는 것도 이들 덕분이다. 분란이 번질 여지가 있으면 즉시 이들이 나서서 깨끗이 정리한다.
그만큼 원인 모를 죽음도 많다.
다만 그들의 죽음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어느 날 갑자기 실종될 뿐이다. 실종될 리가 전혀 없는 사람이 사라져도 나서서 말하는 사람이 없다.
감녕 땅에 사는 사람들은 실종자와 천호문 사이에 연관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하지만 그래서 어쨌다고? 누가 감히 나서서 물어볼 것인가.
살인을 밥 먹듯이 하면서 호가호위하는 자들, 세상에 거칠 것이 없는 자들.
천호문주는 검은 비, 흑우를 세상에 드러내기가 싫었다. 하지만 지금은 드러낼 수밖에 없다.
모든 문파가 이 싸움에서 전력을 다해야 한다.
천호문주는 송가검문주 다음으로 제비뽑기를 잘못했다. 하필이면 송가검문주 옆부분을 차지했다. 가장 늦게 싸울 줄 알았는데…… 다른 문파가 앞에서 아걸을 차단할 줄 알았는데, 빌어먹을! 갑자기 자신 앞으로 들이쳤다.
이제 그가 최전선이다.
‘흑우라면 잡을 수 있어!’
천호문주는 흑우를 믿는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실망이라는 것을 시켜본 적이 없는 악귀들이다.
더욱이 흑우의 움직임은 동영 인자들에게 가려져서 드러나지 않는다. 잘하면 흑우의 정체도 계속 숨기면서 아걸을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 지도 모른다.
‘운무가 걷히면 하늘에 오르든지 땅속으로 꺼지든지 둘 중의 하나가 되겠군.’
“쏴라!”
천호문주가 명령했다.
그러자 주위에 포진해 있던 무인들이 운무를 향해서 일제히 활을 쏘기 시작했다.
쒜엑! 쒜에엑! 쒜에엑!
화살이 운무룰 뚫고 지나갔다.
이 화살은 분명히 유시(流矢)다. 목표를 보지도 않고 무조건 쏘아 내는 화살에 누군가가 맞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목적은 따로 있다. 화살이 날아오는 것을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다. 제 자리에 멈춰 서게 되어 있다.
그렇다. 아걸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화살에는 호각(號角)이 달려 있다. 동물 뼈에 구멍을 내어서 강하고 날카로운 소리를 흘리게 했다.
빼에에엑! 쎄에에에엥!
화살이 날아갈 때마다 호각에서 찢어질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십사 위문 무인들은 이미 몸을 숨긴 상태다. 그들은 운무가 번질 때부터 몸을 숨겼다.
화살이 날아올 것을 알고 있다.
유시에 맞는 자가 있다면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격이랄까? 운이 되게 나쁜 자일 것이다.
쒜엑! 쒜에엑! 쒜에엑! 쎄에에엥!
유시가 나무에 탁탁 박혔다. 바위에 맞고 튕겨 나오기도 한다. 개울물에 처박히는 화살도 있다.
천호문도는 서둘 필요가 없다는 듯 차분하게 살을 재웠다. 그리고 계속해서 쏘았다.
‘유시에 호각까지.’
아걸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저들이 쏘아 내는 화살에서 파공음이 요란하게 일어났다.
화살 수십 대가 일시에 쏟아 내는 파공음은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날카로웠다.
‘소리를 일으킨다는 건 공격이 있다는 거. 흠! 그러면 나를 찾을 수 있다는 건데, 어떻게 찾지?’
아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은 운무 속을 뚫어 볼 수 없다. 몰안을 일으켜도 운무가 너무 짙어서 한 치 앞도 분간하지 못했다. 반철도를 잡은 손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상대도 마찬가지일 텐데, 상대는 자신을 어떻게 찾아올까?
그때, 아걸은 묘한 냄새를 맡았다.
뭐라고 해야 할까? 살이 썩는 냄새? 구더기 수십 마리가 부패하는 냄새? 지독한 악취가 풍긴다.
냄새는 자신의 옆구리에서 피어났다.
