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九十四章 상불출래(想不出来) (2)
쫘작! 쫘아아악! 쫙!
채찍으로 등짝을 후려치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살검이 흘렀다. 아걸이 서 있던 나무를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검이 한두 개가 아니다. 무려 십여 개나 넘는 검이 각기 다른 검초로 나무를 훑었다.
휘릭!
아걸은 위로 솟구쳐서 나뭇가지를 잡았다. 그리고 몸을 한 바퀴 휘돈 후, 다시 반철도 위로 내려섰다.
‘음!’
손끝에 갈가리 찢겨 나간 나무가 만져졌다.
나무는 길바닥에 힘껏 내동댕이쳐진 수박처럼 으깨어져 있었다. 커다란 나무가 걸레처럼 헤졌다.
살검이 휩쓸고 간 나무껍질에는 아직도 검기가 남아 있다. 강렬한 살기가 파헤쳐진 나무를 통해서 손끝으로 전달된다.
‘마검!’
이십사 위문의 합공을 받고 있는데 갑자기 마검이 등장했다.
허도기가 마인들을 부리기는 했지만, 이십사 위문 중에서도 마검이 섞여 있을 줄은 몰랐다.
스읏!
아걸은 반철도를 뽑아내며 땅에 내려섰다.
무릎이 땅에 닿을 정도로 낮게 몸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사방을 쓸어 봤다.
뭉클! 뭉클!
운무는 조금 전보다 더욱 짙어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옅어져야 맞는데, 확실히 더 짙어졌다. 계속해서 운무를 피워 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소리다.
쒜에엑! 쎄에에에엥!
호각을 매단 화살도 계속해서 날아들었다.
저들은 분명히 구비추명공을 사용한다. 화살이나 운무와는 전혀 상관없다. 그런데도 계속 눈가림용 속임수를 전개하고 있다. 소리를 흘리면 잡힌다는 듯이.
‘이런 소음 속에서는 도검이 부딪쳐도 알아채지 못할 거야. 후후!’
아걸은 눈빛을 번뜩였다.
저들은 자신이 나무 위로 솟구쳤다가 내려온 사실을 알지 못한다. 반철도를 뽑고 땅에 내려선 것도 모른다.
‘이건가?’
맞다. 이게 저들의 약점이다.
공격을 퍼붓고 물러나는 동안, 저들은 자신을 추스른다.
공격하는 것만큼이나 뒤를 철저히 막아야 한다. 추격해 오지 못하도록. 아생연후살타(我生然後殺他)라고 하지 않던가. 자신의 안전을 철저하게 도모한 후에 공격한다.
공격은 서둘지 않는다. 어차피 적은 쓰러지게 되어 있는데 뭐 하러 서두를까. 시간을 넉넉하게 잡고 이 싸움을 즐기면 된다. 급한 것은 상대방이다.
하지만 뒤를 막는 동안에는 구비추명공을 쓰지 못한다. 상대방을 지켜보지 못하게 된다.
슷! 탁!
아걸은 반철도를 쳐서 나무를 후려쳤다. 조금 전, 저들이 휩쓸고 간 나무다. 저들이 소리를 듣고 공격하는 게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여전히 모른 척 속아 준다. 그래서 일부러 저들을 격동시키는 척 소리를 흘렸다. 순간,
슛!
검이 날아들었다.
들릴 듯 말 듯 고요하게 흐르는 검음!
보통 사람들은 이 파공음을 듣지 못한다. 검이 광목을 찢어 내듯이 허공을 쭉 찢어 내고 있지만, 전혀 소리를 흘리지 않는다. 귀로 듣는 소리가 아니라 기감으로 느껴야 하는 소리다.
이 소리는 실수일까? 아니면 고의로 흘린 것일까?
아걸은 고의라고 생각한다. 상대방의 무공이 약해서 듣지 못해도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아걸 정도 되는 무인이라면 틀림없이 듣고 바로 반응할 것이다.
저들은 딱 그 정도의 소리만 흘린다.
누가 생각해도 실수로 흘렸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지극히 미세한 소리다.
물론 지금 진짜 공격이 일어나고 있다. 소리 없는 검들이 아걸을 향해서 물밀듯이 밀려온다.
타탓! 타악!
아걸은 앞으로 뛰어나가다가 힘껏 도약했다.
그는 반철도와 하나가 되어 허공을 갈랐다. 소리가 흘러온 곳으로 쏘아져 갔다.
일홀문 사대 문주의 일초무적도 탄궁도다.
반철도와 아걸의 몸이 하나로 연결한다. 도신일체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도체일체된 몸을 적과 연결시킨다. 옆으로는 흐르는 곡선은 일체 배제한다. 똑바로 그은 줄 하나, 일직선만 연결한다. 줄을 팽팽히 하게 잡아당겨서 옆으로 흐르는 길이 없도록 만든다.
진기가 몸을 굽혀서 활을 만든다.
화살은 도신일체가 된 몸이다. 진기가 퉁겨지고, 몸이 날아간다. 적에게 이르는 최단 거리를 반철도가 쏘아져 간다.