독비에 맞은 상처가 매우 빨리 썩어간다. 응급 처치했는데도 상처가 부글부글 끓는다. 누런 고름이 흐르면서 생선 썩는 냄새를 풍긴다.
‘이거…… 였나?’
순간, 아걸의 머릿속이 반짝 빛났다.
자신을 해친 독비는 분명히 동영 인자가 던졌다. 하지만 아닐 수도 있다. 매우 비정상적인 공격 방식에 숙달된 자들…… 마인들이라면 가능하다.
운무를 피워 낸 자, 독비를 흘린 자, 호각 단 화살을 쏘아 낸 자, 그리고 지금 운무 속을 파고든 자…… 이들은 모두 손발이 착착 맞아떨어진다.
공격해 오는 자가 동영 인자가 아니라면, 중원 무인이라면…… 독비를 던진 자도 중원 무인이다. 이십사 위문 무인이 아니라 마도 고수라고 봐야 한다.
‘후후후! 그런가? 그러면 나는 더욱 개운하지. 죽여도…… 죄책감을 덜 수 있으니까.’
아걸은 옆구리 상처를 쳐다봤다.
옆구리에서 피어난 냄새는 멀리 퍼져 나가지 않는다. 악취를 맡을 수 있는 범위는 겨우 반 장도 채 되지 않는다. 누구라도 이런 냄새를 맡고 쫓아올 수는 없다. 하지만 상대방이 사냥개 같은 후각을 지니고 있다면 쫓아올 수 있다.
마도에 구비자(狗鼻子)라는 자가 있었다.
워낙 냄새를 잘 맡아서 ‘개코’라고 불린 자인데, 그의 후각이 천성적으로 타고난 것이 아니라 수련으로 양성된 절기라는 점이 사람들을 놀랍게 만들었다.
구비추명공(狗鼻追命功)!
세상이 온갖 냄새를 다 맡을 수 있다. 개처럼 멀리, 또 정확하게 맡아 낸다. 인간이 맡을 수 없는 냄새까지 아주 진하게 맡고, 쫓아갈 수 있다.
오직 진기를 일으킬 때만 후각이 예민해져서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데도 지장이 없다.
하지만 이 공부는 뇌에 몹시 나쁜 영향을 미친다.
진공을 일으킬 때마다 뇌에 가해지는 자극이 엄청나다. 언제 뇌혈관이 터질지 모른다. 재수가 없으면 처음 진공을 일으키자마자 뇌가 터지기도 한다.
사마외공은 결코 좋은 공부가 아니다.
만약에 누군가가 구비추명공을 펼치고 있다면 뇌혈관이 터져서 즉사하거나 최소한 반신불수가 되는 위험을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독비를 날린 마공, 그리고 구비추명공.
이자들을 죽일 때는 어떤 죄책감도 일으킬 필요가 없다. 이들은 벌써 수많은 사람을 죽이면서 달려온 자들이다. 명부 판관이라면 결코 용서하지 못할 악인이다.
스읏! 타악!
아걸이 휘두른 반철도에 나무가 걸렸다.
‘좋아! 여기서!’
아걸은 나무에 등을 대고 상대가 쫓아오기를 기다렸다.
쉐에에에엥!
검풍이 일어났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정확하게 자신을 찾아내고 쫓아왔다.
검이 날아온다. 파공음이 들린다. 검풍을 숨기려고 애쓰지만, 계속 미미한 소리가 들린다.
아니다. 이건 미끼다. 정작 공격은 다른 데서 일어난다. 그리고 암암리에 흘러오는 암수는 소리가 없다. 기척도 없다. 운무 속에서 벌이는 싸움에 숙달된 자들이다.
‘어디! 어느 정도인지 알아볼까?’
슷! 탁!
아걸은 반철도를 거꾸로 잡고 나무에 깊숙이 찔러 넣었다. 그리고 신형을 훌쩍 날려서 나무에 틀어박힌 반철도 위로 올라섰다.
쒜엑! 쒜에엑! 쒜에엑!
검이 즉시 방향을 틀어서 쫓아왔다.
자신의 움직임을 읽고 있다. 겨우 허리 높이 정도 뛰어올랐는데, 그런 움직임까지 읽어 냈다.
타앗!
아걸은 반철도를 발판 삼아서 튕겨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