쒜엑! 쒜에엑! 쒜에엑!
옆에서 검들이 몰아쳐 왔다.
아걸은 그 검들을 무시했다.
저들이 쳐 오는 것도 빠르지만 아걸이 나아가는 것은 더욱 빠르다. 저들이 일 장을 다가올 때 아걸은 이 장을 달려 나간다. 더욱이 탄궁도로 쏘아진 몸은 독기의 냄새까지 감춰 버린다.
퍼어어억!
반철도가 상대방의 가슴을 뚫었다. 아니, 가슴살을 뚫는 즉시 칼이 쑥 들어가더니 몸통을 꿰뚫어 버렸다.
상대방은 검을 들어서 저항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내지른 검은 아걸에게 닿지 못했다. 허무하게 아걸의 머리 위를 스치며 지나갈 뿐이다.
타타타타탁!
아걸은 찌르던 기세 그대로 탄궁도의 힘을 빌려서 치달려 갔다. 반철도에 꿰뚫린 상대를 밀고 나갔다.
터억!
드디어 끝에 다다랐다. 반철도가 나무를 찍었다. 상대방의 몸통을 뚫은 반철도가 나무에 탁 부딪혔다.
츠읏!
아걸은 반철도를 놓아 버리고 상대방의 검을 낚아챘다.
촤라라락! 촤라락!
연무 속에서 눈부신 검초가 쏟아져 나왔다. 딱딱한 장검이 채찍이라도 된 듯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검이 회초리처럼 휘어지는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목도일참, 유성비도, 점촌일도…… 일홀문 문주들의 도법이 신랄하게 펼쳐졌다. 자연도도 터졌다. 여러 가지 도법이 뒤죽박죽 마구 섞여서 쏟아져 나왔다.
이게 도대체 어떤 도법인가?
도대체 어떤 도법인지 종잡을 수가 없다. 규칙이란 것이 전혀 없다. 당연히 초식 특유의 모습인 깔끔함이 사라지고 지저분함, 난잡함, 어지러움만 남는다.
개망나니가 마구잡이로 검을 휘두른다고나 할까? 그야말로 미친 사람의 춤사위 같다.
파앗!
연무 속에서 살을 가르는 소리가 터졌다.
검이 사람을 베어 냈다. 핏물이 꾸역꾸역 흘러나왔다. 피를 흘리는 모습은 운무에 가려서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진한 피비린내가 사방으로 번져 나간다.
저들은 구비추명공을 사용한다, 독 냄새를 맡다 보면 본의 아니게 피비린내도 맡게 된다. 동료의 죽음이 선명하게 보인다. 어둠을 뚫고 모두에게 알려진다.
스으으읏!
아걸은 빠르게 이동하면서 검초를 펼쳤다.
퍼억! 퍽퍽!
연속해서 살이 그어졌다.
비명은 화살 호각 소리에 묻혀서 들리지 않는다. 사실, 파육음도 들리지 않는다. 저들의 검초를 기감으로 눈치채야 하듯이, 살이 갈라지는 소리도 기감으로 들어야 한다.
츠으으읏!
아걸은 주위를 훑어보았다.
사실, 그는 진파를 일으키고 있다. 몸 전체가 사시나무처럼 바르르 떨리고 있다.
진파…… 단전에서 일어난 떨림이 몸 전체를 울린다. 그리고 이런 울림이 적의 미세한 움직임을 잡아챈다. 공기의 흐름이 약간만 변해도 눈치채게 된다.
장님과 장님이 만나서 싸우는데 아걸의 느낌이 저들보다 훨씬 예민하다.
원래 진파는 적의 일 검을 피하기 위한 구명절초였다. 심장에 틀어박히는 검을 심장 밑이나 옆으로 이동시키는…… 그래서 즉사만 면해 보자는 최후 발악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진파를 외부로 퍼트린다.
진파가 공기의 흐름을 쫓아서 상대방을 감지해 낸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만약 진파가 없었다면 지금도 저들이 공격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슈우우웃!
검이 날아왔다.
‘멀어.’
아걸은 들이닥친 검을 무시했다.
상대가 발악하듯이 검을 쳐 냈다. 하지만 가만히 내버려 두어도 옆으로 흐를 검이다. 몸을 타격하지 못한다. 구비추명공에 문제가 생겼나? 왜 이런 검을…… 그런데.
페에에엑!
검의 방향이 갑자기 변했다. 반 척 옆으로 흘러나가야 할 검인데, 느닷없이 아걸을 향해서 방향을 꺾었다.
‘그러면 그렇지.’
상대도 평범한 검초는 구사하지 않는다. 매우 강렬한 살초를 펼친다.
아걸은 상반신을 움직여서 상대방의 검을 흘렸다. 그리고 역으로 검을 쳐내서 복부에 검을 틀어박았다.
“크윽!”
답답한 비명이 터졌다.
아걸은 검을 뽑아 내지 않았다. 일격이 성공했다고 느껴진 순간, 미련 없이 검을 놓아 버렸다. 검은 얼마든지 있다. 상대가 들고 있지 않은가. 쓰러지기 전에 낚아챈다.
다수의 적과 싸울 때는 변기에 연연하면 안 된다. 내 병기든 적의 병기든 닥치는 대로 손에 쥐고 싸울 줄 알아야 한다. 반철도가 성명 병기라고 해서 고수할 필요는 없다.
애병에 대한 미련을 놓아야 한다.
슈웃!
아걸은 독수리처럼 솟구쳤다.
진파가 인기척을 감지했다. 두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무인이 있다고 알려 준다.
아걸은 무인의 정수리에 검을 찔러 넣었다.
빠아아악!
머리뼈가 갈라지면서 검이 틀어박혔다.
아걸은 검이 들어가는 탄력을 이용해서 다시 몸을 퉁겨 올렸다.
이번에는 검조차 낚아채지 않았다. 다른 적이 바로 지척에 있으므로 검을 잡아챌 시간도 없다.
바로 허공에서 두 발을 휘둘러 찼다.
퍼억!
또 한 명의 무인이 얼굴을 얻어맞고 풀썩 쓰러졌다.
아걸은 즉시 그의 몸 뒤로 돌아가 목을 움켜잡았다. 한 손은 이미 상대의 고개를 꺾어내는 중이었다.
우둑!
목뼈가 부러지자 상대방이 힘을 잃고 축 늘어졌다.
아걸의 손에는 무인의 검이 들려 있었다.
‘후우우!’
아걸은 깊은숨을 내쉬었다.
진파에 느껴지는 기운이 없다.
아걸은 진파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이번에 우연히 묘용을 찾아낸 것이고, 처음 사용해 봤다. 진파의 범위가 어느 정도나 되고, 얼마나 정확한지 전혀 알지 못한다.
다만 지금은 진파에 걸려드는 사람이 없다.
저벅! 저벅!
아걸은 반철도가 꽂혀 있는 곳으로 갔다.
연무가 가득 깔려 있지만, 아걸은 눈으로 본 듯이 사방을 꿰뚫어 봤다. 진파를 일으키면 주변이 어느 정도 느껴진다. 물론 진기를 사용해도 감지할 수 있지만, 진파가 훨씬 정확하다.
스읏!
나무에 틀어박혀 있는 자에게서 반철도를 회수했다.
그제야 죽은 자가 풀썩 무너졌다.
연무 속을 휘젓던 화살도 그쳤다. 호각도 멈췄다. 아마도 연무 속에서 벌어진 살겁을 눈치챈듯하다.
아걸은 생각난 것이 있어서 죽은 자의 손을 만져 보았다.
‘역시.’
생각이 옳았다.
죽은 자는 손가락 옆면에 굳은살이 박여 있다. 검을 정상적으로 잡지 않고 비틀어서 잡았다. 굳은살이 생기더라도 손가락 가운데 마디에 생기는 게 정상인데.
아걸은 이런 검초를 본 적이 있다.
흑우한살검!
엄밀히 말하면 흑우한살검은 검초가 아니다. 마음을 단련하는 심공이다. 그것도 매우 사악하게 단련한다. 사람을 죽여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게끔…… 잔인한 살수에 대해서 매우 당연하게 느껴지게끔 면역시키는 수련이다.
그런 수련을 하다 보면 검을 찌를 때도 잔인해진다. 그냥 찔러도 죽는데, 굳이 살을 헤집으면서 찌른다. 검이 살을 파고드는 순간부터 비틀어대는 것이다.
당한 사람은 처참한 고통 속에서 죽어간다.
검에 맞은 나무가 깨진 수박처럼 흩어져 버린 것도 당연하다. 검을 비틀어서 헤집어 버렸으니까.
아걸이 수련한 자연검처럼 흑우한살검도 살인하면서 자연스럽게 터득하는 검초다. 그래서 사람마다 초식이 다르다. 검초도 다르다. 하지만 검에 소름 끼칠 정도로 잔인한 살심이 담겨 있다는 것만은 다르지 않다.
마음에 검은 비가 내린다. 인성이 사라지고 흑심만 남는다.
검은 죽음을 본다. 죽음 이외의 것은 보지 않는다. 차디찬 살기만 담긴다.
흑우한살검을 극고로 수련하면 마주치기만 해도 저승사자를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들은 겨우 초입 단계다.
“놀랍군. 정도 문파에서 흑우한살검을 쓸 줄이야.”
아걸이 중얼거렸다.
아걸의 음성에는 진기가 실려 있어서 숲속 구석구석까지 번져 나갔다.
이제 아걸 앞을 막아선 천호문은 아걸을 죽인다고 해도 흑우한살검에 대해서 해명해야 한다. 가장 간단한 것은 아걸 손에 몰살당하는 것이다. 그러면 해명할 일도 없다.
저벅! 저벅!
아걸은 운무를 헤치고 걸어 나갔다.
싸움을 마다하지 않는다. 아니, 이제부터는 탕산에 운집한 무인들이 공포를 맛볼 차례다.